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야구선수 신광호(정재광)를 요약하는 키워드는 청춘, 도전, 성장이지만, 정작 <낫아웃>이 걸어가는 길은 그리 활기차지 않다. 광호는 우울한 청춘을 통과하는 중이고, 무언가에 도전할 때마다 상황은 꼬여만 간다. 곁에는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근사한 조력자도, 한 단계 발전하도록 돕는 매력적인 라이벌도 없다. 고립된 상태에서 광호는 두 주먹을 쥔 채 앞만 보고 달린다. 스포츠 선수를 내세운 기존 성장영화 속 주인공은 부단한 노력 끝에 난관을 물리치고, 엔딩에 다다를수록 상승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반면, 광호의 그래프는 정반대다. 광호가 맞이하는 영광의 순간은 오프닝에서 지극히 짧게 재현되며, 이후 광호는 모든 면에서 하락을 거듭한다.
오랜 시간 품어온 영화를 세상에 내놓은 이정곤 감독도 광호와 비슷하다. 그는 영화 근처를 맴도는 지난 10년 동안, 기쁜 일보다는 힘든 일이 훨씬 많았다고 회고한다. ‘내가 할 수 있나?’라는 괴로운 자문자답을 반복했고, 뾰족한 방도 없이 그 시간을 버텼다. 조바심과 불안을 떨쳐내기 어려웠지만, 이제 이정곤은 버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불투명한 앞날을 근심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는 마음이 곧 청춘이고, 광호가 그랬듯 누구나 옳고 그른 선택을 모두 거치며 조금씩 나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아서다. 이정곤에게 ‘버티다’는 ‘꿈꾸다’를 의미한다. 새로운 경기를 앞둔 감독을 만나서, 꿈처럼 흘러가지 않는 삶을 어떻게든 책임지고자 애쓰던 지난 시간에 관해 물었다.
전주국제영화제 상영 당시, 정재광 배우를 먼저 만났다. 감독과 만나면 오래 걷는다고 하던데.
집도 가까워서 자주 본다. 나도 걷기로는 어디서 아쉬운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재광 배우는 진짜 잘 걷는다. 그래서 살이 안 찌나 보다.
실제 모습은 영화와 전혀 다르더라. 감독은 광호와 좀 닮았을까 했는데, 그것도 아니다.
외적으로는 둘 다 거리가 멀다. (웃음) 광호는 나의 고집스러운 면을 총망라한 캐릭터다. 누구나 남들 앞에서는 못 보여주는 모습이 있지 않나. 입 밖에 내지 않고 속으로만 생각하는 것들, 마음 한구석에 쌓인 열등감과 패배감 같은 모난 감정 말이다. ‘다들 감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 오히려 닥치는 대로 드러내면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탄생한 캐릭터다.
그래서 배우 말로는 광호가 악인처럼 보일까 봐 걱정했다고.
맞다, 관객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쩌나 싶었다. 재광 배우가 촬영하면서 “형, 괜찮아요? 저 지금 너무 나빠 보이지 않아요?”라고 계속 묻더라. 그럼 나는 스크립터 친구한테 다시 물어봤다. 나보다는 훨씬 객관적인 입장에서 봐줄 것 같아서. (웃음) 근데 나중에는 스태프들이 나보다 더 몰입하더라. 촬영 중에 다들 많이 울었다.
정재광 배우는 연극영화과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이 떠올랐다고 하던데. 감독과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였나.
사실 다들 대단한 걸 해내고 싶고, 길게 보면 어딘가로 가는 중이겠지만… 당장은 그냥 버티는 수밖에 없지 않나. 꼭 입시를 치르는 학생만이 아니라, 꿈꾸며 살아가는 보통 청춘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여지가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버티고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지금을 지속하기만 하면, 앞으로 더 나아질 거라고.
“계약금 받고 당당하게 프로 가고 싶어요”라는 광호의 말은 비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젊은 세대의 입장에서도 곱씹어볼 만하다.
영화에서 광호가 신고선수 영입을 제안받는데, 사실 시나리오에 “신고선수(비정규직)”라고 써놓았다. 신고선수라는 제도를 모르는 분들도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직관적으로 이해하더라.


스포츠를 결합한 성장영화인데 청춘의 낭만이라든지 생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어떻게 구상한 이야기인가.
본래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스물넷에 영화를 만들겠다고 마음먹고 자퇴했다. 올해로 딱 10년이 지났다. 그동안 영화를 하면서 행복한 순간도 많았지만, 고통스럽고 힘든 순간이 두 세배쯤 많았다. (웃음) 어릴 때는 막연히 ‘하면 할수록 나아지겠지’ 했는데, 막상 해보니 하면 할수록 어려워지더라. 점점 문이 좁아지는 게 느껴졌다. 그런 고민과 불안이 영화에 자연스레 들어갔던 것 같다. 근데 신기하게도 남들이 본 나는 ‘조금씩 성장하는 사람’이더라.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상태는 아닌 거다.
감독이 생각하는 ‘성장’이란 무엇인가.
반성 아닐까.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려면 반성하는 수밖에 없다.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지 않나. 옳은 걸 택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릇된 선택도 한다. 잘못을 줄이려면 스스로 돌아보아야 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더디게 성장하는 것 같다. 광호도 마찬가지다.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인물인데, 후반부에 다다랐을 때는 결국 잘못했다고 말한다. 영화의 시작점과 비교해보면, 광호는 제 잘못을 고백한다는 점에서 일면 성장한 인물이다. 나 역시 미안하다는 말을 못하는 편인데, <낫아웃>을 찍고 나서는 이전보다 편하게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반성이라고 하니 주변 사람들의 의견이 궁금해진다. (웃음) 안주영 감독과 부부이고, <보희와 녹양>(2018)에서 조감독을 맡기도 했다. <낫아웃>을 보여줬을 때, 어떤 이야기를 들었나.
<보희와 녹양>에서 보희가 한강에 들어갈 때, 나도 안지호 배우랑 같이 들어갔다. 샌들 신은 채로. (웃음) 안 감독을 포함해서 오랜 시간 나를 지켜본 동료들은 대체로 좋은 이야기를 해준다. 기존에 만든 영화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결이라고 하더라. 전반적인 톤 앤 매너는 어둡고 무거운 편이지만, 그 안에서 광호를 위로해주려고 하는 따뜻한 태도가 엿보인다고 했다. 광호라는 인물을 놓고 “여기에 이런 애가 있어요” 정도에서 끝나면, 영화가 힘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광호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길 바랐는데, 지인들이 그런 부분을 짚어줘서 다행스러웠다.
정재광 배우에게 일찌감치 러브콜을 보냈다. 4년 전에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수난이대>(김한라, 2016)를 보고 나서 연락했다고.
처음 봤을 때, 엄청난 에너지에 놀랐다. <수난이대>에서는 소위 ‘일베’라고 하는, 훨씬 센 캐릭터를 맡았는데, 그런 연기를 하면서도 관객을 끌어당기더라. 재광 배우 특유의 눈빛이 있다.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데,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진다. 저런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광호를 온전히 소화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낫아웃> 구상 초기였다. 정해진 이야기는 없었고, 단지 ‘야구를 하는 19세 아이’라는 캐릭터 단상만 존재했을 때였다.
각본 작업에 오래 걸렸나.
집필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다. 2016년에 재광 배우에게 운을 뗀 다음, 실제 집필은 2018년부터 시작했다. 초고 작성에 4개월 정도 걸렸고, 이후 예산을 마련하는 9개월 동안 틈틈이 수정했다.
배우의 실제 나이와 극 중 나이에는 차이가 있다. 영화 제작이 결정되기까지 시간은 더 흘렀는데, 그런 면에서 부담스럽지는 않았나.
물론 걱정했다. 시나리오 들고 재광 배우를 찾아갈 때도 ‘그새 나이 들었으면 어떡하지?’ 싶었다. (웃음) 나이는 당연히 들었는데, 내가 봤던 강렬한 눈은 그대로여서 확신을 얻었다. 스크린에 나오는 배우들은 확실히 눈이 특별한 것 같다. 지켜보는 이의 마음을 뺏는다고 해야 할까. 단편 <윤리거리규칙>(2016)을 함께했던 이수경 배우도 눈빛이 너무 좋아서 캐스팅했다.
민철 역의 이규성 배우와 성태 역의 김우겸 배우도 눈에 띈다. 두 배우 역시 미리 점찍었던 배우였나.
두 배우는 프리 프로덕션을 시작하면서 만났다. 민철 역은 캐스팅에 신경을 많이 썼다. 광호와 어울리면서도 다른 느낌을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 연기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감독과 한참 고민하다가 <스윙키즈>(강형철, 2018)의 만철이라는 인물이 떠올랐다. 이규성 배우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하필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KBS2, 2019)이 막 종영했을 때였다. 워낙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여서 ‘과연 할까?’ 싶더라. 걱정하며 시나리오를 보냈는데, 굉장히 빠르게 회신이 왔다. 사흘쯤 걸렸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화가 잘 통했다. 작품 얘기는 하지도 않고, 한 시간 반 동안 수다만 떨었다.
감독이 수다스러운 거 아닌가? (웃음)
이규성 배우도 말이 적진 않다. (웃음) 그날 규성 배우는 일종의 오디션처럼 러프 리딩을 하러 온 줄 알았다고 하더라. 근데 나는 ‘대사는 안 들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눈앞에 그냥 민철이가 앉아 있는 느낌이었거든. 그날 기분이 되게 좋았다. 첫 만남에서 곧장 의기투합했고, 게다가 규성 배우가 다음날 <라디오스타>(MBC) 녹화를 간다고 하니… (웃음) 김우겸 배우는 오디션으로 만났다. 성태가 지망하는 대학에 광호가 지원하겠다고 나선 상황에서 둘이 대화하는 장면을 지정 대본으로 줬다. 그날 우겸 배우를 보고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성태가 광호에게 “너 거기 안 가면 안 돼?”라고 묻는데, 우겸 배우가 그 대사를 웃으면서 치더라.
영화에서도 인상적인 장면이다. 농담인 척하는 애매한 미소가 둘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는 동시에, 성태라는 인물의 성격도 드러낸다.
시나리오 쓸 때는 당연히 진지하게 해야 할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우겸 배우의 싱그러운 미소를 보는 순간, 내가 완전히 잘못 판단했구나 싶었다. 그 나이 애들에게는 그런 톤이 훨씬 자연스럽겠더라. 특별한 경험이었고, 나 역시 무척 좋아하는 장면이다. 영화에는 톤을 좀 더 정리해서 들어갔다. 오디션 때도 우겸 배우가 전체 대본을 읽은 상태였다면, 그렇게 싱그럽게 웃지는 못했을 텐데. (웃음)
민철과 성태는 어떤 면에서 광호보다 성숙한 인물이기도 하다. 재능의 한계를 일찍이 알아채고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대비를 의도했던 이유는 뭐였나.
지난 10년 동안 수많은 동료를 지켜봤다. 그중에는 민철이처럼 이쪽 업계를 아예 떠나버린 사람도 있고, 성태처럼 영화 일을 지속하되 다른 방향으로 간 사람도 있다.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더라. 어쩜 저토록 성숙할까? 어떻게 하면 스스로 길을 찾고, 또 고집을 안 부릴 수가 있지? 그들이 대단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이 모든 게 ‘웃프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를 포함해서 영화 하는 동료들, 넓게 보면 무언가를 꿈꾸는 동년배들 모두 앞뒤로 꽉 막힌 ‘웃픈’ 상황에 놓인 것 같더라. 영화에서 광호뿐만 아니라, 다른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민철과 성태 또한 광호 못지 않게 ‘웃픈’ 시기를 겪는 중이니까.


송이재 배우가 연기한 수현은 본래 그 정도의 역할이었나. 편집 과정에서 분량을 축소한 것인지, 광호와의 로맨스에는 욕심이 없었는지 궁금하다.
실은 시나리오에서 가장 마지막에 추가한 인물이다. 직진밖에 모르는 광호에게 브레이크를 걸어서 다잡아주는 인물이 한 명쯤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민철이나 승길 등 다른 인물도 있지만, 사실 그들이 하는 말은 광호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니까. 로맨스를 만들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여성 캐릭터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남성이어도 상관없는 인물이기를 바랐다. 다만 광호가 수연을 마주쳤을 때 낯설고 당혹스러워 하는 모습은 표현하려고 했다. 광호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야구부에서 활동했기에, 또래 여성과 생활해본 적이 거의 없는 애라고 설정했다. 야구부에서 줄곧 ‘에이스’였기에 또래에게 무언가를 배울 일도 없고, 그들의 말을 신중히 듣지도 않는다. 수현은 그런 광호에게 새로운 변화를 의미한다.
정재광 배우는 <낫아웃>을 찍기 전까지 야구의 ‘야’도 몰랐다고 고백했다. 감독은?
나는 ‘광팬’이다. 야구 심판 교육을 받기도 했다.
어느 팀 응원하나.
한화이글스.
성격 좋구나. (웃음)
수렁에 빠져버렸지. (웃음)
야구광인 감독과 야구맹인 배우 사이의 거리는 어떻게 좁혀 나갔나.
정재광 배우가 야구는 몰라도, 야구 선수에게는 관심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뭔가에 치열하게 매진하는 사람에 호기심을 느끼는 배우이고, 내 눈에는 재광 배우 역시 그런 사람이다. 연기와 삶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하는 친구.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재광 배우가 야구를 몰라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운동하는 사람들, 꿈을 지속하며 달려 나가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이입할 수 있으리라 봤다.
둘이 사전 답사를 여러 번 다녀왔더라.
맞다, 고교 야구부를 찾아서 청주까지 내려갔다. 조감독, 촬영감독, 피디까지 다 같이. 프리 기간도 아니었다. 프리 들어가기 4-5개월 전부터 우리끼리 카니발 타고 돌아다녔다. (웃음) 정재광 배우도 실제 선수를 만나고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영감을 얻은 것 같더라.


고교 야구부를 견학하는 과정에서 이미지에 딱 맞는 선수를 찾아냈다고.
신비한 경험이었다. 부지런히 움직이면 인연을 만나는구나 싶었다. 실제 고등학교 야구부 4번 타자인 친구였다. 시나리오를 쓰긴 했지만, 나 역시 광호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긴 어려웠다. 어떻게 생겼을지, 어떤 아이일지 늘 조금은 불투명한 상태였는데, 그 친구를 보니 장막이 걷히는 듯했다.
모델로 삼은 이가 전혀 없나.
모티브를 가져온 인물은 있다. 현재 서울대 야구부에 재학 중인 홍승우 선수. 고등학생 때 체육계 입시 비리를 겪고, 내부고발자가 되면서 프로구단 진출에 실패한 선수다. 상황이나 캐릭터가 광호와 일치하지는 않는데, 홍승우 선수 관련 기사를 읽으면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코로나19로 인해 현장 운영에 어려움이 컸다고 들었다.
대구에 딱 내가 원하던 구조를 갖춘 카센터가 있었는데, 결국 그곳에서 촬영을 못 했다. 그때는 꿈에서도 영화를 찍을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로케이션이 어긋나면서 촬영이 계속 밀리는 상황이었다. 겨울 촬영이다 보니 추위도 한 몫 했다. 배우들이 오토바이 타는 장면에서 엄청나게 고생했지. 영화에 들어간 장면을 제외한 나머지 분량에서는 모두 울고 있다. 찬바람이 들이치니까 계속 눈물이 나온다고 하더라.
야구팀을 보여줘야 해서 보조 출연도 많았는데.
맞다, 제일 큰 문제는 그거였다. 본래 시합 장면에 다양한 야구팀을 섭외했는데, 촬영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모조리 취소 통보를 받았다. 팀에서 훈련을 금지하는 상황이다 보니, 그분들이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촬영은 당장 내일인데, 배우는 없고. 신명고 야구부로 출연하는 고정 단역 배우들 덕분에 살았다. 그분들이 알음알음으로 수소문해서 배우를 모아줬다. 지금 생각해도 가장 감사한 분들이다. 사실 단역 배우들은 상대적으로 주목받기 어려운 위치이지 않나. 안 보이는 곳에서도 <낫아웃>을 위해 여러모로 애써줬고, 촬영하면서도 애정이 느껴졌다. 이 작품을 정말 사랑해주는구나 싶었다.
제작사 이름도 ‘키즈리턴’인 데다 동명 작품에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엿보여서 당연히 레퍼런스 작품으로 삼았을 거라 예상했는데, 배우는 들은 바가 전혀 없다고 하더라.
기타노 다케시 영화를 좋아하지만, <키즈리턴>(1996)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키즈리턴>보다는 치열하고 뜨겁다고 생각했다. 영화 자체의 목적성도 분명하고. 많이 이야기했던 작품은 <예언자>(자크 오디아르, 2009)와 <폭스캐쳐>(베넷 밀러, 2014)다. 특히 <예언자>는 주인공이 살아남는 과정 자체를 파고들지 않나. 광호 역시 추상적인 꿈을 쫓기보다는 현실을 살아내는 일에 집중한다. 주인공의 연령도 비슷하다. <예언자>가 소년에서 청년으로 변화하는 시점에 주목하는 것처럼 <낫아웃>의 광호 또한 미성년과 성년의 경계선을 돌파하는 지점에 선 인물이다.
왜 하필 19세인가. 그 나이에 얽힌 개인적 추억이라도 있나.
그때는 그냥 평범한 애였는데,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광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어릴 적에는 실패해도 괜찮았다. 속이야 좀 상했을 테지만, 삶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근데 살면 살수록 실패에 집착하게 된다. 자꾸 욕심을 내서 그런가? 욕심이 커지니까 작은 어려움도 크게 다가오고, 스트레스를 받고, 몸에 힘이 들어간다. 광호는 그런 시기를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겪는 인물이다. 광호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체육인에게 찾아오는 숙명 같은 것이기도 하다. 지금 인정받지 못하면 그만둬야 하는, ‘모 아니면 도’의 갈림길에 서 있으니까.
대부분의 스포츠 영화와 달리, 주인공이 싸우는 대상을 특정하기 어렵다. 굳이 따지자면 광호는 세상과 대적하는 인물이다.
19세 소년의 입장에서 모든 상황을 파악하기엔 한계가 있다고 봤다. 뭔가 잘못됐음은 알지만, 거기까지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잘못하는지, 실체를 정확히 알기엔 어렵다. 광호와 야구부 감독의 갈등이 계속 그려지는데, 감독을 연기한 김희창 선배님께 톤을 조율해달라고 부탁드렸다. 해석할 여지 없이 완전히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기를 바랐다. 사실 감독도 자기가 뭘 잘못하는지 명확하게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늘 하던 대로 할 뿐이고, 그게 당연한 것처럼 굳어지면서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는 상태인 거다.
불법 휘발유를 판매하는 사장이 떠오른다. 허정도 배우가 악인도 선인도 아닌, 묘한 인물을 보여준다.
시나리오에서 가장 달라진 인물이다. 허정도 선배님 연기를 보면서 ‘이게 배우의 마법이구나’ 싶었다. 광호가 사장에게 시너 통을 받아 나르는 장면의 경우, 시나리오에는 “사장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라고 짤막한 지문만 적어두었다. 그때 광호한테 이름을 묻는다든지 “민철이 화이팅! 광호도 화이팅!” 이런 대사는 전부 허정도 선배님의 애드리브다. 배우가 캐릭터를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모습을 보면서 짜릿하고 존경스러웠다.
광호는 등장할 때부터 불안하고 화가 난 상태다. 극 전체를 끌어가기 위해서는 정재광 배우의 감정 컨트롤이 관건이었다.
재광 배우와 치열하게 대화를 나눴다.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광호가 어떤 선을 넘지 않길 바랐다. 어느 시점에서는 감정을 내지르는 것보다 안으로 삼킬 때 훨씬 강렬하다고 생각했고, 그게 더 광호다워 보였다. 몸을 쓰는 건 너무 쉽지만, 감정을 표현하는 일은 어려워하는 친구이니까.
광호가 라커룸에서 드래프트 방송을 지켜보는 장면이라든지 대학 실기시험 장면처럼 배우 한 사람에게 온전히 맡겨야만 하는 장면도 몇 차례 등장한다. 배우로서는 정신과 육체 양쪽으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장면인데, 당시 현장 상황은 어땠나.
드래프트 장면을 찍을 때, 현장 공기가 남달랐다. 결과를 기다리는 압박감을 함께 느꼈던 것 같다. 3회차에 찍었으니, 촬영을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스태프 모두 숨죽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나 역시 배우에게 많이 기댔다. 재광 배우가 울분을 토하는 장면의 경우, 사전에 배우와 촬영감독에게 “한 번만 갈 거야. 첫 테이크가 마지막 테이크야.”라고 알렸다.


이유는?
차근차근 쌓아나갈 감정이 아니라고 봤다. 아주 순간적이고 폭발적인 감정이기에 첫 테이크에 나온 것이 가장 완벽하지 않을까 싶었다. 배우를 정서적으로 학대하는 것도 경계했다. 앞서 드래프트를 기다리는 장면을 찍었는데, 화면에서 광호가 계속 괴롭힘을 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명 탈락의 연속이니까. 반면, 실기시험은 ‘테이크 파티’였다. 오래 찍었고, 영화에서도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는 장면이다. 촬영감독과 내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한 신 중 하나였다. 대사 한 마디 없이 중요한 맥락을 짚어야 하는 터라 사전에 콘티도 치열하게 짰다. 근데 막상 현장에서는 즉흥적으로 움직였다. 굳이 콘티에 맞출 필요가 없겠다, 인물에게 집중하면 우리가 원하는 느낌이 나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국 촬영감독과는 여러 차례 호흡을 맞췄다.
오래된 사이다. 단편 <조문>(2014)도 함께 찍었다. <악당출현>(2017)을 연출한 유수민 감독까지 셋이서 단편영화를 대여섯 편 정도 만들었다. 예를 들어 <악당출현>은 유수민이 연출, 김영국이 촬영, 내가 조감독을 맡은 작품이다. 그때 정재광 배우에게 우정 출연을 부탁했다. 내가 사랑하는 동료들을 소개해주고 싶었다. ‘우리는 이렇게 영화를 하고 있어’라고 보여주고 싶었고, 그걸 기회 삼아 재광 배우와도 친하게 지낼 마음이었다. (웃음)
가짜 휘발유를 팔아서 불법적으로 돈을 번다는 설정은 실제로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군대에서 선임에게 들었다. 불법 휘발유를 판매했을 당시 선임의 나이에 비해, 그가 저지른 행위가 너무 크고 무거워 보였다. 슈퍼에서 과자 몇 봉지 서리하는 개념이 아니잖아. 내가 살면서 들어본 범죄 중에 가장 어린 사람이 저지른 일이구나 싶더라. 나이와 행위의 간극이 인상적으로 다가왔고, 미성년자인 광호가 빠질 법한 불법 행위라고 봤다.
일당 20만 원이라는 금액은 어떻게 정했나. 공간의 꾸밈새나 냄새를 언급하는 대사도 사실적이다.
영화 현장에서 일하는 막내 스태프들이 보통 그 정도를 받는다. 그분들에게 보내는 헌사랄까. (웃음) 실제로 불법 휘발유를 제조하는 방법도 찾아보고, 추가 조사를 많이 했다. 사실 영화처럼 불법 휘발유를 배달하는 경우는 없다. 대개 지정된 장소에 가서 주유하고 떠나는 방식인데, 영화에서는 동적인 느낌을 주고 싶어서 배달한다는 설정을 만들었다.
광호가 휘발유를 팔아서 번 돈으로 야구용품을 사는 장면을 촬영했지만, 편집 과정에서 삭제했다고 들었다. 도덕적 결함이 있는 인물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는 장면인데, 어째서 들어냈나.
광호가 혼자 있는 신을 대부분 삭제했다. 나한테는 모든 신이 너무 귀하지만, 전체 리듬을 고려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특히 야구용품을 사러 가는 장면은 촬영 첫날에 찍은 첫 신이라 더 애틋하다. 그때 모니터 화면으로 재광 배우를 보면서 ‘광호다, 됐다!’라고 확신했거든. 해가 질 무렵, 실내연습장에서 광호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신도 있었다. 지금도 아쉬울 정도로 소중한 장면이지만, 영화 흐름에는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다. 면죄부를 주는 장면은 후반부에 배치될 예정이니, 리듬을 만들면서 극적 재미를 살리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영화 전반적으로 가혹한 면이 있다. 열아홉 살 입에서 “실력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말이 나오니까. 감독이 세상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방식과도 연결되나.
그렇지는 않은데, 때때로 막막한 순간이 찾아오는 것 같기는 하다. 누구나 삶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시기를 거치기 마련이지 않나. 광호는 영화에서 그 시간을 통과해내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아직 삶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웃음) 그래도 결국에는 잘 되리라고 믿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광호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고 싶어서 야구를 관두지 않겠다고 말한다. 감독은 왜 영화를 관두지 않고 계속하나.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촬영장에서 재광 배우와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감정 신인 데다 촬영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그날 재광 배우가 많이 힘들어 했다. 밖에서 바람을 쐬는 배우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얘기했다. “재광아, 우리가 이걸 잘 마무리하면, 광호 같은 아이가 덜 생기지 않을까? 이런 애가 없게끔 힘을 내보자.” 뭐라고 해야 할까. 영화로 위로하겠다는 건 아니다. 그저 조금 더 들여다보고, 마음을 주고 싶다.
10년 전에 대학을 자퇴하고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 본래 영화를 즐겨 봤나.
분명히 무슨 계기가 있을 텐데, 지금은 그마저도 생각나지 않는다. 10대 시절에는 액션 영화 좋아하는 평범한 애였다. <스파이더맨>(샘 레이미, 2002), <아이언맨>(존 파브로, 2008), <300>(잭 스나이더, 2006)에 미치는 애. (웃음) 어떻게 보면 디자인과 영화가 닮은 구석도 있다. 결국 무언가를 만들고 잘 마감해서 남들에게 선보이는 일이니까. 영화가 좀 더 재밌긴 하다. 일부러 못나 보이게 만들 수도 있잖아. 정재광 배우처럼 하얗고 예쁜 친구를 오히려 울퉁불퉁하게 보여줄 때, 나름대로 쾌감이 있다.
지금도 액션 좋아하나.
항상 액션 영화를 꿈꾼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에도 관심이 많다. 논픽션과 범죄 소재가 만나는 작품에 꽂혀 있고, <낫아웃>이 첫 번째 시도였다. 윤종빈 감독님을 좋아한다. 논픽션과 범죄 소재를 엮어내는 데 탁월하고, 영화적 재미도 대단하다. 서스펜스를 다루는 면에서는 김성훈 감독님(<끝까지 간다> <터널>)이 최고인 것 같다.
한국 범죄 영화의 장래가 밝네. (웃음)
아, 근데 나는 드라마를 찍어 놔서. (웃음)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두렵지만 설렘과 기쁨이 더 크다. 비호감이라고 느낄 수도 있고, 가슴 한 켠이 찡해질 수도 있을 거라고 본다. 비율로는 후자가 많았으면 좋겠는데, 곧 알게 되겠지. 그럼 어디가 잘못됐는지 반성하고, 그렇게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