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테크노
<창백한 푸른 점> 민규동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Feature / 2021-06-03

민규동의 필모그래피는 종잡을 수 없다. 데뷔작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메멘토 모리>(1999)는 흥행에 성공한 시리즈 전작 <여고괴담>의 공식을 모조리 깨뜨렸다. 불균질한 매혹으로 가득한 영화에 깜짝 놀랐던 이들은 다음 영화 역시 고집스러운 개성을 내세운 작품일 거라 여겼지만, 그가 옴니버스 로맨틱 코미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2005)에서 주력한 것은 보편적 낭만과 대중적 웃음이었다. 따져 보니, 민규동은 그 후로도 쭉 그랬다. ‘꽃미남’ 스타를 앞세운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2008)에서는 불쑥 트라우마를 파고들었고, 기막힌 삼각관계를 선전한 <내 아내의 모든 것>(2012)에서는 소통에 관해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기대를 배반하고 예상을 뛰어넘으면서, 민규동의 작품 목록은 점점 다채로워졌다. <간신>(2015)과 <허스토리>(2018) 등 근래 작품까지 펼쳐 놓으면, 무엇보다 다양한 장르를 고루 섭렵했다는 점이 맨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지난해는 <간호중>을 통해 첫 SF에 도전하기도 했다. “맛집이 되려면 뷔페가 아니라 하나를 파야 하는데, 아직 그게 안 되네요. (웃음)” 민규동은 뒤죽박죽이라고 자평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왕성한 호기심은 일찌감치 정체를 드러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재학 시절, 김태용 감독과 공동연출한 <창백한 푸른 점>(1998)은 이렇다 할 설명 없이 곧장 미지의 세계로 이동한다. 인류 구원을 꿈꾸며 참선에 열중하던 남자는 꿈과 현실을 넘나들고, 삽입된 애니메이션과 테크노사운드는 알쏭달쏭한 분위기로 흥미를 자아낸다. 제작 당시에는 의미를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이 영화, 23년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 확인하고 싶으면 인디그라운드. (www.indieground.kr)

 

 

함께 만든 김태용 감독이 빠졌다. 괘씸하지는 않나. (웃음)

괜찮다. 실은 나도 이 영화를 오랜만에 본다. 필름 시대에 만들지 않았나. 다른 작품과 함께 VHS로 제작된 적도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파일이 없으니 그동안 쉽게 볼 수는 없었다. 다시 보면 좀 낯설겠지. 당시 무명 연극배우였던 이준혁 배우가 출연한다. 학생 영화치고는 꽤 큰 캐스팅을 한 작품처럼 보일 것도 같다.

 

이준혁 배우의 마임 연기가 눈에 띈다. <미스터 고>(김용화, 2013) 등에서 모션 캡처 전문 배우로 활동하기도 하는데, 이때부터 몸을 잘 쓰기로 유명했나.

연극배우인데 마임을 잘했다. <창백한 푸른 점>은 기획할 때부터 대사 없이 몸을 많이 쓰는 콘셉트였다. 그 친구의 장점을 알고 있었고, 불러서 할 수 있는 걸 다 시켜봤다. 재밌게 해보라고.

<창백한 푸른 점>
<창백한 푸른 점>

앳된 얼굴의 이준혁 배우가 “도 닦는 남”으로 등장하고, 검은 토끼는 갈릴레오 갈릴레이라는 이름을 지녔다. 과감하고 기이하다. ‘세기말 감성’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그럴 수 있지. 당시 김태용 감독과 그런 대화를 많이 했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메멘토 모리>(1999)도 원래 할 생각이 없었다. 무슨 공포영화 속편이냐면서 하나 잘 됐다고 또 만드는 관습 같은 건 사라져야 한다고 비난하는 입장이었다. 근데 20세기의 마지막이 우리 영화로 기록되면 재밌겠더라. 당시 우리가 쓰던 폴더 이름이 ‘Y2K’였다. 2000년은 종말을 상징했고, 우리는 소멸의 두려움에 관해 자주 이야기했다.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에 끌린 이유와도 연결된다. 우주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하잖아. 그런 세계관을 받아들이자 많은 것이 달라 보였다.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겸허해졌지. 그래서 영화를 만들 때 오마주 차원에서 제목을 그대로 가져왔고, 애니메이션을 통해 인류의 진화를 보여주려 했다.

 

종말에 대한 불안을 영화의 씨앗으로 삼은 셈이다.

요즘과 비슷했다. 엘니뇨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기후 변화가 화두였고, 90년대가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디스토피아 담론이 등장했다. 당시 자주 꿨던 악몽을 소재로 이야기를 구성했고, 묵시론적 관점에서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작품을 만들었다. 애초 목표는 ‘한 곳에서 한 컷으로 찍어 하루 만에 끝내기’였다. 처음 찍은 영상이 3분 정도였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남더라. 심심하니까 한 번 더 찍으면서 여러 가지를 시도해봤다. 애니메이션도 넣고, 마임 동작에 맞춰서 카메라도 움직여보고. 오프닝에 등장하는 토끼는 지인한테 빌렸는데, 두 번째 촬영할 때는 토끼가 없었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토끼가 상자에서 나왔다가 들어가면서 마무리하는 형식이지 않나. 고민하다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리와인드를 했다. 지금은 별거 아니지만, 당시에는 비용이 꽤 드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사실 크리스토퍼 놀란이 우리 아이디어를 많이 가져갔다. (웃음) <창백한 푸른 점>의 모티브를 재활용하면서 <인터스텔라>(2014)를 만들었잖아. 내가 그 영화를 볼 때 속으로 ‘아, 꽁꽁 숨겨놨는데 잘도 찾아냈구나’ 했다. 결국 왜곡된 시간 속에서 인류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지 문제제기하는 건데, 우리가 너무 앞서 나갔지. 사람들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더라고. (웃음)

 

원래 꿈을 많이 꾸고 기억도 잘하는 편인가.

난 평생 꿈을 꿔온 사람이다. 악몽이 잦아서 힘들다 보니 대개 잊으려고 애쓴다. 크리스토퍼 놀란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다. <인셉션>(2010)을 봤을 때도 감탄했다. 꿈의 논리와 세계를 정확하게 표현했더라. 정말 10분을 자도 10시간짜리 꿈을 꾸거든. 동갑이기도 하고 좋아하는 감독이다. 내 첫 번째 영화의 부제가 ‘메멘토 모리’ 아닌가. <메멘토>(2000)랑 같은 영화제에서 상영한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비슷했는데, 이제 많이 달라졌다. (웃음)

ⓒ이영진 

엔딩 크레디트에는 “파울 드리센의 ‘달걀 죽이기’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달걀 죽이기>는 3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애니메이션이고, 파울 드리센은 비틀즈의 Yellow Submarine 뮤직비디오에 참여하기도 한 네덜란드 감독이다. 당시 이 작품을 어떤 경로로 접했는지, 영감이라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다.

플롯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사실 아이러니는 오래전부터 시나리오에 사용된 플롯인데, 그걸 인간 중심적 사고에 접목하면서 인과응보라는 맥락으로 응용했다. 한창 해외 애니메이션에 심취했을 때다. 당시 ANC코오롱이라는 케이블 채널에서 매주 실험영화와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 전부 비디오로 녹화해서 친구들과 돌려 보며 연출 기법이나 문법을 공부했다. 사실 우리는 기존 영화에 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저항하고 봤던 거다. 영화를 무겁고 진지하고 대단한 무엇으로 여기는 인식에 본능적으로 반발심이 생겼다. 나는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영화를 처음 배웠는데, 첫 촬영 수업에서 선생이 카메라 가방을 들고 삼각대 주변을 세 바퀴 돌라고 하더라. 촬영이 얼마나 경건한 일인지 되새기라는 의도였다. 단편영화를 만들면 엔딩 크레디트에 감독이라고 쓰지도 못했다. 그냥 연출이라는 행위를 한 것이지, 감히 어떻게 감독이라는 호칭을 붙이냐고. 지금과 달리 호칭 자체가 특별한 권위를 의미했던 거다. 영화에 접근하기 어렵게 만드는 허들이 늘 존재했기에, 영화가 얼마나 다양한 양식을 가졌는지 철부지처럼 외쳤던 것 같다. 반골 기질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면에서 김태용 감독과 죽이 잘 맞았다.

 

<창백한 푸른 점>은 한국영화아카데미 13기 동기인 김태용 감독과 단편 <열일곱>(1997)에 이어 두 번째로 공동연출한 작품이자, 둘의 졸업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학교와 영화제에서는 어떤 평가를 받았나.

졸업작품에 얽힌 역사가 길다. 본래 학생 중에 3명만 졸업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13기부터 교육비를 내기 시작했는데, 한 쿼터에 60만 원이었으니 거의 대학 등록금 수준이었다. 학생들이 요구하는 교육 수준은 높고, 아카데미 강의 수준은 굉장히 낮았다. 여러모로 충돌을 빚는 시기였다. 그 와중에 내가 졸업을 앞두고 18명 전원이 수료작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 학생들 다 그거 하려고 왔고, 돈까지 받아놓고 작품을 못 만들게 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막 우겼지. 논의를 거듭한 끝에 아카데미 최초로 그해 학생 전원이 졸업작품을 만들었다. 9명씩 2조로 나눠서 움직였다. 8편에서는 스태프로 일하고, 1편을 연출하는 방식이었다. 귀한 기회다 보니, 다들 엄청난 영화를 만들려고 애썼다. 당시 영화에는 엄숙주의가 상당했는데, 나랑 김태용 감독은 그런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열심히 준비해서 영화를 찍는 친구들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안 할래” 했다. 진지한 드라마나 정치적 발언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친구들 입장에서는 당황했겠다.

개념 없다고 생각했겠지. 애들이 전국을 돌면서 찍는 동안, 우리는 매일 놀던 카페에 가서 이상한 거 찍고 왔으니까. (웃음) 선생님께 되게 욕먹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점수가 나쁘지는 않았다. 발상이 참신하다고 칭찬해주시더라. 졸업영화제도 그해 최초로 열렸다. 이전까지 아카데미에서 만든 영화는 해외 영화제에만 출품이 가능하고, 국내에선 공개 불가가 원칙이었다. 내가 영화진흥위원회 담당자에게 장문의 편지를 두 번이나 보냈다. “우리 아버지는 택시 기사이고 한 달 급여가 43만 8천 원이다. 어머니는 결혼식장에서 폐백 아줌마로 일하신다. 두 분이 아들을 위해 생활비와 영화 제작비를 보내시는데, 내가 영화를 보여드릴 수가 없으니 만든다는 것도 증명할 수가 없다.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결국 국내 영화제 출품 제한이 풀렸고, 졸업영화제 개최도 허가를 받아냈다. 대신 지원금이 없었다. 돈은 알아서 구하라는 것이 영화제 개최 조건이었다.

ⓒ이영진 

그럼 예산도 직접 마련했나.

친구들이랑 셋이서 150만 원을 모았다. 내가 MTM에서 50만 원을 받았는데, 이후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메멘토 모리>에 그때 담당자를 단역으로 출연시키며 빚을 갚았다. (웃음) 그 돈으로 동숭시네마테크를 2박 3일 대관해서 첫 영화제를 열었다. 우리끼리 팸플릿도 만들고, 부모님과 친구들도 초대했다. 영화제 반응이 너무 좋았다. 사람들도 많이 왔고, 다들 신나게 봤지. 덕분에 다음 해부터는 지원을 받으면서 영화제가 개최될 수 있었다.

 

춤추고 랩하는 인물로 화면을 채운 <열일곱>, 애니메이션과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창백하고 푸른 점>, 공포영화이자 퀴어영화인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메멘토 모리>에 이르기까지 이 무렵 다양한 실험에 몰두했다. 감독만의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철이 없었다. 그때 봉준호 감독은 충무로에서 연출부 생활하면서 열심히 데뷔 준비했는데. (웃음) 나나 김태용 감독이나 직업적 욕망이라고 할 게 없었고, 딱히 충무로에 가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우리는 졸업 후에 3D 애니메이션을 준비했다. 서울대학교 공대와 협업해서 회사를 만들고, 시각 디자이너 13명과 함께 3분 남짓한 트레일러를 제작했다. 1년 동안 시나리오를 두 편 썼다. 기후 위기로 멸망한 도시를 등에 업고 50km 상공을 돌아다니는 거대 로봇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1995년에 <토이스토리>(존 라세터)가 나온 이후, 3D 애니메이션이 영화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비전에 도전하자고 의기투합했는데, 아주 어이없게 끝났다. 한 애니메이터가 시나리오를 훔쳐서 다른 곳에 팔아버렸거든. 황당한 엔딩 끝에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메멘토 모리>를 제안받으면서 첫 영화를 급하게 만들었다. 전혀 다른 점프컷을 시도했던 거다.

 

20년 전에 SF 애니메이션을 준비하다니.

그것도 3D로 말이다. 지나치게 무모한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봉준호 감독이 이제 하잖아. 오스카 이후에야 가능한 작업이라는 건데, 우리는 데뷔하기도 전에 했으니까. 어릴 적부터 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얼리어답터’였다. 시티폰이 나오자마자 구입했고, 컴퓨터도 부품을 사서 직접 조립했다. Windows 95를 95번 정도 깔았지. (웃음) 당시 3D는 전인미답의 영역이었기에 더 재미를 느꼈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내 아내의 모든 것>

첫 영화가 ‘점프컷’이었다는 말에 놀랐다.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자연스럽게 산업으로 이동하는 데 성공한 경우라고 봤는데.

좌충우돌처럼 보이지 않나? 목적 지향적인 삶을 살았다면 바위가 나타나도 뚫고 나갔을 텐데, 나는 그냥 흘러온 것 같다. 김태용 감독의 경우, 원하지 않는 작품은 아예 안 찍는 방식을 선택했다. 나는 원치 않아도 일단 만들면서 다른 의미를 찾아내는 쪽이었다. 무계획 상태에서 데뷔를 치렀다고 해야 할까. 준비가 안 된 상태였기에 무겁게 다가오지 않았고, 신중하지도 않았다. 제작사에 거절 의사를 밝혔다가 일주일 만에 마음을 돌렸다. 진짜 지구가 멸망할 것 같으니까. (웃음) 제작사에서는 세 번만 놀래켜 달라고 하고, 우리는 <해피 투게더>(왕가위, 1997)처럼 만들겠다고 했다. 당시 왕가위 영화가 워낙 유행이었거든. 결국 영화 자체를 향한 사랑보다는 문화 혹은 역사에서 파생한 다른 관심사로 움직였던 것 같다.

 

김태용 감독이 <가족의 탄생>(2006)을 개봉한 후에 이런 말을 했더라. 흥행 감독 되면 삶이 변할 줄 알았는데, 민규동 감독을 보니 별수 없다는 생각에 막막하다고. (웃음) 흥행 감독이자 중견이 된 지금, 연출자로서 자신을 총평한다면.

김태용이 나를 놀린 것 같은데? <가족의 탄생>(김태용, 2006)이 잘 안 됐잖아. 먼저 개봉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보면서 놀리고 싶었겠지. “너 흥행 노리고 만들더니 그게 영화냐? 쌤통이다!”라는 비판적 조롱처럼 들린다. (웃음) 사실 감독들은 영화를 만들고 잘 되면 이런 덕담을 주고받는다. “축하해요. 다음 작품 하겠네요.” 말이 덕담이지, 굉장히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주는 거다. 한 작품이 은퇴를 결정할 만큼 위태롭고 불안하다는 뜻이니까. 내가 한국영화감독조합 대표를 맡고 있는데, 주변에 힘들어하는 감독들이 정말 많다.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기회가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조합에서 조사해보니 차기작을 선보이기까지 평균 4.6년이 걸린다고 나왔다. 그럼 누군가는 영화를 10년에 한 번 만든다는 뜻이다. 독립영화는 상업영화에 비해 제작 주기가 빠르고, 1년에 한 편씩 만드는 이준익 감독 같은 사람도 포함한 결과이니까. 영화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나갈 길을 고민해야한다. 매번 엄청나게 뛰어난 작품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사실 잘 만드는 것보다 만드는 일 자체가 어렵게 느껴진다. 한편, 영화는 늘 0에서 시작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험이 쌓이고 연륜이 생기는 건 사실이지만, 관객에게는 그냥 새 작품일 뿐이지 않나. 언제나 무서운 승부일 수밖에 없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재학 시절 인터뷰에서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를 이상형으로 꼽았더라. 지금도 있나. 이상형이라고 부를 감독?

진짜 안 어울리지. <간신> 같은 영화를 만든 감독이 무슨 키에슬로프스키냐고 하겠다. (웃음) 모든 카페에 <블루>(1993)나 <레드>(1994) 포스터가 걸려 있는 때였고, 나는 번역도 안 된 자서전을 찾아 읽을 정도로 키에슬로프스키를 좋아했다.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짓을 보여줬던 라스 폰 트리에 감독에게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금은 크리스토퍼 놀란처럼 SF나 액션 블록버스터를 통해 본인이 원하는 세상을 펼쳐 보이는 감독들이 부럽고, 또 재미있다. 관객과 상관없이 영화제를 통해서 증명 받고자 하는 욕망이 팽창하는 시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두 영역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도 없고. 어쨌거나 새로운 기술과 플랫폼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이다. 뭔가를 예측하기도 어렵고, 예측한 대로 흘러 가지도 않을 거다. 무엇이 됐든 재미있는 걸 선택하고 싶다. 나의 재미와 관객의 재미가 일치하면 좋겠지. 관객은 나보다 훨씬 빨리 변하니까 계속 공부해야 한다.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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