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증, 허기, 영화
<식물카페, 온정> 최창환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1-06-23

거짓말처럼 비가 그친 오후, 서울에서 다른 일정이 잡혔다는 틈을 타 최창환 감독을 만났다. 비행기와 지하철로 약속 장소에 도착한 그는 오는 길에 마주친 사람들이 너무나 급해 보였다고 했다. 집과 작업실이 있는 제주에서 매 순간 치유를 마주하고 살면서, 점차 대상을 바라보는 여유가 생겼다는 최창환 감독. 그가 여행지로 즐겨 찾던 제주에 이주한 건 6년 전이다. 대구에서 <이만원>(2006), <호명인생>(2008), <그림자도 없다>(2011) 등 어두운 노동자의 이야기를 찍던 시절은 영화 앞에 솔직해질 수 있었던 때지만, 도시 생활은 버티기 어려울 만큼 힘들었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그는 늦은 장편 데뷔를 치르기도 했다. <내가 사는 세상>(2018)은 슬픔 속에 밝은 빛이 스며들었다는 점에서 감독 본인에게는 변곡점 같은 영화다. 제주의 풍광을 한껏 받아들이며 <파도를 걷는 소년>(2019)을 찍은 뒤, 최창환이 새로 들고 온 영화는 <식물카페, 온정>. 각자의 반려 식물을 들고 걱정거리를 안은 채 카페를 찾는 인물들, 식물의 상태를 판단하고 꼭 맞는 진단을 내리는 카페 주인 현재(강길우), 그리고 그들을 무심하게 품어주는 식물 카페가 모두 영화의 주인공이다. 영화는 끝까지 차분하고 진지한 톤을 유지하며 일상의 공기를 담는다. 누구도 정신없이 바쁘거나 분주하지 않은 세계, 감독이 과연 어떤 경로를 거쳐 '그곳'에 다다랐는지 궁금했다.

 

 

제주에서 <파도를 걷는 소년>을 찍고 영화의 배경을 다시 대구로 옮겼다. 지금은 어디에 거주하나.

계속 제주에 산다. 대구는 오래 작업했던 공간이어서 함께하는 친구들도 많다. 그러다보니 육지에서 촬영하면 대구를 우선 고려한다. 로케이션에 공을 들이는 거다. 모르는 공간보다는 아는 곳에서 더 잘 찍을 수 있으니까.

 

제주에서 한동안 식당을 운영했다고. <식물카페, 온정>의 콘셉트와 겹쳐 보인다. 손님들 얘기를 즐겨 듣는 편이었나.

접은 지 꽤 됐다. 아무래도 작업과 병행하기 어렵더라. 식당에 온 손님들이 그렇게 말을 많이 하진 않았다. (웃음)

 

전주국제영화제 즈음 통화했을 때, 무척 바쁜 것 같았다.

후반 작업 세 개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운이 좋았는지 작년에 세 편을 연달아 찍었다. <숨어드는 산>, <레이오버 호텔>, <식물카페, 온정>까지. 영화제에 참석하고 개봉 준비까지 하느라 좀 힘들었다.

 

이제는 숨을 고르고 있나.

아니다. (웃음) <레이오버 호텔> 후반 작업 중이다.

<식물카페, 온정>
<식물카페, 온정>

<식물카페, 온정>의 원안을 각색했다. 전작을 함께 한 제작사 매치컷과 작업을 이어가는 중인데, 프로젝트의 시작에 관해 설명해준다면.

<파도를 걷는 소년> 때 인연이 된 김기현 대표는 본인 작품을 찍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감독이기도 하다. 작년 5월인가, 영화 개봉하고 홍보 차 서울에 머무는데 대표님이 식물 카페를 운영하는 남자 얘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숙소에서 맥주 한잔하며 의견을 나눴다. 원래 김기현 대표가 연출하기로 했던 프로젝트인데, 갑자기 나보고 찍어보지 않겠냐고 하더라. 대표님이 한창 바빠졌을 때라 그랬을 수도 있고, 내 영화를 좋아해서일 수도 있고. (웃음) 그렇게 진행됐는데, 둘 사이에 어떤 약속 같은 게 있었다. 우리는 독립영화에도 기획 영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독립 장편의 경우 보통은 감독들이 오래 쓴 시나리오를 가지고 제작 지원을 받는데, 지원 여부에 따라 제작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있지 않나. 그런데 기획 영화를 준비하는 회사가 있고 제작비가 마련되면, 재능 있는 감독들이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상황이 갖춰진다. 그러다 자기 작업도 하고 그러면 좋지 않을까.

 

풍파가 많은 상황에서 최소한의 안전판을 만드는 건가.

맞다. 최근에는 웹드라마가 그런 역할을 하지만, 영화와는 또 다른 것 같다. <식물카페, 온정>도 초기에는 웹드라마로 시작됐다. 내가 연출을 맡게 되면서, 웹드라마 형식으로 가든 영화로 묶든 그건 회사의 일이지만 일단 나는 영화를 찍겠다고 했다. 그런데 전주국제영화제에 가게 됐고, 극장에서 본 대표님이 영화로 개봉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카페라는 고정된 공간에 사람들이 드나드는 구조라서, 에피소드별로 분절되는 드라마 형식을 쉽게 떠올릴 만하다. 각색은 어떻게 진행했나.

우선 현재의 캐릭터가 중요했다. 그게 분명해져야 다른 캐릭터들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시나리오에서 봤던 현재는 내가 잘 모르는 인물이었다. 지금은 종군기자 출신으로 바뀌었지만, 원래는 펀드매니저였다. 일하다가 일상에 지치고, 할아버지의 수목원에 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설정이었다. 그런데 감정이입 하기가 어렵더라. 캐릭터 만드는 작업을 새로 하면서 강길우 배우에게 슬쩍 얘기했다. 처음부터 “이 역할 할래?” 한 건 아니고, 다음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데 이런 캐릭터 멋있지 않냐고 했지.

 

강길우 배우와는 네 작품을 함께 했다.

같이 작업하는 게 정말 편하다. 다음 작품을 생각할 때 새롭게 바라는 모습이 자꾸 생겨나는 배우이기도 하고. 길우가 어른스러워서 내가 생각한 현재라는 캐릭터의 느낌과 잘 맞았다. 어떨 때 보면 나보다 어린데도 형처럼 느껴진다니까. (웃음)

ⓒ이영진

현재는 <파도를 걷는 소년>의 ‘똥꼬 형’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인지 <식물카페, 온정>에서는 지난 두 장편 작업의 반대편에 서보려는 느낌도 든다. 세상 속의 청춘들 쪽에 서봤다가, 이번에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 위치로 옮겨와 본 것 같다고 할까.

그렇게까지 변화를 주려고 했던 건 아니다. 그보다는 그런 캐릭터들이 항상 내 마음속에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하드보일드 영화를 좋아하고, 장르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고, 그래서 그런 느낌을 영화 곳곳에 숨겨놓는 편이다. 작금에는 안 어울리는 캐릭터일 수도 있겠지만. (웃음) 비록 나쁜 놈이긴 해도 <내가 사는 세상>의 꼬뮨 사장이나, <파도를 걷는 소년>에서 강길우가 연기했던 갑보는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의 느낌이 있다. 종군기자도 지금 와서는 잘 볼 수 없는 캐릭터잖나. 전 세계를 힘들게 돌아다니는 사람인데, 내가 그런 인물을 좋아한다. 수많은 멋진 캐릭터는 전쟁 상황에서 주로 등장했다. 엄청난 소설도 2차 대전 같은 큰 전쟁에서 많이 나왔고. 죽고 사는 문제에 직면한 인물에게서 느껴지는 매력이 있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등장했을 때 그런 매력이 잘 보이지 않나 싶다.

 

영화의 설정을 듣고 <심야식당> 시리즈의 분위기를 떠올렸다고 했다.

편안하게 상황을 펼쳐놓고 찍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기본적으로 대화가 많이 오가는 걸 힘들어한다. 현재는 계속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말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야식당>의 주인도 비슷하지 않나. 그냥 들어주기만 해도 어떤 사람들은 그 시간을 통해 도움을 받으리라고 여겼다. 상담받으러 가는 게 다 그런 이유 때문 아닌가.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있다. 영화에서는 구체적으로 주고받는 대화 대신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배우들에게는 시나리오에 있는 대사를 외우라고 강요하지 않고, 편하게 하라고 말한다. 이야기와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면, 그 안에서 충분히 마음대로 연기할 수 있을 테니까. 배우들에게 맡기고 기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면 불안해져서 자꾸 리버스 쇼트를 찍고, 얼굴을 찍게 되는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분위기를 믿고 가려고 한다.

 

영화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공간이 큰 몫을 한다. 널찍한 창과 선 굵은 식물들이 조화를 이루는, 진지하고 조금은 무뚝뚝한 카페를 만들어냈는데.

처음 회의 방향은 트렌디한 공간과 무드를 만드는 쪽으로 흘러갔는데, 나는 이 카페가 남자의 공간이었으면 좋겠더라. 아기자기하고 꽃이 많은 느낌과는 반대였으면 했다. 그건 내가 생각한 현재와 어울리지 않았다. 좀 더 정돈되지 않은 공간, 터프한 분위기를 떠올렸다. 음악도 오래된 블루스나 재즈를 듣고, LP판과 아날로그 필름을 좋아하는 남자, 그게 현재였다. 그런 공간을 찾는 과정에서 애를 좀 먹었다. 프리 프로덕션 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더라. 결국 빈 곳을 채우자는 극단적인 얘기까지 나왔다. 그때 PD님이 떠오른 공간이 있다고 했다. 대구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으로 있는 감정원 PD인데, 사무실 근처에 그런 카페가 있다고. 그게 카페 온정이다. 가보니 바로 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을 직접 담당했다. DJ 활동도 오래 했다고 알고 있는데, 즐겁게 음악을 골랐을 것 같다.

DJ 활동까지는 아니고, 음악 틀어주는 가게에서 오래 일했다. 현재가 들을 법한 옛날 흑인 블루스 음악을 떠올렸다. 현재에게 컬렉터 기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곡, 현재에게 어울리는 곡을 찾았다. 40년대에 녹음된 곡들이라 퍼블릭 도메인이다. 저작권료가 안 들었지. (웃음)

 

마지막에 강길우 배우가 직접 부르는 곡을 넣었다.

엔딩에 길우가 부르는 노래를 넣고 싶었고, 내가 만들겠다고 배우와 약속했다. 전주에서 상영할 때는 기존에 있던 곡을 썼고, 개봉 버전에는 내가 만든 곡으로 새로 녹음해서 넣는다.

 

식물에는 원래 관심이 있었나.

식물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아는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제는 보면 안다. 맨 처음 제주에 이주했을 때, 숲을 걷는 게 너무 좋았다. 숲이 주는 힘이 있다. 그게 카페 온정에 꽃이 없는 이유와도 연관된다. 꽃은 누가 봐도 다 예쁘지 않나. 반면 식물의 푸르름을 보고 거기서 안정을 얻기 위해서는 오래도록 봐야 한다. 그런 게 느껴지길 바랐다. 영화를 준비하며 내가 집중적으로 공부한 건 없다. 미술감독님이 플로리스트여서 식물에 관해 자주 물었고, 길우가 직접 레슨을 받았다. 나는 제주도 집에 파 심고, 양파 심고, 민트 심는 정도다. (웃음)

<식물카페, 온정>
<식물카페, 온정>

이전에 최창환 감독의 영화에서 보지 못한 네 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보통은 함께 작업했던 배우를 먼저 떠올리는 것으로 아는데.

모두 언젠가 같이하려고 생각했던 배우들이다. 이가경 배우와는 원래 잘 알고 친한 사이다. 다른 감독들에게 추천도 많이 했고. 배우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딱 시내와 어울려서 바로 떠올렸다. 김우겸 배우는 다른 감독님 영화를 촬영하면서 만났는데, 목소리 톤과 천천히 연기하는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처음부터 진우로 생각하고 (여자친구인) 상대역을 찾기 시작했는데, 생각해보니 꼭 이성 커플일 필요가 없겠더라. 어차피 사랑이라는 건 어떤 관계에서나 다 같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서석규 배우가 떠올랐다. 석규 배우와는 대구에서 짤막한 작업을 하며 잠깐 만난 적이 있다. 신부님 역할이었는데, 참 편안한 사람인 것 같았다.

 

박수연 배우는 스태프들이 먼저 추천했다고.

박수연 배우는 그동안 고달픈 청춘의 모습을 주로 연기해오지 않았나. 그런 역할만 하기에는 아까운 배우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기존과는 다른 역할로 만나길 기대했는데, 이번에 스태프들이 추천하더라. 사실 서진은 배우가 이전에 해왔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난 캐릭터는 아니지만, 한편으론 너무 잘 어울리기도 해서, 함께 하게 됐다.

 

서진은 현재와 대화하기보다는 혼자서 본인의 마음속 얘기를 꺼내놓으며 안정을 찾아가는 인물이다.

혼자 얘기하다가 뭔가 풀리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의견을 나눴다. 마치 해탈한 사람처럼 말이다. 처음에 박수연 배우는 계속 이렇게 혼자서만 말해도 괜찮겠냐고 했다. 현재도 서진의 말에 뭔가 대꾸를 하려고 해서, 그렇게 하지 말고 “예, 그래요.” “응원할게요.” 정도로만 하면서 가보자고 했다. 나중에는 박수연 배우도 이런 공간에 이런 사람과 있으면, 절로 자기 얘기를 계속하게 될 것 같다고 하더라.

 

진우와 인혁이 커플이 되고, 현재의 과거가 바뀐 걸 보면, 설정상의 변화가 꽤 많았나 보다.

기본적인 인물 구성은 그대로다. 대신 원래 시나리오에는 드라마가 훨씬 많고 캐릭터 사이에 연결되는 부분도 꽤 있었다. 시내뿐만 아니라 서진도 현재의 직장 후배였고, 시내는 현재의 과거 연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조용한 주인공과 혼자서 뭔가를 느끼는 인물들이 나오는 게 더 맞겠다고 판단했다. 내가 생각하는 영화라는 게 그런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각색하며 드라마를 많이 들어냈다.

 

시나리오대로 영화를 찍지 않는다고 했다. 각색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배우들과 함께하는 현장에서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대본 리딩을 하지 않는다. 대신 현장에서 리허설을 많이 하고, 당일에 많은 것들이 정해진다. 그러다 보니 나와 처음 작업하는 배우들은 초반에는 힘들어하기도 한다. 대사를 다 외우고 왔는데 그대로 하지 말라고 하니까. (웃음) 그런데 나중에는 배우들이 그런 과정을 더 즐거워하더라. 나는 배우가 아니니까, 디렉션이야 줄 수 있지만 연기를 어떻게 해줄 수는 없지 않나. 배우가 반짝 빛나는 순간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게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연출자에게도 쉬운 작업이 아닐 텐데.

현장에서 카메라 위치가 정해지고 나면 배우들이 얼마나 편안한지를 우선 파악하려고 한다. 특히 대사가 정해져 있지 않은 롱테이크가 많다 보니 배우들이 힘들어할 수 있어 신경을 쓰는데, 신기하게도 항상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온다. 그러다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다시 가서 얘기하면 된다. 모니터로 현장을 지켜보고 있으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단정해서 말했을 때는 절대 나오지 않는 고유한 몸짓과 눈빛, 말투가 보인다.

<내가 사는 세상>
<파도를 걷는 소년>

그럼 배우에게 인물을 설명할 때 주로 어떤 표현을 쓰는가.

말이 없고 좀 터프한 사람이라고 하는 정도? 본인이 종군기자 출신이고 이런 성격의 사람이라면, 남이 카페에 와서 자기 얘기를 했을 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하는 식으로 배우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나라면 이런 느낌이 들 텐데, 당신은 어떨 것 같으냐고. 그렇게 대화하다 보면 현장에 있던 다른 배우가 자기는 어떻게 반응할 것 같다고 얘기할 때도 있다. 그럼 그렇게도 해본다.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면.

지금 떠오르는 건 시내와 현재가 대화하는 장면이다. 시내는 당연히 현재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이지 않나.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끼리 얘기할 때는 여차저차 사연을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 알아듣는 게 있다. 시내가 “선배 별명이 뭐였는 줄 알아?” 하면 서로 픽 웃고 지나가는데, 우리끼리는 그 별명을 다 알고 있었다. 현장에서는 배우들과 이야기하며 그걸 입 밖으로 내보기도 하고 숨겨보기도 하면서 여러 번 촬영했다. 그런 과정이 캐릭터를 진중하게 만들고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것 같다.

 

진우와 인혁은 카페에 들르는 인물 중 유일하게 둘이 쌍을 이뤄 등장한다. 커플이 흔히 거칠 법한 다툼의 시기를 자연스럽게 보여줬다.

둘이 연기하는 모습이 너무 재밌었다. 석규는 욕심도 많고 정말 능수능란한 배우다. 진우가 상처를 받고 인혁이 토라져서 가버리는데, 커플 사이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지 않나. 아까도 얘기했듯 사랑의 형태는 다 똑같다는 걸 보여준다. 영화에서는 빠졌지만, 밤에 진우와 현재가 만나는 장면이 있다. 말을 잘 하지 않는 현재의 염려하는 마음을 진우가 느낄 수 있었으면 했다. 김우겸 배우가 그럼 자기가 현재의 흉터를 바라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 그렇게 카페에 둘이 앉아서 진우가 현재의 흉터를 오랫동안 가만히 보는 장면을 찍은 게 기억난다.

 

현장의 변화를 즐겁게 포착하면서도 연출자로서 포기할 수 없는 건 무엇인가.

분위기. 영화에서 감독이 만들어내야 하는 건 바로 그것이 아닐까 한다.

 

현재는 말은 없지만 계속 손을 움직인다. 차도 우리고 분갈이도 하고.

전주에서 어떤 관객분이 현재는 끊임없이 뭔가를 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해준 게 생각난다. 그러고 보면 내가 그렇다. 계속 만지고, 고치고, 손으로 자꾸 뭔가를 한다. 그래서 현재가 그렇게 됐나? (웃음) 조용하지만 할 일이 많은 현재에게 자기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중간에 본인이 마실 차를 우리는 컷을 길게 찍었다. 마지막에 불 꺼진 카페에서 카메라를 만지는 장면도 비슷한데, 그런데 그건 원래 찍으려던 컷은 아니다. 그날 강길우 배우 생일이어서 스태프들이 케이크를 준비했다. 난 뭘 하면 되겠냐고 했더니 한 테이크 더 찍으라고 하더라. 이왕 찍을 거면 다르게 찍자고 해서 카메라 만지는 장면을 만들었다. 찍어놓은 분량을 보면 뒤에 스태프들이 케이크 들고 들어가는 것까지 나온다. (웃음)

 

현재는 전장에서 돌아와 외할아버지의 수목원에서 치유와 회복의 과정을 거친다. 감독에게도 그런 공간이 있나.

수목원처럼 딱 정해진 곳이 있는 건 아닌데, 외갓집에 대한 각별한 느낌이 있다. 어릴 때 외가에서 몇 년 지냈다. 보통 유년기의 기억이 사람에게 영향을 많이 남기지 않나. 그때의 기억과 감정이 내게 많이 남아있다. 아마 그 시절의 기억이 없다면 지금의 내가 없을 것 같다.

ⓒ이영진

각각의 에피소드는 매우 보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뻔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것에 대한 고민은 없었나.

뻔한 게 과연 안 좋은 걸까? 내가 좋아하는 훌륭한 영화들은 내용으로만 따지면 다 뻔했던 것 같다. 남자가 여자를 찾아간다든가, 여자가 남자를 기다린다든가. 결국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감독의 무드가 아닐까.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도 그런 얘기가 나온다. 남자가 오즈 야스지로 영화가 심심하다고 하니까, 찬실이가 말하지 않나. 그 안에 삶과 죽음이 다 있다고. 물론 서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고, 쉬운 내용일수록 사람들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걸 생각하는 거다.

 

어릴 때부터 영화광이었다고 들었다. 주로 어떤 영화를 좋아했나.

오즈 야스지로도 좋아했고, 4, 50년대 영화도 좋아했고, 말 그대로 영화광이었다. 닥치는 대로 영화만 봤지.

 

비디오 가게를 들락날락하면서?

그러다 나중엔 비디오 가게 점원도 됐다. 그러면 그 가게에 있는 비디오가 다 내 것이 되는 거 아닌가. (웃음) 그렇게 10대 시절을 보냈다.

 

20대 때는 영화 만들기를 꿈꾸며 무작정 상경해 상업영화 현장에서 스태프로 일했고, 이후 다시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2002년에 찍은 <마부 노바스코시아>라는 영화가 첫 작품인 것 같던데, 관련 정보를 찾기 어렵더라.

20대에 젠체할 때 찍었던 영화다. 로버트 프랭크라는 사진작가의 사진에 감명받아서 만든 전위적인 영화다. 실은 그전에 찍었던 영화도 꽤 있는데, 아마 그 제목이 멋있어서 기록으로 남게 된 게 아닌가 싶다. (웃음)

 

그즈음에는 주로 어떤 관심에서 비롯된 영화를 찍었나.

왕가위를 정말 좋아해서, 습작하며 스타일리쉬한 영화를 많이 찍었다. 내가 필름 작업의 거의 마지막 세대다. 그 당시에 영화를 찍기 위해서는 항상 동료가 필요했고, 품도 많이 들었다. 아이디어를 내고 실현하는 것 자체가 돈과 결부되어 있었다. 3분을 찍기 위해 온종일 노가다를 해야 했다. 지방에서 온 청년에게 서울은 정말 가혹한 곳이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다시 대구에 간 거다.

<이만원>
<그림자도 없다>

대구에서 <이만원> <호명인생> <그림자도 없다> 등의 작업을 하며 영화제를 통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영화들은 스타일리쉬함과는 거리가 있다.

화려하고 멋있는 걸 좋아하던 내게 그 시기가 어떤 변곡점이 됐다.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얘기가 뭔지 생각해보게 된 거다. 그게 가난, 고통, 아픔의 이야기였다. 그게 기본적으로 나를 이루는 요소들이고, 세상 사람들이 가진 것이다. 앞으로 내가 하드보일드 같은 장르 영화를 만들게 되더라도, 그 안에는 항상 그런 얘기가 들어갈 것 같다. 지금 쓰고 있는 무협 영화에도 그런 게 들어가 있고. 어쨌든 그 시기에 솔직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만들고 나서 마음에 안 들었다. 너무 투박했으니까. 그런데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내 필모그래피의 가장 앞에는 <이만원>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협 영화 만든다는 소식은 들은 지 꽤 됐다.

지금 초고는 나왔다. 준비해야 하는데, 역시나 제작 지원 없이는 힘든 작업이라서.

 

삶에 가까운 이야기와 감독이 좋아하는 장르물의 독창적인 분위기를 결합하는 게 궁극의 목표처럼 들린다.

계속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 같다. 예술은 개성이잖나. 예전 대만 영화, 일본 영화, 미국 영화들을 보면 감독의 개성이 드러난 작품이 정말 많다. 지금은 점점 없어지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웃음) 나도 내 개성을 찾고 싶다. 최근에 길우가 제주도에 녹음하러 왔는데, 밤에 둘이 술 마시며 그동안 찍었던 영화들을 쭉 봤다. 분위기가 다 다르면서도 전부 내가 만든 영화가 맞구나 싶더라. 개인 프로젝트에서는 감독 최창환이 아마 더 많이 드러날 거다.

 

현재처럼 사진을 즐겨 찍는다고 했다. 인물 사진은 안 찍을 것 같은데, 주로 어디를 향해 셔터를 누르나.

풍경 사진을 찍는다. 전시회도 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사실 제주도가 정말 큰 무덤 아닌가. 내가 찍는 풍경들이 거의 다 4.3 유적지다. 그 위에 숲이 우거져있는데, 그게 치유라는 생각이 든다. 계속 그렇게 찍고 있다.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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