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딴지 vs 판타지
<덤불 속의 재> 이성강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Feature / 2021-06-06

국내 창작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짚어볼 때, 이성강은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장편 데뷔작 <마리 이야기>(2001)는 단순함을 벗어난 이야기와 디지털 제작 기술의 안정적인 결합으로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한국 작품 최초로 장편경쟁 부문 대상을 차지하는 성취를 이뤄냈다. 이후 이어진 그의 행보에서는 뚝심이 느껴진다. 부지런히 신선한 소재를 발굴하고 쉼 없이 기술을 갈고닦은 결과물인 <천년여우 여우비>(2006)와 <카이: 겨울 호수의 전설>(2016)은 여전히 척박한 국내 창작 애니메이션의 길을 묵묵히 넓혀왔다. 6월 15일까지 인디그라운드(www.indieground.kr)에서 온라인으로 상영하는 <덤불 속의 재>(1998)는 이성강 감독의 ‘공부하던 시절’을 만나볼 수 있는 작품이다. 미술 운동단체 ‘가는패’에서 판화와 걸개그림을 그리던 청년은 남들보다 빨리 디지털 기술을 빨아들였고, 다양한 표현 기법을 실험하며 애니메이션의 길로 들어섰다. “오전 8시 쯤 나와서 저녁 10시에 집에 돌아갔”을 정도의 남다른 지구력으로 빚어낸 작품들에는 새로운 기술이 주는 쾌감과 젊은 시절의 고민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그 시절의 좌충우돌을 듣고 싶어 이성강 감독을 만나 짧은 시간여행을 했다.

 

 

기획전 제목이 《안녕 90's》다. 20년 넘은 기억을 돌아보게 됐는데, 어떤가.

이제는 너무 멀리 와있는 것 아닌가 싶은데. (웃음) 그때는 30대였고, 이제 60이 다 돼가고 있으니, 내게는 ‘안녕, 중장년’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90년대 사람들은 참 고생을 많이 했다. 그때는 세계여행을 하고 싶다든지 하는 개개인의 꿈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던 시대다. 문화학교 서울에서 조영각 씨를 처음 만났는데, 단속을 피해가며 활동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억울한 시대라고도 볼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압박이 있을수록 원래 사람의 열정이라는 건 더 강해지게 마련 아닌가. 그때는 그렇게 압박과 열정이 공존하는 시기였다.

 

<덤불 속의 재>는 공개 당시에도 많이 주목받았고, 대표작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작품이다. 영화를 만들던 1998년은 여러모로 변화의 시기였을 것 같다. 이후 장편 작업에 돌입하기도 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생각 없이 매년 2~3편씩 단편을 만들었다. 물론 그걸 다 사람들에게 보여줬던 건 아니지만. 애니메이션 작업은 1995년부터 시작했는데, 어떻게 보면 <덤불 속의 재>까지는 공부하는 과정에서 나온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저런 애니메이션 기법도 공부하고, 젊은 사람들이 많이 하게 되는 인생과 실존에 관한 고민을 주제로 삼기도 하며 여러 단편을 만들었다. <덤불 속의 재>는 그런 초창기 단편으로서는 아마 마지막 작품이지 않을까. 지금 보면 기술적으로 어설픈 게 느껴진다. 다만 내용상으로는 젊은 시절에 갖게 되는 어떤 알 수 없는 고민이 들어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애틋한 마음인 건가.

그럼. 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칠 때, 영화 만들면서 실존이니 이런 얘기 절대로 하지 말라고 말하곤 했다. 진짜 창피하다고. (웃음) 나도 그런 과정을 겪었던 건데, 돌이켜보면 실은 당연한 고민이다. 젊은 사람이 세상에 부딪히면서, 도대체 이 세상이 어떻게 돼 있고 그 속에서 나는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가 하고 고민하는 건, 2~30대 때는 당연히 거쳐야 하는 과정인 것 같다. 괜히 심술이 나서 학생들에게 유치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웃음)

<덤불 속의 재>
<덤불 속의 재>

<덤불 속의 재>가 한 시기의 마지막이 됐던 이유가 있을까. 장편을 만들어야 할 필요를 느낀 계기와도 관련 있을 것 같고. 

그때까지 만든 꽤 많은 단편을 들고 여기저기서 상영회를 했다. 문화학교 서울에서도 했고, 기타 우후죽순 생겨나던 여러 조그만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도 틀었고. 그러다 애초에 애니메이션을 처음 시작하게 된 마음을 떠올리게 됐다. 미술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 애니메이션을 하게 됐거든. 화랑에 그림 전시하고, 오픈할 때 술 마시고, 손님들은 한쪽 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그림을 보는, 그런 소통 방법이 정말 따분하고 너무 재미없었다. 더 많은 대중과 만나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면서 여러 실험도 해봤는데, 애니메이션이 호응이 좋더라. 지금 생각하면 엉망진창인 애니메이션인데도 문화학교 서울 친구들은 정말 진지하게 봤고, 매우 깊이 있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 과정이 흥미로웠지만, 4~5년 해보니 패턴이 반복됐다. 나 나름대로는 관객을 많이 만날 방법을 계속 연구했다. 카페나 클럽에서 퍼포먼스와 함께 상영하기도 했는데, 아쉬움이 남았다. 극장으로 가야 하는구나 싶었다. 실험에만 계속 머무는 건, 처음 애니메이션을 하려고 했던 동기에서 멀어지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무작정 장편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더 많은 사람과 만나고 싶은’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면서 장편 작업이 시작된 셈이다.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심리학을 전공한 후 화가로 활동했고, 1995년부터 애니메이션 작업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했던 게 컴퓨터라고.

처음부터 애니메이션 때문에 컴퓨터를 공부했던 건 아니다. 초창기의 프로그래밍을 배우려 했던 건데, 미술과 동떨어진 방향에서 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를 활용해서 아트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다. 가상의 화면 속에서 회전하는 조각을 만든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룹을 만들어 인사동에서 ‘달 위의 극장’이라는 전시도 열었다. 바닥까지 사면을 거울로 채우고 가운데 모니터를 설치하면, 사람들이 컴퓨터를 직접 조작해서 화면 속 조각을 돌렸다. 그게 거울에 무한대로 쫙 비치는 굉장히 신기한 전시였다. 그 덕에 국내 4대 일간지에 한 면씩 꽉 차게 기사가 나기도 했다. 그런데 점점 지속하기 어려워지더라. CD 타이틀도 발매했는데 잘 안 팔렸다. 결국 먹고 사는 고민을 하게 된 거다. 그룹에 있던 친구들은 군대에 가거나 직장을 구해야 했다. 나는 혼자 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해보려 했고, 멀티미디어 저작 툴을 사용해서 작품을 하나 둘 씩 만들게 됐다.

ⓒ이영진

돈 모아 프로그램을 구매한 기억도 있을 것 같다. (웃음)

그럼, 구매했지. 그런데 처음에만 사고 나중에는 안 샀다. 버전이 계속 업데이트되잖나. 나쁜 상술이다. (웃음) 90년대에는 소프트웨어라는 게 굉장히 신기했다. 경이롭기도 하고. 마음속에 우러난 존경심이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그때 돈 백만 원, 2백만 원씩 하던 카피를 몇 개 사서 썼다.

 

전승일 감독(<내가 만난 90년대>, <오월상생>)이 1999년에 쓴 글을 보면, 이성강 감독의 디지털 애니메이션 기술이 당시 국내 탑클래스라는 대목이 있다. 매번 새로운 기법과 표현을 실험했다고도 했는데, 새로운 걸 습득하는 과정이 어렵기보다는 흥미로웠나 보다.

학습능력이 좋았다. (웃음) 프로그램을 공부하는 데 큰 어려움을 느낀 적은 없다. 보통 일주일이면 다 알게 됐으니까. 처음 만져보는 프로그램으로 이런저런 걸 해보는 것 자체가 재밌었다. 프로그램에 따라 아트웍도 달라져서, 3D를 해보기도 하고, 온전한 2D 페인팅을 하기도 하고, 절지 애니메이션을 해보기도 하며 다양한 실험을 했다. 애니메이션 학교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말하자면 나 혼자서 학교생활을 했던 거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더 부각됐겠지. 90년대에는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셀 애니메이션을 가르치는 학원이 있었지만, 취업을 위한 거였지 연출을 가르쳐주는 곳은 아니었다. 애니메이터들의 상황도 열악했고, 나도 그런 쪽으로는 큰 매력을 못 느꼈다. 셀 애니메이션 기법 같은 건 그냥 책 보고 공부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이 가장 중요한 교과서였고.

 

당시 유럽 작가주의 애니메이션에 영향을 받았다고.

시각적으로 가장 감명받았던 건 프레데릭 백의 <나무를 심은 사람>(1987)이다. 비디오 카피본으로 봤는데 굉장히 놀라웠다. 게다가 프레데릭 백에 관한 흉흉한 소문도 있었다. 애니메이션을 만들다가 눈이 멀었다나. (웃음) 나중에 알아보니 그건 아니더라. 여하튼 그 작품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만들어볼 수 있을까 싶었다. 동시에 저렇게 만들다가는 단편 하나 만들고 인생이 가겠구나 하는 양가적인 마음도 들었지. 나는 어떤 하나의 스타일을 깊이 파고, 오랫동안 그리는 타입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시스템을 만들고 생산의 효율을 높이는 방법을 많이 고민했다.

<덤불 속의 재>
<덤불 속의 재>

일종의 체계를 만들 필요를 느꼈던 거다.

애니메이션을 만들려면 어떤 시스템이 필요할까를 좀 연구해봤다. <마리 이야기> 시작할 때는 스태프들을 일일이 다 가르쳤다. 종이에 그리는 전통 방식이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작화를 하고 배경을 그려야 했으니까. 물론 순탄했던 건 아니다.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다. 특히 소프트웨어 버그가 매일 한 가지씩은 발생했다. 그러다 정전되면 여기저기서 소리 지르고 그랬던 기억이 있다.

 

<덤불 속의 재>는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 작화에, 우울하고 어두운 내용이 특징이다. ‘페인터’와 ‘애프터 이펙트’라는 프로그램을 썼고, 기법은 ‘페인트 온 글라스’라고 들었는데, 설명을 좀 더 해준다면.

‘페인터’는 손으로 직접 그린 것처럼 표현하는 프로그램 중에서는 가장 훌륭한 소프트웨어고, ‘애프터 이펙트’는 합성 프로그램이다. ‘페인트 온 글라스’는 유리에 유화 물감을 써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기법을 이른다. 유리 위에 그린 그림을 조금씩 지우고 다시 그려나가면서 움직임을 만드는 거다. 페인터를 사용하면 그 기법을 거의 똑같이 재현할 수 있다.

 

전체 작업은 모니터 안에서 이루어진 거고.

맞다. 모니터를 보며 전자펜으로 작업했지.

ⓒ이영진

영화에는 분단, 핵, UFO 등의 모티프가 가득하고, 인물들은 도무지 삶을 지속하지 못한다. 도저히 온전한 자아로 살기 어렵다는 심정이 느껴지는데, 어떤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나.

8, 90년대는 개인이 굉장히 희생당하던 시기다. 그때의 젊은이들, 학생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희생되거나 스스로 희생해야만 했다. 물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다거나 하는 건 굉장히 훌륭하고 열정적인 일이다. 하지만 개별적인 인간으로서는 그게 좀 불행한 일이거든. 여행을 좋아한다거나, 꽃을 좋아한다거나,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사치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 이유는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있을 테고. 그런 걸 그려보려고 했는데, 썩 잘 표현됐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과잉이 있지. 좀 더 다채롭게 고민하고, 그걸 현실의 이야기 속에서 구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생각과 감정이 과잉되다 보니 표현이 상징적으로 된 측면이 있다고 본다. 그래도 만들고 나니 여기저기서 불러주더라.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경쟁 부문에도 아마 한국 최초로 뽑혀서 갔을 거다. 국내에서도 상을 많이 받았고. 하여튼 당시로써는 최선을 다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과잉이다. (웃음)

 

한편으론 이 영화가 유일한 실사 영화인 <살결>(2005)을 떠올리게 해서 놀랍기도 했다. 어둠 속에서 ‘나’를 찾기 위해 애쓴다는 점이 비슷하지 않나. 자아, 정체성 같은 화두에 어떤 의미를 두는지 듣고 싶다.

한 개인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세상은 사회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사회를 바라보는 건 결국 개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개인이 막 달려가다가 문득 도대체 나는 어디에 있나 헤매기 시작하면 모든 게 절망적으로 되는 거다. 그런 측면에서 <살결>이 굉장히 유사한 테마를 다루고 있긴 하다. 어느 날 주변을 돌아봤을 때, 내가 바라보고 있는 세상이 정말 객관적인 건지, 아니면 이게 다 내가 가진 판타지에 불과한 건 아닌지 의문을 품게 되는 심리적 기제와 관련되니까.

 

이 시기 관객을 만나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다고 했다. 파일 형태의 유포를 생각해본 적은 없나.

그런 방식이 본격적으로 대두됐던 시기는 아니다. 인터넷 속도가 너무 느려서 상영이 잘 안 되는 환경이기도 했고. 초창기에 시도는 해봤다. 1996년 즈음에 홈페이지를 만들고 거기서 애니메이션을 상영했다. 지금처럼 mov나 avi 포맷은 아니었고, 프로그래밍으로 만들어져 용량이 가벼운 동영상이었다. 그때는 그런 홈페이지가 별로 없던 때라 신기하게 봤던 분들도 꽤 있었다. 해외의 매크로미디어사에서 전 세계 10대 홈페이지를 꼽았는데, 거기 선정된 적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드는 애니메이션에는 저작 툴로 인한 한계가 있다. 종류가 한정된 거다. 그래서 계속하진 않았는데, 그 시기에 재밌는 상상을 하던 분들은 꽤 있었다. 홍대에 아주 많이 몰려있었지. (웃음) 사이버 코리아라고 일종의 가상 국가를 만들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돈키호테처럼 보였는데, 결국은 실패했던 것 같다. 너무 앞서나갔던 게 아닐까.

<마리 이야기>
<악심>

작업환경은 어땠나.

열악했다. 작업실을 여러 군데 많이 옮겨 다녔는데, 주로 지하에 있거나 주차장에 있었다. 주차장에 있던 시기에 그 동네의 굉장히 독특한 고물상 아저씨가 작업실에 들어오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어차피 돈을 나눠 내면 좋으니까 같이 쓰게 됐는데, 그 공간을 전부 고물로 채워 넣더라. (웃음) 다양한 사람을 많이 만났다. 좋은 사람들, 재밌고 순수한 사람들 말이다.

 

이후 <마리 이야기>를 만들며 장편 작업을 하게 된다. 규모가 크고 협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 단편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을 텐데, 적응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는지.

당연히 어려웠다. 시스템이 어때야 하고, 후반 작업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속에는 불안이 있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다 아는 것처럼 보여야 스태프들이 의심하지 않을 테고, 그래야 끝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2010년대 들어서도 <저수지의 괴물>(2012)이나 <악심>(2014)처럼 상대적으로 단출한 단편 작업을 했는데, 이 작품들을 보며 외려 규모와 시장을 고려해야 하는 상업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 느낄 갈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더라.

상업 애니메이션을 만들며 발생하는 갈등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본을 투자하고 다시 회수하는 게 목표라는 점에 대해선 나도 굉장히 잘 이해하고 있다. 단편을 만들 때는 이게 맞을까 틀릴까 하는 판단을 혼자 하는데, 장편을 만들 때는 그런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 많다. 피디, 투자자, 스태프들까지. 그것에 대해 같이 논의하고 설득하거나 설득당하는 과정이 이어지는데, 감독이 심지가 굳지 않으면 산으로 가게 된다. 그만큼 책임감도 생기게 된다.

<카이: 겨울 호수의 전설>
<프린세스 아야>

<마리 이야기>, <천년여우 여우비>, <카이: 겨울 호수의 전설> 등 그간 해온 작품을 보면 배경의 디테일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구체적이고 독특한 장소를 세밀하게 형상화해낸다.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지점은 무엇인가.

시각적인 완성도에 대한 고집이 있었고, 지금도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90년대에 접했던 훌륭한 단편 애니메이션과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들로 인해 눈높이가 생겨버렸는데, 시각적으로 가치 없는 작업을 할 수는 없었다. 2000년대 초에 작업을 할 때는 퀄리티의 한계를 단번에 뛰어오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거기서 벗어나려고 했고, 스태프들에게도 정말 많이 강조했다. 그 덕에 <마리 이야기>는 미술적으로 훌륭한 작품이 됐는데, 그렇다 보니까 한국 애니메이션 발전사로 보면 굉장히 뜬금없이 확 나와 버린 느낌이 있다. 그렇다고 시각적인 것만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각적인 것과 스토리 중 뭐가 더 중요한지 양자택일처럼 생각하는 건 바보 같은 분석이다. 좋은 스토리와 훌륭한 시각적 연출이 함께 가야 한다. 그럴 때 스토리를 받아들이게 되는 거다.

 

이성강 감독의 영화에서 판타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판타지에 관한 생각을 들려준다면.

사람들이 왜 판타지를 꿈꾸는가 생각해보면, 현실에서 직설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타지가 단지 엉뚱한 상상, 지금까지 못 봤던 걸 보여준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삶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뚱딴지같은 상상력은 그냥 소비되고 말아버린다. 그 자체로 제대로 된 판타지가 아닌 거다. 환상이라는 건 인생의 각 부분과 연결될 때 더 새로워지고 재밌어지는 게 아닐까.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신작 <프린세스 아야>를 공개했다. 계획은 어떻게 되나.

당시에 개봉을 논의하다가 코로나로 인해 개봉 시기를 놓치고 지금은 견디는 중이다. 영화를 개봉하고 나야 새로운 기획을 할 수 있을 텐데. 막연하고 모호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인생을 되돌아볼 수 있는 판타지를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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