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걷는 사람
JIFF 2021 <낫아웃> 정재광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Festival / 2021-04-30

요즘 정재광은 하루에 8시간을 걷는다. 양재천에서 출발해 경복궁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를 가장 좋아한다. 한강을 두 번 건너는 동안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들어찬다. 그는 부지런히 다리를 움직이며 캐릭터를 분석하고 대사를 곱씹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지나가는 봄을 구경하기도 한다. “근데 6시간 정도 걷잖아요? 그때부터는 전부 잊어요. 잡념도 사라지고 내가 나라는 것도 까먹어요.” <낫아웃>(이정곤, 2021)에서 고교 야구 선수 신광호를 연기하기 위해 98kg까지 찌웠던 살도 자연스레 빠졌다. 검게 그을린 피부는 원래대로 돌아왔고, 짧게 깎았던 머리카락도 그새 많이 자랐다. 흰 셔츠 차림으로 테이블에 앉아 차분히 말을 잇는 정재광에게서 광호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가 눈을 빛내며 “저는 오래 걸어요”라고 이야기해주기 전까지는. <낫아웃>의 광호는 팀을 우승으로 이끈 마지막 타자였으나, 졸업을 앞두고 신인 드래프트에 실패하며 갈 곳을 잃는다. 상황은 점점 꼬이고 꿈은 멀어져만 가는데, 영화도 광호도 걸음을 멈출 의지가 전혀 없다. 누구와 경쟁하는지도 모른 채 모두와 싸우는 위태로운 청춘에 정재광은 크고 물기 어린 눈동자로 순수를 더한다. 순도 높은 열정 덕분에 광호는 선악이라는 구분을 뛰어넘어 미래를 향해 돌진하는 인물로, 설령 지지할 수 없다 해도 내버려 두기엔 어려운 주인공으로 남는다. 자신만의 걸음걸이와 속도로 <낫아웃>을 완성한 배우 정재광을 만났다.

 

 

홀로 주연을 맡은 장편영화는 <낫아웃>이 처음이다. 공개를 앞둔 지금, 기분이 어떤가.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서 상영한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뻤다. 나도 아직 스크린으로 본 적은 없어서 설렘 반 긴장 반으로 기다리는 중이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는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처음부터 끝까지 극을 책임지고 이끌어 나가는 역할이고, 감정신도 상당히 많았다.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이 산을 넘어야 배우로서 좀 더 큰 그릇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호가 자칫 비호감이라든지 못된 캐릭터로 보일까 봐 많이 고민했다. 사전에 감독님과 그 지점에 관해 길게 의견을 나눴고, 혹시라도 현장에서 톤이 과하다 싶으면 컨트롤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완성된 영화를 보니 다행히 광호를 이해할 수 있는 흐름이어서 안심했다. 어렵게 찍은 작품이라 애착이 간다.

 

어렵게 찍은 작품이라는 건 무슨 뜻인가.

연기도 연기이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2020년 1월에 크랭크인했거든. 촬영하는 도중에 코로나19가 터졌고, 하필 주요 로케이션 장소인 야구장이 대구에 위치한 곳이었다. 심각했을 때는 ‘이러다 영화를 못 찍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희망고문의 연속이었지. 촬영해도 된다고 했다가, 갑자기 말이 달라지고. 다들 마음 졸이느라 고생했다. 우여곡절 끝에 촬영을 마치고 나서도 걱정이 컸다. 지난 1년 동안 영화 시장이 바뀌는 모습을 지켜봤으니까. 개봉은 둘째치고 일단 <낫아웃>이 세상으로 나올 수 있을지도 확신하기가 어렵더라. 우리끼리는 제목을 따라간다고 말한다. 영화 자체가 ‘낫아웃’이라고. 어찌 됐든 ‘아웃’ 당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웃음)

 

이정곤 감독과는 원래 인연이 있나.

감독님이 처음 얘기를 꺼낸 건 4년 전이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수난이대>(김한라, 2016)를 상영했을 때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자기가 지금 야구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중인데, 나랑 같이하고 싶다고 하더라. 그러다가 정말 몇 년이 지나서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왔다. 감독님 결혼식 전날이었다. ‘설마 청첩장 주러 여기까지 오는 건가?’ 했는데, 갑자기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네더라. 투자받았다면서 이제 시작하자고. 신기하기도 했고, 실은 무척 감동했다. 근데 그때는 별얘기도 못하고 금세 헤어졌다. 감독님이 장모님 전화를 받더니 바로 결혼식 준비하러 가더라. (웃음) 

 

캐릭터 준비 과정부터 들어보자. 광호는 10대 운동선수다. 머리를 짧게 깎고 살도 찌우는 등 외양에 큰 변화를 줬다.

감독님이 이미지를 바꿔보자고 했다. <버티고>(전계수, 2019)라든지 그간 작품에서 주로 보여준 모습과는 다른 이미지이길 바란다고. 시나리오 읽고 나서 가장 먼저 고등학교 전국대회 시합을 보러 다녔다. 실제로 운동하는 친구들을 가까이에서 만났는데, 어느 날 경기장에서 내가 상상한 광호를 발견했다. 몸은 완전히 어른인데, 친구들과 장난치고 놀 때는 마냥 아이처럼 보였다. ‘아, 저 친구다!’ 싶었다. 성숙하면서도 순수한, 동시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간직한 얼굴을 보면서 광호를 정의할 수 있었다. 그 친구를 관찰하다 보니 당장 급한 게 운동이더라. 촬영을 한 달 반 정도 남겨둔 시점이었는데, 하루에 4끼를 먹으면서 몸을 키웠다. 오전에는 근력 운동, 오후에는 야구 연습, 주말에는 수염 왁싱과 태닝으로 시간을 보냈다. 물론 힘든 과정이긴 했지만, 덕분에 인물이 놓인 상황에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낫아웃>
<낫아웃>

몸 고생하는 작품을 자주 만난다. <버티고>에서는 로프공이었고.

그때도 쉽지 않았지. 소방훈련하며 4층 높이에서 계속 줄에 매달린 채 버텨야 했으니까. 근데 그 맛이 또 있다. (웃음) 자랑하자면 야구 학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한 달 만에 타구 속도가 160km/h 나왔거든. 

 

원래 야구를 할 줄 아나. 필모그래피에 등록된 첫 작품도 <스카우팅 리포트>(최병권, 2015)라는 야구 영화더라.

그때는 흉내 내는 정도였고, 사실 부끄러운 수준이다. <낫아웃>을 준비하기 전까지 야구의 ‘야’도 몰랐다. 룰 자체를 모를뿐더러 경기를 본 적도 없었으니까. 유튜브로 경기 영상이나 해설을 찾아보며 공부했다. 영화에서 광호 손에 굳은살이 박혀 있는데, 분장이 아니라 실제 내 손이다.

 

‘피 땀 눈물’의 영화다. 애착이 생길 수밖에 없겠다.

고통스러웠는데 묘하게 즐기기도 했다. 언제 또 이런 걸 하겠나 싶어서 최선을 다했다. 훈련하고 싶어도 여건이 안 따라줄 때가 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기회가 생겨서 감사하고 좋았다.

 

등장할 때부터 광호는 이미 초조하고 화가 난 상태다. 감정을 폭발하는 장면에 힘을 싣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예민하게 배분해야 했다. 

프리 단계에서 감독님과 신을 하나씩 쪼개어 보며, 감정을 세밀하게 분석했다. “여기는 이 정도에서 멈추고, 저기서는 좀 더 보여주고” 하는 식으로 약속했다. 촬영은 시나리오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다 보니, 관객이 당황하지 않도록 장면마다 정확한 감정을 표현하는 게 중요했다. 특히 광호가 악인으로 보여서는 안 되기에 표정에 집중했다. 입술이 약간 튀어나온 뚱한 표정을 많이 활용했던 것 같다.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있는 느낌을 주는 표정이었다.

<낫아웃>을 마치고 <범죄도시2>(이상용, 2020)를 찍었는데, 그 표정이 습관처럼 나오더라. 광호를 털어내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보니. (웃음) <폭스캐처>(베넷 밀러, 2014)의 채닝 테이텀을 보며 연구했다. 얼굴 근육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걸음걸이는 어떤지 관찰하는 식이었다. 신기하게도 몸을 키우다 보니 자세나 호흡이 조금씩 달라지더라. 감정 연기를 할 때도 그런 부분에 도움을 받은 것 같다.

 

라커룸에 혼자 남아 신인 드래프트 생중계 방송을 보는 장면이 떠오른다. 대사 한 마디 없이 눈빛과 숨소리만으로 압박감을 표현해냈다. 

촬영이 총 24회차였는데, 그걸 3회차에 찍었다. 중요한 장면인 데다 촬영 초반이어서 더 긴장했다. 딱 10분만 달라고 부탁한 다음, 눈 감고 음악을 들으면서 명상 아닌 명상을 했다. 다행히 한 번에 찍었다. 슛이 들어가자 다들 숨죽인 채 광호의 마음으로 나를 바라봐주더라. 같이 기다리고, 같이 괴로워했다. 그 기운이 나한테 와준 덕분에 실수 없이 연기할 수 있었다. 현장 집중도가 엄청났다. 광호가 아빠한테 야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나 야구 잘했어, 못한 거 아니야!”라고 소리지르는 장면도 그랬다. 컷하고 나서 돌아보니 몇몇 스태프가 울더라. 예전에 입시 준비할 때가 생각났다면서. 다들 광호와 한마음이었던 것 같다. 

ⓒ이영진 

음악은 어떤 걸 들었나.

<폭스캐처> OST 중에 West Dylan Thordson의 ‘Palaces’. <퍼스트맨>(데이미언 셔젤, 2018)에 삽입된 Justin Hurwitz의 ‘The Landing’도 틈틈이 들었다. 연기할 때마다 레퍼런스로 삼을만한 영화와 함께 음악을 찾는 편이다. 음악은 직관적이지 않나. 정서에 젖어들기 위해 음악에 도움 받을 때가 많다.

 

광호는 참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다. 세상을 일찍 알아버리기는 했는데, 광호가 의심하는 것보다 세상은 훨씬 잔인하지 않나. 세상에 비하면, 너무 순수하고 가진 것도 없는 인물이다.

맞다, 무엇보다 광호 곁에는 좋은 어른이 없다. 야구에 집착하는 이유도 그와 이어지지 않을까 싶더라. 프로선수가 되는 건 남들처럼 살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보일 테니까. 광호가 불법적인 일에 가담하는 것도 어찌 보면 용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편집된 장면인데, 사실 광호는 그렇게 번 돈으로 글러브와 배트를 산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선택할 방법이 너무나 적었던 거다.

 

벼랑 끝에 몰린 듯한 심리 상태가 촬영으로도 드러난다. 클로즈업이 많고, 카메라가 계속 쫓아다니는 느낌을 준다.

김영국 촬영 감독님은 인물에 굉장히 몰입한다. 말하자면 메소드 촬영이랄까. 광호를 정말 사랑하고 아껴줬다. 그런 마음이 시시각각 느껴졌고, 현장에서 처음 경험하는 순간도 있었다. 말로 설명하기엔 어렵지만, 아주 묘한 기분이었다. <악당출현>(유수민, 2017)을 찍을 때부터 꼭 한 번 같이 작업하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호흡을 맞출 수 있어서 좋았다. 

 

스포츠에 전념하는 10대라든지 “아직 시작도 못 했잖아”라는 대사 등 영화 곳곳에서 <키즈리턴>(기타노 다케시, 2000)의 영향이 엿보인다. 실제로 감독과 <키즈리턴>에 관해 이야기 나눈 바가 있나. 

얘기한 적은 없다. 심지어 제작사 이름도 키즈리턴인데. (웃음) 감독님이 추천한 작품은 <예언자>(자크 오디아르, 2009)다. 19세 청년 말리크가 교도소에 들어가서 고군분투하는 내용인데, 광호와 맞닿는 지점이 보였다. 교도소 안과 밖에서 달라지는 말리크의 얼굴을 참고하면서, 광호가 야구장에 있을 때와 불법 주유소에 있을 때 미묘한 차이를 주려고 노력했다.

 

왜 광호를 맡겼는지 감독에게 불어본 적이 있나.

스크린에서 보여준 반항적인 눈빛이 좋았다고 하더라. 결핍에서 오는 에너지가 마음에 든다고. <버티고>(2018)의 전계수 감독님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역할 차이도 있지만, 확실히 스크린에서 큰 매력을 발산하는 것 같다.

영화에서는 내가 아닌, 정말 그 인물이 되는 순간을 경험할 때가 많다. 현장에서 동료들과 가족처럼 끈끈해지는 것도 좋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어떤 인물을 만날지 기대도 된다. 그러니까, 영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웃음)

ⓒ이영진 

그럼 반대로 배우 입장에서는 왜 <낫아웃>에 끌렸나. 광호의 어떤 부분이 제일 마음을 흔들었는지.

연극영화과 입시를 준비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대한민국에서 입시를 치른 고등학교 3학년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당시 나는 나대로 참 절박하고 절실했다. 중앙대학교가 목표였는데, 선생님조차 만류하며 지방대에 지원하라고 했다. 그때 마음을 극대화하면 광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더라. 너무 원하고, 그렇기에 두려운 상태. 살면서 한 번쯤 경험할 감정이고, 생각해보면 사는 동안 계속 감당해야만 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하니까. 음, 촬영 전에 고등학교 야구부 숙소에 방문한 적이 있다. 한참 둘러보다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낡은 일기장을 발견했다. “시합이 며칠밖에 안 남았다, 코치님이 이걸 고치라고 했다, 신경 써서 준비하자” 같은 내용이었는데, 며칠밖에 안 남았다는 문장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힘을 불어넣으려는 의도로 쓴 것이겠지만, 생각해보면 사람을 참 강박적으로 만드는 말이기도 하지 않나. 광호를 연기하는 나도 비슷한 상태였던 것 같다. 해내야 하는 일이 분명했고, 도망갈 데도 없었다. (웃음) 시간이 지난 지금은 한 가지 소망이 있다. <낫아웃>을 보는 모든 관객이 두려움에 잠식당하지 않고 꿈을 꾸면 좋겠다. 일이든 사랑이든 혹은 영화든, 자기 꿈을 오래 지켜 가기를 바란다.

 

천천히 말을 골랐다. 누구보다 광호를 이해하면서도 실제 성격은 꽤 다른 것 같다. 요즘 연기 외에 가장 많이 하는 일은 뭔가.

오래 걷는다. 하루에 8시간 정도. 최근에는 이정곤 감독님과 함께 걸었다. 6시간이 넘어가면 몸이 확 힘들어지면서 자아가 날아간다. (웃음) 그 상태로 대화를 나누면 재밌다.

 

왜 그렇게 걷기 시작했나.

처음에는 다이어트하려고 걸었다. 코로나19로 헬스장에 가기도 어려워서 그냥 한두 시간씩 걸었는데 좋더라. 걸으면서 대사도 외우고, 내가 상상하고 분석한 내용을 되짚어보기도 한다. 장점이 많다. 시간도 잘 가고, 밥맛도 더 좋아졌다. 집에 돌아오면 잠도 잘 온다.

 

걸으면서 일하고, 운동하고, 충전까지 하는 거다. 그전까지는 잠을 잘 못 잤나 보다.

촬영하다 보면 밤과 낮이 자주 바뀐다. 잠을 못 잔다기보다는 자야 할 시간에 못 자는 경우가 많았다. 남들 움직이는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잠들고, 그러다 오후에 일어나면 벌써 하루가 다 끝난 느낌이더라. 양재천에서 경복궁을 왕복하는 루트로 자주 걷는다. 길어 보이지만, 거리를 합하면 24km밖에 안 된다. 

 

‘24km밖에’라니!

생각보다는 짧다. (웃음) 걷는다는 행위는 내게 탈출구가 되어준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바라보고 생각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나중에는 그 생각마저 관찰하고, 내 감정을 세세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관찰자의 시점과 감각이 살아난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그걸 느끼고 싶어서 계속 걷는지도 모르겠다. 

 

<버티고> 개봉 당시, 본인 연기를 100점 만점에 5점이라고 평했다. 자신에게 엄격한 편인가 보다. 

5점이라고 답한 건 내 연기를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아니라, 앞으로 더 채워 나가겠다는 마음이었다. 엄격한 건 맞다. 촬영이 없을 때도 마냥 풀어지는 타입은 아니다. 생산적인 일에 열정이 생기고, 가급적 정해놓은 루틴대로 생활하려고 한다. 그래야 오래 연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한두 번쯤은 운이 좋아서 반짝할 수 있겠지만, 꾸준히 노력하지 않는다면 지속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

<버티고>
<수난이대>

<낫아웃>의 정재광에게 점수를 준다면.

그래도 성실하게 임했으니 80점. 나머지 20점은 아쉬움이라기보다는 막연한 자신감이다. 나도 아직 모르는 나 자신을 믿어보려고 한다. 다른 작품에서 더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근래 <버티고> <큰엄마의 미친봉고>(백승환, 2020) 등에서 주연을 맡았고,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JTBC, 2020)에서도 활약했다. 착실히 스텝을 밟아나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버티고>를 만나기 전에는 연기를 지속할지 고민하기도 했다고. 요즘은 어떤가. 

<버티고>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연기를 계속하는 게 맞나? 고향에 내려가서 입시 학원을 할까?’ 실제로 내 주변에 많은 친구가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그러다가 <버티고>를 기점으로 마음가짐이 바뀌었다. 화면 속 나를 계속해서 보고 싶고, 새로운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소속사에서 애를 많이 썼지. “다른 작품 없나요? 오디션 없나요?” 하며 계속 물어봤거든. (웃음) 정확히 뭘 달성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3-4년 안에 결단을 내려야겠구나 싶더라. 지금도 비슷한 마음이다. 연기하는 나를 의심하지는 않지만, 그저 느긋하지만도 않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걸까. 10대에는 춤을 췄고 취미는 그림이라고 해서 표현에 관심이 많을 거라 짐작했다. 연기로 풀어내지 못한 무언가가 있는 건가.

그렇지, 연기를 쉴 새 없이 한다면 그림을 그릴 시간도 없을 거다. (웃음) 작년에는 인테리어에 빠졌다. 벽지 뜯어내고, 가구 옮기고. 그렇게 눈으로 결과를 확인하면 즐겁더라. 살맛 나는 것 같다. 

 

유하 감독의 신작 <파이프라인>이 개봉을 준비하는 중이고, 드라마 <알고있지만>(JTBC) 출연 소식도 들려왔다. 하반기도 바쁘게 보내겠다. 

<파이프라인>에서는 범죄자를 쫓는 순경 역할을 맡았다. 배유람 배우와 ‘덤 앤 더머’처럼 나온다. ‘빙구미’가 있는 캐릭터이니 기대해도 좋다. <알고있지만>에서는 대학 조소과에서 일하는 조교로 출연한다. 오지랖도 넓고 능글맞은, 밝은 인물이다. 오랜만에 멜로 라인도 있다. 시작은 짝사랑인데 지켜봐 주시길. (웃음) 

 

분주한 와중에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음, 아무래도 나 자신인 것 같다. 요즘 자주 걸어서 그런가, 내 걸음걸이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희일비하며 휩쓸리지 않고, 나를 잘 지켜내고 싶다.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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