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는 건… 그야말로 책임”이라 여기며 ‘레쓰비언 부치’로 한평생 살아온 중년 체육 교사 고현미(백현주). 청소년 성 소수자 혀크(강다현)의 ‘파파’이자 하우스메이트로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중,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동거인 때문에 식구가 갑자기 늘어난다. 코로나 19로 고시원에서 쫓겨난 택배 기사 쌀차비(문혜인)를 ‘냥줍’하듯 데려온 혀크에게 고현미는 묻는다. “쟤도 이쪽이냐?” 이쪽과 저쪽, 오해와 진실, 스테레오 타입과 다양성이 넘실대는 이곳은 <으랏파파>라는 퀴어 유니버스. 허를 찌르는 유머 사이에 코끝이 찡해지는 감동까지 솜씨 좋게 버무려 놓은 ‘정통 가족시트콤’이다. “여보 저 사실 레즈에요 /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어요 / 여보 저 사실 게이에요 /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어요 / 엄마 저 사실 남자에요 / 한 번도 여자인 적 없어요 / 아 우리 가족 LGBT” 부부가 퀴어문화축제에서 서로를 발견하고 기막혀하는 동안 딸은 무대에 올라가서 드랙하는, 기상천외한 ‘우리가족’을 노래했던 이반지하(김소윤)가 극본을 썼다. 제작에는 <3xFTM>(2008), <레즈비언 정치 도전기>(2009), <종로의 기적>(2010)으로 ‘커밍아웃 3부작’을 선보였던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가 나섰고, <두 개의 문>(2011) <공동정범>(2016) 등을 만든 김일란 감독은 첫 시트콤 연출에 도전했다.
음악이면 음악, 미술이면 미술, 최근에는 웹 소설까지 연재하며 ‘올라운더’로 활동하는 불세출의 아티스트 이반지하와 최근 유튜브 ‘연분홍TV’ 채널을 통해 퀴어 예능과 웹드라마로 판을 넓혀 온 연분홍치마의 만남은 일찌감치 기대를 모았다. 창작자는 새로운 웃음을 발굴하고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생산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였고, 많은 이가 기다렸다는 듯 마음을 보탰다. 텀블벅 펀딩으로 제작비를 마련하고 배우들과 만나면서 <으랏파파>의 파일럿 시즌이 탄생했다. 젠더 프리 캐스팅으로 화제였던 연극 <비평가>에서 오만하고 권위적인 비평가를 연기했던 백현주가 극의 중심에서 유감없이 내공을 발휘하고, 작년 개봉한 <에듀케이션>(2020)에서 관계의 균열을 그렸던 문혜인과 그간 주로 연극무대에 서온 강다현이 신선한 매력을 덧칠한다. 이들은 시트콤이라는 놀이터에서 “미치거나 귀엽거나” 또는 “미치도록 귀여운” 캐릭터로 분해 알쏭달쏭한 세계를 저만의 표정으로 채워나간다. <으랏파파> 파일럿 시즌이 공개된 후, 이반지하 작가, 김일란 감독, 총괄 프로듀서 빼갈, 그리고 백현주, 문혜인, 강다현 배우를 한자리에 초대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촬영 뒷 얘기부터 이후 계획까지 이야기가 쉼 없이 이어졌다. 차별과 혐오로 얼룩진 엉망진창 세상에서 유머를 방패 삼아 우당탕 앞으로 진격하는 이들의 유쾌한 수작을 중계한다.
작품 공개 후 어떤 피드백을 받고 있나. 인상적인 평이 있다면.
김일란_ 우리가 의도했던 것보다 사람들이 알아봐 주는 게 되게 많다. 오늘 트위터에서 봤는데, 누가 으랏파파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현미가 계단을 세 개씩 올라가는 거라고 하더라.
백현주_ 집안 내력인 것처럼 혀크까지. (웃음) 혀크랑 현미가 올라가는 모습을 같이 찍지 않았는데, 나중에 붙여놓고 보니 웃기더라.
집도 재밌더라. 쌀차비가 머무는 다락도 눈에 들어오고.
김일란_ 대여한 공간이다. ‘현미라면 이러겠지’라고 생각하며 세팅하긴 했는데, 주인이 워낙 깔끔하게 관리해놓은 곳이어서 크게 손을 볼 곳은 없었다. 지금 집에는 혀크 방이 없는 상황이라, 다음 시즌을 만든다면 이사하는 신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작가님과 계속 이야기하는 중이다.
백현주_ 사실 되게 작은 공간이다. 촬영이 가능했다는 건 그만큼 장비가 별로 없었다는 뜻이다.
스태프 규모도 작고.
김일란_ 회차도 적다. 배우들 덕분에 퀄리티가 훌륭하게 나왔다.
백현주_ 제작 발표회 때 사회자가 촬영 에피소드를 물어보는데 진짜 떠오르는 게 없더라. 계속 촬영한 기억밖에 없어서. (웃음) 장소와 일정 등 여러 상황을 고려해서 최대한 짧게 찍었다.


이반지하 작가는 현장에 가봤나. 카메오로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안 보이더라.
이반지하_ 감독님이 오지 말라더라.
김일란_ 아무래도 신경 쓰일 것 같았다. 눈치 보기 시작하면 힘들어질 듯해서.
이반지하_ 안 보이는 곳에 숨겠다고 했는데도 작가 권력 때문에 안 된다고. (웃음)
김일란_ 카메오 출연은 지금 쓸 카드가 아니다. 아껴 놓았지.
백현주_ 슬쩍 전봇대 뒤에서 출몰하는 느낌으로 나와도 재밌을 텐데.
문혜인_ 될까? 워낙 존재감이 대단해서 곧바로 눈에 띌 것 같다.
백현주_ 어린이 애니메이션을 보면 퀴즈를 내잖아. 우리 시트콤에서도 퍼즐 맞추듯 힌트만 하나씩 주는 거다. 풀샷으로 잡지 말고, 처음에는 이반지하의 손이나 입술만 보여주는 식으로.
이반지하_ 이 시트콤이 나를 너무 이용한다니까!
백현주_ 작가님만 그런 건 아닌 듯하다. 나도 그렇고, 다들 탈탈 털리는 기분이잖아. 우리가... 마음이 하나여서 그렇지. (웃음)
배우들과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캐스팅 과정이 궁금하다.
김일란_ 작가님이 대본과 함께 인물 스케치를 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에게 최면을 걸었던 것 같다. 그림을 보면서 계속 그 이미지에 맞는 배우를 찾았다. 혜인이는 사진을 보고 딱 쌀차비라고 생각했다.
문혜인 배우는 김일란 감독의 다큐멘터리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막상 김일란 감독은 캐스팅하면서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고.
문혜인_ 2020년 가을에 연분홍치마에서 캐스팅 연락을 줬다. 내가 2020년 1학기에 다큐멘터리 수업을 들었거든. ‘수업을 계기로 이렇게 김일란 감독님과 인연이 이어지는구나’ 생각하며 미팅에 나갔는데, 전혀 못 알아보시더라. (웃음) 심지어 여름방학 끝나고 메일도 보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수강생 문혜인입니다”라고 인사했는데, 당연히 기억하신다면서 답장을 주셨다.
이반지하_ 어우, 웬일이야.
김일란_ 할 말이 없다. 완전히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대했거든. 이혁상 감독이 한 마디 하더라.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라이징 스타 문혜인 배우를 몰라볼 수 있냐고.
어쩌다 다큐멘터리 수업을 들었나.
김일란_ 내 말이. 대체 왜?
문혜인_ 당시 뭔가 찍고 싶은 게 있었다. 수업 듣고 얼마 안 가서 다큐멘터리는 내 길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웃음) 실제 삶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일이 두렵게 느껴지더라. 어쩌면 내가 픽션을 좋아하는 이유는 허구라는 거리감이 만들어낸 안전함 때문이지 않을까.
백현주 배우가 연기한 고현미는 디테일이 돋보이는 인물이다. 외모뿐만 아니라 칠판에 한자로 이름을 쓴다든지, 이상은의 ‘담다디’를 흥얼거린다든지, <한겨레21>을 읽으며 휴식 시간을 갖는다든지. 꼰대지만 미워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중년 레즈비언 부치를 완성했는데.
이반지하_ 고현미는 상상했던 외모와는 꽤 다르다. 본래 ‘레스보스’(1996년 신촌에서 문을 연 레즈비언 바로 현재 이태원에서 운영 중이다) 윤김명우 사장님 느낌으로 그렸거든. 노동조합 조끼 입을 것 같은 느낌. (웃음)
김일란_ 고현미 캐릭터를 놓고 작가님과 얘기를 많이 했다. 그만한 풍모를 갖춘 여자 배우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차라리 퀴어 당사자 중에 연기 가능한 분을 섭외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동시에 그림과 꼭 닮은 외모가 아니어도 연기로 설득해낼 수 있는 배우라면 충분하겠단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지인으로부터 백현주 배우님을 소개받았다. “연기의 신이 있다”라며 만나보라더라. 현주 선배님은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나름 고민하셨을 텐데, 사실 난 보자마자 확신했다.
어떤 점에?
김일란_ 연기력도 연기력이지만, 특히 목소리. 다큐멘터리 작업할 때도 목소리를 중요하게 여긴다. 내가 목소리에 콤플렉스가 있어선지 힘 있는 목소리를 좋아한다. 예컨대 이반지하 작가님은 목소리에서 이미 장난기와 짱짱한 에너지가 느껴지잖아. 나처럼 매가리 없는 목소리가 아니라. (웃음) 백현주 배우님의 목소리는 다채롭다. 연기할 때도 높낮이를 되게 다양하게 쓴다. <아무도 모른다>(SBS, 2020)와 <검사내전>(JTBC, 2020)만 놓고 봐도 확 다르다. 여성과 남성의 목소리를 믹싱한 것 같은 느낌을 좋아한다. ‘퀴서비스’를 진행하는 에디 목소리도 진짜 좋아하거든.
이반지하_ 나도 하리수 노래 매일 듣는다. You wanna talk to me, 나에게 말 걸어봐~ (웃음)
한동안 보이그룹 노래를 옥타브 높여서 듣고, 걸그룹 노래를 옥타브 낮춰서 듣는 게 유행하기도 했다.
김일란_ 맞다, 그런 식으로 목소리를 사용하는 방식에 관심이 많다. 다큐멘터리에서도 소리의 힘을 최대한 끌어 올리려고 한다. <공동정범>(공동연출 이혁상, 2016) 촬영 당시, 인물이 과거를 기억하고 표현하는 방식을 살펴보려고 일부러 인터뷰에서 표정을 안 보고 목소리만 듣기도 했다. 끌리는 소리가 있고, 그걸 가진 배우를 좋아한다. 극영화 감독도 아니면서 조민수 배우를 볼 때마다 ‘저런 목소리를 잘 써야 하는데!’라며 혼자 아까워한다. <으랏파파>가 잘 되면 꼭 같이하고 싶다. 민수 선배 특유의 코믹함도 살려서.
고현미는 극의 중심이다. 연기 잘하는 배우를 고른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김일란_ 맞다, 현주 선배님은 현장에서도 중심이었다. 텐트 중앙에 세우는 폴대 같은 역할을 해줬다.
백현주_ 어쩐지 등이 아프더라고.
김일란_ 선배님한테 우리가 다 주렁주렁 매달렸지.
왜 그렇게 열심히 했나.
백현주_ 실은 이 얘기를 듣고 너무 민망했다. 뭐, 빨대 꽂힌 느낌도 좀 있기는 한데. (웃음) 왜 열심히 했는지, 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감독님이 날 믿어준 게 먼저더라. 현장에서 가만히 안 있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감독님이 알아서 할 테니 나서지 말라고 했으면 나도 따랐을 거다. 감독님이 기회를 준 덕분에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강다현 배우는? 필모그래피를 찾기 어려운데 그간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강다현_ 본래 연극을 했고,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 건 <으랏파파>가 처음이다.
김일란_ 나와 빼갈이 따로따로 배우를 찾았는데, 그중 교집합으로 걸리는 사람이 강다현 배우였다.
강다현_ 제안을 들었을 때는 부담감이 컸다. 영상이 처음이다 보니 당연히 기술적인 부분도 걱정스러웠지만, 무엇보다 10대를 연기할 수 있을까 싶더라. 그때 감독님이 사진을 보여주셨다. 내가 일전에 연극에서 10대로 나온 적이 있거든. 이 얼굴이면 할 수 있다며 설득하셨지. (웃음)
혀크는 넉살 좋게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한편, 누구보다 뜨겁게 질풍노도를 겪는다. 고저가 뚜렷한 인물이라 표현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떤 면에 중점을 두고 연기했나.
강다현_ 혀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일단 3회차 대본밖에 없는 데다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연기하다 보면 대개 어느 정도 캐릭터가 그려진다. 실제로 인물을 만난 것처럼 상상하고 점점 내가 그 인물이 된 느낌이 들지. 근데 혀크는 그런 방식으로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본 적 없지만 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한 느낌, 그게 혀크인 것 같았다. 모든 상황을 하나의 점이라고 여겼다. 혀크는 그 점을 굉장히 멀리 찍는 사람이라 당장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한 번에 전체적인 지도를 만들려고 하지 말고, 그저 혀크가 찍는 모든 점에 충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혀크의 감정과 상황을 판단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빼갈은 프로듀서로 제작을 총괄했다. 어떤 인연인가.
빼갈_ 작년 봄부터 연분홍치마 활동가로 합류했다. 그전에는 연분홍TV에서 조연출을 맡았다.
김일란_ 사람들이 도대체 빼갈이 누구냐고 궁금해하더라. 어쨌든 <으랏파파>의 배후가 빼갈인 건 확실하다. 촬영 기간이 넉넉하지 않았는데, 현장에서 우왕좌왕하지 않도록 판을 만들어줬다.
프로듀서로서 가장 중요한 건 뭐였나.
빼갈_ 장소가 많이 바뀌지 않는 것. (웃음) 스케줄 짜는 일도 처음이었다. 많은 사람이 함께할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목표가 압박으로 다가왔지만, 한편으로는 쾌감도 있었다. 모두가 최선을 다하는 순간을 눈앞에서 확인하는 경험은 정말 소중하게 남을 것 같다.
김일란_ 혼자 테트리스 하듯 스케줄을 완성하고 “해냈어!”라며 너무 기뻐했다.
<으랏파파>는 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김일란 감독의 첫 시트콤이지만, 연분홍치마는 그간 유튜브 채널 연분홍TV를 통해 <퀴서비스>, <애기레즈의 고백법>과 같은 웹콘텐츠를 꾸준히 선보였다. <으랏파파>는 어느 정도 기간을 갖고 준비해온 프로젝트인지, 그 과정에서 시트콤이라는 장르를 선택하기까지 내부적으로 어떤 논의를 거쳤는지.
빼갈_ <애기레즈의 고백법>을 마친 후에 퀴서비스 시즌2를 구상하면서 “조금 더 일을 벌여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웹드라마 제작을 결정하고 펀딩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웃음에 관해 많이 생각했다. 웃음의 지평을 넓혀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봤다.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한정적이니까. 여러 사람에게 뭘 보고 싶은지 물어봤는데, 공통으로 “힘들고 우울한 건 그만 보고 싶다”라고 하더라. 황당해도 괜찮다, 차라리 평범해도 괜찮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여러분의 첫 시트콤은 뭐였나. <으랏파파>를 준비하면서 머릿속에 그렸던 작품이 있다면.
이반지하_ <순풍산부인과>(SBS, 1998-2000)를 시작으로 시트콤이 붐인 시절에 대한 추억이 있다. 넷플릭스에서 접할 수 있는 <모던 패밀리>(ABC, 2009-2020)나 <김씨네 편의점>(CBC, 2016-) 같은 외국 시트콤도 떠올랐는데, 그보다는 촌스럽기를 바랐다. <모던 패밀리> 식의 세련됨과는 다른 세팅이 필요하다고 봤다. 실제로 배경 자체가 다르지 않나. 제작 한계이기도 하지만, 일단 서울에서는 그렇게 큰 집 하나를 두고 찍기가 쉽지 않다. 대본을 쓰면서 현실적 조건을 따져야 했다. 초반에 감독님이 “시트콤 캐릭터는 징그럽고 끔찍한데, 이상하게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고 했다. 그 말에 도움을 받았다. 사실 현미, 혀크, 쌀차비 각각 한 명씩 보면 너무 이상하잖아. 얘네랑 같이 산다고 생각해 봐. 머리 아프지. (웃음) 완성된 드라마를 볼 때 인물마다 사랑스러움이 묻어나서 좋았다. 어렸을 때 본 시트콤처럼 촌스러움도 적절히 느껴졌고.
하필 ‘가족’ 시트콤으로 구상한 이유는?
이반지하_ 연분홍치마에서 각본을 의뢰할 때, 내가 쓴 노래 ‘우리 가족 LGBT’를 예로 들었다. 정상 가족 안에 LGBT를 넣을지, 아니면 가족 자체를 퀴어하게 만들지 고민한 끝에 후자를 선택했다.
김일란_ 작가님이 먼저 시트콤 장르를 제안했다.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과 어울렸고, 무엇보다 작가님이 시트콤 캐릭터를 잘 만들 거라는 생각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시트콤 캐릭터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문구가 ‘미치거나 귀엽거나’잖아. 현실 공간에서는 말 그대로 사람 미치게 하는 인물이지만, 극에서 거리를 두고 들여다보면 무척 웃기고 귀엽다. 작가님이라면 분명히 그 지점을 잘 구현해내리라 생각했다. 미팅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때 <안녕, 프란체스카>(MBC, 2005-2006)가 떠오르더라.
이반지하_ 시나리오를 쓸 때는 아니었는데, 다 만들고 나니까 연결되어 보였다. <안녕, 프란체스카>도 세계관 자체를 설득하잖아.
김일란_ 사실 말도 안 되는 세계관이고 이상한 이웃인데, 그냥 “그들이 거기에 산다” 하고 시작해버리니까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작품이 설계한 시스템도 흥미롭다. 박슬기 배우가 연기한 소피아는 내부 서열 체계에서는 왕고모인데, 어려 보이는 용모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프란체스카의 딸을 연기한다. 프란체스카와 두일의 부부 관계 역시 집안과 밖에서 끊임없이 달라지고, 모든 인물은 바깥에서 다른 사람을 만날 때면 끊임없이 둔갑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들의 어긋나고 순환하는 관계를 지켜보는 과정이 재밌었고, 이러한 ‘연기’는 퀴어 가족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라고 봤다. 퀴어 커뮤니티에서 따르는 논리와 비퀴어 커뮤니티에서 수행하는 논리에는 늘 차이가 생기니까.
이반지하_ 계속 엎치락뒤치락하지.
김일란_ 그래서 촬영하는 동안 우리끼리 “이 사람은 지금 현미를 남자로 인식한 거야? 여자로 인식한 거야?”라는 질문을 주고받았고, 번역할 때도 she/he를 놓고 토론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이 재밌더라.
빼갈_ 나는 <원 데이 앳 어 타임>(넷플릭스, 2017-2020)에 등장하는 모녀 삼대를 생각했다. 할머니-어머니-딸은 각자 본인 세대에서는 꽤 진보적이고 독특한 인물들인데, 서로 다른 세대가 만나면서 겪게 되는 묘한 갈등이 있잖아. <으랏파파>가 담아낸 관계 역시 퀴어라는 동질성을 공유하면서도 다양성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강다현_ 나도 찍을 때는 <원 데이 앳 어 타임>을 많이 떠올렸는데, 완성본을 보면서 <거침없이 하이킥>(MBC, 2006-2007)이 생각나더라. 삼대가 모여 사는 일상도 그렇고, 유난히 밥 먹는 장면이 많이 나와서 <으랏파파>와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이순재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가 현미랑 좀 닮았고. (웃음)
이반지하_ 오, 진짜 혀크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낄 수 있겠다.
그러고 보면 시트콤은 당대 분위기를 잘 포착하는 장르다. 유연하고 파격적이기도 하다.
김일란_ 맞다, <순풍산부인과>의 핵심은 경제적 부의 자랑이라고 생각한다. 이전까지는 재산에 대한 욕망을 겉으로 드러내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일종의 겸양이 필요했지. 근데 코미디라는 장르를 통해 그런 욕망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게 된 거다. 실생활에서는 속물이라고 말하지만, 캐릭터로 봤을 때는 웃기고 재밌다. 오히려 정극보다 경제적 상황이나 계층 갈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모두에게 ‘처음’ 혹은 ‘새로움’으로 기억될 작품이 아닐까 싶다. 가장 새로운 건 뭐였나.
김일란_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웃음) 빼갈한테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어쩌다 보니 인생이 신기하게 풀려서 다큐멘터리를 17년 동안 했고, 그 안에서 나름대로 실험을 거듭하며 때로는 한계에 부딪혔다. 그런 시점에 <으랏파파>를 만나 창작자로서 환기가 됐다. 가장 큰 차이점은 제작 과정이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감정을 지켜보는 것이 일이었는데, 픽션에서는 배우와 함께 감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본질적인 차이로 다가왔다.
빼갈_ 이전까지 내게 현장은 두렵고 힘든 공간이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곳. (웃음) 서로를 환대하는 경험도 드물었고, 타인을 배려해도 되는지에 관해서도 사실 확신해본 적이 없다. 여기가 처음이었다. 우리가 서로 배려할 수 있고, 그래도 큰일 나지 않는구나. 무엇보다 안전한 현장이었다. 퀴어인 사람들이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고, 그 이후에도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는 점이 가장 새로웠다.
이반지하_ 얘기를 들으니까 다른 현장 분위기가 궁금하다.
백현주_ 촬영 규모에서 발생하는 차이도 분명히 있을 거다. 사실 많은 현장에서 배려가 우선순위는 아니다. 그보다는 책임 소재가 중요하지. 예를 들어 현장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해도 공식적으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이상 다른 팀에서 그걸 섣불리 건들지는 않는다. 본인이 맡은 영역에서 책임을 다하는 게 먼저니까. 시간 자체가 돈인 곳 아닌가. 마음껏 시간을 쓸 수 있는 몇 명을 제외하면, 다들 그 제한된 시간을 떠받들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책임, 능력, 이런 기준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반지하_ 방금 “책임” 그러는데 “여자”라고 할 것 같았다. (<으랏파파> 3화 참고)
김일란_ 그 톤이었다. 나도 자꾸 따라 하게 되더라. (웃음)
이반지하 작가는 음악, 공연, 애니메이션, 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창작자다. 다만, 시트콤 대본을 쓰고 배우와 협업하는 과정은 지금까지 해온 일과 또 달랐을 듯하다.
백현주_ 애니메이션도 했나? 정말 르네상스 인물이라니까.
이반지하_ 다빈치 버금간다. (웃음) 어디서 직업을 물으면 현대 미술가라고 답한다. 그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으랏파파>는 내게 큰 협업이었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혼자 만들면 됐는데, 대본은 전혀 달랐다. 내 손에서는 끝나도 완결이라고 할 수가 없는 거다. 사실 쓸 때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다. 내가 할 일은 그냥 이 세계를 만드는 거니까. 근데 캐릭터가 배우를 만나고 작품 안으로 연출이 들어오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부분이 생겼다. 예를 들어 쌀차비가 혀크를 따라 집에 들어갔을 때, 짐 정리를 도와주겠다는 말에 존댓말로 거절한다. 난 대사를 반말로 썼거든. 혜인 배우가 쌀차비 감정은 그게 아닌 것 같다면서 굳이! 지적하더라고. (웃음)
문혜인_ 아이디어를 드린 것입니다! (웃음)
이반지하_ 사실 그런 순간이 너무 좋았다. 이게 협업이구나 싶었거든. 배우들이 캐릭터에 집중하면서 내가 못 본 부분까지 읽어줄 때 많이 감동했다. 최선을 다해서 캐릭터를 만들면 이야기가 잘 흘러갈 거라는 믿음으로 글을 썼는데, 배우들이 정말 입체적으로 구현해줬으니까. 인물들이 만나며 시너지를 내고 그들끼리 ‘케미’를 만드는 모습이 신기하더라.
배우에게는 연기와 현장 양쪽 모두 신선한 경험이었을 거라 짐작한다.
문혜인_ 서로 끊임없이 괜찮냐고 묻고 확인하는 현장이었다. 촬영장에서 오래 대기한 적이 있다. 난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데, 땀을 뻘뻘 흘리며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넝쿨 님이 다가와서 “기다리기 힘드시죠. 괜찮으세요?”라고 묻더라. 내가 보기에는 넝쿨 님이 훨씬 힘들어 보이는데. (웃음) 생각해 보니 괜찮냐는 말을 촬영 내내 들었더라. 그동안 여러 독립영화 현장을 경험했고 딱히 나쁜 현장에 갔던 적도 없는데, 그때 처음 깨달았다. 서로 괜찮은 게 중요하구나. 괜찮은지 물어보는 과정이 필요하구나. 그동안 현장에 흐르는 경직성을 얼마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렇다 치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었던 거다. <으랏파파>를 통해 유연하고 즐거운 분위기에서 작업할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백현주_ 프로덕션 자체가 새로웠다. 뭔가 좀 다른 이야기를 기다리던 차에 때마침 <으랏파파>를 만났다. 시트콤이어서 용기를 낸 면도 있다. 진지하게 들어가기엔 내가 모르는 게 많고, <으랏파파> 역시 굉장히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어쨌거나 새로운 시도에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조심스러움을 넘어섰지. 퀴어, 정통, 시트콤이라는 카피의 조합만 봐도 너무 재밌지 않나. 물론 처음에는 어려웠다. 현장까지 그렇게 세팅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 솔직히 그게 나를 자유롭게 할지 아니면 더 속박할지 판단이 안 서더라. 나는 모르는 게 생기면 잘 묻는 편인데, 여기서는 또 물어보면 안 된다고 그래서.
이반지하_ 남자인지 여자인지 너무 궁금한데 참아야 하고. (웃음)
백현주_ 실수할까 봐 긴장했지. 문혜인, 강다현 배우랑 처음 만났을 때도 너무 물어보고 싶더라. “혹시 얼마나 알아? 그래도 너희들은 뭔가 많이 아는 거 같은데.”
이반지하_ 지금 너무 현미 같다. (웃음)
김일란_ 선배님, 2화 보셨나. 미용실 장면부터 어떻게 봤을지 궁금하다.
빼갈_ 사람들이 2화에서 갑자기 현미한테 빠지더라. 자기 스타일이라고, 잘생겨 보인다고.
문혜인_ 우리끼리 그런 얘기 했다. 다음 시즌을 제작할 때는 배우마다 팬이 생겨서 커피차를 보내줄지도 모른다고. 원래 혀크가 1위였는데, 댓글의 열기를 보니 현미가 제일 빠르겠더라. (웃음)
김일란_ 편집할 때 마법 같다고 느꼈다. 평소 모습과 화면 속 고현미가 너무 달라서.
이반지하_ 드라이기를 고쳐주면서 “어유, 저 귀여운 것” 하는 표정을 짓는데 진짜 놀랐다.
김일란_ 현장에서 특별히 디렉팅을 하지도 않았는데, 기가 막히게 현미다운 제스처를 만들어내셨다. 넝쿨이 나갈 때 어색하게 인사하는 모습이라든지 미용실에 들어오자마자 넝쿨을 내보내라고 눈짓하는 디테일은 선배님 아니었으면 아무도 못 했을 거다. 너무 오글거리는데, 진짜 어디선가 본 아저씨 같은 느낌.
이반지하_ 진심 멋있었다.
하지만 백현주 배우는 지금 얼굴을 들지 않고. (웃음)
이반지하_ 드라이기 고칠 때, 말도 되게 속삭이잖아.
김일란_ 모니터링하다가 빼갈이 왜 이렇게 야하냐고.
백현주_ 그런 느낌으로 쓴 거 아닌가?
이반지하_ 맞다. 정확하다. (웃음)
백현주_ 다음 시즌을 만든다면 극에서 점프가 필요한 순간에 여러 방법을 시도해봤으면 좋겠다. 맥락을 연결하면서 리얼하게 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떤 장면에서는 좀 더 비현실적으로 연출해도 괜찮지 않을까. 사실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만화처럼 컷과 컷 사이에 점프가 들어가는 방법이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김일란_ 파일럿이 아니라 본격적인 시즌제로 가면, 현실과 환상의 정도를 합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지금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세계가 어디까지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보니, 어느 정도로 판타지를 허용할 것인지 선택하지 못한 면이 있는 것 같다.
명확한 타깃 대상이 있는 콘텐츠인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아는 사람만 이해하는 이야기로 남기를 바라는 건 아니니까. 농도를 맞추는 일이 어려울 것 같다.
김일란_ 맞다, 결국 반복을 바탕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성과다.
쌀차비는 미스터리한 인물인 동시에 고현미와 혀크를 지켜보는 관찰자다. 문혜인 배우가 이방인다운 거리감을 유지하면서도 회차가 거듭될수록 적응해가는 모습을 인상적으로 그려냈다. 쌀차비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어땠나.
문혜인_ 드라마 흐름은 이해했는데, 웹드라마 또는 시트콤이라는 포맷 자체는 처음이라 낯설었다. 내게 익숙한 톤으로, 기존에 준비해오던 방식으로 연기해도 되나 싶더라. 현주 선배님을 지켜보면서 감탄했다. 정답처럼 딱 맞는 연기라고 해야 할까. 시트콤의 빠른 호흡을 놓치지 않으면서 매 순간 포인트가 살아 있었다. 얼마큼 표현하고 숨겨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미묘한 지점을 찾아가려고 노력했다. 새로운 시도였는데, 사실 촬영을 마치고 깨달은 부분이 많다. 다음 시즌에서 제대로 해보고 싶다. (웃음)
고현미, 혀크, 쌀차비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었나.
이반지하_ 부치 중에 예쁜 이름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현미 정도는 사실 준수한 이름이다. 새롬이, 민들레 이런 이름이 곤란해지는 건데. (웃음) 그 사이 어디쯤이 현미일 것 같았고, ‘고’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카리스마를 더했다. 본명을 쓰기 싫을 때는 현미에서 현웅으로 바꾸기도 하고. 혀크는 10대에게 어울릴 법한 이름을 고민하다가 골랐다. 10대 친구들을 많이 알지는 못하는데, 그런 이름을 좋아하는 시기가 있는 것 같더라. 본명이 혁으로 끝나면 퀴어 사회에서는 혀크라고 불러 달라고 한다든가. 그렇게 한 글자 정도를 바꿔서 쓰는 느낌이다. 쌀차비는 이 집에 들어온 이후에 본격적으로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람이기에 이름을 짓기가 조심스러웠다. 결국 이름 자체가 이 집에서 시작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소품인 찹쌀과자에서 이름을 따왔다.
왜 하필 찹쌀과자였나.
이반지하_ 가출 청소년이나 끼니를 제때 챙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주 먹는 걸 떠올렸다. 시간도 없고 돈도 넉넉하지 않고 입맛도 없는데, 뭔가를 먹기는 해야 하고. 쌀차비에게 찹쌀과자는 식량인 셈이다. 대충 배도 차면서 단맛도 있고, 유행을 타는 과자도 아니라 편의점에 가면 터줏대감처럼 한구석에 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밥은 아니지만, 밥에 가까운 것. 그래서 혀크한테 찹쌀과자를 준다는 건 사실 되게 큰 의미다. 고마움을 표현하는 쌀차비만의 방식이고.
원래 제목은 ‘아빠 하나 우리 둘’이었다고.
이반지하_ 계속 그 제목을 쓰다가 마지막에 포스터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좀 더 강렬한 제목이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처음에 빼갈은 ‘아현동 마님’처럼 ‘망원동 아빠’ 같은 제목을 추천하기도 했다. 근데 내가 지금 마포구에 사는데, 여기가 알려진 것처럼 되게 퀴어 친화적인 동네도 아니거든. 월세도 비싸고 물가도 높고 아주 힘든 동네야. (웃음) 지역을 한정하기 싫었고, 퀴어 문화를 서울 중심으로만 이야기하는 것도 문제라고 느꼈다. ‘검블유’(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처럼 줄임말을 쓰거나 한 번에 검색할 수 있는 제목을 고민했다. ‘아빠가방에들어가신다’라는 것도 해보고. 내가 방송하다가 자러 갈 때 팬들한테 하는 멘트다. (웃음) 여러 후보를 놓고 이야기한 끝에 ‘으랏파파’로 정했다. 들으면 기운도 나고 의미도 있어서 마음에 든다.
‘스탠바이 큐’ 프로젝트를 통해 완성한 ‘성 소수자 친화적인 미디어 제작 환경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현장에 적용했다고 들었다. 실제 어떤 식으로 운영되었는지, 각자 이를 통해 가장 만족감을 느낀 부분은 무엇인지.
김일란_ 기존 현장에서는 시스템이 작품을 만든다면, 여기서는 만남이 작품을 만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처럼 경험 없는 사람에게 연출이라는 역할을 맡기지도 않았겠지. (웃음) 연분홍치마는 기본적으로 현장에 머무는 모든 사람, 특히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신경 쓰려고 노력한다. 주목받는 사람보다 오히려 언저리에 위치한 사람, 잠시 왔다 가는 사람이야말로 때로는 그 현장을 가장 잘 증명한다고 생각하거든. 현장 느낌이 어떤지 나누고, 다음에 또 오고 싶은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계속 이야기했다. 촬영할 때 콘텐츠가 잘 나오는 것만큼이나 우리에게는 중요한 활동이다. 규모가 작아서 가능했던 것도 사실이다. 규모가 커진다면 또 다른 시스템을 고민하고 합의해야겠지. 다만, 우리가 활동하면서 지켜온 원칙을 <으랏파파> 현장에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빼갈은 프로듀서로서 그런 매뉴얼을 소개하고 설득하는 위치였는데.
빼갈_ 어렵지는 않았다. 여기서는 내가 대본에 매뉴얼을 넣고 그냥 출력하면 되니까. (웃음) 최근에는 상업 드라마 현장에서도 성폭력과 위계폭력 등을 인지하고, 촬영 전에 다 같이 수칙을 낭독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의 여러 활동이 긍정적 변화를 만들어냈다. <으랏파파> 현장에서 바랐던 건 딱 하나였다. 다른 현장에서 정체성으로 인해 차별받았던 스태프가 있는데, 그분이 마음 놓고 날아다녔으면 했다. 그리고 진짜 날아다녔지. (웃음)
루땐에서 활동하는 양말, 박한희 변호사, 김보미 다움 대표 등 조-단역 라인업도 화려하다.
빼갈_ 차별금지법 제정연대에서 활동했고, 그곳에서 쌓은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동원했다. 근데 3화에서 현미가 강의하는 장면은 정말 연출의 힘이 컸다.
이반지하_ 대본 쓰면서도 ‘안 될 거야. 김일란 감독이 할 수 있겠어?’ 그랬는데 보고 나서 깜짝 놀랐다. 제법이더라. (웃음)
극본은 몇 화까지 나왔나.
이반지하_ 시나리오 형태로 나온 건 3화까지. 전체적인 스토리에 관해서는 최근 감독님과 공유했다.
백현주_ 우리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
장기 프로젝트를 염두에 둔 듯하다. 추후 계획과 관련하여 제작진과 배우들은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김일란_ 서로 의지는 확인했고, 이제 제작비를 어떻게 구할지 고민해봐야 한다. 결국 기획 개발과 시나리오 작업, 제작비 마련 모두 따로 가는 게 아니니까. 내년 이맘때 본격적인 시즌 1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은 그림이다. 시즌당 10부 정도는 나왔으면 좋겠거든. 그렇게 보면 내년 봄도 좀 빠듯하다.
빼갈_ 지금 말하는 건 전부 희망 사항이다. 매체 편성을 받기 위해 준비하는 단계다.
최근 변희수 하사, 이은용 작가 등 안타까운 죽음을 마주했던 입장에서 많은 성소수자와 앨라이에게 <으랏파파>는 마음 놓고 웃을 수 있는 귀중한 창구다. 재미와 유머를 추구하는 동시에, 참여진에게는 무게감도 자연스레 따라올 듯하다. 최종적으로는 어떤 작품이 되기를 바라나.
김일란_ 최근에 “나도 저 집에서 살고 싶다”라는 트윗을 보고 좀 놀랐다. 어딘가에 재밌는 사람들이 산다, 그들이 새로운 가족을 구성했다 정도로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 느낌까지 불러일으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떤 퀴어들은 화면에 나오는 그 집에서, 고현미가 보호해주는 울타리 안에서 저 정도 잔소리를 애정으로 들으며 살고 싶어 하는 거다.
이반지하_ 갈 데가 없다는 감각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김일란_ 맞다, 슬프더라. 동시에 ‘이게 <으랏파파>의 역할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한 안도감과 즐거움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 에디가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에서 퀴어 청소년들과 <으랏파파>를 함께 봤는데, 다들 좋아했다고 하더라.
이반지하_ 정말? 너무 기쁘다.
김일란_ 작가님도 계속 강조해온 부분이다. 퀴어 청소년에게 집은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볼 때다. 현실에 그 공간이 없다면 시트콤 내에 존재하기를 바란다. 연분홍치마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변규리, 2021)이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다. 성소수자부모모임 활동을 담은 영화인데, 신기하게 <으랏파파>를 만들고 나니 연결 지점이 눈에 들어오더라. 성소수자부모모임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활동이 ‘프리허그’다. 길에서 안아주는 것, 괜찮으니 힘들면 찾아오라고 이야기해주는 것. 모르는 사람이고 실제 부모가 아니라고 해도 어쨌든 사회적 어른으로서 끌어안는 행위다. 그 과정에서 부모님들 역시 ‘내 새끼’만을 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에 필요한 어른으로서 나아간다. <으랏파파>가 현재 유튜브에서 어마어마한 조회 수를 기록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나도 저런 집에서 저런 어른들과 함께 퀴어로서 살고 싶다’라고 생각하니까.
이반지하_ 같은 맥락에서 “10년 뒤에 나도 퀴어 청소년과 저렇게 하우스메이트로 살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트윗도 인상적이었다. 어떤 성인은 <으랏파파>를 보며 그런 미래를 꿈꾸기도 하는 거다.
백현주_ 이제 시작인 것 같다. 지금까지는 고현미처럼 말하고 걷기 정도를 해봤다면, 3화를 마치고 나서 작품을 향한 꿈이 조금씩 생겨난다. 난 고현미라는 인물을 참 멋지다고 생각한다. 같이 있으면 창피한 사람이지만. (웃음) 이 사람이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부르는가, 거기서부터 출발이라고 본다. <으랏파파>의 인물들이 각자 싫어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많이 말했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순간, 누군가는 “취향이 이상하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때부터 진짜 볼거리가 생기거든. 시청자 역시 <으랏파파>를 통해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일, 자신을 잘 명명하는 일에 용기를 얻으면 좋겠다.


작가의 어깨가 무겁겠다.
이반지하_ 전혀. 난 항상 준비되어 있으니까. (웃음) 감독님과 얼마 전에 그런 얘기를 했다. 처음 각본을 쓸 때도 오래 지속하는 시리즈였으면 좋겠다고 했고, 나 역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다. 근데 정말 완성하고 보니까 시트콤이라는 장르 자체가 장기간 진행하지 않고서는 힘을 받기가 어려운 거다. 왜 기존 시트콤이 몇 년 동안, 수백 화씩 이어지는지 이해하게 됐다.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도 너무 많고, 회를 거듭하며 내용이 쌓일수록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으랏파파>가 내 멱살을 잡은 느낌이다. 내가 썼지만 이제는 작품 자체로 동력이 생겨버린 것 같고, 나는 달려가는 작품을 끝까지 쫓아가고 싶다. 그러려면 우리한테 필요한 건 돈이다.
김일란_ 다들 뭐라도 하고 싶어지지, 막? (웃음)
이반지하_ 꽤 많은 사람이 물어봤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또 펀딩을 받을 거냐. 우리도 고민하는 중인데 가급적 새로운 활로를 찾고 싶다. 매번 퀴어커뮤니티에서 모금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지 않았나.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기업이든 사람이든 나서줬으면 좋겠다. 그만한 가치가 충분한, 훨씬 더 멀리 갈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나 PPL 진짜 쓰고 싶다. 잘 쓸 자신 있다.
백현주_ 우리가 뭔가를 또 하겠구나. (웃음)
이반지하_ 쌀차비는 CJ대한통운 다녀야지. (웃음) 우리는 <으랏파파>로 이루고 싶은 완성도와 전문성이 있다. 단순히 영상 제작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리서치부터 기획까지 제대로 하고 싶다. 특히 나는 퀴어 청소년과 청년 이야기를 깊게 하고 싶거든. 대단한 학벌도 없고 든든한 백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일단 세상에 던져진 사람들.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함께 고민하고 또 보여주고 싶다.
끝으로 각자 생각하는 가족의 의미가 궁금하다. 가족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지금 가족이라고 부를 사람이 있는지.
강다현_ 다양한 레이어가 있는 것 같다.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어느 때는 이들이 진짜 가족인가 싶기도 하다. 원 가족이 아닌 공동체를 가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럼 왜 나는 그들을 굳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칭하나 싶고. <으랏파파>에서 다루는 관계가 되게 다양하다. 내가 느끼기에는 거의 모든 관계를 다루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곳에서 우리가 고민을 더해나가면 가족을 좀 더 폭넓게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나뿐만 아니라, <으랏파파>를 보는 분들 또한 그런 상상력을 키워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 우리에게 적합한 이름, 또는 내가 원하는 이름이 가족인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이반지하_ 난 가족이라고 하면 팬들 밖에 생각이 안 난다. 우리 감태들. 내가 요새 팬들한테 아빠거든. 사실 가족이란 말을 별로 안 좋아한다. 아빠라는 호칭도 농담처럼 소비하는 거고.
김일란_ 뭐야, 콘서트에 온 느낌인데. (웃음)
빼갈_ 음, 인정받는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지 않나. 생활동반자법 제정, 동성결혼 합법화, 가족구성권 인정...
이반지하_ 아, 역시 운동권! 가족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감독님은? (웃음)
김일란_ 한동안 나 없는 연분홍치마, 연분홍치마라는 울타리가 없는 나를 떠올리면 막막했다. 그만큼 의지하고 많은 시간을 함께한 공동체다. 아까 현주 선배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내 취향을 모르는 건 전혀 서운하지 않은데, 연분홍 사람들이 내 취향을 모르면 ‘어떻게 이걸 몰라?’ 싶은 거다.
이반지하_ 사장님 마인드 아닌가. ‘요즘 애들이 왜 이래? 커피가 너무 뜨겁잖아’ 같은 거. (웃음)
김일란_ 그런가. (웃음) 혜인은?
문혜인_ 쌀차비가 현미와 혀크 집에 받아들여진 것처럼 내가 <으랏파파> 현장으로 초대받은 느낌이 들었다. 그건 가족이라는 말과 연결되는 감각이기도 했다. 사실 그간 작업하는 과정에서 외로움이 좀 쌓였던 것 같다. 비인간적으로 대접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일종의 소외감에 계속 노출되었던 거다. 일란 감독님이 “만남으로 만든 작품”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깊게 와닿았다. 그냥 한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존재해도 괜찮다는 감각이 오래 남을 것 같다. 최근에 고향에 다녀왔는데 너무 오랜만에 충족감을 느꼈다. 누군가와 한 공간에서 잠을 자고, 같이 밥을 먹는 게 참 좋더라. 실은 되게 오랜 시간이 쌓인 관계잖아. 그런 면에서 <으랏파파>의 가족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축적된 시간 없이도 서로 받아들이면서 서서히 익숙해지는 거다.
백현주_ 가족이란 게 그런가 보다. 정말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인데 함께한다. 기대하는 것이 많아서 어려운가. 운명에 관한 질문을 제일 먼저 시작하게 되는 관계잖아. 이것은 왜 나의 선택이 아닌가. (웃음) 근데 혜인 배우가 말한 것처럼 선택한 관계를 지키기가 더 어렵다. <으랏파파>는 그걸 하려는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