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씨앗, 서로가 우주
<식물카페, 온정> 강길우·박수연·김우겸·서석규·이가경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1-06-23

현재(강길우)가 살뜰히 가꾼 초록 카페 문을 열자마자 손님들이 속속 도착한다. 오랫동안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던 서진(박수연)이 들고 온 건 비좁은 화분에서 버티는 산세베리아. 현재가 다른 화분에 산세베리아를 옮겨 심는 동안, 서진은 문득 자신도 새 자리를 찾아야 함을 깨닫는다. 인혁(서석규)과 진우(김우겸)의 반려식물은 하트 모양의 호야케리다. ‘백허그’하듯 포개어 심은 호야케리가 시든 것처럼 인혁과 진우의 연애도 언제부턴가 삐걱거린다. 임신 후 퇴사한 시내(이가경)도 가게에 들러 전 직장 동료였던 현재와 과거를 추억한다. 누구나 인정하는 일 중독자였던 둘은 이제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현재는 저마다 다른 사연을 품은 이들에게 귀 기울이며, 식물만큼이나 예민한 사람 속을 어루만진다. 덕분에 ‘식물카페, 온정’에서는 식물도 사람도 조금씩 튼튼해진다.

각양각색 영화 속 사연만큼이나 배우들이 작품에 참여한 과정도 재밌다. 강길우는 다른 촬영 일정이 미뤄지면서 가까스로 합류한 반면, 이가경은 시나리오를 읽기도 전에 무조건 함께하겠다고 했다. 최창환 감독은 현재와 시내가 과거 연인 사이였다는 설정을 삭제하며 담백함을 더했다. 김우겸과 서석규는 각각 다른 현장에서 촬영하던 중간에 캐스팅을 제안받았다. 김우겸과 잘 어울리는 배우를 물색하던 감독은 서석규를 떠올린 후, 본래 여성 캐릭터였던 인혁을 남성으로 수정했다. 그런가 하면 박수연은 감독에게 “미리 꺼내 쓰는 패”였다. 평소 그를 눈여겨본 감독은 영화에서 가장 고민한 캐릭터를 박수연에게 주저하지 않고 맡겼다. 한자리에 모인 사연은 전부 다르지만 감독에 대한 믿음만은 똑같았던 다섯 배우, 이들에게 <식물카페, 온정>은 흐뭇한 기억으로 남았다.

 

 

강길우 배우의 목소리로 시작해서 목소리로 끝나는 영화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연극 <왜소행성 134340>(연출, 극본 장성욱)에서 불렀던 ‘별똥별’이 흐르는데.

강길우_ 얼마 전에 감독님이 사는 제주도에 내려가서 새 곡을 녹음했다. 사실 ‘별똥별’은 기존 작품에서 인물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부르는 곡이다. 노래만 들었을 때는 어울릴 수도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 노래가 어떤 시퀀스에 들어가는지 알다 보니 영 어색하게 들리더라.

박수연_ 전주국제영화제 GV에서 어떤 관객이 “김필이 부른 건가요?”라고 질문하기도 했다. 노래를 워낙 잘한다.

강길우_ 난 너무 쑥스러워서 극장에서 영화를 안 보려고 했다. (웃음) 엔딩 곡은 후반 작업 막바지에 나온 아이디어였다. 말한 것처럼 내 목소리로 시작하는 영화다 보니, 감독님이 마무리도 내 목소리로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새로 들어간 곡이 참 멋지다.

<식물카페, 온정>
<식물카페, 온정>

다들 촬영을 일주일 남짓 남겨둔 시점에 캐스팅을 제안받았다고.

이가경_ 남편도 영화 일을 한다. 감독님은 대구단편영화제, 남편은 전북독립영화제를 운영하다 보니 한자리에서 만날 일이 많았다. 시나리오를 읽기도 전에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파도를 걷는 소년>(2019) <내가 사는 세상>(2018) 등 전작을 보면서 같이 작업하고 싶다고 생각했거든. 처음에는 아무런 설명 없이 시내라고만 해서 ‘시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가?’ 했다. (웃음)

서석규_ <브로크백 마운틴>(이안, 2005)을 좋아하고, 한 번쯤 동성애자 역할을 맡아서 연기해보고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 나한테는 그런 캐릭터가 안 오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제안이 와서 반가웠다.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감독님을 신뢰하기에 ‘뭐라도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대구에 갔다. 전작과 달리, <식물카페, 온정>은 대사가 많고 또 중요한 작품처럼 보였다. 원래 여성 캐릭터였던 터라, 내가 말하기엔 어색한 부분도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감독님이 현장에서 대사를 과감하게 쳐내시더라. 그때 마음이 후련해졌다. (웃음)

김우겸_ 강릉에서 촬영할 때, 조연출에게 연락을 받았다. 솔직히 그때는 시나리오를 읽기가 싫었다. 촬영 중인 작품에 집중하고 싶고, 체력적으로 힘든 상태이기도 했다. 며칠 후에 서울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어, 나 최창환인데.” (웃음) 아주 ‘쿨’하게 같이 할 거냐고 물으시더라. 기세에 압도돼서 바로 알겠다고 했다. ‘유명한 분이 내게 직접 전화를?’ 하며 속으로 되게 놀랐다.

 

유명세에 넘어간 건가. (웃음)

김우겸_ 그런 면이 있지. 전화를 받았을 때, 너무 신기하고 기분 좋더라.

이가경_ 난 다른 배우를 거쳤다가 나한테 온 줄 알았다. 촬영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연락이 와서.

강길우_ 마찬가지다. 감독님을 만나자마자 “난 몇 번째야?”라고 물어봤다. 알고 보니 다들 첫 번째 캐스팅이더라.

김우겸_ 어라, 정작 나는 아니었던 거면 어떡하지? (웃음)

 

시나리오는 처음부터 완성 형태로 받았나.

강길우_ 그렇긴 한데, 시나리오와 실제 영화는 아주 다르다. 최창환 감독님은 유연한 연출자다. 배우로서 하고 싶은 바를 전부 해볼 수 있는 현장이다. 일정이 빠듯했지만, 감독님 스타일을 잘 알기에 큰 부담은 없었다. 보통 촬영 전에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이 대사는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고민하는데, 나는 오히려 ‘이런 대사는 감독님이 싫어할 텐데?’라고 생각했다. (웃음) 다른 배우들은 감독님과 처음 호흡을 맞추다 보니 어려웠을 거다.

박수연_ 영화에서는 내가 첫 번째로 등장하지만, 실제 촬영은 중간이었다. 다들 적응한 분위기였고, 특히 길우 배우는 원래 그곳에 있는 사람처럼 편안해 보였다. 초반에는 어리바리했는데, 현장에 익숙해질 무렵 촬영이 끝났다.

강길우 ⓒ이영진
박수연 ⓒ이영진

현재는 근사한 인물이다. 종군 사진기자였다가 식물카페 주인이라니, 게다가 이름마저 ‘현재’이고.

박수연_ 이건 순전히 내 감상인데, 완성된 영화를 보니 서진이 현재를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지더라. 현재와 대화할 때, 눈에 마음을 담으려고 했다. 사진을 좋아하고, 앞으로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 어떻게 보면 서진은 현재를 동경할 수도 있다. 서진이 꿈꾸는 일을 이미 하고 있으니까. 그만큼 멋있는 캐릭터였다.

강길우_ 감독님이 여성 캐릭터와 ‘케미’가 있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연기하면서 서진과 시내에게는 유독 벽을 쳤다. (웃음) 시내는 기존에 알던 사이여서 그나마 웃기도 하는데, 서진을 만날 때는 정말 무뚝뚝하다. 감독님이 좀 그렇다. 불친절하게 보일 정도로 낯가림이 심한데, 특히 상대가 여성일 때는 눈도 거의 마주치지 않는다. 거기서 캐릭터 느낌을 가져오기도 했다.

박수연_ 현재가 그런 사람이기에 서진은 오히려 편하지 않았을까.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도 걸지 않으니 ‘그래, 너는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야’ 같은 느낌으로 대하는 거다. (웃음)

 

캐릭터 첫인상은 어땠나. 왜 캐스팅을 제안했는지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나.

박수연_ 영화에서 내가 들고 온 화분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에너지를 발산하는 대신, 많이 담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꺼내 쓰는 편이거든. 서진처럼 사회 초년생이기도 하고. 아, 감독님은 재킷 입은 사진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동안 영화에서 교복 입은 모습을 주로 봤는데, 그 사진을 보니 서진 같았다고 하더라. “그대로 오시면 돼요”라고 해서 실제로 그 재킷을 입고 찍었다.

김우겸_ <신의 딸은 춤을 춘다>(변성빈, 2020) 등 전작 단편에서 보여준 모습이 있다 보니, 감독님 입장에서 동성 커플을 상상하기 쉽지 않으셨을까 짐작한다. 직접 물어본 적은 없다. 실은 확인 받고 싶은 마음에 “제 어디가 마음에 드세요?” 하고 물어볼 때도 있거든. (웃음) 근데 감독님께는 못 그러겠다. 감독님도 나한테는 말을 좀 더 걸러서 해주는 느낌이었다. 한참 전에 생각했던 바를 시간 지나서 들려주시기도 하고.

강길우_ 처음 작업하는 사이여서 그랬을 거다. 나름의 배려 아니었을까.

서석규_ 나도 물어보진 않았지만, 이전에 짧은 작업을 함께한 적이 있다. 대구 오오극장에서 상시 상영하는 작품인데, 코로나19로 배달 아르바이트에 뛰어든 신부 역할이었다. 현장에서 날이 서 있는 편은 아니다 보니, 인간적 면모를 좋게 봐주신 것 같다. 우겸 배우와도 잘 어울린다고 하더라. 결국 불발됐지만, 다른 작품에서 나를 우겸 배우의 형 역할로 캐스팅하려고 했던 적도 있다. 우리가 좀 닮은 것 같다.

 

방금 우겸 배우가 전혀 동의하지 않는 표정이었는데. (웃음)

김우겸_ 아니, 나도 닮았다고 생각한 적 있다. 그림체가 비슷하다는 느낌?

박수연_ 전혀 안 비슷한데?

이가경_ 지금 아무 말이나 하는 거 아닌가. (웃음)

김우겸  ⓒ이영진
 서석규 ⓒ이영진

이전에 최창환 감독과 작업을 해봤든 아니든, 다들 감독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이가경_ 감독님 영화는 참 잔잔하면서도 자연스럽다. 관객으로도, 배우로서도 롱테이크를 좋아하는데, 창환 감독님이 롱테이크를 많이 사용한다. 감정을 끌고 가기에 편안한 환경이다.

강길우_ 기술적인 면에서도 롱테이크가 훨씬 효율적이다. 연결에 신경 쓰면서 똑같은 연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약속을 지키는 것만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감독님은 로맨티시스트다. 멋진 사람이고, 영화에도 낭만이 있다. 거칠고 투박해 보이지만, 마음을 두드리는 뭔가가 늘 담겨 있다. 작업자로서 믿음이 가고, 이제 성격도 웬만큼 파악했다. 감독님도 나를 자신과 비슷한 질감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터프하면서도 무뚝뚝한 인물을 만들고 싶어서 나를 떠올렸다고 하더라. 본래 현재는 ‘증권맨’에 말도 많은 캐릭터였는데, 감독님이 보기에는 너무 말랑말랑했던 거다. 어쨌든 정보는 전달해야 하니, 현재 대사를 네 배우가 나눠 가져갔다.

서석규_ 촬영 준비할 때, 감독님이 대사를 외워 오지 말라고 해서 당황했다.

강길우_ 자주 하는 말이다. 감독님은 외워서 말하는 느낌을 싫어한다. 차라리 엉성하게 말해도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게 좋다고.

 

그럼 정말 안 외우고 가나.

강길우_ 나는 어떤 스타일인지 아니까. 근데 다른 배우들은 그럴 수가 없지.

이가경_ 어떻게 안 하겠나.

김우겸_ 난 대구에 도착했을 때, 동성로 일대를 걸으면서 달달 외웠다. (웃음)

서석규_ 게다가 우겸이와 나는 연인 관계이니 호흡이 중요하지 않나. 리딩하면서 대사도 맞추고 리허설도 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김우겸_ 갑자기 석규 형이랑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난다. 숙소에서 “…맞으시죠?” 하며 다가갔다. 딱 봐도 배우였거든. 근데 형이 먼저 아는 척을 안 하더라.

서석규_ 작품을 봐서 얼굴은 알았는데, 이렇게 키가 큰 줄은 몰랐다.

김우겸_ 기억하기로는 내가 먼저 인사하고, 사무실까지 같이 걸어갔다. 그날 의상도 피팅하고.

 

옷차림에서 성격이 드러나더라. 현재를 즐기고 싶은 진우는 ‘청청’ 패션이고, 미래를 계획하는 인혁은 트렌치코트를 입는다. 스타일링은 어떻게 했나.

김우겸_ 의상을 몇 개 추려서 들고 갔다. 대구에 도착한 날, 사무실에 가서 피팅하고 결정했다. 사진 찍을 때, 감독님이 손을 잡아보라고 하더라. 괜히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졌다. 뭔가 촉감이 그랬다. 나보다 손도 두툼하고. (웃음)

서석규_ 그래도 같이 사진 찍고 손도 잡아본 덕분에 좀 더 편안하게 연기했다. 영화에서 ‘꽁냥꽁냥’하는 신이 가장 어려웠던 것 같다.

강길우_ 그렇게 정해진 대사 없이 즉흥으로 연기하는 장면이 더 어렵지.

서석규_ 할 게 은근히 많았다. 호야케리를 심는 와중에 둘만의 긴장도 느끼고, 스킨십도 하고.

김우겸_ 그때 현재가 되게 어이없다는 눈으로 본다. 내가 그 눈빛을 봤다. (웃음)

강길우_ 아니, 너무 연애하는 티를 내니까. 다른 사람은 전혀 안 보이는 거다. (웃음)

 

강길우 배우에게는 공간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과제가 있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파악해야 주인다운, 방문객을 맞이하는 여유로운 태도가 나올 테니까.

강길우_ 촬영 전에 계속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 카페로 운영할 때도 들렀고, 세팅하는 날에도 일부러 찾아갔다. 촬영할 때는 의미 없이 물건을 만지기도 하고, 자주 쓰는 물건을 주머니에 넣고 돌아다니면서 감각을 익혔다.

이가경 ⓒ이영진

식물을 다루고 차를 내리는 모습도 능숙해 보인다. 실제로 따로 교육을 받았다고.

강길우_ 다행히 식물을 좋아하고, 직접 키우기도 한다. 차도 한 번쯤 배워보고 싶었다. 늘 눈여겨보던 수업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감독님이 그걸 등록해주더라. 따로 말한 적도 없는데. 식물 수업은 이틀, 차는 하루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식물을 직접 심어볼 수 있었다. 지금 집에 있는데, 너무 웃기게도 영화를 따라 간다. 호야케리는 하나씩 썩었고, 산세베리아는 물을 준 지 오래됐는데도 잘 자란다. 시내의 식물인 스투키는 새싹이 났고.

이가경_ 나는 예전에 스투키를 죽인 적이 있다. 웬만하면 안 죽는다고 하던데. 혹시 ‘축축한 마름’이라고 들어 봤나.

강길우_ 그게 영화에서 말하는 ‘과습’이다. (웃음)

 

영화는 별다른 사건 없이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에피소드 형식이어서 장편에 대한 부담이 없을 듯 싶지만, 달리 보면 배우마다 몫이 확실히 정해져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영화에 드러나는 모습 외에 각자 채워 넣어야 할 부분이 많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가경_ 시내에게 현재는 과거 직장 동료이지 않나. 내 상황에 비춰서 연기를 관둔 친구들을 떠올려 봤다. 오랜만에 그 친구를 만나서 옛 이야기를 한다는 느낌으로. 사실 대화 장면보다는 임산부 연기가 힘들었다. 실제로 경험해본 적이 없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오더라. 유튜브 영상을 엄청나게 찾아봤다. 결국 편집되었지만, 시내가 아이를 낳으러 가는 장면도 찍었다. 감독님이 “자기야!” 하면서 소리 지르라고 하는데, 너무 어렵더라. (웃음)

서석규_ 캐릭터의 마음에 집중하며 최대한 진실하게 다가가려고 했다. 어차피 상황은 대본에 나와 있으니까. 뭔가를 만들어 내려고 하면, 오히려 진실성을 훼손하겠더라.

김우겸_ 사실 새로운 걸 덧붙일 시간도 없었고. (웃음) 나 역시 인물이나 관계의 전사를 고민하지는 않았다. 나한테 중요한 건 시선이었다. 인혁을 바라보는 진우만의 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석규 형의 습관이나 말투를 유심히 관찰했다. 진우가 인혁을 꽉 막힌 사람이라고 여기듯, 내가 석규 형을 좀 그렇게 보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사소한, 이를테면 안경 낀 모습이 나한테는 자극으로 오는 거다. 괜히 답답해 보이고.

 

진우와 인혁은 여느 연인처럼 정답 없는 주제를 놓고 다툰다. 인혁을 얄밉다는 듯 바라보는 진우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김우겸_ 맞다, ‘이 형이 또 이러네?’ 같은 느낌이지.

서석규_ 새로 산 안경이었는데! (웃음)

 

박수연 배우가 연기한 서진은 5년 동안 매달렸던 고시 공부를 포기한 인물이다. 지난해 영화제에서 공개한 <가만한>(연출 안정연, 손모아)의 준서와 일면 비슷한 구석이 있다.

박수연_ 활동 초반에 찍었던 작품에서는 대개 10대를 연기했고, 자연스레 가족이나 친구 등 관계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다 20대 후반부터는 작품 주제가 조금씩 달라졌다. 관계보다는 인생에 찾아오는 선택을 말하는 작품이 많고, <가만한>도 그중 하나다. 서진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다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가는 인물이라면, 준서는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다른 일을 선택하는 인물이다. 요즘 내 관심사가 드러나는 것 같다. 어떻게 살지 선택하는 이야기와 인물에 끌린다. 김우겸 배우와 찍은 단편 <복날>(김현진, 2020)도 비슷하다.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긴 했는데, 확신이 없는 인물로 나오거든. 다 공감할 여지가 있는 인물이었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촬영했다.

<식물 카페, 온정>
<식물카페, 온정>

서진이 “얘네가 맞는 화분을 찾아간 것처럼 저도 찾아갈 수 있겠죠?”라고 묻고, 현재가 “응원할게요”라고 답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사실 분위기에 젖어 들지 못하면, 굉장히 낯간지러운 대사이지 않나. 다행히 박수연 배우의 부러움과 겸연쩍음이 섞인 눈빛, 강길우 배우의 무덤덤하면서도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 우려를 상쇄한다. 

박수연_ 가장 어려운 대사였다. ‘나라면 낯선 사람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까지 속마음을 내보일 수 있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앞에 나온 다른 대사는 나도 충분히 할 법한 말인데, 그 대사는 연기하면서도 용기가 필요했다. 서진도 비슷할 거라고 봤다. 상대방의 반응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말하는 거니까.

강길우_ 사실 “응원할게요”는 원래 없는 대사였다. 현장에서 감독님이 현재라면 뭐라고 할지 물어보더라. 길게도, 살갑게도 말하지 않을 듯했다. 그냥 짧게 한 마디 정도 할 거라는 생각에 “응원할게요”가 어떻겠냐고 의견을 냈다.

박수연_ 원래 대사가 길었는데, 현장에서 많이 잘라냈다.

강길우_ 맞다, 현재가 서진에게 화분 설명할 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이건 토분이고 장점이 뭐고” 하는 식으로 말이 길었는데, 감독님이 줄이자고 해서 대충 얼버무렸다. (웃음) 대사를 정확히 맞춘다기보다는 현장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실행해보는 식이었다. 사실 수연 씨가 어려워하는 줄은 전혀 몰랐다. 상대 배우가 고전하면 느껴지는데, 수연 씨는 아니었다. 게다가 영화로 봤을 때는 어리고 귀여운 느낌이 강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의외로 성숙한 모습이 많았다. 발랄한 이미지와 어른스러운 모습이 섞이면서 서진을 자연스럽게 표현해냈다.

 

커플로 출연한 김우겸 배우와 서석규 배우는 처음 호흡을 맞췄는데, 함께 연기하며 어땠나.

김우겸_ (서석규 배우를 바라보며) 어땠나요? 나부터 해?

강길우_ 둘은 계속 커플 같다. (웃음)

김우겸_ 사실 촬영하면서 많이 흔들렸다. 처음 접하는 현장이라 낯설었거든. 대사도 전부 소화하려고 했고. 석규 형은 나보다 훨씬 유연하고 침착하게 촬영에 임했다. 내가 정돈되지 않은 연기를 할 때도 형이 끝맺음해주는 느낌이었다.

서석규_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는 인혁보다 진우를 가깝게 느꼈다. 인혁은 계획과 미래를 강조하지 않나. 나도 배우로 살면서 애인들에게 늘 그런 말을 들었거든.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생각이 들더라. 그들이 나를 대할 때 이런 마음이었구나, 이렇게 바라봤겠구나 싶었다. 당시에는 몇 년 안에 뭘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애인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해할 수 없다기보다는 내가 당장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그때를 떠올리면서 우겸이를 바라보려고 했다. 우겸이가 흔들리는 모습이 오히려 도움이 됐다.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애쓰다 보니 감정이 쌓이더라.

 

한편, 시내와 현재의 대화에는 아주 편안한 공기가 흐른다. 연출된 느긋함이 아닌, 본래 톤과 속도로 말하는 듯한 인상이다. 두 배우가 원래 알고 지내는 사이인가 했다.

이가경_ 다른 작품에서 연인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럭키택배>라고 남편이 연출한 작품인데, 완성이 늦어지고 있다.

강길우_ 재작년에 찍었지?

이가경_ 지금 후반 작업하는 중이다. 그 친구가 하는 일이 너무 많다. (웃음) 그때 내가 길우 오빠랑 하고 싶다고 의견을 냈다. <시체들의 아침>(이승주, 2018)부터 출연작을 쭉 봐오면서 언젠가 같이 연기하고 싶었다.

강길우_ 배우로서 연기력이나 매력도 중요하겠지만, 나는 좋은 기운을 가진 사람과 호흡을 맞출 때가 참 좋다. 가경이가 그런 사람이다. 가경이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우리가 꽤 친하다고 생각한다.

이가경_ 나도 그렇다. (웃음)

서석규_ 다른 얘기인데, 감독님한테도 그런 기운이 느껴진다. 현장에서 말씀하실 때도 무척 인간적이고, 영화를 대하는 태도도 남다르다. 지켜보고 있으면 ‘참 좋은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감독님 작품에 나오는 인물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이유와 연결되는 것 같다. 만들어낸 캐릭터가 아니라, 진짜 어딘가에 사는 사람 같다.

박수연 ⓒ이영진
 서석규 ⓒ이영진

다른 배우들 역시 각자 맡은 인물과 에피소드에 본인 경험을 이리저리 비춰보았을 테지만, 이가경 배우에게 “나만의 문장을 만들고 싶어”라는 대사는 유난히 애틋했을 것 같다.

이가경_ 맞다, “나 이제 쉬어도 되지?”라고 말할 때는 울컥했다. 연기를 늦게 시작했고, 혹시라도 일을 놓칠까 봐 한동안 여행도 못 했다. 일 욕심이 많아서 쉬지를 못한다. 일이 없을 때는 프로필 돌리느라 바쁘고, 오디션 연락이 안 오면 서너 번씩 찾아가기도 한다. 늘 일에 치이면서도 나에게 휴식을 허락해주지 못하는데,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결혼하고 나서 마음이 편안해진 건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고민이 더 늘었다. 집안 식구들은 아이를 바라는데, 나는 뭐라도 좀 더 해놓고 아이를 낳고 싶거든.

 

구체적 목표를 세울 수 없으니 더 어려울 것 같다. ‘이것만 하고 쉬자’ 할 수가 없으니까.

이가경_ 주변 사람들은 “어차피 아이를 낳을 생각이면, 빨리 낳고 3-4년 후에 복귀하라”고 조언한다. 연기는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스타가 될 것도 아니지 않냐고. 근데 말이야 쉽지, 내 입장에서는 절대 쉬운 선택이 아니거든. 나도 장녀이고 남편도 장남이라 압박이 심하다. 우리 엄마는 벌써 아기 침대를 사 놓았고, 시어머니는 한약을 지어 주셨다. (웃음) 다들 기다리는 눈치여서 마음이 복잡하다.

 

다양한 작품에서 연기했을 뿐만 아니라, 단편 <여름에 내린 눈>(2019) <탈>(2016)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가경_ 아빠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이후, 나와 가족의 삶을 기록하고 싶어서 <탈>을 만들었다. 남편이랑 연애한 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때인데, 둘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찍었다. 페이크 다큐멘터리이고, 편집 과정에서 가족은 편집한 채 나만 남겼다. 결국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다음 작품은 극영화이고 내가 직접 출연하지 않지만, 그 안에도 아빠에 관한 감정과 기억이 담겨 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로 집에 안 좋은 일이 자꾸 생겼다. 어느 날, 셋째 동생이 점을 보고 와서는 납골당에 있는 유골함을 선산으로 옮겨야 한다고 하더라. 실제로는 그럴 수 없지만, ‘내가 어린 아이였다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연출은 힘들지만 재미있다. 직접 해보니 연출자의 마음도 조금은 알 것 같고. (웃음)

 

<식물카페, 온정>에서 연기한 인물 외에 다른 배역을 선택할 수 있다면, 누굴 고르겠나.

서석규_ 서진.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잘 풀리지 않아서 고민하는 모습에 공감했다. 연극을 관두고 처음 영화를 시작했을 때 막막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허들을 넘듯 한 걸음씩 나아가는 인물이라 응원해주고 싶다.

박수연_ 대본을 읽었을 때, 제일 흥미로웠던 캐릭터는 인혁이다. 이렇게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니! (웃음)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보니 도리어 표현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더라.

이가경_ 나도 인혁인데, 이유는 수연 씨와 정반대다. 나랑 닮았거든. 스무 살부터 적금을 들었고, 수입의 80%를 저금하는 식으로 살았다. 동생들이랑 친구들한테 늘 잔소리한다. 청약통장 좀 만들라고. (웃음)

김우겸_ 진우를 다시 하고 싶다. 이번에는 대사에 얽매이지 않고, 공간과 분위기를 온전히 느끼면서. 작업을 좀 더 즐기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강길우_ 시내. 나랑 ‘텐션’이 맞는다. 다른 인물과 비교할 때, 공감할 수 있는 대사도 가장 많다.

김우겸  ⓒ이영진
이가경 ⓒ이영진

현재는 인물들에게 맞춤형 식물 처방을 제공하고, 현재 역시 식물을 통해 상처를 회복한다. 배우들도 자기만의 치유법이 있나.

강길우_ 내 장점 중 하나인데, 자고 일어나면 불편한 감정이 싹 사라진다. 단순하게 산다. 평소에 뭐하냐고 물어보면 딱히 할 말이 없다. ‘멍 때리기’ 좋아하고, 친구도 별로 없다. 운동도 해야 하니까 하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기분이 안 좋으면 잠이 더 잘 온다.

박수연_ 요즘은 명상. 애플리케이션 정기 결제해서 아침마다 꾸준히 한다. 외부를 차단하고 내 몸에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사람이 뭔가를 원하면, 생각이든 마음이든 그 방향으로만 쏟게 되지 않나. 잠시 힘을 뺀 채 나를 들여다보는 과정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이가경_ 영화를 대여섯 편 본다. 집중하느라 잡스러운 생각이 사라지거든. <나를 찾아줘>(데이빗 핀처, 2014) <귀여운 여인>(게리 마샬, 1990) <바그다드 카페>(퍼시 애들론, 1987)처럼 좋아하는 영화를 수십 번씩 보는 편이다.

서석규_ 1인용 텐트를 챙겨서 제주도에 간다. 느긋하게 파도 소리도 듣고, 텐트에 누워서 땅 기운도 느낀다. 자연을 가까이하면 회복되는 것 같다. 평소 틈나는 대로 산에 오른다. 해방감이 있다.

김우겸_ 나는 글을 쓴다. 스스로 어떤 상태인지 설명하지 않으면, 내 마음을 제대로 안 봐주고 그냥 지나치는 것만 같다. 누구나 내면에 마주 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 있지 않나.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 쳐내는 부분이 있는데, 일단 적는다. 비겁함이든 두려움이든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한결 편해진다. 그러고 나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판단할 수 있더라. 앉은 자리에서 토해내듯 쓸 때도 있고,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쓸 때도 있다.

 

카페에서는 정말 많은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 각자 카페 고르는 기준을 들려준다면.

박수연_ 통창, 나무로 된 책상과 의자.

이가경_ 진하고 구수한 커피. 신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서석규_ 음, 멤버십? (웃음)

김우겸_ 흡연실과 편한 의자.

강길우_ 공간에 머무르기 위해 가는 거라면 조용한 곳.

박수연_ ‘식물커피, 온정’이네. 현재의 카페가 딱 그랬다. (웃음)

강길우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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