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림
<평평남녀> <순자와 이슬이> 이태경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1-07-14

평면의 시나리오가 깊이를 갖춘 영화가 되는 과정에는 많은 마법이 관여한다. 배우의 연기는 그중에서도 섣불리 가늠하기 어려운 미지의 영역이다. 배우의 기질과 상태, 본능과 의도가 뿜어내는 다종의 힘이 얽히고 뭉쳐 영화에 고유한 매력을 불어넣는다. 이태경과 여러 차례 작업한 감독들은 입 모아 그가 표현하는 인물의 무한한 가능성을 말한다. <오늘의 자리>(2017), <신기록>(2018), <해미를 찾아서>(2019), <고마운 사람>(2020)까지 연달아 네 작품을 함께 한 허지은, 이경호 감독은 이태경이 그려낸 인물을 보면 그들의 영화 밖 인생까지 느껴진다고 전해줬다. <졸업>(2018)을 시작으로 이태경과 꾸준히 협업하고 있는 허지예 감독은 종종 행위의 디테일을 생략한 시나리오를 그에게 건넨다고 했다. 캐릭터에 관한 배우의 이해와 해석을 믿기 때문이다. 

이태경은 글 속의 인물을 생생히 살려내 감독조차 생각지 못했던 면모를 영화에 새겨 넣고야 마는 배우다. 두 해 전 인터뷰를 계기로 만났을 때 그는 분주해 보였다. 여러 영화의 크고 작은 역할로 얼굴을 알리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직업 배우로서의 미래를 그려보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길이 내내 궁금했다. 어떤 확신과 어떤 불안을 품고 있는지 더 많이 묻고 싶었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그가 출연한 두 편의 영화 <평평남녀>(연출 김수정)와 <순자와 이슬이>(연출 김윤지)가 나란히 상영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만남을 청할 적기라고 판단했다. 맹렬한 더위가 사그라든 이른 저녁, 조용히 약속 장소에 들어선 이태경은 예상보다 솔직하고 깊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최근 사진을 쭉 봤는데 줄곧 짧은 헤어스타일을 유지하더군요. 이유가 있나요?

전 길러보고 싶은데, 작품을 하면 짧게 잘라 달라는 요구를 많이 받아요. 그래서 오히려 궁금해요. 제게 유독 짧은 머리를 원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웃음) 지금은 꽤 기른 상태예요. 작년에 김의석 감독님의 <인간증명> 촬영하면서 숏컷을 했거든요.

 

올해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SAVE THE CAT>(연출 허지예)으로 먼저 관객을 만났습니다. 제법 귀여운 제목이지만, 꽤 깊은 감정까지 파고드는 영화인데요.

시나리오가 정말 좋아서 놀랐어요. 공개되지 않은 영화까지 합치면 허지예 감독과 네 작품 정도를 같이 했는데, 이 친구가 계속 성장하고 진취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느낌이라 현장에서 자신감이 붙기도 하고요. 작년엔 제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예가 완성된 영화로 “언니, 괜찮아요.” 하고 말해주는 것 같더라고요. 주변에 다 보여주고 소문내고 싶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작품이에요.

 

허지예 감독은 이태경 배우가 감독이 쓴 캐릭터를 감독보다 잘 이해하는 것 같다고 했어요. 시나리오에 미처 담지 못한 사정도 상상하고 헤아리며 연기한다고요.

제가 예전 인터뷰에서 연기에 “2차 창작” 하는 재미가 있다고 했잖아요. 그게 쿵짝이 잘 맞는 시나리오가 있어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지만, 어떤 시나리오는 여러 아이디어가 맞대지면 좋은 시너지가 나요. 허지예 감독 글은 워낙 잘 쓰여있어서 제가 조금씩만 보태도 금세 풍성해져요. 어떤 감정이나 톤인지 단번에 알겠는 대사들도 있고요. 제가 연기한 진희는 저와 지예의 워너비 같은 인물이에요. 자기표현에 강하고, 영우(옥자연)가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사람이죠. 저희는 영우와 좀 더 닮았어요.

<SAVE THE CAT>
<드라이빙 스쿨>

촬영 들어가기 전에 항상 철저하게 준비한다고 했어요. 보통 어떤 과정을 거쳐요?

시나리오를 정말 많이 읽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외워지면, 대사에 온갖 감정을 대입해 봐요. 예를 들면 분노에도 여러 종류가 있잖아요. 그걸 다 넣어보며 감정을 찾고, 조각조각 연습한 것을 합치는 방식으로 촬영을 준비해요. 그렇게 100퍼센트, 200퍼센트 준비해서 계획적으로 연기하는 게 안 좋게 느껴질 때도 있어요. 가짜같이 보일까 봐요. 그래서 사전에 감정을 세분화하지 않고 현장에 가서 감정이 읽히는 대로 해본 적도 있는데, 저와 잘 맞지는 않더라고요. 오히려 철저하게 계획하고 준비해가야 더 자유로워져요.

 

자유롭다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즉흥에 약해서 그런가 봐요. 연습한 대로 못하면 위축되기도 하고요. 저는 오래 붙잡고 봐야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사람이거든요. 아직은 그 방법이 제게 제일 잘 맞는 것 같아요.

 

준비하는 과정에서 타인을 자주 관찰하나요?

그렇진 않아요. 제가 가진 말투나 습관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첫 단계에요. 그렇게 비운 자리에 이것저것 넣어보죠. 정말 아이디어가 없을 때는 차라리 영화를 보면서 다른 배우를 관찰해요. 연기에는 표절이 없는 것 같아요. 따라 한다고 해도 제 느낌대로 다른 표현이 나오니까요.

 

감독에게 세부적인 뉘앙스나 감정을 재차 묻고 확인받기보다는 준비해온 걸 먼저 보여주는 편일 것 같은데, 어때요?

맞아요! (웃음) 제가 고집이 좀 있어요. 어릴 때는 말 안 하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제게 엄마가 화를 내기도 했어요. 현장에서도 그렇게 하는 편인데, 그게 잘 맞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죠.

ⓒ이영진 
ⓒ이영진 

준비한 게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의 희열이 있겠어요.

<드라이빙 스쿨>(유수진, 2020)을 찍을 때 그랬어요. 사전에 리딩을 많이 했지만, 현장에선 정신이 없었거든요. 해가 빨리 지는데, 전부 낮에 소화해야 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지긋이 대화하고 상의할 여유가 없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판단한 대로 연기했는데, 결과물을 보니 잘 어우러지더라고요. 반면, 김의석 감독님(<죄 많은 소녀>) 현장을 처음 경험했을 때는 제가 준비해간 것들이 감독님 의견과 엇갈려 당황했어요. 쓰신 글이 워낙 좋아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계속 떠오르거든요. 생각을 많이 하고 가는데, 맞지 않을 때가 꽤 있었죠. 하지만 감독님과도 여러 번 작업하고 나니 이제 현장에서 느끼는 당혹감은 없어요. 경험을 쌓으며 감독님 스타일을 따라가는 게 중요하다는 걸 느껴요.

 

2년 전 여름에 만났을 때, 그 당시를 분기점으로 느끼는 것 같았어요. 연기하면서 새로운 순간을 만났던 적이 있냐고 물었는데, 영화제에 처음 갔을 때와 더불어 인터뷰하던 그즈음에도 뭔가 새롭다고 답했죠. 두 번째 굽이를 지나온 셈인데요. 돌이켜보면 어떤가요?

저도 그 인터뷰를 최근에 다시 봤는데, 그 이후로 엄청 힘들었어요. 스무 살에 영화를 시작하면서, 제게 잘 맞고 또 제가 좋아하는 연기 스타일대로 하다 보면 사람들이 알아봐 주고 자연스럽게 영역을 넓힐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항상 그런 기회들이 저만 비껴가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러더니 작년부터는 제 연기를 보는데 갑자기 너무 이질감이 들었어요. 못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여름에 슬럼프가 크게 왔고, 연기를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최근에는 생각이 가벼워지면서 좀 나아졌어요. 그렇지만 이 직업을 유지하기 위한 동력이 새롭게 필요한 상태이긴 해요.

 

가벼워진 건 어떤 부분인가요?

제가 그동안 해왔던 연기로는 다음 단계로 가는 문턱을 넘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좀 더 확실한 연기가 필요하다고 봤는데, 그 과정에서 제가 원래 추구했던 걸 아예 버리려고 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럴 필요는 없고, 무기 하나를 더 가졌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걸 알았어요.

 

<평평남녀>와 <순자와 이슬이>에서 연기한 인물들은 흥미롭게도 모두 그림 그리는 일과 관련 있어요. 어릴 적 꿈이 원래 만화가였다고 했죠?

딱히 계기가 있거나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운 게 아니었는데, 그냥 그림이 좋았어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을 즐겨봤어요. 요즘엔 없어졌지만 예전엔 만화책 대여점이 많았잖아요. 일본 만화는 300원, 한국 만화는 400원이었죠. 집에 갈 때마다 만화책을 3~4,000원어치씩 빌려서 읽고 따라 그렸어요. 그게 너무 좋아서 만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16살에 배우가 되고자 마음먹고는 3~4년 정도 그림을 끊었어요. 계속 그리면, 연기하는 일이 조금만 힘들어져도 그림으로 돌아갈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스케치북이랑 도구를 다 버렸어요. 그러다 성인이 되고 연기하는 게 진짜 내 꿈이 됐다고 느꼈을 때부터 다시 그림을 그렸어요. 그 이후에 그린 그림은 대부분 자기 발현이에요. 실제로는 못 하는 말이나 날 선 시선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조금은 완화되더라고요.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그림을 그린 거죠.

<평평남녀>
<순자와 이슬이>

특히 좋아했던 만화는요?

어릴 때는 『란마』와 『이누야사』의 작가인 다카하시 루미코를 제일 좋아했어요. 성인이 돼서는 『베르세르크』와 아다치 미츠루가 좋아서 만화방에서 온종일 보기도 했고요. 또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특히 <원령공주>(1997)를 좋아해요. 그런데 그걸 준비하는 데 10년이 걸렸다고 하더라고요. 장인이 되려면 그렇게 해야 하는구나 싶던데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오히려 용기가 생기죠.

그러니까요. (웃음) 내가 하는 일들에 힘을 붙여줘요. 더 해야겠다 싶어지니까요.

 

막연히 배우를 꿈꾸다가 18살에 청소년 극단에 들어갔다고요. 그때 느꼈던 연기의 매력은 뭔가요?

제가 최고가 된 것 같았어요. 조연으로 공연 오디션을 준비했는데, 선배 오빠가 꿈을 크게 가지라며 주연 오디션을 보라고 한 적이 있어요. 그게 덜컥 돼서 사람들한테 주목받고 칭찬받고 나니, 이 일이 진짜 좋더라고요. 나랑 잘 어울리고, 내가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극단 생활과 자신감 덕에 고3 생활이 편했어요. 혼자 있어도 두렵지 않았죠. 그전에는 학교에서 좀 겉돌기도 했거든요.

 

계속 연습하고 공연을 무대에 올리며 10대 후반을 보낸 거네요.

맞아요. 극단이 명동에 있었고, 학생들 위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주말에만 모였어요. 새벽 6시부터 나가서 연습했죠. 김영민 배우가 극단 선배였는데, 우리의 스타였어요. (웃음) 당시에 발음이 안 좋은 게 고민이라 뒤풀이 자리에서 선배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발음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너의 말을 하면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 대사가 더 잘 들릴 거라고. 그게 아직도 생각나요.

 

그러다가 단편영화를 찍기 시작했죠. <대단한 개털>(김준, 2011) 이후 꾸준히 필모그래피를 쌓았어요. 무작정 오디션을 봤던 건가요?

어린 마음에 드라마보다는 영화를 더 하고 싶었나 봐요. 공연도 꾸준히 했는데, 우연히 ‘필름 메이커스’를 알게 됐어요. 그래서 연령대나 이미지에 관한 요구 사항을 무시하고 메일을 다 보냈어요. 답변이 아예 안 오거나 50개 중에 하나 오는 식이었죠.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계속 그렇게 했어요. 그러다 운 좋게 <대단한 개털>에 캐스팅됐어요. 제가 사진보다 실물이 나은 유일한 사람이었대요. (웃음)

<대단한 개털>
<졸업>

진로를 정하고 비교적 빨리 실행에 옮긴 셈이에요. 처음부터 직업으로 여겼나요?

아니에요.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좋아서 오래 해야겠다는 생각 정도였죠. 어릴 때는 평범한 게 콤플렉스였어요. 인생에 굴곡이 많아야 뭘 해도 잘 될 것 같은 생각에 일부러 우울하게 지내기도 했을 만큼요. 연기를 시작하면서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성공할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어요. 이걸 직업으로 생각하게 된 건 2년 전 인터뷰 그 무렵이에요. 어쩌면 잘하는 건 부수적인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슬럼프도 온 거고요.

 

<평평남녀>의 영진은 그간 연기한 인물 중 가장 겉과 속이 일치해요. 껍데기가 없다고 할까. 무엇도 계산하지 않고 그저 매 순간 집중하며 살잖아요.

딱 그런 인물이길 원했어요. 원래 시나리오는 남녀 대결에 가까운 느낌이었고, 아마 감독님은 좀 더 예민한 영진을 원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생각한 영진은 훨씬 순수하고 열정적이고 자기 계산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야 눈치 없는 행동들도 밉지 않게 보일 테고, 나중에 준설(이상현)과 정말 큰 싸움이 붙었을 때도 더 슬퍼질 것 같더라고요.

 

걸음이 무척 빠르고, 불필요한 제스쳐도 전혀 쓰질 않죠. 노래방에 가면 노고지리의 '찻잔'을 부르고요. (웃음)

곡은 감독님이 정해주셨어요. 준설은 방탄소년단 노래를 부르는데, 이상현 배우가 노래를 너무 잘했죠. (웃음) 제가 평소 연기할 때 갖은 제스쳐를 쓰더라고요. 물론 그게 좋을 때도 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말자고 다짐해봤어요. 눈 자주 깜빡거리지 말고, 손을 쓰지 말자. 그건 인물을 만들기 위해서도 필요한 디테일이었지만, 동시에 제가 성장하기 위해 시도해본 방법이기도 해요. 그런데 그걸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네요. 신기해요. (웃음)

 

김수정 감독은 <파란 입이 달린 얼굴>(2015)과 <해변의 캐리어>(2017) 등 독특한 작품으로 주목받았는데요. 이번엔 회사라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만나고, 사랑하고, 싸우고, 멀어지는 남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어요. 어떻게 만나게 됐나요?

바로 직전에 제가 부산에서 다른 작품을 촬영했는데, 감독님이 그때 저를 보시고 연락하셨어요. 시나리오를 주시기에 읽었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인물들이 예사롭지 않았어요. 그래서 감독님 인터뷰를 찾아봤어요. “제가 미친 사람들한테 관심이 있어요.”라고 말씀한 걸 보고 이 작품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시나리오를 만날 기회가 앞으로 많진 않을 것 같았거든요. 촬영할 때는 감독님이 뭔가 요구하시기보다는 제가 의견을 많이 냈어요. 영진이 어떤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감정이 어떤 식으로 흘러갔으면 좋겠다고 하는 식으로요. 저와 감독님의 타협점을 찾아가며 찍었어요.

 

완성된 영화를 보고서도 의견을 나눴나요?

작년에 후시녹음을 하며 가편집된 영화를 처음 봤어요. 저는 이게 캐릭터 무비라고 생각해서 나름 오버했는데, 영화를 보니까 저 혼자 튀는 느낌이더라고요. 살짝 절망하면서 감독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렸죠. 저만 이상한 연기를 하는 것 같다고요. 감독님께서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분은 아닌데,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괜찮다고 하시더라고요.

ⓒ이영진 
ⓒ이영진 

주변의 평가와 상관없이 본인에게 엄격한 사람 같아요.

칭찬을 잘 못 믿어요. 저랑 가까운 지인들은 그 이야기들이 진심이고 좋은 말이니까, 네가 그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얘기해줘요. 제가 잘하는 부분을 인정해야 단점을 인정할 때도 좋고, 정신건강에도 좋다고요. 그런데 성격상 어려워요. 연기 좋다는 얘기도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요. 안 좋은 말에는 또 상처받으면서 말이죠. (웃음)

 

칭찬을 잘 흡수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죠. 그래도 계속 일을 하려면 준수한 결과를 가늠하는 최소한의 기준이 필요하지 않나요?

그게 매번 다르더라고요. 정말 잘했다고 생각할 때가 분명 있는데, 그건 사람들이 별로 안 좋아해요. 현장에서 집중을 못 했을 때, 연기가 잘 안 됐다고 느꼈을 때는 반대로 다들 좋아해 주시고요. 그렇게 기준이 다르다 보니, 내 노력이 큰 의미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해요. 그런 데서 딜레마도 오는 거겠죠? 돌이켜보면 연기 자체가 좋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임했던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지쳤을 테고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도 오래오래 이 일을 하려면 진심으로 좋아해야 할 텐데… 그런데 지금 얘기가 이상한 데로 와버렸죠?

 

예전 인터뷰에서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지 물었을 때 똑같이 대답했어요. 정말 원해서 연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그 이유만 있으면 큰 문제 없이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아직 그렇게 되지 못했어요. 지금은 그런 고민이나 생각에서 잠시 멀어져 있어요.

 

잔잔해진 순간에 우리가 다시 만난 거군요. (웃음)

맞아요. (웃음) 그래서 인터뷰하자는 연락 받고 감사했어요. 의식의 흐름대로 얘기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답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구체적인 작품에 대해 말할 때는 활력이 느껴져요. 솔직하고 치열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가요? (웃음)

<순자와 이슬이>
<평평남녀>

영화 얘기로 돌아가죠. <평평남녀>는 2시간짜리 장편이에요. 주연으로서 고민했던 바도, 기억에 남는 순간도 많았을 텐데요.

막중한 책임이 느껴지죠. 관객이 두 시간 동안 제 얼굴만 봐야 하는 거잖아요. 어떻게 하면 캐릭터의 호감을 유지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감정 분배도 고심했어요. 영진과 준설이 싸우는 장면이 후반부까지 몇 번이나 있는데, 앞에서 감정을 다 써버리면 안 되니까요. 제가 영진을 너무 순수한 사람으로 만든 탓에, 촬영하다가 무척 슬퍼진 적이 있어요. 영진과 준설이 사이좋았던 시기를 나중에 찍었거든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는 다 알고 있는데, 영진은 눈치 없이 행복해하고 있으니 참 슬프더라고요. 내가 인물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인지 혹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경험해보는 일이라 신기했어요.

 

치고받고 싸우는 몸 연기를 보면서, 이태경 배우의 좀 더 크고 분명한 액션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회가 되면 재밌게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아직 몸에 힘 빼는 법을 잘 몰라요. 몸싸움을 찍을 때 저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체급 차이, 힘 차이가 있다 보니, 저는 100퍼센트로 해도 됐어요. 상현 배우는 그럴 수 없었고요. 그런데 제 100퍼센트가 세긴 세거든요. (웃음) 오빠가 고생했죠. 나도 다치지 않고 상대도 다치지 않는 스킬을 배워보고 싶긴 해요.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본인이 좋아하는 신체 부위나 표정이 있나요? 길고 큰 눈이 먼저 떠오르긴 하는데요.

전에는 눈을 유일한 장점으로 여기기도 했는데, 이젠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자꾸 부정적인 생각을 해서 그런가? (웃음) 예전의 맑고 순수한 눈이 아닌 느낌이에요. 친구가 <드라이빙 스쿨>의 선희가 트럭을 몰고 가며 와하하 웃는 장면을 보고서 해준 말이 기억나요. 감독님이 저를 되게 아끼고 사랑하는 게 느껴졌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스스로 주시하는 건 대개 우울한 감정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활짝 웃고 행복해하는 얼굴이 영화에 많이 담기길 바라고 있어요.

 

<순자와 이슬이>는 청소부로 일하는 청년 순자의 자존심에 관한 영화이자, 세대 차이가 크게 나는 두 여자의 우정에 관한 영화예요.

<드라이빙 스쿨>의 수진 감독님을 통해 윤지 감독님 연락을 받고 함께 하게 됐어요. 말씀하신 대로 순자의 자존심에 관한 영화죠. 그런데 자칫하면 순자가 미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고민을 좀 했어요. 순자가 좀 더 귀여워 보이고, 못된 말을 해도 이해받을 수 있길 바랐어요.

ⓒ이영진 
ⓒ이영진 

순자와 이슬, 이름의 주인이 짐작과 반대라 재밌더라고요. 어떤 점에 흥미를 느꼈나요?

초고는 좀 더 장르물에 가까워서 마냥 재밌게 읽었어요. 확신이 생겼던 제일 큰 이유는 감독님이 좋아서예요. 대화를 나눌수록 순자와 이슬에게 무한한 애정을 가졌다는 게 느껴졌어요. 둘이 말다툼하는 장면 찍을 땐 카메라 뒤에서 훌쩍이더라고요. 정말 이 인물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나리오를 썼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그 당시에 제게 순수한 마음이 없어서였는지 더 믿음이 갔어요. 저도 덩달아 감독님의 순수한 마음을 따라간 거죠.

 

지금으로서는 <순자와 이슬이>가 가장 최근의 모습이 담긴 영화죠?

네, 맞아요. 작년 가을에 찍었으니까요. <평평남녀>는 재작년에 찍었고요.

 

이태경 배우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공동연출하시는 허지은, 이경호 감독과의 작업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아 짧은 코멘트를 부탁했는데, 길고 정성스러운 답장을 주셨어요. 최근 특별 출연한 작품까지 합하면 네 편을 함께 하셨죠.

두 분 다 정말 때 묻지 않은 좋은 분들이에요. 처음엔 우연히 같이하게 됐는데, 그 후에도 잊지 않고 저를 불러주셨잖아요. 어쨌든 제가 전작에서 밉지 않게 했다는 믿음을 주신 거니까 감사하죠. 감독님들이 저를 너무 좋아해 주셨고 많이 칭찬해주셨어요. 그런데 한편으로 저는 감독님들이 다른 배우들과도 작업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혹시라도 다음 작품에 저를 안 부르면 제가 서운해할까 봐 걱정하시나 싶어 직접 말씀드린 적도 있어요. 또 어떤 날은 제가 그동안 너무 힘든 역할을 많이 해온 것 같다고, 좀 더 가벼운 사람이나 멋있는 사람도 연기해보고 싶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다음에 제게 주신 게 <해미를 찾아서>의 민주였어요. 제 얘기를 귀담아듣고 두 분이 함께 고민해주시고, 그렇게 선물처럼 주신 거예요. 특별하죠.

 

<오늘의 자리>의 지원, <신기록>의 소진, <해미를 찾아서>의 민주에 이르는 흐름 자체가 감동적이죠. 어느 인터뷰에서 그걸 벽에 부딪혔던 사람이 벽을 부수게 되는 과정이라고 직접 설명한 적도 있잖아요?

열심히 준비한 답변이었어요. (웃음) 영화에서 민주의 사연이 나오지 않아 좋았어요. 그래서 더 귀 기울이게 되는 인물이죠. 내가 이제 이런 역할도 할 수 있구나,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고 또 누군가의 편에 서는 한 사람을 연기할 수 있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요.

<오늘의 자리>
<신기록>

허지은, 이경호 감독은 이태경 배우가 “단단하고 고요한 모습 아래 휘몰아치는 무언가가 가득하다는 느낌”을 준다고 했어요. 잔잔한 표면 아래 굉장히 다양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요.

너무 좋은 말씀이에요. 두 분을 만나면 늘 많이 배워요. 영화의 주제와 하고자 하는 목표가 확실한 분들이죠.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간다는 점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하시잖아요. 저는 두 분만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함께 영화를 찍으면서 실제로 느끼는 바가 많아요. 또 제가 다른 시각을 더해 시너지를 낼 수도 있는 작업이고요. 감독님들의 현장은 늘 큰 소속감을 느끼게 해줘요. 다들 똘똘 뭉쳐있는 느낌이고, 즐겁고 좋은 에너지가 가득하죠.

 

최근 일본에서 개봉한 <호수 밑 하늘>(연출 사토 토모야)에서 1인 2역의 주인공을 연기했죠? 예전에 이 영화의 본인 연기에 대해 아쉬움을 말한 적이 있어요.

애정이 너무 커서 한동안 미워하기도 했던 작품인데요,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그때의 나는 정말 열심히 연기했고, 또 감독님이 잘했다고 말씀해주신 걸 믿어야겠다고 생각해요. 최근에 개봉하면서 온라인으로 무대인사도 했어요.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나면서 더 애틋해지더라고요.

 

취미는 여전히 요리인가요?

안 한 지 좀 됐어요. (웃음) 요새는 발레를 하고 있어요. 2년을 했는데 아직 토슈즈도 못 신고 있지만요. 열심히 다녀보려고요. 몸 쓰는 취미 생활이 저한테 잘 맞아요.

 

한 해의 반을 건너왔어요. 지금 어떤 것을 바라나요?

올해가 빨리 갔으면 해요. 연기를 그만둔다는 결정에도 실은 진짜 큰 용기가 필요하더라고요. 해가 끝나갈 무렵에는 어떤 방향이든 결정을 하고 저도 좀 더 나은 상태가 되면 좋겠어요.

ⓒ이영진 
Interview
마그마를 찾아서
<귤레귤레> 고봉수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5-06-09
Interview
1974, 김미옥
<케이 넘버> 미오카 밀러·조세영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5-05-21
Interview
이것이 전부란 말인가
<숨> 윤재호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5-03-17
Interview
사랑하는 당신
<두 사람> 반박지은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2025-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