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고? 빙고!
JIFF 2021 <오토바이와 햄버거> 박한솔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Festival / 2021-04-30

스펀지처럼 흡수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구나 싶다. 박한솔은 의심 없는 눈으로 칭찬을 받아들였다. “재주가 많네요”라고 말을 건네면 “제 생각에도 저는 끼가 참 많아요”라고 응했고, “잘 물드는 것도 능력이죠”라고 짚으면 “맞아요, 저는 도화지 같은 사람이에요!”라며 느낌표를 붙였다. 맑은 웃음을 뒷받침하는 건 허무맹랑한 ‘근자감’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아 올린 시간이다.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박한솔은 무대를 좋아했다. 시험 성적보다 장기자랑 등수가 중요했고, 갈고닦은 실력을 선보이는 시간이 짜릿했다. 같은 꿈을 꾸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가장 열심히 하는 애’로 통했을 정도이니 욕심과 노력이 비례하는 배우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부문에서 상영하는 <오토바이와 햄버거>(최민영, 2021)에서도 박한솔은 꾸밈없는 얼굴로 인물에게 성실하게 다가간다. 거친 말투와 행동 뒤에 자리한 온기를 그려내는 섬세함 덕분에, 영화는 정직하면서도 활기차게 관객의 마음을 연다. 넘치는 끼만큼이나 견고한 진심을 지닌 배우 박한솔을 만났다.

 

 

한여름에 촬영한 것 같더라. 영화 중간중간 쟁쟁하게 울리는 매미 소리가 인상적이다.

사실 촬영은 10월 말에 했다. 현장은 조금 쌀쌀해서 계절감을 표현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영화에서 동생 광현으로 나오는 박지한 배우가 “어른들은 이상해요. 여름에 여름 영화 찍고 겨울에 겨울 영화 찍으면 되는데~”라고 하더라. (웃음)

 

캐스팅은 어떤 경로로 이루어졌나. 오디션을 봤나.

감독님한테 연락을 받았다. 평소에도 같이 작업해보고 싶은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인터넷에서 내가 맨 얼굴로 찍은 사진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고 하더라. 얼마 전에도 그런 얘기를 했다. 한솔 씨는 화장하고 꾸몄을 때보다 맨 얼굴이 훨씬 예쁘다고. (웃음) 처음 캐스팅 제안할 때도 아예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난 3월에 종영한 드라마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JTBC)에서 신입사원 세림 역으로 출연했다. 직장인이고 분위기가 전혀 달라선지 처음 <오토바이와 햄버거>를 봤을 때 같은 배우인 줄 몰랐다.

맞다, 결이 완전히 다르지. 사실 난 아직 <오토바이와 햄버거>를 못 봤다.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궁금하고, 가혜가 좀 거친 캐릭터이다 보니 화면으로 봤을 때는 어떨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근데 감독님이 되게 자신 있게 말하더라. 지금껏 내가 출연한 작품 전부를 놓고 봐도 <오토바이와 햄버거>에서 가장 예쁘게 나온 것 같다고. (웃음)

 

최민영 감독은 ‘돌고래유괴단’에서 광고 작업을 하는 연출자다. 시나리오 첫 느낌은 어땠나.

그동안 연기했던 인물과는 다른 캐릭터여서 호기심이 생겼다. 내게서 의외의 면을 발견하는 연출자가 생각보다 많다. 대중이 바라는 모습에서는 조금 벗어난, 차분하고 서늘한 느낌을 봐주더라. 그런 접근이 흥미로웠고, 시나리오도 강렬했다. 체구도 작은 여자애가 오토바이를 탄다? 심지어 치킨 배달 아르바이트를 한다? 거기에 담배를 피우면서 욕까지? (웃음) 가혜에게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기회였고, 동생을 위해 애쓰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단편치고 러닝타임이 긴 편이라 배우로서 더 욕심이 생겼다. 혼자서 극을 이끌어 나갈 힘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며 단번에 출연을 결정했다.

<오토바이와 햄버거>
<오토바이와 햄버거>

<오토바이와 햄버거>는 2007년이 배경이다. 완전히 시대극이라고 할 수는 없는, 어찌 보면 애매한 시기인데 무엇에 초점을 맞춰 준비했나.

세대가 겹치다 보니 공감할 부분이 많았다. 아이리버 MP3라든지, 후드 집업 같은 패션이 눈에 들어왔다. 가혜가 딱 우리 오빠 나이다. 내가 어릴 적에 오빠 옷을 많이 훔쳐 입었거든. (웃음) 특별히 자료를 조사한다기보다는 주변 지인을 최대한 이용했다. 서너 살 차이 나는 언니, 오빠들과 대화하며 리마인드하고, 감독님과는 당시 말투나 정서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2007년의 박한솔은 어땠나.

초등학교 6학년이니까… 한참 게임에 빠졌을 때다. ‘서든어택’하고 ‘메이플스토리’하고. 가혜와 달리, 집에서 얌전히 시간을 보내는 애였다. (웃음) 

 

활달한 성격 같은데. 밖에서 여럿이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나.

아, 온라인에서 열심히 놀았다. ‘네이버폰’이나 ‘네이트온’ 같은 메신저가 유행이었는데, 거기서 사람들과 수다 떨고 게임을 했다. 중학생 때는 원더걸스와 애니메이션에 빠졌다. 학교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원더걸스 활동 소식을 찾아보는 게 일과였고,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를 그때 전부 봤다.

 

‘원나블’을 섭렵하다니. 

그런 면이 좀 있다. 하나에 빠지면 끝까지 파고드는 스타일이다. 

 

그럼 연기에는 언제부터 푹 빠졌나.

사실 대답하기가 애매하다. 어릴 적부터 남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했다. 학기마다 장기자랑 나가는, 거기에 온 열정을 쏟는 애들 있지 않나. 그게 나였다. 중학생 때는 방송반에 합격했는데, 댄스 동아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 포기했다. “내 길은 이거야! 댄스 동아리 갈래!”라면서. (웃음) 그만큼 춤과 노래를 좋아했고, 무대에 서는 순간이 즐거웠다.

 

신기하다. 나는 ‘장기자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딱히 떠오르는 게 없거든. 

나한테 장기자랑은 연례행사였다. 빅 이벤트. (웃음) 진짜 목숨 걸고 했다. 친구들이랑 새벽부터 모여서 주차장에서 연습하고, 당연히 장기자랑 1등이 목표였다. 무대에 오르면 설렘과 성취감을 동시에 느꼈다. 한 번은 선생님이 무대를 만들어주신 적도 있다. 마치 오프닝 무대처럼 교내 행사 앞에 자리를 만들어주신 거다. 

ⓒ이영진

앞으로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기대해봐도 되나.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 사실 노래든 춤이든 꾸준히 해야 실력을 유지할 수 있는데, 최근에는 연기에 집중하다 보니 소홀해질 수밖에 없더라. 대학 때는 뮤지컬 공연도 많이 했다. 큰 무대에 서기 위해 매일 발성 연습하고 긴 시간 훈련했다.

 

재주가 많다.

내가 생각해도 끼가 많은 편이다. “너는 나중에 연예인 해라”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으며 자랐다.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재학 중이다. 데뷔 과정은 어땠나.

진학하고 학교 생활에 충실했다. 공연도 많이 했고. 그러다가 4학년 때 필름메이커스에 프로필을 보내면서 영화를 시작했다. 단편 <좁은 문>(김윤미, 2018)과 <뽑기>(심규택, 2017)를 촬영한 후에 웹드라마를 찍었고, 그때 소속사에 들어갔다. 사실 무얼 데뷔작이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처음 찍은 단편영화는 <좁은 문>이고,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건 스니커즈 광고다.

 

<오토바이와 햄버거>로 다시 돌아가자. 가혜는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했나. 나이는 어리지만 세상을 일찍 배운, 만사에 통달한 듯한 나른한 느낌을 매력적으로 그려냈다.

가혜는 ‘츤데레’에 가깝다. 누구보다 따뜻하고 사랑이 가득한 친구인데, 표현에는 서툴다. 그래서 주변에도 남자인 친구들이 대부분인 것 같고. 사실 가혜 역시 누군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나이 아닌가. 충분한 애정과 관심이 주어지지 않는 환경이다 보니, 자신이 아끼는 사람조차 다정하게 대하기를 어려워한다. 나도 가혜랑 비슷한 면이 있다. 표현을 예쁘게 못한다고 해야 하나. 말도 좀 툭툭 하고.

 

제스처도 꼼꼼히 준비한 티가 난다. 가게 사장과 배달비를 흥정할 때나 헬멧 사이에 핸드폰을 끼우고 전화를 받는 모습에서는 천연덕스러움이 묻어난다.

오토바이가 주는 힘이 세더라. 오토바이에 몸을 기대거나 헬멧을 쓰는 것만으로도 가혜다운 자세와 제스처가 나왔다.

ⓒ이영진

오토바이는 원래 탈 줄 아나.

아, 내가 또 원동기 면허를 땄지! (웃음) 하루에 4시간씩 수업 들으면서 일주일 내내 연습했다. 처음에는 선생님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운전면허도 없거든. 한 해에 두세 명은 꼭 시험에 떨어지는데 그게 나일 것 같다고 하더라. 자신감 떨어지게! 아니라고,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면서 열심히 했다. 넘어져서 오토바이에 발이 깔린 적도 있다. 그러다가 막바지에 갑자기 ‘필’이 딱 왔다. 감을 잡고 나서 바로 통과했지.

 

영화가 참 여러 가지에 도전하게 한다. (웃음)

너무 뿌듯했다. 오토바이를 탈 수 있어도 원동기 면허 시험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 마지막 코스에서 일 자로 쭉 가는 게 좀 어렵거든. 면허증을 받고 진짜 기뻤다.

 

가혜는 입도 거칠고 말투도 퉁명스럽다. 대사에 신경을 많이 썼을 것 같다.

감독님이 리딩하면서 몇 군데 포인트를 짚어 주셨다. 대사 하나씩 놓고 세부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고, 전체적인 뉘앙스를 잡는 데 집중했다. “했냐?”라는 말투가 어색해서 입에 붙을 때까지 계속 중얼거렸다. 그 외에는 주로 현장에서 찾았다. 혼자 대본을 보며 연습하는 것보다 실제로 연기하면서 순간순간 찾아 나가는 편이 내게 맞는 것 같다.

 

순발력이 좋은가 보다. 

맞다. 순발력은 큰 장점이다. 촬영하기 전까지 시나리오를 분석하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국 현장에서는 다른 배우와 호흡을 맞추고 주변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상대가 어떻게 대사를 주는지에 따라 내 연기가 달라지기도 하고. 오디션이나 캐스팅 인터뷰에서도 임기응변이 필요하다.

 

친구와 싸우거나 동생에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목소리가 깨끗하더라.

노래를 오래해서 그런가. 뮤지컬 준비할 때 레슨도 많이 받았다. 그러고 보니 새벽에 큰 소리를 내거나 오토바이를 몰아도 괜찮았다. 거주민이 없는 동네라 민원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됐거든.

 

어디서 촬영했나.

송파구에 위치한 재건축 지역이었다. 감독님이 그 동네 출신인데, 본인도 거길 발견하고 놀랐다고 하더라. 5회차 정도로 꽤나 바쁜 일정이었지만, 촬영 여건이 좋아서 큰 무리는 없었다. <오토바이와 햄버거>는 배우나 스태프뿐만 아니라, 감독한테도 무척 뜻깊을 작품이다. 감독님이 나고 자란 동네에서 촬영했고, 감독님 어머니와 강아지도 특별 출연한다. 물론 감독님도. (웃음) 가혜에게 오토바이를 사는 사람이 감독님이다. 가혜라는 인물 역시 감독님이 어렸을 때 알고 지낸 누나에게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들었다. 촬영 마치고 내가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더니, 감독님이 “저는 아마도 이 영화를 평생 못 잊을 거예요”라고 하더라.

<좁은 문>
<뽑기>

끈끈함이 느껴진다. 힘든 현장이었지만, 동료들끼리 소통이 잘 됐나 보다. 

감독님도 되게 열린 분이고, 친구로 나오는 박강섭 배우와도 호흡이 잘 맞았다. 내가 유머러스한 사람을 좋아하는데, 강섭 배우가 딱 그랬다. “오빠, 너무 웃겨!” 하면서 계속 박수 쳤다. 그럼 오빠도 흥이 났는지 더 웃겨주고.

 

박한솔 배우도 ‘개그 욕심’ 있을 것 같은데.

있지. 나는 칭찬에 불타오르는 타입이다. 옷 갈아입을 때가 기억난다. 내가 옷을 진짜 빨리 갈아입는데, 한 번은 의상 팀 언니가 “이수근보다 빨라요”라고 하더라. 그 말을 들은 다음부터 이상한 자부심이 생겨서 옷 입을 때마다 시간을 단축했다. (웃음)

 

살면서 들은 칭찬 중에 가장 기분 좋았던 건?

동기가 해준 말이 떠오른다. 연기를 그만두었다가 다시 시작한 친구인데, 어느 날 찾아와서는 내 덕분에 용기를 얻었다고 하더라.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결국에는 잘 되는 모습을 보니 힘이 된다는 뜻이었다. “너는 학교 다닐 때도 참 열심이었는데, 찾아보니까 네가 정말 여기저기에 많이 나오더라. 나도 최선을 다하면 저렇게 되겠구나 싶었어.”라는 말을 듣고 무척 감동했다.

 

지금은 어떤 작품, 어떤 인물을 기다리나.

시트콤과 코미디 장르에 관심이 많다. 워낙 재밌는 이야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현장에서도 웃음을 공유하는 순간이 좋다. 다른 배우들로부터 “나 그거 찍을 때 너무 웃겨서 배 찢어지는 줄 알았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더라. 아직 어려서 그런가? 결과만큼이나 과정이 중요하고, 일할 때도 최대한 즐거운 추억을 쌓고 싶다. 드라마로 치면 <거침없이 하이킥>(MBC)이나 <으라차차 와이키키>(JTBC) 같은 작품. 영화 <스물>(이병헌, 2014)을 여자 버전으로 만들어도 재밌겠다.

 

잘 어울린다. 개그 욕심에 순발력까지 갖추었으니.

내가 주변 사람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거든. 남의 기분이나 말투도 잘 옮고. 유머 코드가 맞는 동료들과 함께하면 신나게 ‘티키타카’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아가씨>(박찬욱, 2016)와 <박쥐>(2009)처럼 전혀 다른 색감을 지닌 작품에도 끌린다. 섹시하고 강렬한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관계와 감정을 연기하기 위해 많은 용기와 고민이 필요하겠지. 최근에는 연기 스터디를 하고 있다. 드라마 <화양연화-삶이 꽃이 되는 순간>(tvN, 2020)에서 만난 친구들과 틈틈이 만나며 오디션을 준비하는 중이다. 앞으로도 나를 잘 챙기며 새로운 작품에 도전하고 싶다.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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