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그렇게
<인트로덕션> 신석호·박미소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1-05-25

홍상수 감독의 25번째 영화 <인트로덕션> 개봉을 일주일 앞두고 신석호, 박미소 배우를 만났다. 총 3막으로 구성된 영화에서 장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배우는 오직 둘 뿐이다. 영호(신석호)와 주원(박미소)은 계속해서 누군가를 찾아간다. 오랜만에 방문했거나 처음이라 낯선 장소에는 영호와 주원 입장에서 알 도리가 없는 규칙과 역사가 존재한다. 결국 영호는 문밖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끝내 만나지 못한 채 돌아오고, 독일로 유학을 떠난 주원은 어머니와 그의 옛 친구 옆에서 경직된 얼굴로 시종일관 눈치를 살핀다. 두 인물은 누군가가 이미 뿌리 내린 공간에서 부유하는 이방인이며, 그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관계가 자리 잡은 공간에서 서로를 간절히 끌어안는 젊은 연인이다. 

두 배우는 건국대학교 영화과 재학 시절, 홍상수 감독과 선생과 제자로 인연을 맺었다. 신석호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를 시작으로 <풀잎들>(2017) <강변호텔>(2018) <도망친 여자>(2019) 등에 배우 겸 스태프로 꾸준히 참여해왔고, 박미소는 <인트로덕션>을 통해 영화에 입문했다. 작품 속 인물처럼 매일 새로운 과제를 직면했지만, <인트로덕션>은 “자유롭고 행복한” 현장이었다. 두 배우는 그곳에서 가장 귀하고 강한 걸 배웠다. 연기는 혼자 할 수 없다는,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귀 기울이고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미래를 가늠할 수 없기에 불안하지만, 그러므로 지금 만나고 경험하는 모든 것에 충실하고 싶다는 두 배우의 마음을 들었다.

 

 

곧 개봉인데 떨리겠어요. 홍상수 감독과 최근에 나눈 대화에선 어떤 말이 오갔나요.

신석호_ 어제 뵀어요. 영화에 관해서 특별히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고, 대신 감독님이 영화 포스터에 편지를 써 주셨어요. “너의 부분을 참 곱게 드러내 줘서 고맙다. 덕분에 영화도 곱게 나온 것 같다.” 그렇게 적혀 있더라고요.

 

박미소 배우도 편지 받았나요. 

박미소_ 네, 같은 내용이에요. (웃음)

 

두 분은 학교 다닐 때부터 아는 사이였어요?

신석호_ 이번 현장에서 처음 봤어요. 미소 씨랑 학번 차이가 있다 보니 학교 다니던 시기가 겹치진 않아요.

박미소_ 저는 2019년 가을에 감독님 수업을 들었는데 종강 후에 갑자기 연락을 주셨어요. 영화 촬영 관련해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셔서 만나러 갔어요.

 

눈에 띄는 학생이었나 봐요.

박미소_ 전혀요. 저는 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학기 내내 조용히 수업만 들었어요. 과제는 열심히 했지만요. (웃음) 이렇다 할 일 없이 수업이 끝났는데, 방학 중에 연락받고 깜짝 놀랐어요.

 

그때가 언제쯤이에요?

박미소_ 2020년 1월이요. 

 

2막을 독일에서 촬영했어요. <도망친 여자>로 베를린영화제에 참석했을 때죠?

신석호_ 처음부터 저희가 같이 갔던 건 아니에요. 감독님과 김민희, 서영화 선배님이 영화제 참석을 위해 베를린에 먼저 머물고 계셨어요. 감독님이 공식 일정을 모두 마친 후에 연락을 주셨고요. 베를린으로 와서 촬영하면 좋겠다 하셔서 둘이 후발대로 갔어요.

박미소_ 엄청나게 긴장했어요. 사실 촬영 준비하고 끝나기까지 그 모든 과정이 선명하게 기억나진 않아요. 어떻게 흘러갔나 싶어요. 워낙 훌륭하신 선배님들과 함께했잖아요. 게다가 저는 장편 영화에 참여해본 경험도 없었고요. 많이 떨렸어요.

<인트로덕션>
<인트로덕션>

신석호 배우는 <풀잎들>부터 시작해서 야금야금 분량을 키운 느낌이에요. (웃음) 이번 작품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게 되리라는 사실은 언제 알았나요.

신석호_ 처음에는 항상 그래 왔듯 스태프로 시작할 거라고 이해했어요. 당연히 합류하겠다고 말씀드리고 기다리는데, 촬영 전에 팀 전체가 모인 자리에서 감독님이 저를 배우로 소개하시더라고요. 그때 속으로 ‘출연은 하는구나’ 했어요. 분량은 전작과 비슷한 정도일 거라 예상했고요. 근데 촬영하다 보니 점점 그게 아닌 거예요. ‘뭐지? 왜 자꾸 나오지?’ (웃음) 그러다 촬영 중반쯤 감독님이 “네가 주인공이 될 것 같다”고 알려주셨어요.

 

그때부터 부담이 밀려왔겠어요.

신석호_ 아무래도 얘기를 듣고 나니 약간. (웃음) 

 

연기와 스태프 일을 동시에 소화하는 건 어떤 경험인가요. 박미소 배우에게는 처음 주어진 역할이기도 했는데요.

박미소_ 연기에만 집중했을 때는 몰랐던 여러 가지를 깨닫는 시간이었어요. 영화는 참 많은 사람의 노고와 마음이 필요한, 아주 소중하고 고된 작업이구나 싶더라고요. 영화에 임하는 자세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생긴 것 같아요.

신석호_ 모드를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거나 뭔가를 습득해서 움직인다기보다는… 그냥 물 흐르듯 그렇게 돼요. 내 장면 끝나면 바로 옷 갈아입는 거죠. (웃음) 감독님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생각하는데, 정말 매번 새로워요. 현장 분위기도 각각 다르고, 참여하는 배우도 달라지니까요. 항상 처음 하는 기분이에요.

 

고정된 틀이 없다는 의미일까요.

신석호_ 일반 영화 현장에선 사전에 여러 가지를 계획하고 그에 맞춰 촬영하잖아요. 반면 홍상수 감독님 현장은 감독님의 대본에 따라 촬영이 이뤄져요. 밖에서는 힘들지 않냐고 묻는데, 사실 내부에 있는 저희로서는 자유로움이 훨씬 크게 다가와요.

박미소_ 맞아요, 자유롭고 행복했어요. 따뜻한 분들과 함께해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인트로덕션>에서는 홍상수 감독이 촬영을 병행했어요. 이러한 변화는 현장에서 어떤 차이로 다가왔나요. 

신석호_ 이번 작품은 스태프도 최소 규모로 꾸렸고, 촬영 장비 자체도 간소화했어요. 항상 쓰던 카메라가 아니라, 감독님이 소장한 소형 카메라로 직접 찍으셨고요. 저희처럼 경험이 충분히 쌓이지 않은 배우들은 거대한 장비를 보며 압박을 느끼기도 하는데, 그런 면에서 편안한 환경이었어요.

박미소_ 감독님께서 전반적으로 많은 역할을 소화하셨어요. 제가 느끼기에 감독님은 좋아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현장에서 변수가 생기면 보통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인데, 감독님은 그러지 않으셨어요.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대로, 즐거운 것을 즐거운 대로 두면 된다고 여기시는 듯해요. 그런 마음이 느껴지다 보니, 저도 큰 걱정이나 두려움 없이 따라갈 수 있던 것 같아요.

<인트로덕션> 촬영 현장
<인트로덕션> 촬영 현장 

낯선 공간과 사람들 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는 영호와 주원의 모습은 두 배우와도 겹쳐 보여요.

신석호_ 감독님은 보통 인물이나 상황 설정을 깊게 일러주시지 않아요. 한의원에서 촬영을 시작했을 때도 극 중 영호가 아버지(김영호)와 얼마 만에 만났는지, 대략 어떤 관계인지 정도만 알려주셨어요. 그러면서 덧붙이신 말씀이 있어요. 뭘 자꾸 만들려고 하지 말고, 그냥 지금 느끼는 대로만 보여주면 된다고요. 화면 속 저희가 자연스럽게 보였다면, 아마 그런 디렉팅 덕분이지 않을까 싶어요. 또 영화에서 영호와 주원은 여러 인물을 만나는데, 매번 그들로부터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고 튕겨 나가잖아요. 그런 상황이다 보니 서로 의지하는 모습이 드러난 것 같고요.

박미소_ 촬영 당일에 대본을 받으니까 인물을 분석한다든지 뭔가를 만들어낼 수가 없어요. 석호 선배가 말한 것처럼 인물 배경에 관해서 감독님이 뚜렷하게 설명해주시지 않고요. 연기할 때 저도 모르는 제 모습이 자연스레 묻어나온 것 같아요. 편집본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이런가? 이 사람은 주원이라는 캐릭터인가 아니면 나인가?’ 

 

최근 홍상수 감독의 대본은 어떤 형태인가요.

신석호_ 당일 아침에 페이퍼로 받아요. 책을 읽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시나리오는 지문과 대사를 구분해서 쓰는데, 감독님 대본에는 소설처럼 상황 묘사와 대사가 번갈아 등장하는 식이에요. 알다시피 대사에는 문어체를 많이 사용하시잖아요. 불편하고 어색한 구석도 있는데, 한편으로는 그런 말투에서 감독님만의 유머가 나오기도 하는 것 같아요. 물론 직접 말하다 보면 가끔 턱턱 막히기도 해요. 그래도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스태프로 참여하며 지켜봤던 터라 익숙해진 면도 있고, 대본을 외우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아요. 감독님이 먼저 일단 해보자고, 나오는 대로 해보자고 하면서 최대한 편하게 이끌어주세요.

 

박미소 배우 입장에서는 흥미로우면서도 아찔했을 것 같아요. 익히 들어온 바야 있지만, 실제로 연기하는 상황에 돌입했을 때는 긴장했을 테고요.

박미소_ 맞아요, 대본을 받고 촬영은 언제쯤 들어가실지 여쭤봤어요. 2시간 후라고 하시는데, 그때부터 불안이 엄습했어요. 혹시라도 감독님과 선배님들께 누를 끼치는 건 아닐까 싶어서요. 되게 조여오는 느낌이었어요. 어디서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기라도 했는지 전부 외우기는 했어요. 어떻게 연기했는지도 모르겠는데, 끝나고 보니 뭔가 하기는 했고. (웃음) 촬영을 이어 가면서 조금씩 긴장이 풀렸어요.

 

많은 것을 계획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연기하면 무엇에 가장 집중하게 되나요.

신석호_ 아무래도 상대를 잘 지켜봐야 해요. 제 대사를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반응을 살펴야 가능한 순간이 많아요.

박미소_ 처음에는 제 대사에만 급급했어요. 누가 말을 해도 들리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화면 속 제 모습이 되게 평면적으로 보이는 거예요. 결을 맞추지 못할 때마다 감독님께서 짚어 주셨어요. 듣고, 반응하고, 받아들이는 것. 가장 어려우면서도 간과해선 안 될 부분이구나 싶어요.

ⓒ이영진

영화에는 세 번의 겨울이 담겨요. 각 장 사이에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 거라고 짐작했나요. 

신석호_ 감독님께서 말씀해주신 바는 따로 없는데, 저는 2장과 3장 사이에 1년 정도 시간이 흐르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약간 변화가 생기니까요.

 

박미소 배우는 어땠어요?

박미소_ 저도 그 정도.

 

원래 말이 없어요?

박미소_ 말수도 적고 눌변이에요. 사실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아, 어쩌죠? 죄송해요. (웃음)

 

아니에요. 계속 영화를 보는 기분이에요. (웃음) 패션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온 유학생을 연기했잖아요. 의기소침하면서도 자기만의 생각에 푹 빠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어요.

박미소_ 베를린에서 서영화 선배님이랑 촬영할 때 제일 떨렸어요. 테이크도 굉장히 여러 차례 갔어요. 그때 감독님이 “너 되게 특이하다. 말투가 원래 그러니?” 물으셨어요. (웃음) 처음에는 감독님께서 엄마를 어려워하는 느낌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중간에 영호를 만나러 가기 전에는 좀 미친 것 같은? (웃음) 약간 나사가 풀린 듯한 뉘앙스라고 하셨고요.

 

소심한 푼수라고 해야 할까요. 엄마 친구이자 화가 역을 맡은 김민희 배우에게 “참 예쁘게 생기신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재밌어요.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서는 주로 남자가 여자에게, 나이 많은 사람이 그보다 어린 이에게 찬사를 전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박미소_ 실제로 김민희 선배님을 봤을 때 그렇게 생각했어요. 너무 예쁘고 매력적이고 아름다워요. (웃음) 그러다 보니 대사가 자연스레 나왔던 것 같아요. 나중에 영상을 보면서 좀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음, 촬영할 때는 재미있었어요. 영호와 거리에서 만나는 장면을 찍을 때는 맥주를 마시기도 했고요.

신석호_ 기억나요. 감독님이 몇 번 촬영하고 모니터링을 하시다가 뜬금없이 맥주를 마시자고 하셨어요. 마신 다음에 다시 찍어 보자고. 그 자리에서 바로 맥주 한 병을 마시고 찍었어요.

 

그 장면을 포함해서 영호는 장마다 누군가와 포옹을 나누죠. 스킨십의 타이밍과 느낌은 어떻게 정해졌나요.

신석호_ 1장에서는 개인적으로 전사를 설정했어요. 예지원 선배님과 명확하게 어떤 관계라고 나오지 않아서요. 극 중 영호의 아버지와 어머니(조윤희)는 이혼한 상태인데, 어쨌거나 이혼 사유는 아버지 쪽에 있을 거라고 봤어요. 가족에 소홀하던 사람이 아닐까 했죠. 영호는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통해 예지원 누나를 만났을 거예요. 근데 결국 아버지 때문에 누나와 멀어졌고요. 누나처럼 따르고 사랑하던 상대이기에 포옹할 때는 고마움이라는 감정을 떠올렸어요. 내가 의지할 수 있던 사람이어서, 나한테 그런 사람이 되어줘서 고맙다는 마음이요.

ⓒ이영진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이 아름다워요. 와락 끌어안는 느낌도 좋고.

신석호_ 네, 마침 눈까지 와주었고요. (웃음) 2장에서 주원을 포옹할 때는 연인으로서 애틋함이 클 거라고 생각했어요. 영호가 당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붙잡고 싶을 거라고요. 그러다가 마지막 3장에서는 오히려 안기는 입장이 되죠.

 

다행스러웠어요. 한 번은 누가 안아주는구나 싶어서.

신석호_ 표현하기엔 애매한데, 영호는 줄곧 뭔가에 막혀 있는 상태잖아요. 스스로 해소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 바다로 들어갔다 나오면서 한 차례 해소시켰다고 봤어요. 그런 순간에 친구(하성국)가 안아준 거고, 영호는 그걸 위안 삼았겠구나 싶었죠.

 

영호라는 이름도 재밌어요. 김영호 배우가 극 중 아버지를 연기했잖아요. 홍상수 감독의 유머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별 뜻 없이 직관적으로 지었을 것 같기도 해요.

신석호_ 이름에 관해서는 말씀이 없으신 편인데, 간혹 여쭤보면 그냥 귀여워서 정했다고 하세요. 마침 호 자 돌림이기도 하고. 김영호 선배님이 “(이름 줬으니) 잘할 수 있지?” 하면서 장난치셨어요. (웃음)

 

엔딩으로 가볼까요. 영호는 마지막에 바다에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그 장면을 포스터에 넣어서 조금 놀랐어요. 보석처럼 숨겨놓고 싶은 장면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신석호_ 스틸 촬영하고 나서 저희도 너무 좋아했어요. 그때부터 이걸 포스터로 하자는 이야기도 나왔고요. 엔딩 장면이라서 과연 포스터에 사용하시려나 싶었는데, 그게 됐더라고요. 

 

바다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언제 알았나요.

신석호_ 강원도에 도착했을 때 감독님과 해변을 산책했어요. 숙소가 바다와 가까운 곳이었어요. 그때가 2월 말인가, 3월 초인가 그랬을 거예요. 감독님이 반쯤 농담으로 “영호가 바다에 들어가면 어떨까?” 하셨고, 당연히 들어갈 수 있다고 답했죠. 이틀 후에 대본을 받아 보니 바다에 들어간다고 나와 있더라고요. (웃음) 

 

웃음, 떨림, 찌푸림이 모두 섞인 영호의 표정이 인상적이에요.

신석호_ 그날 마지막 촬영이었어요. 단번에 오케이가 나면 좋겠지만 아닐 가능성도 염두에 뒀어요. 정 안 되면 곧바로 옷을 말려서 다시 찍어야지 생각했는데, 다행히 한 번에 오케이를 받았어요. 영호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도 좋고, 카메라 움직임도 만족스럽다고 하시더라고요.

ⓒ이영진

바다에 뛰어들기 직전에는 영호와 주원의 꿈 같은 재회가 이루어지죠. 사랑과 죽음에 관해 말하면서도 아주 해맑은 느낌이 나요.

박미소_ 어떤 사랑스러움을 의도하진 않았는데, 감독님도 그 장면을 귀엽다고 하시더라고요.

신석호_ 거기서 둘의 높이가 약간 달라요. 주원은 영호보다 살짝 아래에 있는데, 영호가 손을 내밀어서 올라오라고 잡아줘요. 음, 두 사람이 서로에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아닐까 해요. 지금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뿐이라고 여기는 것 같아요.

박미소_ 2장과 연결되는 느낌도 있어요. 주원도 유학 가서 낯선 환경과 인물 속에 놓이잖아요. 주원이 처음이라는 지점에서 부침을 겪을 때, 그로부터 유일하게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이 영호와의 짧은 만남이에요. 그래서 주원이 영호를 만나는 장면이 나왔다고 생각하고, 3장에서 영호 앞에 등장한 주원 역시 비슷한 의미이지 않을까 싶어요. 

 

서로를 원해서 선택하는 사이만 살아남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부모와 자식처럼 맺어진 관계는 오히려 연결이 약해 보이는데, 연인은 어떻게든 만나는구나 싶어서요.

신석호_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보니, 제 입장에서도 묘한 느낌이에요. 영호의 그리움처럼 보이기도 하고, 서로 갈구하는 이미지처럼 다가오기도 하죠.

 

횟집에서 기주봉 배우에게 잔뜩 혼이 나는 장면에서는 <풀잎들>이 떠올랐어요. 그때도 누나인 아름(김민희)에게 난데없이 호통 세례를 당하잖아요. 감독은 배우에게서 지속적으로 어린아이 같은 면모를 발견하는 것 같아요. 아직 굳은살이 배기지 않은 여린 부분이라고 할까요. <강변호텔>에서 영환(기주봉)이 읽는 시에는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아이”로 표현되기도 했어요. 

신석호_ 감독님이 좋은 면만 봐주시는 것 같아요. 제 입으로 “저한테 아이 같은 데가 있어요”라고 말하기는 좀 쑥스럽네요. (웃음) 감독님이 유독 그런 부분을 아끼고 더 드러내 주려고 하시는 듯 하고, 사실 누구에게나 조금씩 있는 면이기도 하잖아요. 저는 해변에서 촬영할 때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떠올랐어요. 3막으로 구성된다는 점이나 주인공이 누군가를 방문한다는 점에서는 <도망친 여자>와 비슷하다고 생각했고요. 실제로 감독님도 중간중간 말씀하셨어요. 다만, <도망친 여자>의 감희(김민희)가 사람들과 만나면서 관계를 주도해가는 인물이라면, 영호는 좀 더 끌려가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의지할 데를 찾는 사람이죠.

 

1장과 2장에서는 두 사람 모두 어떤 출발선에 선 것처럼 보여요. 이제 막 연애를 시작했다거나 새로운 일을 해보려고 이주한다거나. 그러다 3장에서는 한 차례 결과를 마주하죠. 영호는 배우가 되려다가 그만두었고, 꿈에 의하면 주원은 독일에 갔다가 공부에도 사랑에도 실패한 후 빈손으로 돌아왔어요. 이런 낙차를 어떻게 해석했나요.

신석호_ 영호는 제 것을 가지려는 욕심보다는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큰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연기를 포기한 이유도 애인이 싫어하는 일을 할 수 없어서라고 하잖아요. 미움 받을까 봐 걱정하는, 그러다 보니 자신의 것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는 친구 아닐까요. 촬영하면서 그런 생각이 점점 강해졌어요.

박미소_ 주원은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갈망하는 인물 같아요. 속으로는 영호를 그리워할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영호를 두고 유학을 떠나잖아요. 영호를 선택하지 않은 건, 결국 주원이 지닌 새로움을 향한 욕구 때문이라고 봤어요.

 

극 중 영호는 “연극계 신”이라 불리는 기주봉 배우로부터 “너 얼굴 좋으니까 배우 해도 되겠다”라는 말을 듣고 연기를 시작했다고 나와요. 그런 말 들어 봤어요? (웃음)

신석호_ 어릴 적에는 우스갯소리처럼 들었어요. 어른들은 그러시잖아요. 너는 잘생겼으니까 커서 배우 해라, 키가 크니까 모델 하면 되겠다.

박미소_ 저는 아니에요. 듣고 싶지만 한 번도 들어본 적은 없어요. (웃음) 

ⓒ이영진

그럼 연기는 어떻게 시작했어요?

신석호_ 원래 꿈은 파일럿이에요. 공군이 되고 싶었는데, 어릴 때 수술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럼 신체검사에서 자격 미달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도덕적 도둑>이라는 연극을 봤어요.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커튼콜이 인상적이었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박수 받는 모습이 멋있더라고요. 그때 어머니한테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음, 영호와 좀 비슷한 면이 있는데요. 제 위로 누나가 둘이었어요. 누나들이 저한테는 엄마와 마찬가지였는데, 어릴 적에 누나 한 분이 건강 문제로 먼저 하늘에 갔어요. 한참 마음 둘 곳이 없었어요. 어머니 입장에서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는 게 반가우셨던 것 같아요. 무작정 극단에 찾아가서 그때부터 연기를 배웠어요.

 

당찬 고등학생이었네요.

신석호_ 추진력이 좋은 편이 아닌데, 이상하게 그때는 그랬어요. 연기하면서 성격도 바뀌더라고요.

 

박미소 배우는 튀는 걸 싫어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배우가 될 생각을 했어요?

박미소_ 저는 언어가 필요 없는 사람이었어요. 하루에 두 마디 정도 했을까요. 말도 없고, 혼자 있기를 좋아했어요. 그러다 고등학생 때 진로를 고민하면서 갑자기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지방에 살았는데, 지방 사람들은 그런 게 있거든요. 뭘 하려면 일단 서울에 가야 한다. (웃음) 서울로 갈 방법을 혼자 알아보다가 한 친구가 연기 학원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데, 쉬는 시간마다 걔네 반으로 찾아갔어요. 친구가 학원 커리큘럼을 이야기해주는 걸 들으니까 저도 너무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학원을 같이 다녔어요?

박미소_ 어느 학원에 다니는지 안 알려주더라고요. 하루는 걔네 반에 갔는데, 친구는 없고 책상에 학원 숙제가 놓여 있었어요. 그렇게 학원 이름을 알게 됐죠. (웃음) 학원을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제가 부족하다는 건 알았어요. 말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감정을 표현해본 적도 거의 없으니까요. 입시를 치르기 전부터 재수를 결심하고 아르바이트를 두 개씩 했어요. 부모님께 학원비를 달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학교 끝나면 마트에서 일하고, 밤에는 편의점에서 일했어요. 잠이 부족하다 보니 나중에는 환청이 들리더라고요. 그때 확신했어요. 몸이 힘들고 미쳐가는 것 같은데도 포기가 안 되니까요. 여전히 그래요. 한 번도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놓은 적은 없어요.

 

갑자기 연기에 빠졌던 이유는요?

박미소_ 속에는 표현하고 싶은 게 많은데… 제가 제 입으로, 제 입장에서 말하는 건 힘들었어요. 근데 배우에게는 명분이 생기잖아요. 주어진 역할이자 임무니까요. 연기를 통해 그동안 밖으로 꺼내지 못한 것을 표출하면, 제가 좀 행복해질 것 같았어요.

 

담아두는 이야기가 많았다는 뜻이죠? 출구가 필요한데, 언어라는 도구만으로는 힘들고.

박미소_ 네, 많이 참는 성격이에요. 자신한테 관대하지도 못하고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냥 삼키다 보니 제가 점점 안으로만 들어가는 거예요. 언젠가부터 ‘난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하는구나, 그게 제일 편하구나’라고 느꼈던 것 같아요.

 

남한테 상처를 줄까 봐 무서웠나요? 

박미소_ 네, 그리고 제가 상처받는 것도요. 말하지 않으면, 드러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잖아요. 저는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도 이상하게 괴로워져요. 차라리 혼자 있는 게 낫더라고요. 어떤 접점도 만들지 않는 상황이 제 마음에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신석호 ⓒ이영진

들어보니 두 분 모두에게 연기가 일종의 테라피네요.

신석호_ 안 그래도 어제 감독님이랑 저녁 식사할 때 그런 생각했어요. 감독님이 고생했다면서 영양제를 선물로 주셨는데, 갑자기 미소 씨가 훌쩍이는 거예요.

 

아이고, 지금 또 우네요.

신석호_ 그때 미소 씨를 보면서 생각이 정말 많은 사람이구나, 단지 그걸 표현하지 못할 뿐이구나 싶었어요. 오늘 얘기를 들으면서도 그래요.

 

영양제에 이렇게 눈물을 흘리셨단 말이에요.

박미소_ 너무 슬프고 또 감사하고…

 

무슨 영양제였어요. (웃음)

박미소_ 멀티 비타민이요. (웃음) 

 

보통 배우라고 하면 되게 외향적이고 남들 앞에 서는 걸 즐길 거라고 짐작하는데, 알고 보면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요. 오늘 인터뷰 끝나고 돌아가서도 무슨 말 했는지 곱씹을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말이란 게 계속 뱉고 또 떠올리다 보면, 내가 나한테 상처를 받기도 하잖아요.

박미소_ 그래서 문제예요. 어떻게 좀 변하고 싶은데, 달라지려고 노력하다 보면 괴롭고. 노력을 안 한다고 해서 괴롭지 않은 것도 아니고. 악순환이죠. 

신석호_ 독일에서 촬영할 때가 떠올라요. 미소 씨가 서영화 선배님이랑 같이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영화에서는 수직적인 관계로 나오는데, 현장에서는 서로 부둥켜안는 느낌이었어요.

 

첫 장편이 좋은 경험으로 남아서 다행이네요. 학교에서도 많이 고생했을 것 같거든요.

박미소_ 너무 힘들었죠. 새로운 환경이 으레 그렇듯. 저는 말이 없다 보니 모든 상황에 귀를 기울이게 돼요.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많고, 인간 관계에 대해서도 여러 생각이 들어요.

 

예민하다는 건 사실 참 좋은 일이죠.

박미소_ 저한테 세상은 시시각각 달라져요. 슬픈 것도 감사한 것도 너무 많고, 자꾸 새로운 것이 전해지다 보니 하루에도 감정이 몇 번씩 요동치는 거예요. 어제도 그랬어요. 감독님과 같이 있는데, 온갖 감정이 뒤섞이더라고요. 슬프면서 감사하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요. 남들 눈에는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은데, 제가 이만큼 느낄 수 있는 사람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홍상수 감독은 신석호 배우에게도 특별한 분일 거예요. 필모그래피 대부분을 홍상수 감독의 작품으로 채울 정도인데, 작업을 지속하며 어떤 의미를 발견하는지 궁금해요.

신석호_ 이걸 경력으로 삼아서 뭔가를 해보겠다는 욕심은 없어요. 그냥 감독님이 영화를 대하는 방식이 좋아요. 영화는 깨끗하고 순수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거든요. 그런 작품에 합류할 수 있으니 저한테는 무척 좋은 일이죠. 다른 작품에 스태프로 참여했던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 버겁기는 하더라고요.

박미소 ⓒ이영진

어떻게 보면 홍상수 감독의 현장이야말로 예외라고 할 수 있는데, 신석호 배우 입장에서는 표준이라고 부르는 현장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던 거네요.

신석호_ 네,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는데 책임 소재가 분명한 현장이 있잖아요. 아무래도 홍상수 감독님 현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보니, 그런 곳에 갔을 때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어요.

 

<인트로덕션>을 촬영하면서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건 뭐예요?

박미소_ 다른 현장에는 일하러 간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번에는 좀 달랐어요.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기억에 남아요. 당일 대본을 받고 연기하는 것도 처음에는 많이 걱정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재미있는 경험으로 다가왔어요.

신석호_ 저희처럼 연출부로 일하는 친구들이 몇 명 있어요. 사실 저희는 전부 모셔야 하는 입장인데, 선배님들이 먼저 그러지 말라고 해주세요. 선배님들도 감독님 현장을 무척 편하게 느끼시는 것 같아요. 선배님들을 따라서 저희도 덩달아 편안해지고요. 그런 자유로움이 감독님 현장의 매력이 아닌가 싶어요. 사실 처음에는 되게 어려웠어요.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있잖아요. 감독님 현장도 그와 같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서 보니 전혀 다른 거예요. 당시에는 ‘진짜 이렇게 해도 되나?’ 했어요. 그러다가 한 작품, 두 작품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어요.

 

연출할 계획인가 싶기도 했어요.

신석호_ 사실 시도해봤어요. 하고 알았죠. 연출은 내 길이 아니구나. (웃음)

 

앞으로는 어떤 경험을 해보고 싶나요?

신석호_ 특정 장르나 캐릭터를 바란다는 건 시기상조 같아요. 솔직히 아직도 걱정하거든요. 누가 나를 찾아줄까? 내가 찾아간다고 해도 쓸모 있는 배우처럼 보일 수 있을까? 모든 배우의 고민이기도 하고요. 그저 기회가 왔을 때 떳떳한 배우가 되고 싶어요. 

 

떳떳한 배우라면요?

신석호_ 연기를 잘해야겠죠. (웃음)

 

첫발을 딛은 박미소 배우는 어떤가요. 

박미소_ 저도 주어지는 상황에 충실하게 임하고 싶어요. 안 가본 길이 너무 많으니까요. 말수가 적은 탓인지 전작에서는 주로 어두운 역할을 맡았어요. 은둔하거나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인물이요. <인트로덕션>에 나오는 제 모습을 보며 신기했어요. 내가 이런 연기도 하네, 이런 표정도 있네. 이상하면서도 좋더라고요. 어떤 역할이든 마다하지 않고, 전부 경험해보고 싶어요. 

신석호_ 미소 씨가 약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곁에서 지켜보면 절대 아니에요. 주변 사람을 정말 잘 챙겨줘요. 그만큼 관찰하고 있다는 뜻이죠. 배우로도 인간으로도 훌륭한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칭찬이 왔으니 돌려주어야겠네요. (웃음) 

박미소_ 석호 선배도 그래요. 묵묵하게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동시에, 시야가 굉장히 넓어요. 베를린에서 선배한테 얘기했어요. 참 섬세한 사람 같다고. 연기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를 다 잘해요. 다방면으로 챙길 줄 아는 사람이어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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