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밍> 제작은 불확실함의 연속이었다. 경험을 바탕으로 써나간 이야기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걱정했고, 처음 도전하는 기술을 제대로 제어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해 초조했다. 그야말로 ‘가내수공업’처럼 방법을 하나씩 찾고 재료를 직접 만들어가면서, 작업 기간은 애초 예상했던 2년을 훌쩍 넘겼다. 첫 번째 ‘3D 장편 창작 애니메이션’을 마침내 완성한 김혜미 감독은 인터뷰에서 제작 과정에서의 불안을 거듭 고백했지만, 목소리와 눈빛은 고된 작업을 기어이 끝맺은 단단한 성실함으로 가득했다.
온갖 두려움과 무서움을 이겨내야 했다는 감독의 회고는 <클라이밍>의 주인공 세현의 상황과도 겹친다. 세계선수권대회 출전을 앞둔 클라이머 세현은 어느 날 갑자기 임신이라는 미지의 공포와 마주한다. 그런데 그 과정이 특이하다. 고장 난 핸드폰을 통해 두 명의 세현이 연결된 것이다. 이쪽 세계엔 선수 세현이, 저쪽 세계엔 산모 세현이 있다. 둘은 서로 감정과 신체의 영향을 주고받는다. “내 커리어를 위해 네가 양보해줘야겠어.”, “나는 아이를 낳고 싶어, 낳을 거야!” 결국 싸움이 될 수밖에 없는 이 관계를 개성적으로 표현해낸 김혜미 감독을 만나, 애니메이션을 시작한 순간부터 차근히 물었다.
오래 작업한 첫 장편으로 개봉을 경험하게 됐다.
기적 같은 일이다. 원작이 따로 있거나 유아 대상이 아닌 창작 오리지널 작품은 개봉까지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나. 기쁘고 신기하다. 극장에 포스터가 걸리고, 관객들에게 영화를 선보이는 게 오랜 꿈이었다. 소망을 이뤘다. (웃음)
최근에는 개봉에 맞춰 여러 일정을 소화 중이다. 해석의 폭이 열릴 여지가 있는 영화다 보니, 질문받고 답변하는 과정이 매번 새로울 수도 있겠다.
오랫동안 작업 자체만 생각해오다가 개봉하면서 피드백을 듣고 리뷰도 찾아보고 있는데, 솔직히 엄청 신기하다. 과연 이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질까? 그게 계속 궁금했다. 그런데 전달이 되는 것 같더라. 날카롭게 해석해주시고 섬세하게 알아봐 주시는 분들을 보며, 생각했던 것보다 관객들에게 전해지는 부분이 크다는 것에 놀라고 있다. 내가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서 그 안에 빠져있기만 했던 건 아니었구나 싶어서 안심이다.
미술학과에서 공예를 전공했다. 애니메이션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어릴 때부터 애니메이션을 마니아처럼 좋아했던 건 아니다. 대신 뮤직비디오 보는 게 재밌었다. 내가 뮤직비디오 부흥기의 MTV 세대다. (웃음) 그때 본 영상들에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한 재밌는 표현이 매우 많았다. 그런 것에 대한 관심이 있었는데, 대학교 졸업하고 나서 일반 회사에 다니다 문득 창작을 하고 싶어졌다. 회화를 전공한 건 아니지만 미술을 했으니까, 애니메이션을 통해 창의적인 작업을 할 수 있겠더라. 그래서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갔고, 결국 장편 시나리오까지 쓰게 됐다. 그렇게 관심 둔 것에 천천히 눈을 뜨고, 느리지만 순서대로 길을 찾아온 것 같다.
어떤 뮤직비디오에 마음을 뺏겼나.
주로 미셸 공드리의 작업. 라디오헤드나 케미컬 브라더스, 화이트 스트라입스의 뮤직비디오를 재밌게 봤다. 박자에 맞춰서 컷을 구성하고, 레고나 드럼 세트 같은 사물을 프레임별로 촬영하거나,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경계를 허무는 창의적인 표현이 너무 멋있었다. 그게 또 음악과 유니크하게 딱 맞아떨어지니까 신기하기도 했고.


2000년대 초반부터 <나쁜 꿈>(2003), <무쇠소년>(2004) 등 단편 애니메이션 작업을 했다. <클라이밍>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 과정을 통해 2017년에 제작을 시작했으니, 간극이 꽤 길다. 아카데미에는 언제 입학했나.
2002년에 들어가서 2004년에 졸업했다. <나쁜 꿈>과 <무쇠소년> 둘 다 아카데미에서 만든 작품이다. 스탠드 카메라로 한 프레임씩, 35mm 필름으로 찍었다. 셀에 직접 그리는 방식으로 <나쁜 꿈>을, 컷아웃 기법으로 <무쇠소년>을 만들었다. 졸업하고 나서는 교수님인 이성강 감독님의 <천년여우 여우비>(2006) 막내 스태프로 일했다. 실사 영화인 <살결>(2005)에서도 제작부 막내를 잠깐 했다. 계속 창작 일을 하고 싶고, 거기 끼어있고 싶었다. 연이 끊어지고 작업이 뜸해지면 자연히 창작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지 않나. 자꾸 시켜달라고 했지. (웃음) 그다음에 <사적인 바다>(2007)라는 단편을 만들었는데, 이후 결혼하고 육아를 하면서 쭉 쉬게 됐다. 그러다가 또 <배다리뎐>(2014)과 <찰칵찰칵>(2017)을 만들었고, 그 즈음에 장편을 할 수 있게 된 거다.
아카데미 장편 과정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
본과과정을 수료한 학생들에 한해서 장편 과정에 들어갈 기회가 마련됐다. 그전에는 나이 제한 같은 게 있었는데, 나중에 그게 없어졌다. 운이 좋았다. 아주 옛날의 졸업생이 다시 들어간 거라, 교수님들도 어색해하시더라. (웃음)
<클라이밍>이 세상에 나오는 데 3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가장 넘기 어려웠던 산은 뭐였나.
장편 과정은 계속 2D 드로잉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아카데미로서는 3D 작업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초반에는 반대가 있었다. 나도 3D를 해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도전해보고 싶었다. 못하니까 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보다는, 배우면서 해보고 싶었다. 소재가 클라이밍이기 때문에 앵글도 다양하게 써보고 싶었고, 3D 스태프로 참여해주신 정지신 팀장님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반대가 있으니 PT 발표를 여러 번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갔다가, 처음부터 그냥 되는 건 없다는 걸 깨닫게 됐다. 하나씩 설득하고 만들어가야 하는 거였다. 본 작업을 하면서는 경험의 한계를 많이 느꼈고,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많이 불안했다. PD가 없어서 일정, 예산, 스태프 관리도 직접 다 했다. 편집하면서는 이게 제대로 된 이야기인가, 연출 의도를 잘 전달하고 있는가를 계속 고민했다.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가는 게 제일 어려웠던 것 같다. 밤새 들여다봤는데도 다시 보면 아무것도 안 보이고, 길을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 때면 무척 괴로웠다. 그래도 결국 이 이야기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해답을 알고 있으니까, 잘 찾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많이 다졌다.
정지신 팀장을 비롯해 스태프 구성은 어떻게 했나.
팀장님은 원래 알았고, 그분이 목원대학교에서 수업을 하셔서 학생들과 졸업 작품처럼 10개월 정도 애니메이션 액팅 작업을 했다. 학생들이 졸업한 이후에는 다른 외주업체를 알아보고, 렌더링 작업 때는 또 다른 스튜디오를 알아보는 식으로 흘러갔다. 계획대로 안 되는 순간이 많아서 체계적으로 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러다 보니 중간에 쉬는 타이밍이 많았다. 그 기간에는 계속 편집에 대해 고민했다. 그건 정말 다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거니까.
본인의 임신과 출산 경험에서 영화가 시작됐다고 했다. 사회적인 측면에 집중하기보다는 내밀한 심리로 쑥 들어간다는 점이 독특하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임신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긍정적인 이미지만 떠올렸고, 산모라면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고 미리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 임신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뀌는 게 아니다. 그냥 나로서 계속 존재하는데, 어떤 변화가 생긴 거고, 거기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막연한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생명체가 내 몸 안에 들어있다는 게 낯설었고,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기존에 알고 있던 임신의 익숙한 부분 말고, 그 이면에 있는 다양한 느낌을 작품으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임신하기 전의 나와 임신한 나의 충돌 같은 걸 생각했다. 꿈에서 술을 마시다가 놀라서 깬 적도 있거든. (웃음)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주인공과 산모인 주인공을 평행세계에 배치하고, 임신을 매개로 영향을 주고받는 걸 극적으로 구성하면 재밌겠더라. 거기 클라이머라는 직업적 설정이 들어갔고.
클라이밍을 떠올린 계기가 따로 있는지.
그냥 맨 처음부터 그렇게 설정했다. 강한 여성의 이미지 중 클라이밍 선수를 떠올렸고, 운동의 특징을 이야기에 반영했다. 육체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임신했을 때 오히려 제약이 많을 수 있고, 체중 변화 같은 부분에도 예민하다는 직접적 요인이 맘에 들었다. 클라이밍은 일반 스포츠와 달리 자기와의 싸움이 주가 되는 종목이다. 상대와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완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묵묵히 본인과 겨룬다는 점에서 멋진 스포츠다. 그게 삶과 닮아있다고 느꼈다. 선수들이 자일이라고 부르는 로프를 생명줄이라고 볼 수 있는데, 거기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는 모습이 주제를 잘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로프는 동시에 아이의 탯줄을 상징하기도 한다. 자아실현을 위해 자일을 놓지 못하는 클라이머 세현과 태어나기 위해 탯줄을 놓을 수 없는 아이가 서로 줄다리기하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게 엄청 팽팽한,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 될 것 같더라. 임신에 대한 불안과 클라이밍의 특징을 유기적으로 고민하면서 시나리오를 써나갔다.
직접 등반도 했나.
스태프들과 같이 레슨을 받았다. 3D 팀장님은 원래 클라이밍을 하셔서 이해도가 높았다.
임신하고 꿈에서 술 마셨다는 얘기는 다른 사람들한테도 몇 번 들어봤다.
그런 제약이 생기는 순간 공포와 부담을 느끼게 되더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거라면 그렇지 않을 텐데, 절대 안 된다고 하니까 크게 억압받았던 것 같다.

세현을 둘로 나눈 구성에 대해 좀 더 들어보고 싶다. 선수 세현과 산모 세현의 관계를 표현하면서 중점을 두고자 했던 부분이 있다면.
둘은 임신에 대한 반응이 다르다. 남자친구인 우인에 대해서도 임신한 쪽은 그가 내 임신 사실을 좋아하는지 궁금해하고, 다른 쪽은 그가 임신을 곧 결혼이라고 생각하는 걸 부담스러워한다. 그러니 청혼 반지에 대한 반응도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상황이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생각했다. 이런 구조를 통해 자기 자신과 싸움 끝에 아이가 태어나고, 자아실현이 좌절되는 과정을 표현하려고 했다. 아무리 고민과 번뇌가 있어도, 임신한 아이는 태어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산모에게 임신과 출산은 평면적인 행복이 아니라, 여러 가지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엄마로서 거듭나는 발판이 되는 것 같다. 꼭 필요한 고민의 시간을 거쳤기 때문에 엄마로서 단단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세현의 감정과 환상에 집중하면서 주인공을 둘러싼 객관적인 현실은 점차 모호해진다. 그러면서 후배 아인과 예비 시어머니에 대해 느끼는 적대가 증폭되기도 하고.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가는 영화기 때문에 주관적으로 느끼는 감정을 극대화해서 표현하려고 했다. 세현은 남들이 본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짐작하면서 불안의 이유를 찾고 감정을 점점 키우기도 하고, 나름의 편견을 갖고 주변 인물을 보기도 한다. 예비 시어머니 같은 경우에도, 그냥 몸에 좋은 것들을 권하는 건데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부담스럽게 해석하게 된다. 그런 점을 표현하려고 주인공의 시점숏을 많이 사용했다.
<클라이밍>은 공포, 스릴러 장르로 구분된다. 단편 작업만 봤을 때는 예상하기 어려운 선택이기도 한데.
주인공의 불안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공포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작정하고 놀라게 하거나 잔인한 공포물을 만들려고 했던 건 아니다. 좋아하는 작품은 대개 현실적인데 발을 딛고 있으면서 기묘한 느낌이 드는 현실 공포물. 최근에는 <유전>(아리 에스터, 2017)과 <겟아웃>(조던 필, 2017)을 재밌게 봤고, 예전에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1997)나 이와이 슌지의 <언두>(1994)를 좋아했다. 무서운 장면이 도드라지는 건 아닌데, 그 서늘한 공포가 계속 생각난다. <렛미인>(토마스 알프레드슨, 2008)도 그렇고. 결국 이야기가 울림이 있어야 오래 남더라. 곱씹을 수 있는 주제가 있고, 그걸 장르로 표현해낸 작품은 다시 봐도 감동이 있다.
이번 작품을 준비하며 참고한 영화도 있나.
<블랙 스완>(대런 아로노프스키, 2010), <바바둑>(제니퍼 켄트, 2014), <케빈에 대하여>(린 램지, 2011)처럼 인물의 심리를 파고드는 영화를 많이 봤다. 긴 서사를 풀어가는 게 아니라 내면으로 좁고 깊게 들어가고, 그걸 영상으로 표현해내는 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특히 새로웠던 건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언더 더 스킨>(2013)이다. 감독의 전작과도 확연히 다르고 음악도 충격적이었다. 음악감독님께 <클라이밍>에도 그런 실험적인 스타일의 음악을 넣고 싶다고 얘기했다. 이 작품들처럼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같은 연출 의도를 표현한다고 할 때도 좀 더 낯설고 독특한 컷들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전반적으로 그런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날카롭고 어두운 톤에 조명도 창백한 느낌이고.
3D 애니메이션 하면 보통 픽사나 디즈니처럼 귀엽고 익숙한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나. 그런 걸 따르기보다 이야기의 주제에 맞게 개성 있고 독창적인 느낌을 내고 싶었다. 조명도 여건이 되는 한에서 강렬하고 명확하게 쓰려고 했다. 후반부에 가면 색도 왜곡되고, 전반부와 다른 기묘한 분위기가 난다. 자아분열처럼 보일 수도 있는 강렬한 장면들이라 색 보정을 과하게 하면서 차이를 만들려고 했다.
주인공이 스포츠 선수이기 때문에 작화에 관해서도 고려할 점이 많았을 것 같다. 마른 체형에 근육이 도드라진다는 신체적인 특징도 있고, 클라이밍 장면에서 동작의 가짓수도 많다.
일단 제목이 클라이밍인데, 클라이밍 장면의 디테일이 떨어지면 안 된다고 판단해서 고증을 많이 하려고 노력했다. 액팅 자체가 다들 처음 해보는 동작인 데다 중력도 거스르는 자세라 어려움이 있었는데, 다들 잘해주셔서 밀도 있게 잘 나온 것 같다. 클로즈업도 많이 신경 썼다. 애니메이터분들한테 감정선을 디테일하게 써서 드리고, 눈동자의 떨림 같은 부분에 특히 공을 들였다.
클라이밍 동작을 구현한 과정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면.
손을 쓰는 부분이 디테일하게 제어돼야 했기 때문에 손가락을 하나하나 움직일 수 있도록 모델링했다. 다리 가용범위도 일반 동작보다 더 벌어지도록 하면서 유연하게 몸을 쓸 수 있게 했다. 팔을 위로 펴서 역삼각형 모양으로 벌어질 때 다리는 붙인다거나, 반대로 무게중심이 다리에 있을 때는 다리를 삼각형 모양으로 구현하는 등 역학적인 부분을 염두에 뒀다. 홀드를 어떻게 밟는지, 시선과 손이 어떤 순서로 움직이는지, 등반하기 전에 초크가루를 어떻게 턴다든지 하는 디테일에도 신경 썼고.
암장이 주로 등장하지만 자연 바위에서 등반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게 좀 막막했다. 자연 바위에 주인공을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가 어려웠다. 인물이 어디에 있어야 하고, 로프는 어떻게 두어야 하는지, 떨어질 때는 어떤 순서와 모양인지 표현하는 게 쉽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떻게 했나 모르겠네. (웃음)
2D와 비교해보면 3D의 이점은 무엇인가.
2D는 설정을 변경하면 전체 컷을 아예 바꿔야 하거나 못쓰게 되는 경우가 있다. 3D의 경우엔 꽤 복잡하긴 하지만, 그래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마지막까지 카메라 배치를 바꾸면서 여러 앵글을 시도해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처음에는 인물을 어떻게 배치해야 하고, 카메라를 어디에 둬야 하는지도 몰랐다. 계속 확인하고, 옮기고, 카메라 렌즈도 바꿔보면서 자연스럽게 정리가 됐던 것 같다. 경험치가 쌓였다고 할까. (웃음) 컷이 1,000개 가까이 되는데, 렌더링하기 직전까지 엄청나게 많이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하나씩 다 만져봤다. 해볼 만큼 다 해봤기 때문에 후회 없다.
애니메이션 작업의 매력을 짚어본다면.
아무래도 감독이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 연출의 폭이 넓다. 완성된 컷을 가지고도 또다시 조합하고 새롭게 만들어갈 여지도 있고. 그런데 화려하고 독특한 표현방식만 생각하다 보면 한계가 있고, 결국엔 이야기 구조가 중요하다. 기법은 거기 맞춰서 찾아가는 거다. 감정을 쥐락펴락 할 수 있도록 이야기가 잘 설계되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창작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사운드 등 여러 요소가 종합적으로 섞이면서 독특한 감흥을 끌어내는 게 영화의 힘인 것 같다. 나도 나만의 개성이 묻어있는 그런 멋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게 시작이었다.
<클라이밍>은 지난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경쟁 부문에도 올랐다.
글로벌한 정서를 생각해서 만든 게 아니고, 내 개인적인 경험을 극대화하고 특정한 시기를 밀도 있게 조명한 영화라서 그런지, 외국 영화제에 초청됐다는 게 신기했다. 국내에서도 공감을 많이 얻을 수 있을지 고민했으니까. 입체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이야기인 것 같다는 평이 있어서 다행스럽더라.
내밀한 감정에서 시작해 고군분투하며 영화를 완성했다. 돌이켜보면 어떤가.
이 작업을 치유나 힐링의 과정으로 생각했던 건 아니다. 내가 느낀 강렬한 감정을 이야기로 만들면 독특한 작품이 나올 것 같아서 시작했고, 그걸 꿋꿋하게 잘 해냈다는 게 다행이고 대견스러운 마음이다. 무섭고 못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정말 컸다. 개미지옥에 빠진 것처럼 모래밭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래도 매일 조금씩 작업을 해내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잘 해냈다. (웃음)
3D 장편 과정에 뛰어든 것처럼,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는.
다 해보고 싶다. (웃음) 뮤직비디오도, 실사도 좋다.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매체라면 무엇이든 열심히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