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한 나날
<느린 여름> 박찬옥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Feature / 2021-06-04

박찬옥의 인물들은 자꾸만 서성인다. <질투는 나의 힘>(2002)의 원상(박해일)은 여자친구의 새로운 연애 상대인 교수 주변을 맴돌며 불안을 곱씹고, 새로 만난 여자에게 설레면서도 발붙이지 못하고 부유한다. <파주>(2009)의 중식(이선균)과 은모(서우)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집은 편치 않은, 아니 위태로운 공간이다. 쌓여가는 비극과 더불어 서로에 대한 감정도 아슬아슬하게 부풀지만, 이들은 끝내 마음 둘 곳을 발견하지 못한다. 고등학생 박찬옥도 그랬다. “학교에 갇혀서 입시 공부만 하는 걸 견딜 수 없었”고, “꼼짝 못 하게 하는 그곳”을 벗어나 독서실에 앉아있어도 갑갑하긴 마찬가지였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만든 19분짜리 단편 <느린 여름>(1998)에는 그런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주인공 소년은 말한다. “잠자는 병에 걸린 것처럼 자꾸 잠만 자고 싶어져.” 하지만 소년은 잠에서 깨어나, 잠만 잘 수는 없는 다른 사람들을 관찰한다. 전철역에서 일하는 형,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누나, 홀로 손자를 돌보는 엄마. 소년은 태연히 그들을 바라보며 느린 여름 풍경 속을 아주 천천히 걷는다. 감독은 그때 어떤 마음으로 영화 속을 걸었을까. 그리고 지금은 어디를 걷고 있을까. 그의 보폭이 궁금해 만남을 청했다. (<느린 여름>은 6월15일까지 www.indieground.kr에서 볼 수 있다)

 

 

박찬옥 감독 만나러 간다고 하니 주변에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근래에는 제작자 포지션을 확인한 일이 몇 차례 있었는데, 어떻게 지냈나.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객원교수로 있는 동안, 학생들이 찍을 독립 장편을 선발하고 리뷰하면서 이름이 그렇게 올랐다. 엄밀히 말해 제작이라고 하긴 어렵지 않을까.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다음 영화를 암중모색 중이다.

 

<느린 여름> 상영 소식을 듣고는 어땠나.

영화 찍으며 고생했던 게 많이 생각나더라. (웃음) <느린 여름>은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만들었다. 청년의 제작비로 찍은 <생강>(정지우, 1996)이 영화제에서 수상해 상금이 생겼고, 그 상금과 개인 투자자에게 받은 돈을 합쳐 <느린 여름>의 제작비 6백만 원이 마련됐다.

 

고생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제작비 마련과 기술적인 부분. 지금 가장 생각나는 건 편집이다. 학교에서 영화 찍었을 때와 비교하면 스태프 수도 늘었고 다들 역량이 있었지만, 후반 작업은 나 혼자 알아서 진행해야 했다. 편집할 수 있는 기자재가 한양대에 있었는데, 난 졸업생이라 조교님께 허락을 구하고 방학 동안 몰래 편집실을 이용했다. 겨울밤에 필름이 든 가방을 지고 언덕을 올라 건물에 들어가면, 수위 아저씨가 문을 잠갔다. 거기 밤새 갇혀서 편집을 했다. (웃음) 아비드보다 오래된, 무비올라라는 수동 편집기를 사용했다.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은데, 아마 책임감 때문일 거다. 어렵게 마련한 상금과 개인 투자자의 지원으로 영화를 찍었던 거니까, 어떻게든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느린 여름>
<느린 여름>

마음도, 몸도 고생이었겠다.

특히 어려웠던 게 녹음이다. <느린 여름>은 내게는 첫 번째 동시녹음 영화였고, 영화제작소 청년으로서는 두 번째 동시녹음 영화였다. 디지털 녹음기기를 샀는데 싱크를 어떻게 맞추는지 우리로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당시 컴퓨터로 음악 하시던 분께 부탁해서 사운드 디자인을 했다. 영화의 전체 프레임 수를 세서 러닝타임을 계산하고, 거기 사운드 시간을 맞춘 다음, 과연 싱크가 맞을까 걱정하면서 작업을 했다. 광학녹음 해주시는 분도 이렇게 해서 맞을 수 있겠냐고 의아해하셨는데, 해보니 딱 맞았다. (웃음) 그런데 배음 문제로 녹음을 다시 하게 된 거다. 작업해주신 분의 집에서 밤을 새우고 그분 할머니 방에서 잤던 기억도 난다. 녹음을 다시 하며 결국 제작비가 초과됐다. 대학 들어가면서 어머니가 언젠가 급할 때 쓸 수 있을 거라고 금반지를 해주셨는데, 정말 그걸 쓸 날이 오더라.

 

영화제작소 청년은 1990년에 결성된 단체다. 기록에 박찬옥 감독은 <셔터맨>을 찍은 1994년부터 함께한 것으로 나오는데. 

<셔터맨>은 영화제작소 청년하고는 상관없다. 난 아마 1996년부터 합류했을 거다. 한양대 다닐 때부터 청년 회원들과 교류가 있었고, 회비 내는 회원이 된 건 학교를 졸업한 이후다. 회원이 되고서 정지우 감독의 <생강>, 김용균 감독의 <저스트 두 잇>(1996)을 같이 만들었다. 그때는 이미 모두가 학생 신분을 벗어난 상태였다. 작은영화제라고, 동숭아트센터에서 청년 회원들의 영화를 모아 틀었던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만들었던 영화 목록을 한번 정리했는데, 아마 그 기록이 남아있는 것 같다. 그리고 <셔터맨>은 공동연출이라, 첫 번째 영화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럼 <캣 우먼 & 맨>(1995)이 첫 번째인가.

그렇게 볼 수 있겠다. 난 학사편입으로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그게 3학년 때고, 당시 4학년이던 정지우 감독, 3학년이던 김용균 감독이랑은 함께 수업을 들은 클래스메이트 사이다. 그런데 커리큘럼 상 3학년 1학기 때는 영화를 못 찍고, 2학기 때 찍게 되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그때 그간의 역량을 모아 좋은 영화를 만든다고 말씀하시더라. 4학년 때는 잡념이 많아져 별로 안 좋다면서. (웃음) 어쨌든 나로서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 아닌가. 그래서 여름방학에 워크숍을 하며 <셔터맨>을 겨우 완성했고, 2학기 정식 수업에서 <캣 우먼 & 맨>을 찍었다.

ⓒ이영진

영화제작소 청년 소개 글을 찾아보면 상당한 공동체 의식이 느껴진다. 자체 제작을 꿈꾸고, 주류 이데올로기를 반성하고, 대표도 순번제로 했다고. 청년에서의 시간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나.

난 처음부터 같이 활동했던 건 아니고, 친구 따라 강남 가듯 들어가지 않았나. 내가 합류했을 때는 이미 사무실도 마련되어 있었고, 기자재도 구비되어 있었다. 청년은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상인, 1991)을 공동제작하며 만들어졌는데, 당시 학생들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등록금을 모았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로 계속 활동한 사람도 있고, 나간 사람도 있고, 그런 상태에서 내가 들어간 거다. 영화를 찍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예산서 쓰는 방법을 거기서 처음 배웠다. 그걸 옆에서 지켜봐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회원들이 다 같이 제작자가 되어 영화를 만들었고, 개인의 연출에 대해서는 존중을 해줬던, 그런 곳이었다.

 

<느린 여름>을 만들 당시, 창작자로서는 어떤 시기를 보내고 있었나. 학교를 졸업하고 계속 연출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을 테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

경험을 쌓아가는 중이니까, 이전에 찍은 영화와는 좀 다르게 만들어보려고 했다. <느린 여름>은 내 영화중에는 처음으로 드라마가 있고 일상이 있는 작품이었다. <캣 우먼 & 맨>은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 그렇지 않았고, <있다>는 대사가 없는 영화였다. 아마 동시녹음이 가능해지면서 저절로 드라마와 대사가 있는 작업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 당시에 또 관심 있었던 건, 멀티 시점이었다. <느린 여름>에서 그런 부분들을 시도해보려 했다.

 

훗날 <파주>를 함께 한 김우형 촬영감독과 작업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일상을 찍지만 지루하지 않은 화면, CCTV처럼 높은 앵글이 기억에 남는다. 촬영에 관해선 어떤 점을 신경 썼나.

촬영을 전문으로 전공한 사람과 처음 영화를 찍는 거였다. 그러다 보니까 준비를 좀 해야겠다 싶어서, 촬영감독이랑 콘티 짜는 자리에 이미 어떻게 찍겠다는 걸 다 생각하고 나갔다. 그런데 나중에 김우형 촬영감독이 “다음에는 같이 찍자.”고 하더라. (웃음) 내가 생각해온 그림을 공유하기만 했지, 같이 한 게 아니었던 거다. 지금도 생각나는데, 처음 만난 자리에서 촬영감독이 “이 영화에서 촬영의 기저는 뭐야?” 하고 물었다. 나는 “기저?” 했고. 그때는 촬영에 대한 명료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냥 본능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김우형 촬영감독이 정리해줬다. 일상을 찍는 영화니까 양식적이지 않은 앵글을 쓰고 싶다든지,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기보다는 관찰자 시점으로 가기 때문에 앵글 위치를 높게, 사이즈를 크게 한다든지.

<캣 우먼 & 맨>
<있다>

드라마가 도입됐다고는 하지만, 특유의 거리 두기가 흥미롭다. 방금 언급한 앵글과 시점도 그렇고, 관찰자적 이야기에, 심지어 크레딧을 보면 이름이 있는 캐릭터가 하나도 없다.

일단 내레이션을 하고 싶었다. 그전에는 안 해봤던 거니까 내레이션으로 감정 상태를 표현하되, 극 밖으로 뛰쳐나가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캐릭터를 감정적으로 따라가면서 사실적인 것처럼 관객을 극에 전부 몰입시키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럽지 않나. “이건 영화야” 하며 관객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해설자처럼 굴기도 하면, 완전한 일루젼이 형성되는 게 아니라 조금씩 극 바깥으로 튀어나갈 수 있다. 감정을 따라가더라도 좀 거리를 두고 보는 게 나로서도 편할 것 같았고.

 

수능이 100일 남은 소년들의 별다른 것 없는 시간, 서성이는 시간을 영화의 중심으로 삼은 이유가 있다면.

고3 때 경험이 특별했던 것 같다. 늦은 사춘기랄까. (웃음) 전두환 정권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녀서 자율학습 시스템이었다. 1, 2학년 때도 입시 분위기는 있었지만, 그래도 같이 놀고 일탈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런데 고3 수험생이 되자 누구한테 같이 놀자고 말하기도 어렵더라. 너무 갑갑했다. 그래서 독서실에 다녔는데, 그렇다고 공부를 의욕적으로 하는 모범생도 아니었고 딱히 잘 노는 아이도 아니었다.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영화 첫 장면에 나오는 것처럼 책상 아래서 자는 게 전부였다. 되게 무기력하고, 괴롭고, 졸렸다. 화장실에서 교실까지 가는 게 벅차게 느껴졌던 게 기억난다. 그래서 고등학생이 주인공인 영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더 잘 노는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려고 했는데, 당시에 그런 영화가 많이 나왔다. 그래서 원래 내가 지녔던 모습으로 다시 가게 됐다.

 

주인공이 바라보는 가족 구성원들의 상황도 밝지만은 않다. 어딘가 막혀있고, 무력하다. 아마 영화를 만들던 당시의 정서와 관련되지 않을까.

맞다. (웃음) 고등학생 시점으로 영화를 만들었지만, 이미 나는 20대 후반이었으니까. 그때는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없다는 걸 알 때고, 인생이 기쁘고 행복한 순간으로 꽉 찬 게 아니라는 걸 느낄 때다. 의무와 도리 같은 게 있지 않나.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게 또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니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영화 대사에도 그런 게 있지 않나. “형한테 아이가 있는 게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불행인 것 같기도 하고.”

ⓒ이영진

마지막에 소년들은 노래방에서 무한궤도의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를 부른다. 왠지 맨 처음부터 이 노래를 넣기로 했을 것 같더라.

지금은 여기 안 계신 신해철 씨의 노래인데…. 그를 좋아해서 콘서트에도 갔던 기억이 난다. 신해철 씨의 곡들이 내겐 참 재미있었다. 뭐랄까 가사를 직설적으로 쓰지 않나. 추상적이거나 돌려 말하지 않는 솔직함이 있다. 당시의 다른 곡들은 자연, 사랑, 그런 것들을 마치 시처럼 썼는데, 신해철 씨의 가사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막 솔직한 고민도 가사에 쓰고 말이다. 곡 스타일도 굉장히 독특하다. 모든 곡이 가요제 곡처럼 볼륨감이 있고, 스케일도 이만큼 크다.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의 가사가 정말 진실하고 솔직하게 느껴졌다. 도입부에서부터 자율학습 세대의 고등학생이 주인공으로 설정되어있는 느낌이 든다. 캄캄한 밤에 교실에 앉아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는 거다. 나와 같은 세대인 거지. 이 노래를 노래방에서 부르는 건 이미 시나리오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앞서 작은영화제 같은 시도도 이야기해주었는데, 열심히 만든 영화로 관객을 만나는 경험은 어땠나.

나는 만드는 즐거움에 더 빠져있었지, 관객이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희박했던 것 같다. 첫 장편을 만들고 나서,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수익을 내야 또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처음에 손익분기점을 못 넘겨서 어떻게 하면 많은 관객이 영화를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며 두 번째 장편을 만들었는데, 또 잘 안 됐다. 그래서 낙담했지. 여전히 어려운, 제일 어려운 일이다. 관객이 많이 보면서, 창작자도 좋아서 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 참 어렵다.

 

<질투는 나의 힘>과 <느린 여름>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말한 적 있다. 소년기의 무기력함이 청년기의 티 내지 않는 불안으로 이어진 것 같기도 한데, 관련성을 짚어본다면.

본인의 문제와 주변 사람들의 문제가 맞물린다는 지점이 아닐까. <질투는 나의 힘>도 <느린 여름>처럼 누구를 관찰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나. “도대체 저 유부남은 어떤 사람이길래?” 하는 거니까. (웃음) 그런데 <느린 여름>에서는 인물의 조건들이 뭉뚱그려져 있다. 그냥 수험생이니까 힘들지, 가장이 원래 힘들지 하는 식으로. <질투는 나의 힘>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상태가 있다. 여자친구한테 배신을 당한다든지 하는. 그런 구체적인 상황을 끌고 오는 게 상업영화의 방법인 것 같다.

<질투는 나의 힘>
<파주>

한편으로 <느린 여름>은 앞서 말한 책임감의 측면에서 박찬옥 감독에게는 일종의 기점일 것 같다. 남의 돈으로 영화를 찍기 시작한 거니까.

맞다. 이전에는 그냥 “엄마 나 학교에서 이런 그림 그렸어.” 하는 느낌이었다면, <느린 여름>은 달랐다. 또 이 영화로 처음 상(제3회 부산국제영화제 선재상)을 받았다. <있다>도 여성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지만, 순서로 따지면 <느린 여름>이 처음이다. 그게 기점이 되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들어가게 됐고, 커리큘럼으로 충무로 연출부를 하면서 장편영화를 만들고 싶어졌다. <느린 여름>을 만들면서 어쩌면 이 영화가 내 마지막 영화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다음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도록 이어줬다.

 

일상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독특함을 찾아내는 편인 것 같다. <파주>는 인물의 상태에서 시작했다고 했는데, 개인적으로 창작이 시작되는 지점은 어디인 것 같나.

일단은 여러 요소가 맞물리는 거라고 생각한다. <느린 여름>은 고등학생이 주인공인 영화를 생각했던 건데, 구체적으로 시나리오를 쓰게 된 계기는 지하철에서 고등학생 두 명이 티셔츠를 바꿔 입는 걸 보면서다. 굉장히 인상 깊은 순간이었다. 정말 자유로워 보였다. 그러면서 고등학생 두 명이 나오는 영화로 만들게 됐다. <질투는 나의 힘>은 내 청년기가 끝나간다고 느껴서 청년이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자고 한 게 시작이었고, 기형도의 시를 보면서 “아, 이게 바로 청년들의 감정이지” 하면서 연결이 됐다. <파주>는 카뮈의 『반항적인 인간』을 보면서, 어떤 집단에서 혼자 다른 생각을 하는 인물을 떠올리며 시작됐다. 그러니까, 사람의 어떤 기질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느린 여름>은 진공감, 쉽게 말하면 무기력감이었고, <질투는 나의 힘>은 결핍과 질투, <파주>는 배덕감인 셈이다. 여러 사람의 보살핌과 도움, 집단이 다 같이 추구하는 걸 망치는 사람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좀 협소하지. 상업영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스토리를 잘 구성했어야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박찬옥 감독의 다음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혹 들려줄 수 있는 계획이 있나.

구체적인 건 없다. 여전히 어려움을 느낀다. 내가 관심을 갖는 인물의 어떤 면을 가지고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쉽지 않다.

 

그럼 현재의 관심은 어딜 향하고 있나.

음, 사람이 자기합리화를 하지 않나. 자기를 속이지 않으면 자기 존재가 흔들리기도 하는데, 그런 데 관심이 있다. 또 예전에는 카인에 더 관심을 두었다면, 요즘에는 반대쪽에 있는 사람, 참는 사람에게 눈길이 간다. 말하고 보니 너무 피상적인데. (웃음) 아무튼 그런 상태다.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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