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흩어진 밤> 이지형·김솔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1-06-20

<흩어진 밤>은 부모의 이혼 소식을 접한 남매의 여름을 따라간다. 이미 다른 거처를 마련한 아빠와 방 두 개짜리 새집을 알아보는 엄마, 수민(문승아)과 진호(최준우)는 이별을 직감하고 불안에 휩싸이지만 북받치는 감정을 섣불리 토로하지 않는다. 다만, 나이가 들면 이해하게 될 거라며 설명을 미루는 어른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흩어진 밤>의 원제는 ‘차가운 집’이었다. 온기가 사라진 냉랭한 집에는 적막이 흐르고, 집을 보러 온 낯선 이들은 거실이 너무 어둡다며 불평한다. 한편, 집 밖은 햇빛이 쨍쨍한 한여름이다. 어색하게 눈을 돌리는 가족 사이로 매미 소리가 울려 퍼질 때, 말할 수 없는 속마음은 점점 헝클어진다. 담담하면서도 섬세한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흩어진 밤>은 김솔, 이지형 감독의 데뷔작이다. 대학원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글과 눈을 존중하며 공동 연출을 결심했다. 김솔은 이지형이 쓴 시나리오 초고의 엔딩을 오래도록 곱씹었고, 이지형은 김솔의 눈에 들어온 공백을 채워냈다. 긴 시간을 지나 다시 한번 여름 앞에 선 두 감독을 만났다.

 

 

2019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큰 호평을 받았고 여러 부문(한국장편경쟁 대상, 배우상-문승아)에서 수상했지만 <남매의 여름밤> <에듀케이션> <여름날> 등 비슷한 시기 제작 공개된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졸업작품에 비해 유난히 개봉이 늦어졌는데. 그간 어떻게 지냈나. 

김솔_ 작년에는 <아워 미드나잇>(임정은, 2020)과 <신림남녀>(정지영, 2021)에 각각 조감독과 스크립터로 참여했다. 2년 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을 때, 어리둥절하면서도 금방 개봉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후 영화진흥위원회 개봉지원사업에 응시했는데 계속 떨어졌다. 안 되면 어쩌나 싶더라. 무엇보다 배우들한테 많이 미안했다. 반쯤 포기한 상태였는데, 코로나19 지원사업을 통해 다행히 개봉할 수 있게 됐다. 

이지형_ 생각보다 2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1년 정도는 영화제에 다니느라 바쁘기도 했고. 틈틈이 일하고 다음 작품도 구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동기들이 개봉하고 잘 되는 모습을 보면서 은근히 자극받았다. ‘우리 영화는 개봉 못 하는 거 아니야?’ 싶어 답답했지만, 이 모든 과정이 내게는 자양분으로 남을 것 같다. 

 

당시 2020년 촬영을 목표로 각자 시나리오 작업 중이라고 했다. 차기작은 계획대로 진행했나. 

이지형_ 졸업 후에 알게 모르게 방황했다. 시나리오를 쓰긴 했는데, 계획이라는 게 계속 바뀌지 않나.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그때는 어렸다. 어리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던 것 같다. (웃음)

김솔_ 나도 졸업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다. 대학원에 다닐 때는 그저 졸업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최근에는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지 또는 만들고 싶은지 고민하는 중이다. 일종의 영화 사춘기라고 해야 할까. (웃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마라케시국제영화제 등 해외영화제에도 초청받았다. 직접 참가도 했나. 

이지형_ 다행히 코로나19 전이어서 몇몇 영화제에 참석했다. <흩어진 밤>은 굉장히 한국적인 상황을 담았다고 생각했다. 부모의 이혼이 파장을 일으키고, 아이에게 영향을 주는 내용이지 않나. ‘쿨’한 유럽에서 이걸 진지하게 봐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이 공감해줬다. 가정이 쪼개지고 부모와 자녀가 헤어지는 상황이라든지 그때 발생하는 아픔을 충분히 이해하더라. 한 관객은 본인이 이혼가정의 부모인데, 영화를 보며 자녀가 떠올라서 슬펐다고 말하기도 했다.

<흩어진 밤>
<흩어진 밤>

김솔 감독이 이지형 감독에게 공동연출을 먼저 제안했다고.

김솔_ 기본적으로 동기이다 보니 이래저래 만날 일이 많았다. 1학년 때는 지형 언니와 나, 김덕중, 윤단비 감독까지 함께 시나리오 모임을 하기도 했다. 사실 지형 언니 입장에서는 공동 연출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다. 당시 나는 제작지원에 탈락하고 새로운 단편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언니는 이미 <흩어진 밤> 초고로 제작지원에 선정된 상태였고. 언니 혼자 연출할 기회가 있었지만, 내 제안을 받아들여 줬다.

이지형_ 누구든 같은 학교에서 1년 정도 지내면, 그 사람의 장점과 특징이 눈에 들어오지 않나. 김솔 감독은 내게 없는 걸 가졌다. 나는 생각이 많은 편이다. 생각이 많아서 좋기도 하지만, 가끔은 힘들 때도 있다. 우선순위나 중요도를 따지기 어려워하다 보니, 작업할 때 무얼 취하고 버려야 할지 오래 고민한다. 나한테는 전부 중요하니까. (웃음) 반면, 솔 감독은 효율적으로 쇼트를 구성하고 상황 판단도 빠르다. 균형을 맞춰준 덕분에 영화가 임팩트 있게 나아갈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둘이라서 좋은 점과 둘이기에 어려운 점이 있었을 텐데.

김솔_ 연출자는 결정하는 사람이지 않나. 내가 우유부단한 편이라서 의논할 상대가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반대로 의견이 다르면 합의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래도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서사 흐름과 감정 등은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 제일 잘 아는 것이기에, 대부분 지형 언니의 의견을 따랐다.

이지형_ 일단 혼자일 때보다 눈이 늘어나다 보니, 자연스레 볼 수 있는 것이 많아졌다. 자기 작품이든 타인의 작품이든, 영화를 볼 때 꽂히는 부분이 생기지 않나. 그걸 중심에 놓다 보면, 미처 못 보고 지나치는 것도 생기기 마련이고. 그렇게 놓칠 뻔한 부분을 서로 채워 나가면서 완성도를 높였다고 생각한다. 

 

두 감독 모두 대학원에서 영화를 시작했다. 이지형 감독은 간호학, 김솔 감독은 사회학을 전공했다고 들었는데, 어쩌다 영화 연출에 관심을 갖게 됐나.

김솔_ 어릴 적부터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대학 들어가서는 사진 동아리도 했는데, 그때만 해도 영화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영화의 이해>라는 교양수업을 들었다. 학점 받기가 쉽다며 ‘꿀교양’으로 소문난 강의였거든. 영화에 관해 몰랐던 것을 하나둘 배우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큰 재미를 느꼈다. 다만, 직업으로 삼을 생각까지는 못 했다.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는 걸 알다 보니 선뜻 결정할 수가 없더라. 졸업이 다가왔을 때, 내키지는 않았지만 일단 취업을 준비했다. 주로 일반 회사의 문화사업 부서에 이력서를 냈고, 영화 배급사에 지원한 적도 있다. (웃음) 그러다가 고민한 끝에 한겨레영화학교를 찾아갔다. 해보고 맞으면 영화를 하고, 아니면 미련 없이 취직하자는 마음이었다. 

김솔 ⓒ이영진 

해봤더니 ‘역시 이거구나!’ 싶었나.

김솔_ 몸은 힘든데,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 수강생끼리 스태프 품앗이를 하면서 바쁘게 단편을 찍었다. 하루는 촬영을 마치고 새벽이 다 돼서야 집에 돌아오는데, 문득 이게 내 길이라는 확신이 들더라. 그 정도로 즐거웠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두려움이 커진 것 같다.

 

이지형 감독도 어릴 적에는 영화에 관심이 없었나.

이지형_ 나는 중학생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티켓값이 5-6000원이던 시절인데, <살인의 추억>(봉준호, 2003)이 개봉했을 때는 극장에서 네 번이나 봤다. 남들과는 다른, 조금은 특별한 취미가 있다고 ‘자뻑’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에서는 이과 계열 공부를 하다 보니 영화나 글쓰기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대학에 가면 영화도 많이 보고 책도 많이 읽어야지’ 했지만, 전공이나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상상하지는 못했다. 간호학과를 선택할 때도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냥 수능 점수에 맞췄다. 주변에서 취업하기 편리한 과라고 추천하기도 했고. 근데 입학해서 보니 적성에 너무 안 맞는 거다. 당시에는 전과가 불가능해서 다른 분야를 공부하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결국 도서관에서 혼자 영화 보고 소설 읽으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내 안에 발산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는 건 알았고, 실제로 습작을 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졸업 후에는 병원에 취직했다. 2-3년 정도 일했는데, 아무리 돈을 버는 게 좋아도 안 되겠더라. 계속 내가 나랑 부딪히는 느낌이었다. 병원에서 퇴사한 후에 뭘 할지 고민하다가 독립영화워크숍을 찾아갔다. 그게 내 첫 번째 영화 작업이었다.

 

대학원에 진학하기까지 먼 길을 돌아온 셈이다.

이지형_ 진학을 준비하면서도 갈팡질팡했다. 영화를 좋아하긴 했지만, 심도 있게 파고든 사람은 아니다 보니 모르는 게 많았다. 거기에 나이는 또 먹었고. ‘이렇게 내가 내 인생을 꼬는 거 아닌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서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웃음) 근데 직접 해보니 재미있고, 무엇보다 발전시킬 수 있는 부분이 보이기 시작하더라. ‘나한테는 이런 감성과 기질이 있구나’ 하면서 몰랐던 면을 발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는 이걸 못하는구나’ 하면서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키우고 채워야 할 목표 같은 것이 생겼다. 지금도 비슷하다. 먼 미래보다는 그저 눈앞에 있는 목표에 충실하려고 한다.

<흩어진 밤>
<흩어진 밤>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4인 가족 구성원 중 가장 어린 수민을 주인공으로 세웠다. 누구의 시선으로 보여줄 것인지 오래 고민했을 텐데. 

이지형_ <흩어진 밤>도 그렇지만, 내가 쓴 시나리오에는 10대가 자주 등장한다. 성숙한 10대. 어떻게 보면 그게 과거의 내 모습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어린 시절에서 많은 재료를 찾는 편이다. 어릴 적에 경험한 순간이 문득 떠오르기도 하고, 이야기를 쓸 때도 거기에서 가지를 뻗어 나간다. 집안 형편은 무난했는데, 거의 방치된 상태에서 자랐다고 해야 할까. 나름대로 좋은 점도 있었다. 동네가 시골이어서 자연과 가까웠다. 학원도 안 다니고, 낮부터 저녁까지 친구들과 놀러 다녔다. 아, 신기하게도 당시 친했던 친구들이 지금 미술, CG, 디자인 등 분야는 조금씩 다르지만, 비슷한 일을 한다. 다들 어느 정도 소질이 있었구나 싶다. 상상력이 풍부한 애들이어서 어릴 때도 상상에 근거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관객 입장에서는 어른의 사정을 헤아리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난처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연출자들끼리 어떤 대화를 나눴나.

이지형_ 이전까지 장편 시나리오를 완성해본 적이 없어서 일단 한번 써보자는 생각이었다. 관계나 심리에 관해 많이 생각하고 써왔기에, 첫 장편 소재를 정할 때도 자연스레 가족 이야기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20대 여성이 주인공이었는데, 시간을 거치다 보니 연령대가 낮아졌다. 아무래도 나와 내 주변의 가족을 관찰하고 복기할 수밖에 없었다. 음, 결국 한 인간의 서사는 연결된다고 본다. 중학교 때 내가 왜 그랬나 싶어서 되짚어보면, 초등학교 때 일어났던 일이 생각나더라. 성인이 된 나 역시 어릴 적부터 긴 시간을 거쳐 오며 형성된 사고 흐름 속에 놓여 있는 거다. 특히 유년 시절에 가족의 민낯을 처음 마주하는 순간, 누구나 한번 깨지는 것 같거든. 그때 감각을 계속 파고들면, 가족에 관한 단순한 정수가 남더라. 예를 들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같은 질문. (웃음) 겉보기엔 아주 단순한데, 막상 말을 시작하려고 하면 되게 생각이 많아지니까. 영화 속 수민이가 10살인데, 그 나이가 묘한 경계라고 생각했다. 완전히 어린 아이도 아니고, 조금씩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시기다.

김솔_ 학교에서는 부모의 이혼 사유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실제로 이혼을 다룬 논문이나 통계도 찾아보면서 조사했다. (웃음) 하지만 어른의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기보다 아이 시점에서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지형 ⓒ이영진 

카메라를 수민과 같은 키에 놓았고, 전부 핸드헬드로 촬영했다. 수민을 제외한 다른 인물은 프레임 밖으로 밀려나거나 잘릴 수밖에 없는데, 촬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뭐였나.

김솔_ 촬영 콘셉트는 초반부터 정하고 갔다. 수민 시점으로 진행하는 동시에 흔들리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초반에는 넓은 렌즈를 쓰고, 후반에는 화각이 좁은 망원렌즈를 사용했다. 

이지형_ 가족에 관한 여러 이야기와 질문을 담은 영화이지 않나. 나는 혈연관계의 밀접함이 아니라, 거리감에 집중하고 싶었다. 누구나 어릴 때는 부모가 곧 세상인 것처럼 느끼며 애착 관계를 이룬다. 하지만 결국에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가족 구성원들이 흩어지고 멀어지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가족의 생명을 지속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면에서도 인물들이 화합하는 느낌보다는 얼마간 거리를 두면서 긴장을 가져가길 바랐다. 프레임 아웃과 인물의 잘림뿐만 아니라, 구도적으로도 일부러 떨어져 앉는 방식을 택했다. 

김솔_ 핸드헬드의 경우, 날 것의 느낌을 줄 수 있어서 좋았다. 지형 언니가 다르덴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고. 제작 여건에서 비롯한 선택이기도 하다. 시간이 없다 보니 빠르게 찍어야 했는데, 픽스 카메라보다 유연하게 찍을 수 있었다.

이지형_ 핸드헬드의 백미는 롱테이크와 동선 연출이다. 영화에서 표현할 수 있는 공간 자체가 넓어지고, 앞서 말한 인물간의 거리감을 보여주기에도 적절했다.

 

배우들은 전부 오디션으로 만났나. 어떤 배우를 기다렸나.

이지형_ 모두 오디션으로 만났다. 부모는 딱 봤을 때 왠지 서먹서먹하고 안 어울리길 바랐다. 뽑아놓고 보니 진짜 달라 보이더라. 근간이 다른 느낌? (웃음) 김채원 배우는 아니라고 판단하면 차갑게 돌아서는 성격처럼 보였다. 동시에 마음 씀씀이가 넓고 생각하는 바도 많다는 게 느껴졌다. 보통 오디션에서 엄마 역할이라고 하면, 배우들 대부분이 전형적인 모습을 연기하는데 김채원 배우는 달랐다. 엄마 역할을 수행하지만, 자신을 챙기는 느낌이었다.

김솔_ 임호준 배우는 전작을 보다가 눈에 들어왔다. 한참 배우를 찾던 중에 전주국제영화제에 갔는데, 한 섹션에서 호준 배우가 2-3번 정도 연속으로 출연하더라. (웃음) 이후 연락하고 만나 보니 이미지도 잘 맞고, 무심한 듯한 연기를 잘해주셨다.

<흩어진 밤>
<흩어진 밤>

문승아 배우의 차분한 연기가 돋보인다. 오디션에서는 뭘 보여달라고 했나.

이지형_ 상황극처럼 한 문장씩 대화를 주고받는 형식이었다. 

김솔_ 지금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아이가 개를 잃어버렸는데, 길을 걷다가 자기 개를 데려가는 사람을 발견한다. 승아가 처음에는 “저희 개예요”라며 실랑이하다가 나중에는 울음을 터뜨리더라. 몰입하는 모습이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오디션을 멈춰야 할지 고민하다가 조금 더 지켜보자 했는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연기를 해내더라. 그만큼 연기를 향한 욕심도 많고, 집중력도 탁월하다. 

 

대화 장면은 대부분 롱테이크로 찍었다. 대사 전달뿐만 아니라, 시선이나 표정 등 신경 쓸 부분이 많았는데, 대본 리딩 과정은 어땠나. 

이지형_ 리딩을 많이 하지는 못했다. 촬영 전에는 4-5번 정도 만났고, 현장에서도 일일이 지도하는 식은 아니었다. 문승아 배우는 본인 감정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의 감정도 잘 파악한다. 심지어 거기에 영향을 받고, 그런 내면의 변화를 잘 표현해낸다. 촉이 발달했다고 해야 할까.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느끼는 감정 자체가 되게 디테일하다. 시선 방향이나 동선처럼 큼지막한 약속은 설명했지만, 나머지는 배우가 스스로 채워냈다. 

 

수민은 늘 엄마와 아빠, 아빠와 오빠, 오빠와 엄마 사이에서 눈치를 살핀다. 사실상 아무런 결정권이 없는, 깍두기 같은 존재인데 갑자기 누구와 살지 선택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배우에게는 영화 속 상황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시켰나.

이지형_ 촬영 전에는 승아 배우에게 여러 번 되물었다. 수민이는 어떤 기분인 것 같아? 뭘 느끼는 것 같아? 그때마다 승아 배우는 ‘쿨’하게 대답하더라. 수민이가 너무 불쌍해요. 마음이 아플 거 같아요. 장황하게 늘어놓기보다는 짧고 단순하게 표현했다. 근데 현장에 들어가서 보니 감정의 결이 세세하게 살아 있었다. 나 역시 후반으로 갈수록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감을 잡았다. 이전 장면에서 도레미파’솔’ 정도의 감정이었다면, 여기서는 ‘미’ 정도였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식이었다.

이지형 ⓒ이영진 

수민이 인형에 화풀이를 한다든지 부모 사이로 드론을 날리는 등 불쑥 화를 내는 순간도 있다. 전반적으로 유지해온 분위기에서는 살짝 튀는 장면인데.

이지형_ 부모에게 화가 난 상황이라고 알려줬는데, 초반에는 통증을 가하는 행위 자체를 연기하기 어려워했다. 다만 승아 배우는 기다려주면 어떻게든 이유를 찾아낸다. 본인 스스로 그때 화가 난 이유, 인형을 때리는 이유를 찾아낸 다음부터는 알맞은 연기를 보여주더라.

 

수민과 아빠가 공원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현장감이 느껴진다. 아빠와 엄마 사이를 궁금해 하는 수민에게 아빠가 첫만남을 회상하면서 “그때 아빠가 좀 반해가지고”라고 말할 때, 오토바이 소리와 매미 울음이 갑자기 커지면서 감정이 고조된다. 따로 사운드 편집을 거친 장면인가.

이지형_ 현장 소리다. 그렇게 현장에서 운 좋게 얻은 것들이 있다. 가족들이 소풍을 가기 전에 차에 올라타는 장면에서도 사운드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아파트에서 들리는 바이올린 소리부터 여러 생활 소음이 끼어드는데, 마치 가족의 혼란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지더라.

 

진호를 연기한 최준우 배우도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 상대에 따라 조금씩 태도와 어조가 달라지는 걸 보면서 감탄했다. 특별한 설명 없이도 ‘아, 엄마한테 인정받고 싶어 하고, 아빠를 원망하고, 동생에게는 동병상련을 느끼는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

김솔_ 사실 당시 최준우 배우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은근히 사춘기 같은 느낌이 있었다.

이지형_ 사춘기에 진입하기 직전에 <흩어진 밤>을 찍은 것 같다. 약간 시크하기도 하고. (웃음) 소통하는 방식은 승아 배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리딩할 때는 상황과 심리를 설명했고, 현장에서는 배우가 편안하게 느끼는 순간을 찾아내려고 했다. 준우 배우는 어느 정도 인물을 연구하고 준비해오는 스타일이다. 그게 내가 생각했던 방향과 다를 때는 당황스럽기도 했는데, 몇 번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톤이 맞춰졌다. 

<흩어진 밤>
<흩어진 밤>

이들 남매 사이에는 가족간의 정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 일종의 연대랄까, 함께 고생하는 사이로서 마음이 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후반부에 ‘엄마와 아빠 중 누구랑 살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잠시 경합하는 구도처럼 비칠 때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이지형_ 현장에서도 둘이 진짜 금방 친해지더라. (웃음)

김솔_ 특히 승아 배우는 영화와는 달리, 엄청나게 활기찬 성격이다. 준우 배우도 에너지가 워낙 많고. 두 사람 덕분에 촬영장 분위기가 즐거웠다.

이지형_ 촬영이 총 13회차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 사이에 ‘케미’가 생겼다. 촬영 후반부에는 나도 편하게 지켜봤다. 정말 가족이 된 것처럼, 그들끼리 알아서 굴러가는 느낌이었다. 

 

부모의 경우, 직업을 통해 캐릭터 성격까지 설명한다. 유명 영어 강사인 엄마와 박물관에서 일하는 아빠는 각자 속한 직업 세계만큼이나 타고난 기질도, 삶의 지향도 다르다. 일자리 자체도 구체적으로 설정했고, 아이들이 부모의 직장에 찾아가기도 하는데.

이지형_ 실제로 우리 어머니가 강사였다. 내가 어릴 적에는 과외를 하셔서 집에 다른 아이들이 들락날락했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안 좋더라. 엄마를 빼앗기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수민 또한 비슷한 종류의 불안을 느낀다. 집이 팔리는 상황을 통해 오프닝에서부터 그런 정서를 드러냈고, 영화 전체적으로 ‘가족이란 뭐지? 미래의 가족은 어떤 모습이지?’라는 질문을 던지며 불안이라는 감정을 연결해 나가려고 했다. 그때 나한테는 ‘엄마가 선생님이고, 엄마가 나 외에 다른 아이를 가르친다’라는 상황이 중요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수민이가 엄마와 오빠가 함께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본다거나 엄마가 일하는 학원에 찾아가는 이유 역시 그런 불안에서 기인하는 행동이다. ‘엄마 옆자리에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닐 것 같아’라는 생각을 표현하려고 했던 장면이다.

김솔_ 아빠는 본래 일반 회사원으로 설정했는데, 피상적으로 느껴진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직업을 고민하다가 우리 아버지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실제로 박물관에 근무하시거든. (웃음) 박물관도 종류가 다양한데, 사람과 삶에 관한 영화이다 보니 민속 분야가 어울리겠다고 판단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서울역사박물관을 찾아갔지만, 섭외가 쉽지 않았다. 교수님께 말씀드렸더니 단국대 박물관을 추천해주셨다. 때마침 의복과 생활용품을 전시하는 중이었고, 가족 모형도 있었다. 정착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화 대사와 잘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김솔 ⓒ이영진 

그러고 보니 영화에 등장하는 집은 어떻게 구했나. 거실 한쪽 벽면이 책장이고, 전체적으로 집안 곳곳에 책이 많다.

김솔_ 내 본가에서 찍었다. (웃음)

이지형_ 집안 분위기가 지적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영화 속 부부가 그런 캐릭터이기도 하고, 이혼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차별을 두고 싶었다. 대개 이혼 가정은 가난하게 그려지지 않나. 이혼을 배우자의 부정행위 같은 일방적인 유책 사유로 인한 결과로 묘사하기도 하고. 그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교육 수준이 높고 지적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 또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어려움 때문에 헤어질 수 있으니까.

 

개봉을 오래 기다렸다. 다시 볼 때, 제작비와 촬영 일정 등 여건상 표현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나.

김솔_ 늘 아쉽고 부족한 것 같다. 물론 주어진 상황 안에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배우와 스태프 인건비를 충분히 챙기지 못한 점이 마음에 남는다. 후반 작업 비용이 넉넉하지 않다 보니 사운드에 신경을 많이 쓸 수 없었다. 운 좋게 현장에서 소리를 얻은 장면도 있지만, 현장을 통제할 수 없어서 아쉬운 장면도 있다. 지형 언니랑 둘이 폴리를 만들기도 했다. 언니가 저쪽에서 걸어오면, 나는 발소리를 녹음하는 식이었다. (웃음)

이지형_ 본래 에필로그처럼 덧붙인 이야기가 있었다. 한 계절이 지난 다음, 따로 떨어져 살던 남매가 재회하는 장면이다. 둘은 헤어짐으로 인한 무력감을 느끼지만, 새로운 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한 상태에서 대화를 나눈다. 제작비가 모자라서 찍지 못한 건 아니고, 당시에는 현재 엔딩으로 끝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근데 지금은 ‘에필로그가 있었다면, 엔딩에서 말하고자 한 바가 좀 더 분명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떤 의미에서?

이지형_ 절망적이라고 생각하면 한없이 절망스럽지만, 사실 영화에 담긴 통증은 일종의 ‘성장통’이라고 봤다. 사회는 점차 개인화되고,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구조 역시 언젠가는 허물어질 거라고 생각하거든. 결국에는 보호자와 자식이라는 관계만 남을 것 같다. 그런 거대한 변화를 염두에 두고 바라보면, 영화 속 인물들이 완전한 절망을 겪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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