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끈질긴 모험
<액션히어로> 이주영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1-07-16

참 겁이 없는 사람. 이주영이 꺼내 놓은 퍼즐을 맞춰보니 그런 결론이 나왔다. 운전면허증을 손에 쥔 날, 이주영은 대담하게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을 가로질렀다.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하게 뱄지만, 목적지를 향해 쉴 새 없이 핸들을 틀었다. 연기를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십여 년 동안 모델로 쌓은 커리어는 장점보다 단점이 되기 일쑤였고, 신인 배우에게 스물여덟이라는 나이는 장벽이었다. “정작 나는 내 나이를 신경 쓰지 않는데, 주변에서 자꾸 신경을 써주는” 상황이었지만, 이주영은 겁 없이 부딪혔다. 데뷔작 <몸값>(이충현, 2015)에서는 천연덕스럽게 교복을 소화했고, <독전>(이해영, 2018)에서는 문신 가득한 몸에 민소매 티셔츠를 걸쳤다. 그렇게 연거푸 새로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이주영은 모델 출신 신인 배우에서 어떤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리는 배우로 거듭났다.

<액션히어로>에서는 주성(이석형), 차 교수(김재화), 재우(장인섭)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며 극을 이끄는 선아 역을 맡았다. 선아는 액션 배우를 꿈꾸며 대학에 입학했지만, 십 년째 학교를 벗어나지 못한 채 조교와 카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신세다. 차 교수의 입시 비리를 목격한 선아는 옳고 그름 사이에서 갈등하는데, 끝내 도망치지 않음으로써 선을 지킨다. 거창한 포부를 내세우는 인물도 아니고, 대단한 양심을 강조하는 인물도 아니다. 다만, 선아는 관계에서 쌓은 정을 배반하지 않는 동시에, 본인이 거쳐 온 시간을 책임지려고 애쓴다. 이주영은 선아를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는 인물이라고 소개한다.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선아는 일단 겁내지 않고 걸어가려 한다. 어쩌면 겁이 없다는 말은, 누구보다 자주 용기를 낸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벌써 다음 옷으로 갈아입고 씩씩하게 미소 짓는 이주영을 만났다.

 

 

영화 시장이 어려운 가운데 <아무도 없는 곳>(김종관, 2021)에 이어, 올해 두 번째 개봉작을 들고 왔다. 운이 좋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성실하다는 증거 아닐까. 크랭크업한 작품도 여러 편이고.

나름대로 잘 쉰다. 상업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조연을 맡다 보니 스케줄이 아주 빽빽하지는 않다. ‘워라밸’을 유지하는 중이다. (웃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는 <액션히어로>와 단편 <목소리>(김영제, 2021)까지 두 편을 선보였다.

두 작품을 비슷한 시기에 찍었다. 2019년 가을에 촬영했고, 공교롭게도 둘 다 현실에 밀착한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입시 비리, 성폭력 등 굵직한 이슈를 중심에 놓는 작품들이다. 배우로서 무게를 느꼈을 듯하다.

사회 이슈를 다루는 작품에 출연하거나 그에 관해 말하는 것이 부담스럽지는 않다. 다만, 어떤 메시지를 담아내든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나리오의 첫 느낌이다. ‘이거 하고 싶다!’는 느낌이 딱 와야 한다.

<액션히어로>
<액션히어로>

어떤 시나리오를 만나면 그런 느낌을 받나.

시나리오를 읽을 때 우선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매끄럽게 흘러가는지, 작품만의 매력이 있는지 살펴본다. 그다음은 캐릭터다. 자연스레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시나리오가 있다. 어떻게 표현하면 좋겠다든지, 여기서는 이런 애드리브를 해보고 싶다든지. 그쯤 생각이 다다르면 연기하고 싶다는 마음에 두근거린다. <액션히어로>도 그랬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캐스팅을 제안받은 상태가 아니었다. 편하게 읽기 시작했는데, 유머 코드가 통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처럼 ‘취향 저격’ 당하면, 마지막까지 즐겁게 볼 수 있는 작품인 것 같다. 영화제 상영 당시, 객석에서 1분마다 웃음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웃음)

 

캐스팅 과정에서 이석형 배우가 감독에게 이주영 배우를 추천했다고.

석형 배우가 먼저 시나리오를 받고, 나는 모니터를 해주는 상황이었다. 펼친 자리에서 후루룩 읽었다. ‘어라, 재미있네? 계속 재미있을까?’ 하며 봤는데, 진짜 끝까지 재미있더라. 선아 역할에 관심이 생겨서 석형 배우한테 캐스팅이 확정된 상태인지 물어봤다. 잘 모르겠다고 하기에, 그럼 감독님과 미팅할 때 한번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보건교사 안은영> <액션히어로> <목소리> 까지 이석형 배우와는 벌써 여러 작품을 함께했다. 서로 시나리오 모니터링까지 해줄 정도면 무척 친한가 보다.

오래된 인연이다. 같은 연기학원 출신이거든. 연기를 시작할 무렵부터 알고 지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진짜 작품 하나만 할 수 있기를 바라던 때였다. 당시 필모그래피가 없는 상태이다 보니, 오디션을 준비할 때도 막막했다. 연기 연습할 겸 영상 프로필을 직접 만들기도 했는데, 누가 안 찍어주니까 촬영부터 편집까지 ‘셀프’로 했다. (웃음) 나름대로 잘 만들었고, 언젠가 기회가 생기면 공개하고 싶다. 배경음악으로 <실버라이닝 플레이북>(데이비드 O. 러셀, 2012) 삽입곡을 써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어쨌든 당시 주변 지인 중에 영상을 편집할 수 있는 사람이 석형뿐이었다. 석형에게 편집을 배우면서 아주 친해졌다. 타이밍 좋게도 영상 프로필을 완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름 메이커스’에 <몸값> 오디션 공고가 올라왔다. 거기에 “영상 프로필이 없으신 분은 지원하지 말아 주세요”라는 문구가 있었다.

 

역시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가는구나. (웃음)

덕분에 오디션 기회를 잡았다. 애초 감독님이 떠올렸던 이미지는 좀 더 전형적인, 여고생이라고 하면 으레 떠올릴 법한 모습이었다. 근데 짧은 머리인 나를 보며 ‘이런 캐릭터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가발을 쓴다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추가됐다.

ⓒ이영진

<액션히어로> 이진호 감독은 첫 만남에서 순수함을 느꼈다던데, 그날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기억하나. 어디서 순수함을 느꼈을까.

순수함이라… 그냥 날 보면 딱 느껴지지 않나? (웃음) 사실 대화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렇게 인터뷰하듯 진심으로 했지. 석형뿐만 아니라, 김재화 선배님도 이미 캐스팅을 확정한 상태였다. 재화 선배님의 경우,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염두에 뒀다고 하더라. 김재화 선배님은 ‘천재인가?’ 싶을 만큼 아이디어가 넘치는 분이다. 함께 촬영할 때, 웃음을 참느라 애먹었다. 워낙 일에 열정과 애정이 큰 분이라, 지켜보며 많은 자극을 받았다. 선배님과 또 같이 연기하고 싶다.

 

<액션히어로>에서 ‘액션히어로’ 역을 맡았다. 실제로 몸을 잘 쓰는 편인가.

아무래도 선아의 주특기가 발차기이다 보니, 감독님은 길쭉길쭉한 사람이 연기하면 더 임팩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사실 이번에 영화를 찍으면서 처음으로 발차기라는 걸 해봤다. 시작할 때는 너무 못했는데, 이제는 잘한다. (웃음) 한 달 동안 이석형 배우랑 주 3일씩 액션스쿨에 나가서 특훈을 거쳤다.

 

아주 멋진 발차기를 보여줬다. 김재화, 장인섭 배우와 함께 만들어낸 전기 충격기 신도 인상적이다.

전기 충격기 신이 되게 어려웠다. 준비할 당시에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현장에서 고생했다. <액션히어로>를 찍으면서 액션 연기는 곧 감정 연기이기도 하다는 걸 깨달았다. 몸의 움직임을 맞추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표정 연기가 굉장히 중요하더라. 힘을 주는 상황, 절박한 감정 등이 함께 드러나야 하니까. 실제로 선아를 연기할 때 가장 중요했던 점 또한 감정이다. 선아는 액션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포기한 채 살아가는, 큰 좌절을 겪은 인물이다. 현실과 타협하면서 안주하는 상태고, 그러다 보니 자꾸 외국으로 도망치고 싶어 한다. 무언가에 억눌린, 주눅 들어 있는 모습을 표현하려고 신경을 썼다. 그런 역할을 맡은 적이 거의 없기에 연기하면서 또 다른 재미를 느꼈다.

 

하긴 이전까지는 주로 에너지를 발산하는 인물을 연기했다.

남한테 눌리기보다는 남을 누르는 쪽이었지. (웃음)

ⓒ이영진

영화 중반부에 이런 내레이션이 나온다. “스무 살. 그때의 내가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실제 이주영이라면 어떨까. 스무 살의 이주영이 지금 이주영을 본다면?

마냥 좋지 않을까. 어쨌든 20대에는 모델로 일하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으니까. 이렇게 배우로서 차근차근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본다면, 무척 좋아할 것 같다. 근데 몰랐으면 좋겠다. 10년 후를 미리 알아버리면 나태해질 것 같거든. 실은 미래를 상상해본 적도 별로 없다. 특히 나이를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지금도 그렇고, 예전에는 더 그랬다. 서른 살이 됐을 때도 덤덤했다. 친구들은 “벌써 서른이라니 어떡해”라며 불안해했는데, 난 이렇다 할 마음의 동요 없이 그 시기를 지났다.

 

모델로 활동할 때는 왜 힘들었나.

마음은 굴뚝 같은데,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선아는 모델 시절의 나를 닮은 인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선아처럼 나도 큰 꿈을 꿨다. 세계적 모델이 되기를 바랐지만, 계속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혔다. 아무리 노력해도 번번이 실패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워킹을 되게 잘한다. 그때 하도 죽어라 연습해서. (웃음) 근데 100을 연습하고 200을 노력해도, 얻는 건 10도 안 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마음고생이 심했다.

 

오늘 사진 촬영을 위해 직접 옷을 가져왔다. 모델 경력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패션 센스가 좋은 사람이구나 싶더라.

영화나 드라마 촬영할 때도 의상 팀에 아이디어를 많이 낸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캐릭터를 상상하는데, 난 의상부터 먼저 고민한다. 어떤 옷을 좋아하고 즐겨 입는지, 이 장면에선 어떤 옷이 어울릴지. 옷에는 인물의 생활 습관부터 취향까지 다양하게 묻어 나온다고 생각한다. 의상을 떠올린 후에 표정이나 말투, 제스처 등 단계별로 짚어 나간다.

 

옷에 관심이 많구나.

어릴 적부터 옷을 좋아했다. 패션 잡지를 모으는 게 취미였고, 잡지에 나온 옷을 사달라고 엄마한테 조르기도 했다. 그럼 엄마가 진짜 똑같은 옷을 사줬다. 나만큼이나 엄마도 옷에 관심이 많거든. 모델 일을 시작한 것도 패션 잡지 덕분이었다. 고등학생 때 잡지를 읽다가 모델 에이전시 기사를 발견했다. ‘믿을만한 에이전시’라고 두 군데를 소개했는데, 그걸 아빠한테 보여주며 “나 여기 보내줘”라고 했다. 모델을 꿈꾸는 데 특별한 계기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워낙 옷을 좋아하는 데다가,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이라 친구들로부터 늘 “너 모델 같아”라는 말을 들었다. 자연스럽게 ‘진짜’ 모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림을 잘 그리거나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했다면 디자인에 관심을 가졌을 텐데, 내가 그런 쪽으로는 재주가 없다.

ⓒ이영진 

모델 일에 미련은 없나.

<몸값>을 찍고 나서 밀라노에 갔다. 한참 배우와 모델 사이에서 고민하던 시기인데, 더 늦기 전에 한 번쯤 해외에서 모델로 활동해보고 싶었다. 그때 밀라노에서 마음을 확실히 정리할 수 있었다. 사실 밀라노 활동도 애초 시기를 봄으로 예정했는데, <몸값> 촬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가을로 미룬 거였다. 해외로 가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거의 10년 가까이 이렇게 고생해왔는데, 원점으로 돌아가야 할까? 모든 과정을 또다시 감당할 수 있을까? 그렇게 자문하다 보니 답이 나오더라. 무엇보다 <몸값>을 찍고 나서 연기에 더 애정과 욕심을 느꼈다. 결국 두 달 일정을 한 달로 축소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모델 출신 배우’라는 수식은 흔하지만, 사실 모델과 배우는 엄연히 다른 직업이지 않나. 모델로 활동하다가 연기를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거나 자연스러운 선택은 아니었을 텐데.

모델과 배우의 일은 전혀 다르다. 아예 반대라고 느낄 때도 있다. 모델은 자아도취에 빠져야 한다. 자신에게 감탄하는 뻔뻔스러움이 필요하고, 항상 최고의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 배우가 보여줘야 할 모습은 그와 다르다. 꾸밈없이 발가벗은 모습을 드러내야 하고, 때로는 자신의 가장 추하고 나쁜 면까지도 전부 보여줘야 한다. 어떤 모델이 연기하다가 “남에게 이런 모습까지 보여주기는 싫다”라며 관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이 지켜온 기준에서는 망가지는 기분일 테니까.

맞다, 배우는 그럴 때 잘 망가질 줄 알아야 하는 것 같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일기도 오랫동안 썼다고 들었다. 쓰고 나면 다시 읽어보기도 하나.

가끔 읽는다. 읽어봐야지 해서 읽는 게 아니라, 책장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펼쳐 보는 식이다. 그럼 이제 정리는 뒤로 미루고, 두어 시간을 훌쩍 지나 보내는 거지. (웃음) ‘그때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하며 예전 일기를 찾아볼 때도 간혹 있다. 근데 난 과거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항상 현재에, 지금 당장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왔다. 물론 많이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한다. 그래도 선택하는 순간에는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

<몸값>
<독전>

나이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말과 이어진다. 다만, 현재에 집중하다 보면 충동적으로 결정할 때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어떤 면에서는 충동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먼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모델이든 배우든 선택하지 못했으리라 본다. 연기를 시작했을 때가 스물여덟이었다. 주변에서는 다들 나이가 너무 많다며 만류했는데, 내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겁이 없구나.

맞다, 겁이 진짜 없다. 일단 저지르고 본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수습하면 되지. 처음 운전할 때가 떠오른다. 우리 집이 강북 쪽인데, 운전면허증을 받자마자 동부간선도로를 타고 압구정에 갔다. 손에 땀이 줄줄 흐르더라. (웃음) 어쨌거나 새로운 걸 시도할 때,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덕분에 연기라는 좋은 선택을 했다. 물론 나쁜 선택도 많이 했겠지만. (웃음)

그럼. 여러 차례 실패하며 시행착오를 겪었다.

 

‘늦었다’는 생각에 불안하지는 않았나. 그럴 때는 어떻게 마음을 다스렸나.

당연히 조바심이 났다. 나는 나이를 신경 쓰지 않는데, 주변에서 자꾸 신경을 써주는 거다. <몸값>을 찍고 나서 미팅한 소속사 중에는 내 나이를 이유로 계약을 거절했던 곳도 있다. 당시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경우였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판에 박혀 있지?’ 혼자 그런 생각도 많이 했다. 그때 나한테 힘이 되어준 배우가 김선영, 김소진, 조우진 선배님이다. 그분들처럼 나도 마흔 살에 잘 될 거야, 하며 목표를 길게 잡았다. 그러려면 내가 연기를 잘해야겠더라. 당장 스타가 되려는 게 아니니까.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쓰지 말고, 연기를 더 열심히 해보자고 다짐했다. 게다가 희한하게도 첫 작품인 <몸값>에서는 고등학생 역할을 맡지 않았나. <몸값> 덕분에 나이에 대한 선입견이나 두려움이 깨진 측면도 있다. 그러니까 (나이에 관계없이) 연기할 수 있는데! (웃음)

ⓒ이영진

<몸값>에서 ‘원신 원컷’을 소화하며 기세 좋게 누비던 모습이 떠오른다.

처음부터 좋은 작품을 만났다. 그러고 보면 나는 첫 작품에 늘 운이 따랐다. 첫 상업영화는 <독전>(이해영, 2018)이고, 첫 드라마는 노희경 작가님의 <라이브>(tvN, 2018)니까. 모델 활동할 때 얻지 못한 행운이 이제야 찾아오나 싶을 정도였다. 연기를 시작하면서는 기도를 참 열심히 했다. 종교가 기독교인데, 모델일 때는 기도도 안 하고 그저 욕심대로 살았다. 그렇게 10년 동안 수없이 실패를 경험하다 보니, 연기를 시작할 때 되게 무섭더라. ‘우여곡절 끝에 좋아하는 일을 다시 발견했는데, 예전처럼 욕망에 휩쓸려서 그르치면 어떡하지? 다시 모든 게 와르르 무너져버리면 어떡하지?’ 그래서 연기를 우상으로 삼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여유를 달라고. 되게 절박했던 것 같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그만두라고 하면 단념할 테니, 내가 계속해도 되는지 신호를 달라”고 기도했다니까. 근데 너무 신기하게도 바로 다음 날 <몸값>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으로 선정됐다. 소식을 듣고 ‘이건 연기하라는 계시다!’ 했지. (웃음)

 

기도라는 단어를 썼지만, 결국 자기 수양의 시간을 거쳤던 셈이다.

맞다, 요즘 명상이 좋다고들 말하지 않나. 기도와 비슷하다. 내려놓고, 비우고, 기다리고. 내게 종교는 흔들림 없이 중심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뿌리가 되어준다. 음, 기독교와 연기는 일면 닮은 구석이 있다. 성경에 “네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는 말이 나온다. 요즘 세상에서는 자아를 더 드러내고 증명하라고 하지 않나. 나도 20대 시절에는 그 말에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근데 연기할 때 그래야 하더라. 나를 내려놓아야 가능한 일이 있다.

 

영화에서 선아에게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탈출’이다. 선아처럼 갑갑한 현실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던 적은 없나.

최근에는 아닌데, 어릴 때는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딱히 이유도 없이 ‘이 집구석을 나가야 해!’라는 마음이었다. (웃음) 내가 좀 청개구리 스타일이거든. 가족에게서 벗어나고 싶었고, 학교에 다니는 것도 너무 싫어했다. 어쩌면 그래서 모델 일을 얼른 시작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학생이지만 공부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었거든. 지금은 탈출이 아니라, 오히려 책임에 관해 자주 생각한다. 어느 날, 문득 ‘사람은 책임감으로 사는 건가?’ 싶더라. 내가 책임져야 할 대상을 떠올리면, 힘겨움이 싹 가시면서 기운이 난다.

 

시간이 지나면 삶의 우선순위를 재배열하게 된다. 추구하는 가치도 달라지고.

맞다, 몇 년 사이에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일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책임감이 중요하게 다가왔다. 예를 들면, 같이 사는 식구들. 유기견을 입양했는데, 얘를 보면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이 힘들거나 고민스러울 때도 ‘그래, 얘 밥값은 벌어야지’라는 현실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니까. (웃음) 확실히 책임감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돼준다. 그러다 보니 책임질 뭔가가 없는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살아가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책임감이 없다면, 쾌락주의에 빠질 것 같거든. 자기 욕망을 위해서만 사는 삶.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영진

자기 객관화에서 오는 걱정일까? 언제나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해온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 얼마 전에 “어떤 딸이었어요?”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이기적인 딸이었다고 답했다. (웃음) 나만 위하는 사람이 될까 봐 경계하는 건, 그런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집이 아닌 바깥에서도 튀는 아이였나.

아니, 평범했다. 낯가림이 심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친구들과도 활발하게 어울렸다. 사실 여전히 낯을 가리는데, 이제 그 어색한 분위기를 웃음으로 무마하는 것 같다.

 

사회생활의 기술을 터득했다고 해야 할까. 근데 무표정일 때와 웃을 때 인상이 되게 다르다. 본인은 어떤 얼굴을 제일 좋아하나.

어떤 얼굴? 음… 전부 다. (웃음) 나는 날 사랑해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남들이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한다. 친구들이 대화 중에 “아, 망했어”라고 하면,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하는 식이다. 부정적인 것들이 힘이 더 세고 오래 가는 것 같거든. 내가 곱슬머리인데, 어릴 때는 이걸 콤플렉스로 여겼다. 다른 애들보다 키가 큰 것도 싫었다. 여자나 어린아이가 요구받는 미의 기준이라는 게 있지 않나. 한동안 곱슬머리와 큰 키를 부정했는데, 이제 그냥 편안히 내버려 둔다. 다른 뭔가로 덮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어릴 때는 자신을 좋아하기가 참 어려운 것 같다. 말했듯 여성의 경우에는 더하고.

일단 외모에 대한 지적이 너무 광범위하고 구체적이니까. 부모님을 포함한 주변 어른으로부터 나 자체로 사랑과 칭찬을 받는 경험이 중요한 것 같다. 나는 나한테 그렇게 해주고 싶다. 가장 좋아하는 배우 중 한 명이 키이라 나이틀리인데, 그녀의 얼굴도 ‘호불호’가 나뉘기로 유명하지 않나. 가름한 얼굴형을 선호하는 아시아에서는 키이라 나이틀리를 미인으로 안 치는데, 서구권에서는 가장 닮고 싶은 얼굴로 꼽는다고 하더라. 글쎄, 내 눈에는 그런 면이 좋은 것 같다. 아름답다고 할 수도 있고,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도 있는 매력 때문에 키이라 나이틀리를 좋아하나 보다.

ⓒ이영진

키이라 나이틀리의 출연작 중 좋아하는 것을 고른다면.

<오만과 편견>(조 라이트, 2006)과 <어톤먼트>(2008). 사실 키아라 나이틀리의 모든 출연작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심지어 나는 멜로를 즐겨 보지도 않고. 근데 신기하게도 조 라이트 감독이 연출한 두 작품을 제일 좋아한다. 그게 배우와 감독의 힘인가 보다.

 

배우는 감정 소모가 많은 직업이다. 피로도가 상당할 텐데, 연기라는 일에 만족한다는 말을 자주 했더라. 타고난 기질 덕분인지,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하는지 궁금했다.

음, 대개 배우는 힘든 직업이라고 짐작한다.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계속 꺼내서 써야 하니까. 근데 나는 연기를 안 했으면 더 힘들었을 것 같다. 이 모든 감정을 그냥 묵히고 쌓아둔 채로 사는 게 아니라, 연기로 승화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생각하는 연기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그거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기에 나한테만 해당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동시에 배우는 호사를 누리는 직업이기도 하다. 사실 지금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지 않나. 주식이나 부동산이 아니라, 어떤 작품과 가치에 관해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남들 기준에서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일 텐데, 나는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참 좋다. 어쩌면 그게 본질 아닌가 싶기도 하고. 실제 생활에서 가치나 태도에 관해 말하면 오그라든다고 핀잔받겠지만, 나한테는 그게 일이니 좀 더 정당하게 말할 기회를 얻는 기분이다.

 

그럼 배우라는 직업의 단점은?

얼굴이 드러난다는 것. 나는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많이 알아보는 배우가 되면 사적 영역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연기를 시작하기 전과 후를 비교할 때, 가장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도 듣고 싶다.

연기를 시작한 후로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 꼭 연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20대에서 30대로 넘어오기도 했고, 개인적인 사건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 같다. 소위 ‘배우병’이라고 하지 않나. 인지도를 쌓는 과정에서 우월 의식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현장만 둘러봐도 정말 많은 이와 협업한다. 어떤 스태프를 만나는지에 따라 작품의 결과도 달라지고. 연기는 배우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려고 한다. 생활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건… 매니저가 생겼다? (웃음) 이렇게 인터뷰하는 것처럼 내 이야기를 풀어놓는 자리도 많아졌고.

<삼진그룹영어토익반>
<아무도 없는 곳>

주변 평가나 자신의 성장 속도를 의식하는 편인가.

마흔 살에 잘 될 거라는 믿음은 현재 진행형이다. 난 아직 전성기를 맞이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지금은 내공을 쌓아가는 중인 거다. 나한테 왜 이렇게 마이너 한 선택을 많이 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 일부러 그런 작품과 캐릭터만 고른 건 아니다. 그저 때마다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가는 시나리오를 선택했다.

 

데뷔작 <몸값>부터 <독전> <삼진그룹영어토익반> <보건교사 안은영> <아무도 없는 곳>에 이르기까지 독특하고 특별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신스틸러’로 호평받았다.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배우로서는 인물에게 공감대를 찾기 어려웠을 것도 같은데.

사실 <액션히어로>의 선아를 선택한 이유는 그런 갈증 때문이다. 현실적이고 연약한 면이 있는 캐릭터라 매력을 느꼈다. 비슷한 시기에 찍은 <목소리>에서도 팔로워에 가까운, 공기 같은 인물을 연기했다. 내가 그런 작품에도 이물감 없이 잘 스며드는 배우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한편 ‘신스틸러’라는 칭찬이 부끄럽긴 하지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앞서 언급한 조우진, 김선영, 김소진 선배님도 조연을 맡을 때, 영화에 계속 등장하는 게 아니지 않나. 따지고 보면 서너 신인데, 그때마다 잊을 수 없는 연기를 선보이는 거다. 선배님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일차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했구나 싶다. 이제 다음 스텝을 고민할 시기인 것 같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생각해보는 중이다. 최근에는 현실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와 감정 연기에 관심이 많다.

 

안 그래도 그간 장르물에서 활약한 경우가 잦았던 터라, 좀 더 보편적인 인물이 되고 싶지 않을까 했다.

드라마 <땐뽀걸즈>(KBS2, 2018) 마지막 화를 촬영할 때, 신기한 경험을 했다. 혜진이라는 인물이 고향을 떠나기 전에 선생님과 마주 앉아서 대화하는 장면인데, 갑자기 내가 진짜 혜진이가 된 것처럼 지난 일을 회상하게 됐다니까. 원래 우는 장면이 아닌데, 자연스레 눈물이 났다. 심지어 똑같은 대사에서, 그것도 한쪽 눈으로만 계속 울어서 감독님은 ‘쟤가 어떻게 알고 연결을 맞추지?’ 싶었다더라. (웃음)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좀 더 깊은 감정을 표현해보고 싶어졌다. 가족 이야기, 특히 엄마와 딸의 관계를 그리는 작품에도 끌린다. <윤시내가 사라졌다>(김진화)에 출연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작품이고, 나는 윤시내의 이미테이션 가수 엄마를 둔 유튜버 역할을 맡았다.

 

<윤시내가 사라졌다> <보이스>(김곡, 김선) 등 공개를 앞둔 작품이 여러 편이다. 공포 옴니버스 시리즈 <테이스츠 오브 호러> 프로젝트에서는 임대웅 감독의 <재활>에 출연한다.

<재활>은 귀신이 출몰하는 전형적인 공포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캐릭터도 현실적이고, 새로운 시선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스릴 넘치는 심리극이니 기대해도 좋다. <윤시내가 사라졌다>와 <보이스>의 개봉 시기는 아직 정해진 바가 없다. 모쪼록 관객과 좋은 자리에서 만나길 바란다.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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