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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지 않고 스스로
<줌마네에서 영화를 만드는 까닭은> 감독 이숙경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돌보다, 돌아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팬데믹과 페미니즘 백래시 시대를 견디고 돌파하고 있는 여성들을 초대한다”는 의미다. 여성 퀴어 예술가의 자립과 성장을 다룬 <토베 얀손>(차이다 베리로트, 2020)을 개막작으로 상영하며, 여성의 역사와 현재를 다룬 다양한 작품을 관객에게 소개한다. 서로 돌보고 함께 돌아보는 영화 축제에서 이숙경 감독은 프로그램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연결과 소통을 위해 애썼다. 올해는 그가 만들고 꾸려온 ‘여성주의 문화예술기획 플랫폼 줌마네’가 2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다. 영화제 특별상영을 앞두고, 줌마네는 그동안 제작한 워크숍 작품을 새롭게 엮어 <줌마네에서 영화를 만드는 까닭은>을 만들었다. 줌마네 기획단인 김혜정 감독은 내레이션을 통해 ‘줌마네에 아무 관심이 없던 26세 비혼주의 여성’이 어떻게 20년 동안 줌마네를 보금자리 삼아 ‘영화와 일상의 통합'을 시도해왔는지 들려준다. 영화제 준비로 쉴 틈 없다는 이숙경 감독을 잠시 붙잡고, 올해 프로그램과 줌마네에 관한 이야기를 청했다.
올해도 코로나19 상황에서 영화제를 진행한다. 작년과는 또 다른 부담과 어려움을 느꼈을 듯한데.
작년 경험을 바탕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볼 수 있는 점은 다행이었다. 다만, 영화제 준비 기간 내내 걱정도 따라다녔다. 우선 스태프들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해야 했고, 업무수행 방식의 변화에도 적응해야 했다. 아무래도 화상 회의를 진행하다 보니, 갑작스러운 일이 발생했을 때 대처하기가 쉽지 않더라. 한편으로는 일도 일이지만, 멤버십이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나. 영화제 역시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코로나19로 인해 스태프 엠티도 갈 수 없고, 서로 만나서 관계를 쌓아나가는 시간 자체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삶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올해부터 영화제 사무국과 별도로 프로그램위원회를 구성했고, 이숙경 감독이 위원장을 맡았다. 이와 같은 조직 구성은 왜 필요했나. 위원회와 위원장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듣고 싶다.
프로그램위원회라는 형식이 올해 최초로 도입된 건 아니다. 과거에도 위원회가 설치된 적이 있는데, 작년 영화제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재도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조직 내 소통에 집중하는 역할로, 나와 권김현영 오거나이저, 황미요조 프로그래머, 김현민 프로그래머까지 네 명이 한 팀이다. 사실 일하는 사람들 간의 연결과 소통, 일터의 인간다움 등은 영화제에서 꾸준히 고민해온 내용이기도 하다. 영화제는 계절 노동자의 집합소라고 볼 수 있다. 소수의 정규직 멤버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여러 영화제를 거친다. 채용 시기부터 일하는 방식까지 저마다 다른데, 서로 합을 맞추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어쩔 수 없이 멤버십을 형성하기도 전에, 곧장 실무에 돌입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코로나19는 그런 상황을 악화하는 데 일조했고. (웃음) 영화제에서는 프로그래머가 핵심을 만들고, 프로그램팀이 관련 실무를 진행한다. 프로그램위원회는 여기서 짠 계획과 구성을 어떻게 다른 팀과 스태프에 공유할지 고민한다. 프로그램팀, 홍보팀, 기획사업팀, 운영위원회, 집행위원회 등에서 논의하는 바가 ‘따로국밥’이면 안 되지 않나. 거리 두기를 하면서도 소통에 어려움이 없도록 다리를 놓는 역할을 맡았다.
공모 접수한 한국영화는 어떻게 봤나. 예년보다 국내 극영화 편수가 적은 점이 눈에 들어오던데.
다른 영화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본다. 제작 편수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추이였는데, 올해는 확실히 줄었다. 공모한 작품의 경우, 일상의 풍경을 표현하는 작품이 대다수였다. 인물이 홀로 고립된 상황을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내는 점이 특징이다.
“돌보다, 돌아보다”라는 슬로건처럼 성찰과 기념의 의미를 담은 특별전을 다양하게 마련했다. <고양이를 부탁해>(정재은, 2001) 20주년 특별전을 위해 영화의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을 기획 및 제작했다고.
<고양이를 부탁해>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인연이 깊다. 여성의 일과 자립, 주거 불안, 관계 등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소중하면서도 유의미한 작품이지 않나. 개봉 당시에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는데, 그때 여성영화제에서 상영을 지속하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정재은 감독과 간간이 이야기를 나눌 때면, 필름 상태를 유지하지 못해서 마음이 안 좋다고 했다. 그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번에 확인해보니 정말 상영하기가 어려울 정도더라. 사실 영화진흥위원회나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필름 복원 사업을 진행하는데, 거기에는 여성 감독의 작품이 많이 빠져 있다. <고양이를 부탁해>도 마찬가지이고. 고민하다가 영화제가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추진하기로 했다. 사실 쉽지는 않았다. 워낙 오랜 시간이 흐른 터라, 감독 외에는 누구에게도 ‘내 영화’라는 감각이 없는 상태였다. 제작사 바른손이엔에이 곽신애 대표가 큰 도움을 줬고, 김현민 프로그래머가 애를 많이 썼다. 특별전을 기대해주시면 좋겠다.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으면서도, 또 차이가 발생하는 지점이 있다. 흥미로운 관람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 콜렉티브: 아시아의 여성영화 제작 공동체’에서는 한국, 일본, 미얀마의 작품과 단체를 소개한다. 미얀마 양곤필름스쿨의 단편영화, 일본노동조합이 제작한 여성 감독의 연출작 등 쉽게 접하기 어려운 작품을 포함했다.
올해 영화제의 가장 중요한 섹션 중 하나다. 영화제의 산증인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는 황미요조 프로그래머가 전체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특히 미양마 양곤필름스쿨에서 제작한 영화를 보며 감탄했다. 양곤필름스쿨은 유럽 영화인의 펀딩을 통해 설립된 소규모 영화학교다. 사회적 이슈를 일차원적으로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꾸준히 미학적 언어를 만들기 위해 시도한 노력이 엿보인다. 작품을 관람하다 보면, 자연스레 영화란 무엇이며 어떤 시스템에서 만들어야 하는지 묻게 된다. 영화는 산업이기에 자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기는 어렵다. 양곤필름스쿨에서 만든 단편영화는 그러한 시스템 안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지켜낼 방법이 무엇인지 확인할 기회를 준다.
위 섹션에서 소개하는 ‘여성영상집단 움’과 ‘여성주의 문화예술기획 플랫폼 줌마네’ 역시 올해 20주년을 맞이했다. ‘줌마네’는 2001년 이숙경 감독이 문을 연 곳이기도 하다.
‘줌마네’는 뭐라고 설명하기가 참 애매한 곳이다. 단체도 아니고, 모임도 아니다. 어쨌거나 다양한 여성의 예술창작에 기반하는 굳건한 자조모임인 것은 분명하다. 어느 날, 권김현영 오거나이저가 아카이빙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더라. 시스템이 있는 조직에서 아카이빙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작은 형태로 흩어졌다가 모이기를 반복하는 곳에서 스스로 기록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고. ‘줌마네'는 어떤 기관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로, 외부 지원 없이 긴 시간 동안 활동을 지속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을 정리하고 모아서 보는 일이 안팎으로 유의미하겠더라. 워크숍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작품을 한 편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 산업에는 공고하게 다져진 역사가 있다. 어떤 여성은 그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영화를 찍고, 그래서 역사로부터 제외되기도 한다. ‘줌마네’는 디지털카메라가 발명된 이후, 200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그룹이다. 지금은 휴대폰으로 아무 때나 동영상을 찍을 수 있지만, 캠코더로 촬영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세팅이 필요했다. 편집할 때도 여러 절차를 거쳐야 했고. 영화에 뜻을 둔 사람들이 모여서 작업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남자들이 만들어놓은 시스템 밖에서, 우리에게 가능한 재정 구조에서 찍었다. 그러니까 계보가 없지. (웃음)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나. 기존 시스템으로 건너가면, 또 다른 영역에서 선택과 타협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줌마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대한 고민했다. 형식과 내용을 갖추기 위해 애썼고, 나름의 미학적 결과를 얻었다. 그걸 10여 년 하다 보니 놀라운 상황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남성 기술 스태프와 작업했는데, 지금은 스태프 전원이 여성이다. 그만큼 여성 영화인이 늘어난 거다.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졌고, 더불어 우리가 만드는 영화의 완성도도 높아졌다.
<줌마네에서 영화를 만드는 까닭은>(2021)을 통해 과거 작품을 소개한다.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김혜정 감독이 내레이션을 맡았다.
‘줌마네’가 통과한 시간을 한 영화에 촘촘하게 담기는 어려웠다. 김혜정 감독이 고민하다가 자기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스물여섯의 비혼 여성이 ‘줌마네’에서 영화를 만들며 마흔여섯이 된 이야기인데, 그 자체로 ‘줌마네’다. (웃음) 우리는 이 안에서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들이 삶의 좌표가 되어주었고, 함께 작업하며 어울리는 과정에서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을 찾아냈다. 말로는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시간인데, 과거 작품을 연결해서 보니 우리가 뭘 하려고 했는지 알겠더라. ‘줌마네’라는 이름도 그렇다. 나라고 멋진 이름을 짓고 싶지 않았겠나. 너무 촌스러워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그 이름에 완전히 젖어들었다. (웃음) 오히려 최근에는 레트로한 매력으로 가닿기도 하더라. 무엇보다 품이 넓은 이름 덕분에, 자신만의 생각과 경험을 가진 다양한 여성을 만날 수 있었다.
20년이라고 하니 처음에는 막연하게만 들렸는데, 작품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20년 동안 힘들기도 했을 테지만, 무엇보다 참 재미있었겠구나 싶더라.
말 그대로 지지고 볶으면서 재미있게 살았다. ‘줌마네’를 안 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20년 전 나는 여성학을 공부한 젊은 페미니스트였다. 여성주의 언어를 만들어나가는 초창기 세대였고, 누구 못지않게 뜨거웠다. 새로운 언어를 흡수하다 보니, 계속 싸울 수밖에 없더라. 어느 순간부터는 친구들과 멀어졌다. 만날 때마다 “남자 만나지 마라” 하는 식으로 이상한 소리를 해댔거든. (웃음) 근데 막상 엄마나 이모, 옆집 언니한테는 뭐하고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엄마한테 다짜고짜 “당신 삶은 가부장제에 얽혀 있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개념어가 아닌, 또 다른 언어가 필요했다. 1998년 소모임으로 시작한 ‘내공 프로그램’을 통해 ‘월경 페스티벌'과 ‘웹진 줌마’라는 결과물을 낳았고, 그것이 현재 ‘줌마네’의 모체가 되었다. 본래 글쓰기를 기반으로 한 자조모임으로 출발했다. 이후 영화로 영역을 확장했고, 현재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여성 작업자의 플랫폼이 되었다.
김혜정 감독과 준비하는 신작은 어느 정도 진행했나.
트리트먼트는 나온 상태이고, 겨울쯤 시나리오를 완성해서 내년에 촬영할 예정이다. 다양한 세대의 여성과 새로운 가족 형태가 등장하는 극영화다. 사실 나이가 많아도, 난 아직 신인이다. 마흔다섯에 영화학교를 들어갔으니까. 이제야 영화로 뭘 말하고 싶은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좀 알겠다. 그동안 영화 현장에서 느낀 두려움이 커서 웬만하면 안 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재미있다. ‘줌마네'에서 기획한 ‘두 번째 영화를 위한 제작 워크숍’이 힘을 줬다. 김혜정 감독도 그때 참여하지 않았다면 영화를 관두었을 거다. 어쨌든 우리 둘 다 줌마네에서 활동하며 끊임없이 단편을 찍었고, 지속적으로 영화 언어를 개발했다. 말하자면 현장을 쉰 적이 없는 거다. 문제는 제작 시스템이다. 완전히 독립적이지는 않겠지만, 기존 시스템과는 다르기를 바란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구현해낼 수 있는 스태핑과 적정 예산을 고민하며, 즐겁게 만들어보려고 한다.
끝으로 올해 영화제에서 추천작을 소개한다면.
프로그래머 추천작을 제외하고 골라보겠다. 앞서 말한 미얀마 양곤필름스쿨의 단편영화를 챙겨 보길 바란다. 올해로 3회를 맞이한 ‘필름X젠더’ 작품도 굉장히 흥미롭다. 김태은 감독의 <육상의 전설>은 엄청난 에너지를 지닌 코미디 영화다. 새로운 영화의 탄생이라고 부를 법하다. 조예슬 감독의 <소금과 호수>는 이야기와 연기 면에서 무척 강렬한 작품이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끌고 나가는 힘이 대단하다. 한편, 올해는 음악과 연계된 매력적인 작품이 많다. <고양이를 부탁해> 상영에는 OST를 담당한 ‘모임 별'의 공연을 마련했고, ‘호주 여성영화 1세기’ 섹션에서 선보이는 무성영화 <더 치터스-청춘의 사기꾼>(폴렛 맥도나, 1930)는 즉흥연주와 함께 상영한다. 유재하음악경연대회 금상 수상자이자, 최근에는 ‘빅.이.슈’라는 팀으로 신곡 ‘사회적 합의를 위한 필수 비트’를 발표한 뮤지션 이주영이 현장 음악을 맡는다. ‘새로운 물결’ 부문의 <일렉트로니카 퀸즈 - 전자음악의 여성 선구자들>은 여성 EDM 작곡가의 연대기를 엮어낸 작품이다. 좋은 영화가 많으니, 폐막까지 많은 관심을 보내주시면 좋겠다.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Interview 2------------------------------------------------------------------------------------------------------------
자유와 책임
박남옥상 <깃발, 창공, 파티> 감독 장윤미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박남옥상’ 수상자는 <깃발, 창공, 파티>(2019)의 장윤미 감독이다. 선정위원회는 “연출가가 동시대 여성들이 마주한 어려운 현실을 함께 호흡하고 전진하고 있는지, 그리고 작품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보고자 했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깃발, 창공, 파티>는 사측의 탄압과 횡포에 맞서 자신들의 권리와 공동체를 지키려는 노동조합 구성원들의 모습을 담는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선출된 여성 지회장과 대다수의 여성 조합원으로 이루어진 지도부가 이끄는 구미공단 KEC지회의 1년은 생동하는 말과 즐거운 웃음으로 가득하다. 이들은 쉼 없이 노동하고 놀고 투쟁하며 연대한다. 장윤미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그사이에 들어가 우리 시대 여성 노동자들의 얼굴,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공동체의 시간을 포착해낸다.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2014), <콘크리트의 불안>(2017) 등 매번 소재와 형식을 달리해 당시의 고민과 질문을 영화로 표현했던 장윤미 감독에게, 지금은 과연 어떤 시기인지 물었다.
수상 소감은.
매번 작업하면서 여성주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름대로 고민도 많이 한다. 그게 조금은 보이는 것 같아 기쁘다.
<깃발, 창공, 파티>를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며, 참 부지런한 창작자라고 생각했다. 텃밭 가꾸듯 영화를 만들고 있다.
딱 맞는 표현이다. 영화 만드는 걸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그때그때 신경 쓰이는 게 있고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잘하고 싶다는 욕심 없이 일단 시작한다.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는 마음으로. 손에 카메라 들고 촬영하고, 찍은 걸 가지고 편집하는 기본적인 과정이 여전히 무척 재밌다. 현재의 속도와 스타일이 내게 잘 맞는다. 이렇게 작업하는 지금이 좋다.
어려운 과정은 없나.
기획하고 지원서 쓰는 게 정말 힘들다. (웃음) 완성한 영화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어려워한다. 하지만 끝맺는 것 자체는 중요하게 생각한다. 마음에 안 들어도 무조건 끝까지 해보는 게 습관이 됐다. 맨 처음 했던 작업이 병역을 거부한 친구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는데, 그걸 찍어놓고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2년 동안 손도 안 댔다. 그러다 그걸 끝내지 않았다는 게 너무 마음에 걸려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내보려고 엄청나게 애썼다. 끝내고 나니 시작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더라.
<깃발, 창공, 파티>는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여러 지역에서 상영했다.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처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했을 때, 사측에서 영화를 보러 왔다. 그래서 조합원분들이 회사 사람들과 극장에서 대치하는 상황이 됐다. 내가 연출자로서 해야 할 역할이 분명 있었을 텐데, 너무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조합원분들이 관객들한테 회사 사람들이 왔다는 걸 알렸고, 관객들도 목소리를 모아 그들에게 나가라고 얘기했다. 그때 사측에서 나더러 다큐멘터리 한다는 사람이 이렇게 객관적이지 않으면 어떡하냐고 뭐라고 했다. (웃음) <깃발, 창공, 파티> 도입부에 KEC지회의 입장을 따라가는 영화라고 썼던 게 내게 더 중요해지는 순간이었다.


영화 공개하기 전에 나눴던 대화를 돌이켜보면, 여성의 노동이나 이야기에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 스스로 미진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어떤 부족함을 느꼈고, 어떻게 돌파해보고 싶었나.
<공사의 희로애락>(2018)이 물론 내게 중요한 작업이긴 했지만, 전형적인 산업화 세대의 남성 노동자에게 마이크를 쥐여줬다는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 세대의 드러나지 않은 여성 노동자들이 많고, 또 임금 등 여러 가지로 차별받아왔다는 걸 알고 있어서, 관련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했다. 그러다 30년 만에 여성지회장이 나왔다는 KEC지회를 우연히 알게 됐다. 주로 여성 간부들의 얼굴과 말과 행동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했지만, 작업하다 보니 조직과 공동체가 어떻게 꾸려지는지 또한 중요한 주제가 됐다. 그래서 어느 하나에만 집중하지 않고 많이 열어두고 작업을 이어갔다.
말 그대로 <깃발, 창공, 파티>는 공동체의 역동을 포착하려는 영화로 보인다. 작업을 시작하며 목표로 삼았던 게 있다면.
사실 첫 시작이나 목표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촬영을 시작했을 때 마침 지회가 임단협(임금 및 단체협약 협상)에 참가하게 돼서, 운명이라 생각하고 신입조합원처럼 배우는 마음으로 찍어보려고 했다. 그렇게 카메라 들고 따라다니다가 어느 날 ‘KEC 임단협’이라고 검색해봤는데, ‘몇 년 연속 평화적 타결’ 같은 기사가 잔뜩 뜨더라. 민주노총 소속인 지회는 배제하고 어용노조와 회사가 협상한 결과였다. 거기 적힌 평화가 과연 무슨 뜻일까 고민하고 싶었고, 결과가 어떻게 되더라도 그 문구를 활용하겠다고 결정했다. 편집하면서는 일상의 리듬을 만드는 게 되게 중요했다. 편집할 때 너무 재밌었다. 사실 예전에는 영상 편집 못한다고 욕도 많이 먹었다. 왜 필요 없는 걸 쳐내지 못하느냐, 왜 여기서 끊지 못하느냐고. (웃음) 지금은 그런 게 나만의 장점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스타일의 창작자가 있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을까.
선정위원회에서는 “투쟁의 한복판에서도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는 '깃발, 창공, 파티'와 장 감독의 수상이 (코로나 19 장기화라는) 위기의 시기를 견디고 있는 여성들에게 더 큰 용기와 영감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을 전했다. 영화는 길고 끈질긴 투쟁의 시간을 따라가면서, 즐겁게 웃는 순간도 부지런히 담아낸다. 덧붙이자면, 그러한 일상이 바로 투쟁의 조건이자 결과로 보인다.
그게 KEC지회의 특징인 것 같다. 여성 조합원들이 많기 때문인지, 일상적인 이야기도 서로 많이 하고, 음식도 같이 해 먹는 때가 많다. 신(新) 사무실이라는 공간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일 수도 있겠다. 나도 촬영하지 않을 때 계속 거기 머물면서 밥도 얻어먹고 같이 놀기도 했다. 그게 당연한 일은 아니라고 하더라. 보통은 노동하고 투쟁하면 지쳐서 일상을 나누기 어렵다고. 나중에야 그게 특별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작업자로서는 공장의 노동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노동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노조가 굴러가기 위해서는 피켓도 만들어야 하고, 공간도 관리해야 하잖나. 식물에 물도 주고 청소도 해야 한다. 그걸 다 담고 싶었고, 그러다 보니 일상의 리듬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앞으로도 더 천천히, 더 느리게 잘 관찰하고 싶다. 영화 보시고 지회 분들이 “우리가 저렇게 노는구나, 우리 공간이 저렇게 생겼구나.” 하고 말해주셔서 참 좋았다.
현재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새로 시작된 고민이 있다면.
<깃발, 창공, 파티>를 만들면서 공적이지도 사적이지도 않은 공간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한편으로는 조직과 공동체가 좋으면서도, 사람들이 모여서 생기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일회용품을 많이 쓰고, 회식하면서 고기도 많이 먹으니까. 그런 걸 줄여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 관심사는 계속 변한다. 지금은 동물권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고, 또 장애인 활동지원사 일을 시작하면서 장애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 중이다. 일하면서 내가 가진 모순도 깨닫게 되고, 사회가 소수자, 약자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보게 됐다. 사는 것 자체가 폭력이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요즘이다. 최대한 해를 가하지 않고 사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너무 무해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르기만 한 작업은 재미가 없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여성영화감독’이라는 이름엔 어떤 의미가 있나.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을 기리는 상을 받게 됐으니, 묻고 싶다.
카메라 들고 촬영할 때 굉장히 자유롭다고 느낀다. 그런데 그게 당연하게 얻어진 게 아니라는 생각을 새삼 했다. 여성이 카메라를 드는 것조차 당연하지 않은 시절이 있었던 거니까. 그 과정에서 성과를 내든 못 내든 버텼던 여성들, 또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한 분들에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내가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 거겠지. 그렇다면 지금 여성 영화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책임을 느끼고 생각해보려 한다.
어디서 용기를 얻는지.
요즘 동물권 공부에 빠져있다고 했는데, 그렇게 계속 공부하고 싶은 게 있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용기가 생기는 것 같다.
<깃발, 창공, 파티>가 일종의 관찰자적 다큐멘터리였다면, 지난해 공개한 단편 <고양이는 자는 척을 할까>는 실험적인 에세이에 가깝다. 의미가 명확히 결정되지 않는 이미지들로 가득한 영화처럼 보였는데, 설명을 덧붙여준다면.
인서트 컷에 관심이 많다. <깃발, 창공, 파티>의 주인공이 사람들이긴 하지만, 인서트를 소비되는 컷으로만 쓰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아예 인서트로만 이루어진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스토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1번 이미지와 2번 이미지를 결정하고 3번 이미지로 선택된 걸 그사이에 넣는 방식으로 만들어봤다. 설명이 너무 이상한가? (웃음) 인서트가 그냥 흘러가 버리는 게 아니라 다른 이미지들과 조금은 평등한 관계였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샹탈 애커만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최근에 관심을 두고 있는 여성 감독이 있나.
오다 카오리의 <세노테>(2019)를 인상 깊게 봤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인상적이고, 세상을 보는 방식이나 태도가 더 궁금해지는 여성 창작자다.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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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침과 속삭임 Outcry and Whisper
발견 |원하이·쩡진연·트리시 맥애덤 |홍콩 |2020|101분|15세 이상|컬러|다큐멘터리

여러 가지 이야기와 다양한 스타일이 뒤섞여 얼핏 보기에 복잡해 보이는 이 다큐멘터리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지난 8년간 중국과 홍콩의 여성들이 각자 다른 자리에서 내고 있는 크고 작은 저항의 목소리를 엮은 일종의 영상 콜라쥬다. 원하이와 쩡진연 감독은 이미 전작 <우리는 노동자들이다 We the Workers>(2017)에서 각각 감독과 프로듀서를 맡아 중국 동남부 지역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정부와 경찰, 공장주에 대항하는 모습을 기록하여 전 세계 영화제에서 주목받았다. 이후 두 감독의 시선은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과 활동가로서 살아온 감독 자신의 내면으로 향했다.
<외침과 속삭임>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과 홍콩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사회적 부조리를 증언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이 담긴 다양한 기록 영상, 자신의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투쟁을 이어가는 쩡진연 감독의 일상과 내면의 목소리를 기록한 비디오 다이어리, 그리고 두 감독과 함께 세 번째 감독 자리에 이름을 올린 트리시 맥애덤이 연출한 애니메이션 영상이다. 영화 속 여성들의 아이러니한 현실을 뛰어난 상상력으로 담아낸 이 애니메이션은 영화 곳곳에 삽입되어 영화에 특별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이 다큐멘터리의 목표는 이 영상들을 배열하고 조립하여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면도날로 자신의 얼굴을 그어가며 자신의 의지를 증명해야 하는 끔찍한 현실이,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 그들은 나를 패배시킬 수 없고 나를 쓰러뜨릴 수 없어”라고 속삭이는 쩡진연의 조용한 외침이 여전히 중국과 홍콩 사회 곳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한편 현실과 내면의 조각들을 모아 잘 보이지 않는 현실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데에 있다.
조지훈/ 무주산골영화제 프로그래머

121 2021-08-27 | 20:00 - 21:41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8관
412 2021-08-30 | 16:10 - 17:51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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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지침서 Instructions for Survival
발견|이아나 우그레헬리제 |독일|2021|172분|12세 이상|컬러|다큐멘터리

그는 고요한 경계의 삶을 산다. 사샤로 불리는 알렉산드레는 여자친구와 함께 사는 트랜스젠더다. 반동성애 혐오 집회가 빈번히 열리는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그의 일상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위에 올라탄 듯 위태롭다. 생물학적 성별이 기재된 신분증 카드로는 합법적인 직장을 얻을 수 없으니 정체성은 곧장 생계의 문제로 이어진다. 공적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호르몬제 약품을 위해 불법 루트를 찾아야 하나 그마저 녹록지 않다. 비합법적 영역에서 타인을 경계하며 살아야 하는 알렉산드레의 여자친구 마리는 생계를 위해 대리모가 되어 자신은 결코 안아볼 수 없을 아이를 낳는다. 이웃들에게조차 그들의 정체성을 폭로당하면 안 되는 삶의 불안은 문밖에 있는 개와 커튼이 쳐진 창문을 통해 암시된다. 그들이 죽음으로부터 달아났다는 표현은 결코 과장된 수사가 아니다. 알렉산드레의 엄마는 그가 차라리 감옥에 가거나 죽는 게 낫겠다고 했으며 친척들은 그를 죽이겠노라 찾아다녔다.
진보의 속도에서 뒤처진 동유럽 국가들의 반동성애 분위기는 실로 험악하다. 헤이트 스피치뿐 아니라 가학적 폭력행위도 빈번하다. 공산주의보다 동성애가 더 무섭다는 혐오의 물결은 과거 이념시대 ‘철의 장막’에 이어 동유럽에 새로운 ‘반동성애 ‘무지개 장막(rainbow curtain)’을 드리우고 있다. 알렉산드레와 마리는 새로운 삶을 찾아 벨기에로 망명한다. 익숙한 삶의 공동체를 떠난 이들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생존 지침서>는 정체성의 선택이 생존의 위협이 되는 장소에 거주하는 자의 불안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다. 조지아 내전의 경험을 담은 단편 애니메이션 <무장한 자장가 Armed Lullaby>를 만든 이아니 우그레헬리제 감독의 첫 장편.
송효정/ 영화평론가

114 2021-08-27 | 20:00 - 21:12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관
524 2021-08-31 | 20:10 - 21:22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6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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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치터스 - 청춘의 사기꾼들 The Cheaters
호주 여성영화 1세기|폴렛 맥도나 |호주|1930|93분|전체 관람가|컬러+흑백|극영화
기업을 함께 운영하던 사장 트래버스와 부하 직원 빌. 그러나 회사 운영에 어떤 안 좋은 사건이 생긴 후 감옥에 갇힌 빌은 트래버스를 향한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현재, 매력적인 여성 파울라는 능수능란한 연기와 함께 보석을 훔치는 사기꾼으로 대활약 중이다. 거대 갱단과 함께 화려한 도시를 종횡무진하던 파울라는 어느 날 리와 사랑에 빠지며 예상 못한 인생의 굴곡을 경험한다.
한 사기꾼의 극적인 삶을 그린 범죄 멜로드라마 <더 치터스-청춘의 사기꾼들>은 영화 자체는 물론 영화 외적인 이야깃거리도 풍부한 작품이다. 먼저 이 작품은 평소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호주의 초기 무성 영화이며, 감독인 폴렛 맥도나(1901~1978)는 세 자매와 함께 직접 제작사를 차려 활동했던 열정적인 영화인이었다. 감독의 언니인 마리 로레인(1899~1982)과 필리스 맥도나(1900~1978)는 <더 치터스>에서 각각 배우와 미술 감독으로 참여했으며 세 사람은 이후에도 호주영화사와 여성영화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작품의 고유한 매력도 뛰어나다. 빛과 그림자의 대조를 활용한 미장센이나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감정을 고조시키는 연출 등은 지금보아도 아름다운 시각적 순간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사회의 전통적 도덕 가치를 의도적으로 흔드는 듯한 전개와 인물 묘사는 극 전체에 기대 이상의 활기를 불어넣는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기성 세대의 질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모습이나 결혼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수용하는 듯한 면도 때로 엿보이지만, 관점에 따라 그 반대의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놓아 더욱 흥미롭다. 이 영화를 본 관객은 영화사의 멋진 여성 주인공 목록에 파울라의 이름을 새로 추가하게 될 것이다.
김보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123 2021-08-27 | 19:30 - 21:29 문화비축기지 T2 야외공연장
520 2021-08-31 | 19:30 - 21:29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