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유감
<지리멸렬> 봉준호
글 차한비 사진 소동성 / Feature / 2021-06-06

시작을 돌아보는 일이 늘 유쾌하진 않다. 첫인상은 종종 끝까지 이어지지 않고, 첫사랑엔 어김없이 실수가 끼어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TIME, 2020)이자 “한 번도 나쁜 영화를 만든 적 없는 감독 30인”(metacritic, 2020)에 꼽힐 정도로 성공을 거둔 감독의 초기작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봉준호가 한국영화아카데미 재학 시절에 만든 <지리멸렬>(1994)은 세 개의 에피소드(<바퀴벌레> <골목밖으로> <고통의 밤>)와 에필로그로 이뤄진 옴니버스 작품이다.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사회에서 존경받는 나이 지긋한 인사들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우아한 삶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봉준호는 기성세대의 품위를 지켜주려고 애쓰는 대신, 눈살이 찌푸려지는 ‘지리멸렬’한 가식과 위선을 속속들이 비춘다. 대학교수는 틈나면 포르노 잡지를 들추고, 신문사 논설위원은 남의 집 앞에 놓인 우유를 훔쳐먹는다. 그런가 하면 술에 취한 엘리트 검사는 노상에서 대변을 보려다 순찰 중이던 경비원에게 덜미를 잡히기도 한다. 봉준호는 “먼 옛날에 연출한 조악한 작품이 다시 관객과 만난다고 하니 창피합니다”라고 소감을 밝혔지만, <플란다스의 개>(2000)부터 <기생충>(2019)까지 20년간 그가 펼쳐 보인 세계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지리멸렬>은 촌스러울지언정 기대를 무너뜨리는 작품은 결코 아니다. 여기에는 지하실이 등장하고, 달아나는 자와 따라잡는 자가 엎치락뒤치락한다. 무엇보다 봉준호는 <지리멸렬>에서도 보란 듯이 뒤통수를 친다. 유머와 아이러니를 꼼꼼하게 배치해둔 솜씨를 다시 한번 확인할 기회이자, 출발선에 선 앳된 씨네필의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다. (인디그라운드 www.indieground.kr)

 

 

젊은 관객들과 함께 극장에서 <지리멸렬>을 본다고 상상하면 어떤가.   

조악하고 치기 어린 작품을 다시 내보인다는 게 부끄럽다. 감독 입장에서는 비단 학창 시절에 만든 단편뿐만 아니라, 최근 장편 역시 관객과 함께 본다고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미 완성한, 더는 손을 댈 수 없는 작품이지 않나. 장면마다 후회의 연속이기에, 솔직히 이렇게 상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다. (웃음) 이중적인 감정이 든다. 기억 속에 남은 90년대 단편을 엮어서 선보이는 훌륭한 이벤트에 내 작품이 포함된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하거든. 어떤 각도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을 것 같다. 젊은 영화학도나 단편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은 <지리멸렬>을 보면서 희망을 얻지 않을까. 이렇게 버벅거리면서 단편을 찍어도 꾸준히 정진하다 보면 장편을 만드는구나, 감독으로서 창작을 이어 나갈 수 있구나, 하면서. (웃음)

 

<지리멸렬>은 한국영화아카데미 11기 3차 실습작으로 알려졌는데, 간혹 졸업작품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3차 실습작품이자 졸업작품이다. 11기는 나와 장준환 감독, 손태웅 감독, 최익환 감독, 조용규 촬영감독 등이 모인 기수인데, 당시 상황이 특수했다. 원래 기수마다 12명을 선발하는데, 학기 시작하자마자 2명이 빠져나갔다. 1994년 무렵에 처음 케이블TV가 개국하면서 프로듀서나 스태프를 많이 뽑았거든. 2명이 방송계로 떠나면서 학생이 갑자기 10명으로 줄었고, 남은 우리들은 동지가 되어 똘똘 뭉치는 분위기였다. 본래 졸업작품을 찍으려면 학생들끼리 경쟁해야 했다. 12명 중 6명만 졸업작품을 찍도록 학교에서 지원해주고, 나머지 6명은 촬영감독으로 참여하는 시스템이었으니까. 우리는 졸업작품 6편에 부여하는 예산과 장비를 쪼개서 8편을 만들기로 했다. 그럼 졸업작품 8편에 3차 실습작품 2편을 합해서 총 10편이 나오잖아. 10명 모두 평화롭게 연출작을 하나씩 갖고 졸업하게 된 거다. 학교가 세팅해놓은 경쟁에 휘말려 들지 말자며 다 같이 애썼다. 그러니까 학교 관점에서는 3차 실습작이지만, 우리끼리는 전부 졸업작품이라고 여겼다. 영화제에서도 함께 상영하고, 그런 아기자기한 기억이 난다. (웃음)

 

영화진흥공사에서 책정한 지원금으로 제작비를 모두 해결했나. 앞서 만든 <백색인>(1994)의 경우에는 후반 작업 비용을 마련하느라 제작 기간이 길어졌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지리멸렬>은 어땠나.

영화진흥공사(이하 영진공)에서 지원금을 줬던가? 기억이 확실치 않은데, 기본적으로 모든 장비와 후반 작업을 영진공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 담당자들도 참 잘해줬다. 실제 촬영하며 밥을 먹거나 하는 데 쓰는 진행비의 경우, 담당자를 통해 예산을 충당했던 것 같다. 영진공에 없는 특수 조명기를 쓴다거나 정해진 일정을 넘어서 보충 촬영을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 외에는 꼭 사비를 들여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아카데미 입학 경쟁률이 높지 않았을까. 돈을 거의 안 쓰고 단편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었던 것 같다. <백색인>은 아카데미에 가기 전에 개인적으로 찍은 작품이다 보니 정말 오래 걸렸다.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투자를 받아서, 정확히는 갈취해서 만들었지. (웃음) 돈을 마련하면 진행했다가, 돈이 떨어지면 한동안 구상만 하는 식이었다. 반면, <지리멸렬>은 학교 실습 일정에 딱딱 맞춰서 진행했다. 

<지리멸렬>
<지리멸렬>

<백색인>은 당시 활동하던 연합 동아리를 기반으로 만들었다. 

‘노란문’이라고, 당시 홍익대학교 정문 근처에 조그마한 사무실이 있었다. 최종태 감독님이 동아리 창립자였다. 그때는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대학원을 다니셨다. 이후 <해로>(2011)로 대종상 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받고, 최근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어린 시절을 다룬 영화 <저 산 너머>(2020)를 만드셨다. ‘노란문’은 92년부터 3-4년 정도 이어졌는데, 한창 융성했을 때는 인원이 40명 가까이 됐다. 연세대, 서강대, 이화여대, 동국대, 홍익대, 성균관대 등 다양한 학교에서 영화에 열정을 품은 젊은이들이 모였다. 매일 같이 영화 보고 세미나도 하면서 열심히 활동했다. 이때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들 덕분에 <백색인>을 찍을 수 있었다. 스태프 70% 정도가 ‘노란문’ 멤버였으니까. 

 

제도 바깥에서 혹은 기존 대학에서 영화를 만드는 또래에 비해,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수학하며 많은 기자재를 다뤘으리라 예상한다. 촬영뿐만 아니라 후반 작업 역시 이전에 단편을 만들던 때와는 다른 경험이었을 것 같은데.

기술적 측면에서 많은 혜택을 누렸던 게 사실이다. 일정만 잘 조율하면, 당시 충무로 스태프나 프로덕션에 제공되는 장비를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 학교에 후반 작업 시설이 함께 있으니까. 교육 과정 자체는 짧았지만,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다양한 장비와 기술을 몸으로 습득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동료인 장준환 감독의 <2001 이매진>에 촬영으로 참여했고, 장준환 감독 또한 <지리멸렬>에서 조명을 담당했다. 제작 기간은 짧지만, 연출 외에 다른 파트를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 같다. 

장준환 감독이 <2001 이매진> 콘티를 보여줬던 기억이 난다. 촬영감독으로서 이런저런 의견을 교환하고, 어떻게 찍을지 작전도 세우고 그랬다. 영화학교에 다닐 때만 가능한, 귀한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충무로 현장에 가면서부터는 연출부-조감독-감독의 길을 쭉 걸어가지 않나. 촬영이나 조명, 녹음 등 다른 분야에 직접 뛰어들 일이 거의 없는데, 아카데미에서 짧게나마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노래 가사처럼 “입장 바꿔 생각을 해 봐”였지. (웃음) 감독이 된 후에도 그때 생각이 많이 나더라. 내가 촬영감독이었을 때 경험한 것, 스태프로서 감독을 대하며 느꼈던 것이 상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줬다.

 

<지리멸렬>은 제목 자체가 시대를 향한 촌평이다. 영화 후반부에 “94’ 한국방문의 해”라는 광고가 잠깐 등장하기도 하는데, 문민정부 출범 후 세계화 구호가 본격적으로 부상한 1994년은 감독에게 어떤 풍경으로 남아 있나.

정말 역동적인 시대였던 것 같다. 딱 떠오르는 인물은 서태지. 새로운 시대 정신을 외치는 시기였고, 나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서태지의 음악으로 들썩거렸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보고 충격받았던 기억도 난다. 지금은 서로 잘 아는 친한 사이가 됐지만, 당시에는 저 멀리 바다 건너에 사는 젊은 감독이라는 느낌이었지. 1994년에 <펄프픽션>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고 한국에서도 개봉했다. 아카데미 강의실에서 문만 열고 나가면, 복도 건너에 바로 영진공 시사실이 보였다. 개봉을 앞둔 영화 대부분 그곳에서 프린트를 체크하고 상영했기에, 신작을 공짜로 보는 묘미가 있었다. <펄프픽션>을 보면서 ‘영화를 이렇게도 만들 수 있구나!’ 하며 놀랐다. <지리멸렬>을 챕터 형식으로 구성하는 데에도 얼마간 영향을 주었으리라 추측한다.

ⓒ소동성

<지리멸렬>은 밴쿠버국제영화제, 홍콩국제영화제, 샌디에이고국제영화제에 초청됐고, 장준환 감독의 <2001 이매진> 역시 끌레르몽페랑영화제 등에서 상영됐다. 해외에서 한국 영화의 위상이 높지 않았던 시기인데, 당시 해외영화제 참가는 어떤 경험이었나.

이제 와서 생각하면 이상한 규정인데, 당시 아카데미 작품은 국내 영화제에 출품할 수 없었다. 해외 영화제는 가능했다. 1995년 10월에 장준환 감독과 함께 밴쿠버에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생애 첫 국제영화제였을 거다. 밴쿠버영화제는 독립영화, 특히 아시아 영화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영화제이고, 젊은 필름 메이커를 매우 환대하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주최 측에서 용돈도 줬다. (웃음) 영화제 기간에 밥 굶지 말라면서 단편 감독들한테 진행비를 주더라. 되게 신기했지. 단편만 틀면 관객 참여가 저조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해서, 장편 앞에 단편을 하나씩 붙여서 상영했다. 장편을 보러 온 관객들이 고스란히 단편도 보게 되는 방식이었고, <지리멸렬>은 장선우 감독님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 앞에 상영했다. 나로서는 장선우 감독님이 <지리멸렬>을 본다는 것 또한 설레고 떨리는 일이었다. 

 

상영도 상영이지만, 다른 영화를 보느라 바빴을 것 같다. 

미친 듯이 극장을 돌아다녔다. 절묘하게 시간표를 짜서 하루에 대여섯 작품씩 봤다. (웃음) 특히 미국 인디 영화가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때였다. 홍콩영화제에서 그렉 아라키의 <둠 제너레이션>(1995)을 보고 굉장히 흥분했다. 지금은 <포드 V 페라리>(2019) <로건>(2017) 등을 연출한 할리우드 메인스트림 감독이지만, 애초 인디로 출발했던 제임스 맨골드의 <헤비>(1995)도 인상 깊게 봤다. 미지의 영화를 새로 발견하면서 영화적 흥분을 가득 느꼈던 시간이다. 

 

앞서 인터뷰한 감독들이 수십 년 전을 생생히 기억해서 놀랐다. 돌이켜보면 이때 감독은 어떤 시기를 통과하던 중이었나.

갱년기에 접어들면서 기억력이 감퇴하기 마련인데, 다른 감독님들이 무던히 애를 쓴 모양이다. (웃음) 이 무렵에 나는 정말 정신이 없었다. 아카데미 학사 과정도 굉장히 타이트했고, 일찍 결혼하면서 생계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힘들었다. 또 영화는 영화대로 어렵고 벅찬, 여러모로 복잡한 시기였다. 그랬기에 1년 동안 아카데미에서 함께 지낸 동기들이 각별하게 느껴졌고, 서로 재미있는 추억도 많이 쌓았던 것 같다. 

 

다이내믹한 시기였다. 1995년부터는 단편영화 비디오 출시가 이뤄지기도 했다. 태일영상, 영화마을, 나이세스, 인디라인 등에서 영화제 수상작을 모아 대중에게 소개했고, 여기에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작품도 다수 포함됐다. 

1990년대 중반, 한국 영화계 상황과 관련이 있다. 시네필 문화의 폭발이라고 해야 할까. 특히 1995년은 ‘영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전 세계적으로 영화 이벤트가 많았다. BFI에서 영화 100주년 다큐멘터리 제작을 국가별로 추진했고, 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에서는 장선우 감독님이 <씻김>을 만들었다. ‘키노’와 ‘씨네21’ 등 영화 전문 잡지가 창간된 해이기도 하다. 대학 영화 동아리나 ‘영화공간 1895’ 같은 민간 시네마테크에서 고전영화와 작가주의 영화를 활발하게 상영했고, 많은 젊은이가 눈을 시뻘겋게 뜨고 몰려와서 객석을 채웠다. 지직거리는 저화질의 복사 테이프로 잉마르 베르히만, 스탠리 큐브릭, 오즈 야스지로 등을 봤지. 1996년에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 극장 개봉해서 6만 관객을 모을 정도였으니, 열기가 정말 대단했다. 그런 흐름에서 독립영화도 관심을 받았고, <지리멸렬> 또한 영화제와 비디오 등을 통해 관객과 만났다.

<지리멸렬>
<지리멸렬>

개별 에피소드를 따로 떼어도 충분히 완결적인 이야기인데, 옴니버스로 구성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에필로그를 먼저 떠올린 것인지, 에피소드 의도를 명확하게 하고자 추후 덧붙인 것인지도 궁금하다.

에필로그 아이디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심야 토론 방송을 보는 중이었다.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고 부르는 인사들이 양복을 빼입고 나와서 점잖게 대화를 나누는데, 문득 ‘평소에도 저럴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에서도 저토록 품격 있는 인간일까 의심하는, 악동 같은 상상이 <지리멸렬>의 출발점이었다. 특히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매체나 미디어를 통해서 권위 있는 모습만 노출하지 않나. 영화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그들의 가장 권위 없고 지질한 순간을 포착한다면 어떨까 싶었다.  

 

각각 다른 공간에서 촬영했고, 에피소드마다 기용한 배우가 다르다. 한 작품이지만 들이는 품으로 따지면 네 작품을 찍는 것과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짐작한다. (웃음) 제한된 조건 내에서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세웠던 원칙이 있나. 여건으로 인해 찍지 못하거나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장소도 많고 인물도 여럿이라 어수선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만큼 욕심이 있었다. 실습 기회가 많지 않다 보니, 가능하면 다양한 로케이션에서 많은 배우들과 작업해보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쓰고 콘티를 짤 때부터 최대한 표현 가능한 방향을 고민했기에, 현장에서 ‘이걸 못 했는데 어떡하지?’라는 순간은 없었다. 어려움이 예상되는 부분은 이미 정리를 했고, 촬영할 때는 준비한 것들이 제때 기능하도록 세팅했다. 

 

그때부터 사전 준비에 철저했다. (웃음) 영화 곳곳에서 감독의 인장과도 같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바퀴벌레>와 <골목밖으로>는 녹음으로 둘러싸인 풍경 중앙에서 ‘지리멸렬’한 인물이 등장하며 시작하는데, 이는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의 오프닝과도 연결된다.

아, 진짜 숲이 나오네. 왜 하필 숲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바퀴벌레> 오프닝의 경우에는 인물이 대학교수라는 사실이 아직 드러나지 않잖아. 공간 자체도 캠퍼스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떤 인물이나 공간의 맥락을 처음에는 설명하지 않았다가, 영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서서히 파악하도록 하는 방식을 좋아했던 것 같다. <플란다스의 개> 오프닝도 마찬가지다. 숲을 보여주다가 카메라가 후퇴하면서 아파트 내부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골목밖으로>에서는 쫓고 쫓기는 두 인물의 경주 장면이 인상적이다. 특히 좁은 골목을 매개로 담 높은 주택가와 다세대 건물을 넘나드는 공간 활용이 흥미롭다. 

<지리멸렬>에서 그나마 마음에 드는, 자부심을 느끼는 부분이 <골목밖으로> 로케이션이다. 스카우팅 하면서도 되게 즐거웠다. 중구 필동, 대한극장 뒤쪽 주택가에서 모두 찍었다. 현재 어떤 식으로 재개발되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재미있는 골목이 많았다. 골목 자체가 이 에피소드의 테마이기도 하고, 유명 일간지의 논설위원과 신문 배달하는 청년처럼 일상에서는 마주치기 힘든 두 인물이 기이한 상황에서 쫓고 쫓기는 에피소드이다 보니 로케이션 확보가 필수적이었다. 유동인구가 많지 않고 조용한 동네라서 별 탈 없이 찍고 나왔다. 청년이 우유를 훔쳐 먹었다고 오해하는 아주머니가 김선화 배우다. 그러고 보니 그 집을 어떻게 섭외했더라. 집 내부에서 촬영하지는 않았지만, 김선화 배우가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와야 했다. 집 앞에서 중요한 롱테이크를 찍기도 했고. 누가 따로 섭외해주는 게 아니라, 감독이 전부 알아서 해야 했다. 감독이자 프로듀서이고, 또 제작실장인 상황이었지. 내가 섭외를 했을 텐데, 별 소음 없이 흔쾌히 허락을 받았던 것 같다. 

<지리멸렬>
<지리멸렬>

별다른 대사 없이 추격 장면으로 채워져서 무성영화를 보는 것 같다. 쫓고 쫓기는 이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결코 끝나지 않을 우화 속 주인공 같다는 느낌도 든다. 당시 지도교수였던 최하원 감독을 비롯해 학교에서는 어떤 평가를 받았나.

풍부하게 해석해줘서 고맙다. 무성영화 같다는 말도 반갑다. 당시 최하원 감독님과 최기풍 감독님이 지도해주셨는데, 코멘트는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코멘트를 해주셨던가? (웃음)   

 

<골목밖으로>를 포함해서 영화의 리듬감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음악인데, 예상외로 무척 서정적인 음악을 사용했다. 

맞다, 당시 영진공 녹음 기사님들이 의아하게 여겼다. 좀 더 박진감 넘치는 음악을 써야 하지 않냐며 만류하더라. “그게 아니라, 조용하고 나른한 음악을 써야 합니다. 추격이 아닌 척하면서 추격하는 이상한 분위기입니다.”라고 설명했는데,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셨다. 나는 묘한 뉘앙스를 살리고 싶었다. 논설위원은 쫓기는데 쫓기지 않는 척하고, 신문 배달원도 실은 쫓아가면서 아닌 척 신문을 배달하지 않나. 어쨌든 계속 우겨서 그런 음악을 썼다. 당시는 저작권 개념도 없던 때라, 집에 있는 LP 중에 몇 개를 추려서 들고 갔다. 

 

<고통의 밤>에 등장하는 지하 공간도 빼놓을 수 없다. <플란다스의 개>부터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지하는 감독의 영화를 구성하는 주요 공간 중 하나인데, 특히 <고통의 밤>에서 어두운 통로와 천장에 설치된 배수관을 조망하는 장면은 <플란다스의 개>와 아주 흡사하다. 몇 년 전에 구술한 자료에 따르면, 실제로 거주했던 아파트에서 촬영이 이뤄졌다고. <고통의 밤> 촬영 이후에도 해당 공간에 관심을 직접적으로 드러냈는데, 과연 어떤 기억이 지하실을 감독만의 보물창고로 만들었을지 궁금하더라. 

<고통의 밤>과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공간은 같은 곳이다. 송파구 방이동 대림아파트 6동 지하실. (웃음) 부모님이 사는 아파트였고, 결혼 전까지는 나도 거기서 살았다. 중학생 때 우연히 아파트 지하실에 내려간 적이 있다. 어떤 애들이 거기에 탁구대를 놓고, 공을 치고 있더라. 사방이 어두운 곳에서 백열등 하나만 걸고. 데이비드 린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풍경이었지. (웃음) 아주 묘하고 기괴한 느낌을 받았다. 안으로 더 들어가 보니 휴게실 같은 공간이 나왔다. 침대와 탁자 등 주민들이 버리려고 내놓은 가구를 경비 아저씨들이 수집해서 나름 방처럼 꾸며 놓았더라. 실제로 청소노동자나 경비원들이 거기서 커피를 마시거나 잠깐 눈을 붙이기도 했다. 밖은 대낮인데 지하실 내부는 온통 깜깜하고, 중산층이 버린 가구가 밑에서 재조합되어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그런 대비가 <지리멸렬>부터 <플란다스의 개>까지 쭉 이어졌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줄곧 아파트에서 살았다. 왜 계속 지하 공간에 집착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찌 보면 아파트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갖는 정서이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아파트 지하실은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나오지도 않거든.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과 매우 가깝지만, 의외로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장소에 관심이 많다.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에필로그에서 TV를 통해 가식과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은 <괴물>(2006)의 엔딩과 맞물린다. <괴물>의 강두와 세주가 뉴스를 끄고 밥을 먹듯, 에필로그의 신문배달원 또한 권위와 권력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에 개의치 않고 잠을 자러 들어간다. 감독 특유의 얄궂은 거리감이랄까, 반골 기질이 엿보이는 장면이다.

정확하다. 나도 <괴물> 엔딩을 찍을 때 <지리멸렬> 에필로그를 떠올렸다. 세주가 “테레비 재미없다. 끄자. 먹는 데 집중!” 하면, 강두가 리모컨을 찾다가 몸을 기울여서 발가락으로 탁 꺼버린다. <지리멸렬>과 명백히 같은 뉘앙스다. <지리멸렬>의 에피소드마다 누군가를 속이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준 인물들이 등장하고, 에필로그에서는 그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하지만 신문 배달하는 친구는 그냥 텔레비전을 끄고 잠자리에 든다. 아, 거기서 옆에 엎드려 누워 있는 사람이 나다. (웃음) 어쨌든 주인공들이 권위 있는 척 폼을 잡고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다른 사람들은 “I don’t care”인 거다. 얄궂은 거리감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본다. 반골 기질까지 품기에는 내가 소심하고 겁이 많다.

 

엔딩 크레디트에서 낯익은 이름을 찾아보는 즐거움도 있다. 아내인 정선영 님이 <지리멸렬>의 편집 스태프로 참여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인데, 이외에도 김뢰하 배우, 조용규 촬영감독, 조명에 장준환 감독 등 지나치기 어려운 이름이 여럿이다. 

아내는 <백색인>에도 참여했다. 아카데미 동기들과 다 같이 친하게 지냈고, 김병철 감독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는 등 스태프 품앗이도 많이 했다. 김뢰하 배우는 <백색인>으로 처음 만났다. 대학 동기 중에 극단 연우무대로 간 친구가 있는데, 걔한테 소개를 받았다. 그때가 김윤석, 송강호 배우가 연우무대 막내 단원으로 들어가서 극장 청소하는 시기였다고 하더라.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김뢰하 배우를 검사 역할로 염두에 뒀고, 대학교수 역을 맡은 유연수 배우는 김뢰하 배우가 추천해줬다. 유연수 배우는 <괴물>에도 출연한다. 한강에 진입하는 주인공 가족들에게 ‘삥’을 뜯는 구청 직원으로 나와서 묘한 연기를 보여준다.

 

1950년대부터 활동한 윤일주 배우가 <골목밖으로>에서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분했다. 

지금 상당히 고령이실 텐데, 건강하신지 모르겠다. 장선우 감독님의 <경마장 가는 길>(1991)에서는 문성근 배우의 아버지로 출연하셨고, <춘향뎐>(임권택, 2000)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다양한 작품에서 활동하셨다. 당시 단편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중장년 배우를 캐스팅하기가 쉽지 않았다. 젊은 배역의 경우, 연기 전공하는 또래 학생을 섭외하거나 대학로를 찾아가면 구할 수 있었다. 근처 대학 연극영화과 사무실에 가서 협조를 요청해도 되고. 근데 연세가 좀 있는 배우를 섭외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고민하다가 배우 협회에 등록된 분들한테 정식으로 의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협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입구에 사무국장님이 앉아 계시더라. “자네는 여기 왜 왔나?” 물으셔서 소개를 쭉 했다. “저는 영화아카데미에 다니는 봉준호라고 하고요, 지금 실습작을 찍으려고 하는데요”라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사무국장님이 대뜸 이리로 와보라면서 시나리오를 보여달라고 하시더라. “음, 경비원하고 논설위원이 필요하겠구먼” 하시더니, 바로 그 자리에서 셀프 캐스팅을 하셨다. “논설위원은 내가 하겠어. 경비원은 광진이가 잘하겠네. 박광진 어딨어? 잠깐 와보라고 해!”라며. (웃음) 오디션을 보거나 배우를 고른 게 아니라, 캐스팅을 선고받은 셈이었다. 그분이 윤일주 선생님이다. 참 멋지셨다.  미래에 영화계를 이끌 감독들이니 많이 도와줘야 한다면서 촬영 때 여러모로 배려해주셨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장비도 같이 옮겨주셨고.  

ⓒ소동성

이후 졸업하고 나서는 곧장 영화 현장으로 뛰어들어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 가지 이유>(1996) 등 여러 작품에 참여했다. 

충무로 연출부를 해보고 싶었는데, 지원했던 작품마다 계속 탈락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박광수, 1995)에 지원했을 때는 이미 자리가 꽉 찬 상태였다. 당시 최고 화제작이었기에 누구나 조감독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다. 박광수 감독님은 연출부에 창의적인 자극을 주시는 분으로 워낙 유명하시기도 했고. 그 다음에 문을 두드린 작품이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장선우 감독님의 <꽃잎>(1996)이었다. 지하철 2호선에 있는 88올림픽 다방에서 당시 퍼스트 조감독이었던 장문일 감독님한테 면접을 봤다. 거기서도 면접을 변변치 않게 보는 바람에 떨어졌다. (웃음) 좌절하던 차에 영화아카데미 1기 졸업생인 박종원 감독님과 일하게 됐다. 선배님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 <영원한 제국>(1995) 등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그 무렵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관련한 정치 드라마를 준비하고 계셨다. 시놉시스 작업에 참여하면서 함께 진행하다가 그 작품이 결국 엎어졌다. 

 

현장에서 일을 시작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때 연출부로 들어간 작품이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 가지 이유>다. 박종원 감독님을 포함해서 정지영 감독님, 강우석 감독님, 고 박철수 감독님 등 일곱 분이 모여서 만든 옴니버스 작품인데, 박종원 감독님이 맡은 에피소드에서는 시나리오 각색에도 부분적으로 참여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흑역사’라고 해야 하나. 사실 감독님들이 항상 필모그래피에서 살짝 뒤로 빼놓으시는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 (웃음) 참여했던 스태프들 입장에서도 작품 자체를 자랑스러워할 수는 없는, 약간은 서글프고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근데 나는 졸업 후에 당장 생계유지가 급했으니까. 이렇게나마 충무로 현장을 처음 경험한다는 것에 의의를 뒀다. 촬영 준비하며 슬레이트 치는 거 연습하고 그랬다. (웃음) 

 

당시 충무로 풍경은 어땠나. 도제 시스템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든지,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던 시기인데. 

단편 제작 현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영화가 대작이 아니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메커니즘은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충무로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도 사라졌다. 당시 무서운 소문이 많았다. 누가 누구를 때렸다더라, 군기를 엄청나게 잡는다더라, 누가 무슨 잘못을 해서 어떻게 잘렸다더라, 하는 이야기들. 긴장했는데, 막상 현장에 가보니 생각보다 분위기가 좋았다. 선배들한테 듣기로는 90년대 초까지도 폭언과 폭력이 잦았는데, 90년대 중반부터 반인권적인 상황이 줄어들기 시작했다고 하더라. 요즘은 알다시피 모든 스태프가 표준근로계약을 맺고, 급여 역시 미국이나 일본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지 않나. 격세지감이고, 참 좋은 일이다.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당시에는 계약서조차 제대로 못 썼으니까. 조감독 퍼스트만 제작사와 계약서를 쓰고, 그분이 돈을 받으면 연출부 애들한테 기분 내키는 대로 떼어주던 시절이었다. 그럼 우리는 불평도 못 하고 그냥 감사합니다, 하면서 받는 거다. 도제 시스템의 잔재이자 엄밀히 말하면 착취였다. 당시엔 그걸 영화를 배우고 일을 익힌다는 개념으로 묵묵히 참고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이었지. 오늘날 한국 영화 현장에는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시스템이 정착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괴물>
<기생충>

아마도 <지리멸렬>을 가장 관심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는 이들은 영화를 꿈꾸는 젊은 창작자일 거다. 창작자라면 누구나 재능과 지속 가능성을 일찌감치 고민하기 시작하는데, 감독은 어땠나. 언제 처음 ‘내게 재능이 있나? 내가 영화로 먹고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는지, 어떻게 답을 내렸는지 궁금하다.

궁극의 질문이자 공포의 질문이다. (웃음) 근데 이건 모여서 의논한다고 결론이 나는 문제가 아니다. 각자 참 외롭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 나 역시 말을 덧붙이기가 어렵다. 

 

과거에는 개인과 사회라는 대립 구도를 포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면, 요즘에는 사회적 이슈를 소재로 취하면서 개인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 많다. 최근 젊은 감독의 작품을 어떻게 보고 있나.

경향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트렌드’라고 부르는 것에는 항상 허상이 있다고 생각한다. 창작자 각자 무얼 하고 싶은지 파악하고 행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최근 작품을 보면서는 완성도에 놀랄 때가 많다. 기본적인 만듦새 자체가 굉장히 매끄럽고, 영화라는 매체를 다루는 솜씨 또한 탁월하다. 기실 초등학생도 스마트폰을 통해 촬영과 편집을 자유자재로 하면서 유튜브 영상을 만드는 시대이지 않나. 그런 면에서 더더욱 테크놀로지보다는 독창성에 집중해야 하지 않나 싶다. 모험 정신을 발휘하며 자기만의 방향을 고민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감독의 모험 정신도 기대된다. 현재 차기작과 더불어, 애니메이션을 준비한다고 들었다. 

새로운 프로젝트이지만, 쓸데없는 설렘과 흥분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한다. 계속해야 한다,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차기작은 영어 기반의 미국 작품이 될 것 같고, 현재 시나리오를 작업하는 중이다. 애니메이션은 CG 아티스트들과 차곡차곡 준비해나가고 있다. 공개한 바처럼 장기 프로젝트로 진행할 예정이고, 시나리오는 올해 1월에 완성한 상태다.  지난 20년간 만들어 온 호흡과 리듬, 습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평정을 갖고 작업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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