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좋아하냐고 묻자, 김예은은 망설임 없이 답한다. “너무 좋아해요. 맛있는 과일이 많고, 바다에서 수영할 수 있는 계절이라서요.” 잘 익은 열매와 드넓은 해수욕장이 눈앞에 놓이기라도 한 것처럼, 시원한 웃음까지 덤으로 돌아온다. <생각의 여름>엔 과일과 바다 대신 시와 농담이 가득하다. 김예은은 방바닥과 한 몸인 듯 종일 누워서 시간을 보내는 스물아홉 살 시인 지망생 현실을 연기한다. 공모전에 내야 할 마지막 시가 도무지 써지지 않자, 현실은 가방을 메고 집 밖으로 나선다. 눈썹 위로 짧게 자른 앞머리와 품이 넉넉한 빈티지 원피스. 외모부터 심상치 않은 현실은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배낭에서 등산화를 꺼내 야무지게 챙겨 신더니 “시가 산으로 갈 때는 산으로 가는 게 답이다!”라며 별안간 등산길에 오르고, 옛 친구부터 전 애인까지 난감한 만남을 줄줄이 이어 간다. 대부분은 현실을 한심하다거나 짠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드물게 대단하다며 박수를 보내는 이도 있다. 어쨌거나 현실은 그들 모두에게 스스럼없이 농담을 건넨다. 어색해서 웃고 그리워서 장난치는 동안, 농담은 진담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리고 모두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 깊은 밤, 현실은 홀로 책상에 앉아서 시를 쓴다.
김예은은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단번에 마음을 줬다. 곁에 있는 사람을 붙잡고 속을 전부 털어놓는 현실에게서 제 모습을 봤고, 상대방을 지레짐작하지 않는 투명함에 감탄했다. 이십 대의 마지막 여름을 씩씩하게 통과하는 현실 덕분에, 누구 못지않게 뜨거웠던 자신의 지난날을 떠올리기도 했다.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커질수록 고민은 깊어졌다. 정답이 없는 질문에 묶여 있는 시간은 고단했지만, 다행히 김예은은 현실처럼 우왕좌왕하면서도 끝내 길을 잃지는 않았다. 한바탕 애를 쓰고 난 후, 가뿐한 발걸음으로 새 영화를 들고 온 김예은과 만났다. 여름에 관해서라면 일가견이 있는 그에게 무더위를 날 방법을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이번에도 금세 답을 내놓는다. “속내를 터놓을 수 있는 친구와 산에 올라가면 어떨까요.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김밥을 나눠 먹고, 계곡을 만나면 시원한 물에 세수하면서 땀을 식혀요. 산에서 내려와서는 막걸리 한 잔!” 영화 속 현실 같기도, 영화 밖 김예은 같기도 한 대답이다.
재작년 여름에 만났을 때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에 관해 많이 이야기해줬다. 게임 ‘배틀그라운드’와 풋살을 즐겨 한다며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새 새로 생긴 취미가 있다면.
요즘 운동에 더 재미를 붙였다. 나만의 루틴도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면 무조건 밖에 나가서 30분 정도 러닝하고, 헬스장으로 가서 1시간 동안 근력 운동을 한다. 운동에 미쳐 있다고 해야 하나. (웃음) 현재는 코로나19로 모임을 중단했지만, 풋살도 여전히 즐겁게 하고 있다.
최근 올림픽 경기라든지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SBS, 2021)을 보면, 팀 스포츠가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소속 팀도 있나.
진짜 추천한다. 나도 잘하는 건 아닌데, 하면 할수록 재미가 쌓인다. 풋살 클럽은 지역마다 있다. 이전에는 잠실 클럽 소속이었는데, 작년부터는 성수에도 팀이 생겨서 그쪽으로 옮겼다. 성수 클럽 멤버들과 1년 정도 호흡을 맞췄다.
언젠가 영화에서 신나게 공 차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나도 스포츠 영화에는 꼭 한번 출연해보고 싶다.


2년 사이에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 <생각의 여름>과 단편 <굿 마더>(이유진, 2020)로 영화제를 찾았고, <오! 문희>(정세교, 2020)와 <프랑스여자>(김희정, 2020)에 잠시 등장하기도 했다. 이시이 유야 감독의 신작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도 개봉을 기다리는 중이다.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은 감독님께 연락을 받았다. 전작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사실 감독님과 처음 만난 건 꽤 오래전이다. 단편 <그날 밤>(최기윤, 2014)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재상을 받았을 때, 감독님이 심사위원 중 한 분이었다. 그때 내 연기를 무척 좋게 보셨는지 시상식 파티에서 먼저 인사를 해주셨다. 나는 당신 영화를 심사했던 사람인데, 당신은 몇 년 안에 정말 잘 될 것 같다고.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도 어떤 일본인 감독이 당신을 믿어줬다는 걸 기억해달라고 하시더라. (웃음) 그날 메일 주소를 교환하고 나서 이따금 메일을 주고받았다. 언젠가 한국에서 작업하게 되면 꼭 같이하자고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제안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참여했다.
작품 규모라든지 역할의 성격과 비중이 각각 다른데, 어떤 기준으로 출연작을 선택했나.
캐릭터의 비중이나 출연 분량에 관해서는 크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그보다는 영화에서 인물들이 이뤄내는 관계를 중요하게 살펴본다. <굿 마더>는 동성애를 다루는 동시에,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에 집중하는 면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특히 레즈비언 딸을 둔 엄마에게 초점을 맞춰서 그녀의 입장이나 상황을 그려내는 점이 신선했다. 이유진 감독님의 새로운 시선이 좋았고, 흔히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서 마음에 들었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조민호, 2019) 개봉 당시 여러 여성 배우들과 작업하는 즐거움을 들려주며, 전형에 갇히지 않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생각의 여름>을 선택하는 데에 그런 욕구가 깃들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맞다. 나도 그렇고, 부모님이나 친구들도 “너는 왜 자꾸 우울하거나 어두운 캐릭터를 맡는 걸까?”라며 늘 조금씩 아쉬워했다. 제발 평소대로, 사석에서 만나는 김예은의 모습으로 나오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아마도 이미지나 목소리의 영향이 아닐까 싶은데, 고민하던 와중에 <생각의 여름> 시나리오를 받았다. 인물의 성격이나 뭔가에 반응하는 방식이 나와 굉장히 비슷하더라. 시나리오가 아니라, 내 일기장을 보는 듯했다. 이 영화라면 나의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작품에서는 쉽게 볼 수 없던 모습이다.
내가 너무 귀여운 척하지? (웃음)
척이 아니라, 진짜 귀엽다. 현실은 희비의 경계에 선, 말하자면 ‘웃픈’ 캐릭터인데 참 편안하게 소화하더라.
시나리오를 봤을 때, 현실이 마주하는 상황이 딱히 극적이지는 않았다. 감독님도 캐릭터에 어떤 특성을 더 부여하기를 원하지는 않으셨고, 나 또한 ‘이런 사람으로 보여야겠다’ 같은 의도는 없었다. 다른 인물들과 최대한 편안하게 마주할 방법을 궁리했고, 현장에서도 주어진 상황에 집중하며 즉흥으로 연기하려고 했다. 좋아하는 친구들과 작업한 덕도 크다. 한해인, 곽민규 배우와는 워낙 친하고, 이번 작품으로 처음 만나는 배우들과는 사전에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가장 많이 대화한 사람은 감독님이다. 시나리오를 펼쳐 놓고 이 장면은 어떤 감정으로 썼는지 물어보는 식이었는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와 별반 다르지 않구나 싶더라. 생각의 흐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서로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최대한 나답게 연기하려고 노력했다.
‘나다움’이라면? 현실의 어떤 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나.
현실은 솔직하다. 선입견을 내세우며 상대방을 섣불리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좋았다. 대사 자체가 직관적이다. 지나치게 고민하거나 의미를 압축할 필요 없이 바로바로 나올 만한 말들. 어떤 캐릭터는 한 마디를 해도 굉장히 오랜 생각을 거치는데, 그에 비하면 현실은 좀 더 투명하게 반응하는 인물이다.
김종재 감독은 캐스팅을 제안하면서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 워낙 경험이 많은 배우다 보니 <생각의 여름>처럼 작은 영화에 출연할까 싶었다고. 어느 시점부터는 이런 오해를 종종 받아왔을 것 같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해주는 말 아닌가? (웃음) 특히 단편영화 찍을 때면 감독님들이 꼭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데, 날 북돋아 주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
영 빈말은 아닐 거다. 10년 넘게 활동하며 다수 작품에 출연했고, 심지어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주연을 맡았다.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단편 <고백 한 잔>(윤성현, 2009)이 첫 작품이던데.
운이 좋았다. 연기에 앞서 현장 스태프로 일을 시작했는데, 내가 연기에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감독님이 대학 워크숍 작품을 연결해줬다. “한번 해볼래요?”라고 해서 “네, 해볼게요” 했지. 주연 자리를 꿰 찰 만큼 능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정말… 정말 운이 좋았다. (웃음)
현장 스태프라면 미술팀을 말하는 건가. 본래 대학에서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고, 처음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단편 <바람만 안 불면 괜찮은 공기>(정재웅, 2008)에서도 연기가 아니라 미술로 참여했다.
미술도 했고, 필모그래피에는 없지만 연출부로 참여한 작품도 몇 개 있다. 대부분 대학생이 만드는 단편영화였다.
왜 곧장 연기를 시작하지 않고?
부산에서 10대를 보냈고, 그때는 연기학원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딱히 다른 길을 찾아볼 생각도 못한 채 대학에 진학했는데, 어느 날 친구가 “너 영화 좋아한다며? 그럼 연출부 한 번 해봐.” 그러더라. ‘필름메이커스’라는 사이트에 들어가면 스태프를 모집하는 글을 찾을 수 있을 거라면서. 그때도 연기하고 싶긴 했지만, 경험이 없다 보니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촬영 현장에 가면 배우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겠구나 싶어서 스태프로 지원했는데, 그게 한국영화아카데미 작품이었다. 돌이켜보면 정말 무지했다. 아카데미라고 하기에 방송아카데미 같은 학원인가보다 했거든. (웃음) 그렇게 대학교 1학년 때 무턱대고 스태프 일을 시작했는데, 이후 인연이 닿으면서 연기할 기회까지 얻었다.
10대에 연기학원이나 연극영화과 입시에 관해 일찌감치 정보를 얻었다면, 더 빨리 진입했을 수도 있겠다.
글쎄, 내 성격을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어릴 적에는 수줍음이 진짜 많았다. 중학교 3학년 때쯤 엄마한테 우스갯소리처럼 “나 연기해볼까?”라고 했던 적이 있다. 그때 엄청나게 혼났다. 배우는 예쁘고, 끼 있고, 집에 돈 많은 애들이 하는 거라면서 당장 마음 접으라고 하시더라. (웃음) 나 역시 진지하게 고민하던 상황은 아니기에 ‘그래, 내가 어떻게 연기를 하겠어’ 하며 바로 수긍했다. 사실 부모님이 허락했어도 확 밀고 나가지는 못했을 것 같다. 시도는 해봤겠지만, 두려움에 주춤하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대학에 가면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것이 기점이 됐다. 머리가 큰 거지. 오히려 미술을 하고 있으니 연기에 도전해볼 용기가 났던 것 같기도 하다. 처음부터 정면 돌파하려고 했다면, 이만큼 지속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고백 한 잔> 이후로 4년 정도 필모그래피가 공백이더라. 이때는 어떻게 시간을 보냈나.
계속 영화 현장에 나갔고, 광고 연출부 아르바이트도 병행했다. 화장품 브랜드 광고를 찍을 때는 가이드 모델로 서기도 했다. 그때 촬영 감독님이 <한여름의 유자>라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작품을 연결해줬다. 내 이미지가 마음에 든다면서, 후배가 영화를 찍는데 혹시 지원해볼 마음이 있냐고 묻더라. 덕분에 난생처음 필름 작업을 경험해봤다. 이후에는 그 작품의 조감독이었던 이정홍 감독의 추천으로 <그녀는 위대하지 않다: 지혜우화>(최봉준, 2011)를 찍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현장에서 만난 동료들을 통해 새로운 작품을 만났고, 잠시 극단 생활도 경험했다. 돌이켜보면 뭐든 참 열심히 하는 시기였다. 일하고, 공부하고, 클럽도 다니고. (웃음)
착실한 사람이라는 건 안다. 2014년부터는 해마다 영화제에서 김예은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표정들>(양시모, 2014)로 장편에서는 첫 주연을 맡았고, <그날 밤>(최기윤, 2014)과 <은하비디오>(김현정, 2015)로 연기상을 받았다. 이후에는 <암살>(최동훈, 2015) <군함도>(류승완, 2017) 등 상업영화에 조단역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현장과 사람을 접하면서 자연스레 정체성이라든지 위치에 관해 고민했으리라 짐작한다.
괜히 좀 울컥한다. (웃음) 한창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에 고군분투하던 시기였다. 어떤 분들은 나를 ‘영화제에 잘 가는 배우’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출연작 중에는 영화제에서 상영하지 않은 작품이 훨씬 많다. 한 달에 단편 6-7편을 찍던 때도 있다. 그렇게 1년에 30편 정도 찍으면, 그해 영화제에서 한두 작품을 소개할 수 있던 거다. 오히려 처음 영화제에 갔을 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주변에서 칭찬해줘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러다 2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점차 욕심이 생겼다. 잘하고 싶었고, 내 색깔을 찾고 싶었다. 사실 색깔이라는 건 계속 만들어가는 것이지 않나. 근데 당시에는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들한테 자꾸 눈길이 가더라. 더 멋있어 보이는, 더 잘하는 사람들을 따라 하면서 불나방처럼 쫓았던 것 같다. 저 배우의 저런 매력도 갖고 싶고, 저 배우의 저런 능력도 갖고 싶고. 그렇게 타인과 비교하며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흉내 내다 보니, 결국 알맹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작품을 많이 찍어도 허전했다. 막상 공개하고 나면, 내 모습에 실망했다는 분도 생기고.
이미지가 하나로 굳어진다는 불안감도 영향을 미쳤을 거다. <은하비디오>로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이후 몇 년 동안 비슷한 캐릭터를 맡는다는 느낌이었다.
작품에 갖는 애정과 자부심과는 별개로, 답답함을 느끼던 시기가 있다. “이 장면은 <은하비디오>에서 했던 것처럼 해주시면 돼요”라고 디렉팅하는 감독님도 계셨으니까.
<생각의 여름>에서 현실이 스물아홉이지 않나. 김예은도 20대 후반에 나름 성장통을 겪은 셈이다.
배우로서도, 인간 김예은으로서도 자존감이 떨어지다 보니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별걸 다 해봤다. 혼자 여행을 떠나고, 다른 지역에서 몇 달 살아보기도 하고. 3주에 걸쳐 부산에서 서울까지 무작정 걸었던 적도 있다. 울고 걷기를 반복했지. 그래도 회복하기가 어려웠다. 이제 진짜 끝이구나 하며 연기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는데, 신기하게도 마음을 놓아버리니 조금씩 괜찮아지더라. 30대에 접어들면서 한결 편안해졌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야 그대로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지금 잘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웃음) 20대 후반에 배두나 선배랑 여행을 갔던 적이 있다. 내가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두나 언니가 “너 되게 경솔하다”고 했다. 당시에는 상처를 받았다. 난 그동안 열심히 살았는데, 왜 경솔하다고 하지?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에야 말뜻을 이해했다. 진짜 너무너무 경솔했구나 싶어서 부끄러웠다. 사람은 평생 배우면서 살아야 하고, 연기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훨씬 재미있게 연기를 하는 것 같다.
그만큼 치열하게 시간을 보낸 덕분에, 자신에게 좀 더 너그러워진 것 아닐까. 지금은 “내 색깔”이 뭐라고 생각하나.
아직 하나로 정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때마다 달라지는 나, 그게 가장 나다운 모습이다. 그렇게 보면 20대에 아등바등하던 모습 또한 그때의 나였던 거겠지. 초조해하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나한테서 이런 모습이 나왔구나’ 하면서 지켜본다.
확실히 호방해졌다.
맞다, 매사에 초연하지. (웃음) <생각의 여름>을 볼 때도 ‘그해 여름의 나는 저랬구나’ 한다.
여태 보여준 모습 중에 가장 발랄하고 유머러스하다.
본래 감독님이 생각했던 느낌과는 차이가 있다. 나는 코미디 요소가 강한 시나리오라고 느꼈고, 헤어와 의상도 욕심을 내서 준비하고 싶었다. 근데 감독님은 현실이 그냥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면 좋겠다고 하더라. 서로 고민을 거듭하다가 다른 배우와 스태프에게 의견을 물어보니, 대부분 나와 마찬가지로 시나리오를 유쾌하게 읽었다고 해서 “일단 예은 씨 느낌대로 해보자”고 결론이 났다. 초반에는 감독님도 좀 헷갈려 하셨는데, 3회차 넘어가면서부터 딱 믿어주셨다. 정작 나는 그때부터 불안해지더라. ‘잘못되면 어떡하지? 그럼 다 책임져야 하는데?’ 싶어서 감독님한테 “원래 계획했던 방향으로 가볼까요?” 슬쩍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웃음)


장편에서 주연을 맡은 건 오랜만이지 않나. 호흡이 길다 보니 부담을 느낄 법도 했다.
현장이 워낙 바쁘게 돌아가는 상황이라, 오히려 부담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직전에 촬영한 단편 <굿 마더>가 6회차였는데, <생각의 여름>을 9회차로 찍었다. 처음에는 감독님이 7회차로 찍자고 했고, 심지어 휴차도 한 번뿐이었다. 내가 그것만은 안 된다고 말렸다. 장편이라 찍어야 할 분량이 늘어난 만큼 챙길 것도 많아서 정신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메이크업하고 옷 입고 촬영장 가면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찰랑거리는 단발과 짧은 앞머리, 빈티지 원피스, 배지가 달린 조끼, 동그란 안경, 커다란 배낭 등 만화 같은 모습이 눈에 띈다.
어땠나. 괜찮아 보이던가?
잘 어울렸다. 영화에 싱그러운 분위기를 더했고, 전체적으로 색감도 다채로워졌다.
다행이다. 의상과 소품을 직접 고르고 싶었다. 조끼는 스무 살에 아르바이트할 때 입던 옷이고, 원피스는 시장과 빈티지 마켓을 돌아다니면서 구했다. 사실 감독님이 생각한 현실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좀 있다. 내가 앞머리를 짧게 자르고 갔더니 깜짝 놀라더라. 처음에는 옷도 대부분 티셔츠 차림이었다. 영화에서 현실이 집에 있을 때나 반려견 호구랑 산책할 때처럼 편하게 입는 옷들. 그나마 컬러풀한 티셔츠에 (곽)민규 오빠 바지를 빌려 입었다. (웃음)
현실은 밖으로 나가 여러 사람을 만나지만, 결국에는 혼자 시를 써야 하는 인물이다. 영화가 현실을 따라가는 구조이기에, 배우로서는 관객의 마음을 사는 일이 중요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유분방함을 드러내면서도 믿음직스럽게 보여야 했는데.
믿음을 얻는 데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이 혼자 등장하는 장면을 많이 고민했다. 누군가를 만나는 장면에서는 상대 인물을 통해 내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는데, 혼자 있을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싶더라. 특히 마지막 시를 쓰는 장면이 고민스러웠다. 그때 감독님이 그냥 생각만 해도 충분할 것 같다고 하더라. 시와 다른 인물을 떠올리다 보면, 딱히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현실이 보일 거라면서. 덕분에 마음을 다잡고 그때그때 상황에 집중하며 연기했다.
한때 친했다가 멀어진 주영(한해인)이나 이별한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 민구(곽민규) 등 다소 불편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앞에서도 현실은 유머를 잃지 않는다. 장난치고 능청 떠는 모습이 도리어 슬프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감독님이 쓴 대사를 보면서 나도 ‘웃프다’고 느꼈다. 최대한 밝은 척해야겠구나 싶어서 속으로 ‘내 안의 ‘캔디’를 끌어올리자!’ 했다. (웃음) 그래야 관객 입장에서도 생각할 여지가 풍부해질 것 같더라.
대화 장면에서는 말의 리듬감이 돋보인다. 애드리브로 완성한 장면도 있나.
하나도 없다. 나도 신기해서 감독님한테 따로 여쭤봤을 정도다. “얍, 얍, 얍!” 같은 추임새부터 그 모든 말장난이 대본에 적혀 있었다. 심지어 감독님은 웃기려고 쓴 대사도 아니라고 하더라. 최대한 진지하게 연기해달라고 하셨고, 다들 웃음기를 뺀 채 임했다. 그러다 보니 대화를 둘러싼 상황 자체가 재밌어졌다. 생각해보면 평소에도 그렇지 않나. 누가 막 웃기려고 하면, 상대방은 오히려 안 웃지. 코미디 영화라고 해서 표현을 과장하거나 억지 부릴 필요는 없는 거다. 무엇보다 동료들과 호흡이 잘 맞았다. 희경 역으로 출연한 백성철 배우와 연기할 때는 웃음을 참느라 고생했다. 희경이 현실에게 시 쓰기에 관해 조언하며 연설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는 감독님이 사전에 애드리브를 요청했거든. 성철 선배가 진짜 세세하게 준비해왔더라. 캐릭터에 완전히 몰두해서 4-5분 동안 ‘꼰대’ 같은 대사를 쉴 새 없이 쏟아냈다. (웃음)
반려견으로 나오는 호구(복자)와의 호흡은 어땠나.
복자 씨는 완벽했다. 연기를 너무 잘해서 가끔 위기감을 느끼기도 했다. 같이 촬영했는데, 끝나고 나서 사람들이 복자만 칭찬하고 그랬거든. 뒤에서 이렇게 째려보면서 ‘내가 더 잘할 거야!’ 했지. (웃음)
오프닝을 포함해서 중간중간 현실의 내레이션이 삽입되고, 시를 낭독하는 장면도 있다. 목소리 좋다는 칭찬이야 워낙 많이 들었겠지만, '한 번 더!' 하고 싶다. 개성이 뚜렷하면서도 듣기 편안하다.
내심 ‘시를 저렇게 읽어도 괜찮으려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웃음) 사실 한동안 목소리에 자신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예전에는 오디션을 보러 가면, 대부분 싫어하거나 어색해했거든. 기대하던 목소리가 아니니까. 근데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2017)을 연출한 이광국 감독님이라든지 현장에서 만난 몇몇 동료가 낮은 목소리를 장점으로 봐준 덕분에, 최근엔 용기를 얻었다.
현실의 시 다섯 편은 모두 황인찬 시인의 작품이다. 영화에서는 직접 쓴 시로 나오기에, 시를 읽고 나만의 느낌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했을 듯하다.
시를 잘은 모르지만, 좋아한다. 촬영하기 전에 감독님이 『구관조 씻기기』(2012)와 『희지의 세계』(2015)를 선물해주셔서 찬찬히 읽어봤다. 모든 시가 그렇겠지만, 황인찬 시인의 작품은 곱씹을수록 울림이 크더라. 딱 보자마자 와닿는 시가 있는가 하면, 좀 더 지켜봐야 하는 시도 있지 않나. 시에 등장하는 사물과 풍경을 상상하며, 그 안에 머물러보려고 했다.
어떤 시에 가장 마음이 가던가.
순위를 매길 수 없을 만큼 전부 좋아한다. 감독님한테 계속 말했다. 어쩜 이렇게 시를 잘 뽑으셨냐고. (웃음) 굳이 고르자면 ‘실존하는 기쁨’과 ‘무화과 숲’이다. 아무래도 나는 영화 속 상황과 감정에 빗대어 시를 읽을 수밖에 없는데, 한해인 배우가 ‘실존하는 기쁨’을 낭독할 때는 약간 울컥하더라. 영화에서 시점이 이동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현실의 입장을 떠나서 주영의 입장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시처럼 다가왔다.
시인이 등장하는 기존 작품과 차이를 두거나 또는 참고한 부분이 있나.
‘시인은 이럴 거야’라고 선을 그은 채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봤다. 이미지에 갇히다 보면, 자칫 젠체하거나 무거운 캐릭터가 될 수도 있으니까. 텍스트로든 내레이션으로든 영화에는 시가 계속 나올 텐데, 캐릭터까지 어려우면 관객 입장에서는 영화를 따라가기가 버거울 것 같더라. 시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좀 더 캐주얼하고 정형화되지 않은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다. 시인처럼 보이기 위해 구태여 어떤 설정을 부여할 필요는 없었다. 현실은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런 태도가 현실의 시인다운 면모이고, 대사와 행동에 자연스레 묻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영화에서는 “슬퍼도 슬퍼하지 않는 것”을 시인답다고 말한다. 배우다운 건 뭐라고 생각하나.
솔직함 아닐까. 자신에게 솔직한 것. 틸다 스윈튼이 어떤 인터뷰에서 인생의 목표를 묻는 말에 그렇게 답한 적이 있다.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아마 평생 노력해도 어려울 거라고. 그때는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삶의 태도를 일컫는 것인지, 연기에 관한 이야기인지 아리송했다. 근데 왠지 모르게 그 말이 마음에 남아서 오랫동안 곱씹어 보니, 내가 나를 배우라고 말할 때 떳떳하기를 바란다는 뜻일 수도 있겠구나 싶더라.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솔직하기가 쉽지 않다. 비겁한 구석도 있고, 감추고 싶은 부분도 많다. 그걸 보여주어야 할 때, 너무 두려워하지는 말자고 생각한다. 사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다 보면, 화면에 어떻게 나오는지 자꾸 신경쓰게 되거든. 어떤 자세로 앉아 있고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때 나는 어떻게 보이는지. 근데 감정만큼은 거짓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느껴지지 않으면서 그런 척하지는 말자는, 내가 느끼는 만큼 표현하자는 마음이다.
그러고 보면 꼭 시인이 아니더라도 <은하비디오> <극장쪽으로>(유지영, 2017) <항거: 유관순 이야기> 등 그간 사색에 잠긴 인물을 그려낼 때가 잦았다. 김예은을 생각하면, 울적하거나 힘겨운 와중에도 단단함을 유지하는 얼굴이 단번에 떠오른다.
평소 모습은 현실이랑 닮았다. 힘들면 힘들다고 다 얘기하는 편이라, 도리어 주변에서는 속마음 좀 감추라고들 한다. 힘들고 아픈 일이 생겨도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넘어가는 분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참 멋진 어른이구나 싶다.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라든지 고민을 털어놓는 선배 중에는 누가 있나.
박종환 선배와 배두나 선배에게 조언을 구할 때가 많고, 변진수 선배에게도 연기 테크닉에 관해 자주 물어본다. 문혜인, 한해인 배우와도 친하다. 고민거리가 생기면 서로 들어준다.
가장 사랑하는 배우는 여전히 메릴 스트립인가.
그리고 틸다 스윈튼도! 아, 며칠 전에 극장에서 <아이 엠 러브>(루카 구아다니노, 2009)를 다시 봤는데, 신기한 일이 있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화장실에 갔더니 애플워치 알람이 울리더라. 1시간 48분 동안 수면했다고. 워낙 좋아하는 영화이긴 한데, 그 정도로 집중했을 줄이야. 정말 미동도 없이 봤던 거다.
현실은 “시가 산으로 갈 때는 산으로 가는 게 답이다”라면서 등산길에 오른다. 연기가 막히거나 연기할 에너지가 바닥났을 때 김예은은 뭘 하나.
그걸 평생 찾아 헤매다가 최근에는 달리기로 정했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땀을 빼는 게 좋더라. 노폐물이 배출되는 것처럼 고민이 빠져나간다고 상상한다. (웃음) 집에 돌아와서 젖은 옷을 빨래통에 탁 던지는 순간, 묘한 쾌감이 있다. 그 후에는 샤워하면서 ‘아, 덜어냈어!’ 하는 거다.


듣기만 해도 상쾌하다.
덜어내기가 중요한 것 같다. 연기도 잘하려고 안 하니까,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좀 덜고 나니까 훨씬 재미있다. 언젠가 새로운 고난이 닥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지금은 현장에 있는 시간이 행복하다.
욕심을 컨트롤할 줄 알게 됐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열심히 하려는 마음마저 사라진 건 아닐 테니까.
맞다, 잘하든 못하든 좀 더 편안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거다. 남이 보는 것과 내가 보는 것도 참 다르다. 어떤 배우를 보면서 정말 연기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 배우는 아니라고 할 때가 있다. 촬영 마치고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오늘 망했다” 그러더라. 비슷한 상황을 여러 차례 경험하다 보니, 문득 100점짜리 연기라는 건 없구나 싶더라. 열심히 하되, 100점이냐 혹은 100퍼센트냐 하는 질문에 지나치게 매달리지는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현장에서 재밌다고 느낀 순간은 언제였나.
<생각의 여름>에서는 한해인 배우랑 산 정상에 올라가서 대화할 때. 어쩌다 보니 중간에 대사를 서너 개 빼먹었는데, 다시 해보겠다고 하자 감독님이 괜찮다고 하더라. 이대로 좋다고, 지금 보니 그건 쓸모없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고. 그만큼 감정 흐름이라든지 대사를 주고받는 호흡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한때 절친했던 두 인물이 이렇게 멀어졌구나, 각자 아픈 데가 있지만 말할 수 없구나. 그런 감정이 느껴져서 기억에 남는다. 새로운 환경에 직면할 때도 재미있다. 9월 방영 예정인 드라마 <홈타운>(tvN)에서는 그간 안 해본 역할을 맡아서 즐겁게 촬영했고, 엄태화 감독님의 신작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이라는 상황 자체가 매력적이었다. 현실에서 겪어본 적 없는 일을 연기로 경험할 때면, 여행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설레고 신이 나는 여행.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