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처음 만난 삼촌(엄태구)은 한눈에 봐도 사기꾼이다. 고아가 된 경언(이재인)에게 슬그머니 다가온 삼촌은 아버지 보험금을 능청스레 날려 먹는다. 살길이 막막해진 경언은 삼촌의 계략에 마지못해 가담하여 부녀를 사칭한 결혼 빙자 사기극의 조연이 된다. 어른의 사정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열네 살 경언, 꿈꿔왔던 어른이 되지 못했지만 타인에게 베푸는 사랑만은 넘쳐나는 삼촌, 마음에 빗장을 걸고 살아왔지만 어느새 고독한 중년이 되어버린 약사 점희(서정연). 영화는 세 인물이 결핍을 확인하고 서로의 빈틈을 파고들며 온기를 나누는 과정을 따라간다. 하지만 거짓으로 지탱되는 과정이 만만히 흘러갈 리 없다.
<어른도감>은 속 깊은 조카와 철부지 삼촌이 펼치는 버디무비다. 과하지 않은 사기극 코미디에 유사가족 드라마가 얹혔지만, 악의 없이 끝내 건강하고 산뜻하다. 가족영화라기보다 고독한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감내해 가는 과정을 응원하는 성장영화라 함이 적절하다. 감독은 어른 남자와 어린 소녀의 버디무비를 고안하며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페이퍼 문>(1973)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어른도감>과 <페이퍼 문>은 장례식장에서 만난 어른과 소녀가 동행하며 사기극을 자행한다는 출발점이 비슷하다. 스타일 면에서는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처럼 사려 깊은 휴먼 드라마에 가깝다.
감독은 쓸쓸함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되 애련에 젖어 들지 않고 그사이 얼핏얼핏 비치는 희비극을 포착해 낸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 조합이 성공적이다. 10대 조카 경언 역은 단편 <장례난민>(2017)을 비롯해, <아이 캔 스피크>(2017)에서 손숙의 아역, <센스 8>(2015)에서는 배두나의 아역으로 등장한 이재인이 맡았다. 망한 아이돌 출신이자 바람둥이 셰프인 삼촌 재민 역에는 엄태구가 나섰다. 사물의 이면까지 응시하는 그윽한 눈매의 배우 이재인은 '애 어른' 경언 역으로 더할 나위 없다. 엄태구는 어떠한 역할을 맡아도 어색하지만, 그 어색함이 묘하게도 신선한 호감으로 이어지는 흔치 않은 배우다. 조카와 삼촌에게 결혼 사기를 당하는 스마트한 40대 약사엔 서정연 배우가 출연해 눈길을 끈다. 이지적이고 차가운 외모지만 타인에 대한 깊은 공감도 함께 보여주는 배우로, 김인선 감독의 단편 <수요기도회>에서 주연을 맡은 바 있다.
영화 <어른도감>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여성감독인 김인선의 첫 장편영화다. 2018년 전주국제영화제 넷팩상과 정동진영화제 관객상을 받았다. 그동안 <아빠의 맛>, <수요기도회> 등 인간의 심리를 묘파하는 단편을 만들어온 김인선 감독은 가족과 인간관계에 주목하던 전작의 관심을 이어받아 조금씩 감정들을 쌓아가는 첫 장편영화를 만들어냈다.
몰입을 이끄는 연기의 디테일을 거두어내면 단점도 분명하다. 영화 플롯과 감정의 흐름은 장편보다 단편에 어울릴 법하다. 선악 구분 없이 인물을 그려내겠다는 뚝심에도 무리가 있다. 엄태구가 맡은 삼촌 재민은 한때 상하이에서 요리사였던 자로, 연상의 재력가 여성을 등쳐먹는 바람둥이이자 상습 사기꾼이다. 바람둥이, 사기꾼, 셰프라는 설정이 한 인물 속에 적절하게 섞여들지 못한 채 상황에 따라 제각각 드러난다. 연기의 한계이기보다 각본의 설득력이 부족한 탓이다. 보험금을 탕진한 삼촌이 도리어 조카를 사기극에 끌어들임에도 영화의 시선이 티 없이 무구하다는 점도 비현실적이다.
무엇보다 어린 배우의 활용이 불편하다. <우리들> 이후 아역, 특히 십대 전후의 소녀를 활용하는 영화가 상업영화뿐 아니라 근래 제작되는 독립 단편영화에서 유행이 되고 있다. 아이다움 없이 묵묵히 세상을 관조하는 소녀에 의탁하되 열린 결말로 영화를 종결한다는 것, 이는 어쩌면 작위적 스토리 봉합보다 기만적이며 손쉬운 선택일 수 있다.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사이에서 주저하며 애매한 상태에서 택한 타협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른도감 Adulthood 제작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FILMS) 감독 김인선 각본 김인선, 박근범 출연 엄태구, 이재인, 서정연 배급 영화사 진진 제작연도 2017년 상영시간 92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18년 8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