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가진 전부를
<어른들은 몰라요> 안희연·이유미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1-04-10

화장하고 차려입은 모습이 어색하다며, 이유미와 안희연은 서로를 보자마자 한바탕 웃었다. 길거리를 누비며 온갖 고생을 함께 한 18살 세진(이유미)과 주영(안희연)으로 처음 만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 <어른들은 몰라요>(이환, 2021)의 아이들은 최소한의 안전망도 없는 세계에서 살아간다. “애 떼려고” 거리로 나온 세진, 어떻게든 수술비만 마련하면 해결될 줄 알았는데 고난의 연속이다. 도움을 주겠다며 접근하는 어른들은 하나같이 속이 시커멓고, 참고 견뎌보려는 노력은 번번이 좌절된다. 세진은 점점 더 크고 깊은 절망을 향해 가는 듯 보인다. 그런 세진 곁에 많은 이들이 스쳐 가지만, 그중에서도 주영은 특별하다. 집 나온 지 4년이라는 주영은 세진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먼저 동행을 제안한다. 이들은 단번에 서로의 버팀목이 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상대를 떠나지 않는 사이가 된다. 비장하게 의리를 결심한 적 없지만, 마음으로 단단히 엮인 관계. 눈을 빛내며 영화 얘기를 들려주는 이유미와 안희연도 그래 보였다. 이렇게까지 잘 맞는 동료를 만났다는 것이 마냥 신기해서, 캐스팅을 제안하며 자신을 보였던 이환 감독에게 ‘신기’라도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그 특별한 만남이 그룹 EXID의 하니를 배우 안희연으로 만들었고, <박화영>(이환, 2018)의 이유미를 더 넓은 세계로 이끌었다. 세진과 주영으로, 또 이유미와 안희연으로 <어른들은 몰라요>라는 세계를 해쳐온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이렇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친한 것 같다. 지난주에도 만났다고.

안희연_ 어제도 통화했다. (웃음)

이유미_ 완전 친하지. (웃음) 워크숍 하면서 많이 끈끈해지다 보니까 촬영 끝나고도 자연스럽게 연락하고 지낸다.

안희연_ 만나면 다음 작품에 대한 고민도 털어놓는다. “감독님, 나 이런 거 해볼까?”, “유미야, 나 저렇게 해볼까?” 하면서.

이유미_ 꼭 연기에 관련된 게 아니더라도,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 한다. 정말 ‘친한 사람들’이 됐다.

 

둘 다 한창 바쁘게 활동 중이다. 안희연 배우가 출연하는 드라마 <아직 낫서른>(카카오TV)이 방영 중이고, 이유미 배우는 넷플릭스에서 공개 예정인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과 <오징어 게임> 촬영을 마쳤다. 속도나 리듬은 어떤가. 기분 좋게 움직이고 있는지 궁금하다.

안희연_ <아직 낫서른>은 촬영이 끝난 상태고, 4월 말에 다음 작품을 시작한다. 지금은 영화 홍보에 집중하고 있다. 템포는, 좀 빠른 편이다. 내 안의 평온을 유지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는 루틴을 요즘 못 지키고 있어서 아쉽다. 뭐, 이럴 때도 있는 거니까. (웃음) 정말 많은 사람들이 같이 영화를 만들었는데, 홍보가 내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니까 책임감이 생기더라. 열심히 하려고 노력 중이다.

이유미_ 드라마 촬영 끝나고 처음으로 아무 일 없이 3개월 정도 쉬어봤다. 쉬는 방법을 몰라서 언니한테 물어보기도 했다. 쉬면서 성장한 것 같다. 그림도 많이 그리고 사람도 자주 만났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점점 알아갈 수 있었다.

 

피가 튀는 장르물이나 좀비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고 말한 적 있다. 지난해부터는 판타지나 좀비 스릴러에 연달아 출연 중인데, 보는 것만큼 연기도 재밌던가.

이유미_ 맞다, 그랬지. 너무 재밌다. (웃음) 실제로 보고 있으니까 더 재밌더라. 붉은 피가 주는 시원한 느낌이 있다. 취향인 거겠지.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는 얄밉고 못된 친구를 연기했다. “얘가 왜 이래?” 싶다가도 나중에는 애잔해지기도 하고, 매력 있는 캐릭터다.

 

안희연 배우는 <어른들은 몰라요> 이후 웹드라마를 쭉 찍고 있다.

안희연_ <어른들은 몰라요>를 촬영했던 몇 개월이 내 인생에 가장 짙었던 순간이라고 생각하는데, 연기가 좋았던 건지 무언가를 한다는 행위가 좋았던 건지 구분이 잘 안 됐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정반대의 환경에 나를 놓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게 웹드라마였다. 연기를 계속해보니까, 재밌었다. 자꾸 더 해보고 싶어졌다.

<어른들은 몰라요>
<어른들은 몰라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 차례 영화를 상영했다. 스크린으로 본 <어른들은 몰라요>는 어땠나. GV 영상을 보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더라.

안희연_ 감독님이 영화를 하도 안 보여줘서 일단은 굉장히 궁금했다. 큰 스크린에 내 얼굴이 나오는 게 어색하기도 했고, 신기했고, 무엇보다 감개무량했다. 모든 게 새로운 경험이니까 당연히 긴장도 많이 했다.

이유미_ 진정하려고 정말 애썼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오열하고 있었거든. (웃음) 촬영할 때의 추억과 힘들었던 일들이 막 생각나서 울고 있는데 GV를 해야 한다더라. 어떤 질문을 받았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영화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는 역할은 처음이었고, 영화도 그 자리에서 처음 봤기 때문에 걱정을 좀 했던 것 같다. 보고 나니 그래도 마음이 놓였다.

 

<어른들은 몰라요>는 <박화영>의 세진에서부터 시작된 영화다. 초고부터 시작해서 계속 시나리오를 받았고 영화의 전 과정을 함께했는데.

이유미_ 감독님이 어느 날 세진이의 영화를 만들 거고, 나랑 닮은 아이가 동생으로 나올 거고, 세진이는 어른들한테 계속 배신을 당할 거라는 얘기를 해줬다. 처음엔 이환 감독님이 그리는 배신은 대체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리고 정말 얼마 안 가서 시나리오를 받았다. 그야말로 감독님만의 배신이더라. 이야기가 세고 어렵다는 느낌이었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궁리하면서 자연스럽게 계속 대화를 해나갔던 것 같다. 그걸 시작으로 촬영이 끝날 때까지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영화 찍으면서는 막상 그런 생각을 못 했는데, 끝나고 나니 정말 치열한 시간이었다고 느껴졌다. 처음과 끝을 다 하면 이런 느낌이 드는 건가? 이렇게 치열해질 수도 있는 거구나, 싶더라. 값진 경험이었다.

 

안희연 배우는 기존 소속사와 계약이 끝나고 해외여행 중에 SNS 메시지로 캐스팅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이 영화가 본격적인 연기의 시작인데, 출연을 결정하게 된 계기가 있나.

안희연_ 여행 가기 전에 <박화영>을 알게 돼서, 나중에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박화영>을 만든 감독이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다며 DM을 보낸 거지. (웃음) 시나리오를 보내준다기에 일단 받았다. 솔직히 너무 셌는데, 동시에 용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감상을 이야기하고, 거절 의사를 전했다. 지금 회사도 없고 연기를 해본 적도 없으니, 당장 결정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그랬더니 한국에 오면 한 번 만나기라도 하자더라. 당시에는 회사와 계약은 끝났지만, EXID 외국 공연이 남아있어서 일단 한국에는 들어와야 했다. 그때 감독님을 만났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두 번째 만났을 때 출연하기로 하고, 다음 날부터 워크숍을 시작했다.

 

바로 다음 날?

안희연_ 맞다. 나한테는 이 사람이 이걸 왜 하려는지가 중요했는데, 대화가 통했다. 그때 나는 미래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래도 앞으로 내가 하려는 일이 세상에 조금은 도움이 되길 바랐다. 그 얘길 했더니 감독님이 이렇게 말했다. 영화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본인도 그런 꿈이 있다고 말이다.

 

그래도 연기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을 텐데.

안희연_ 해보고 하는 후회가 낫잖나. (웃음) 그리고 감독님이 워크숍이라는 시스템에 자신을 보였다. 그걸 함께 해줄 유미에 대한 믿음, 내가 잘 따라와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하더라.

안희연 ⓒ이영진

둘 다 첫인상으로 ‘세다’는 얘길 했다. 어떤 이야기라고 봤나.

이유미_ 연기하면서 마음 아픈 부분이 너무 많았다. 처음 시나리오 읽었을 때, 세다는 느낌에 더해 세진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더라. 그러다가 제목을 다시 봤다. 내가 지금 어른이라서 세진을 모르고 있는 건가 싶어서 세진에게 흥미를 많이 가지게 됐다. 그럼 세진이가 직접 되어서 한번 느껴보자는 마음이 들었고, 그게 어떠한 끌림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이해하고 싶은 매력이 있었다. 나중에는 고민이 정말 많아졌다. 세진 주변에 있던 많은 어른과 나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내가 이해한 세진이 지금 곁에 있다면 나는 어떤 어른이 될 것인지 계속 생각하게 됐다.

안희연_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보셨으면 좋겠다. 그때 흘러나오는 노래가 정말 많은 감정을 준다. 영화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거기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들으면 눈물이 많이 나는데, 감독님이 홍보하면서 노래 제목을 말하지 말라고 하더라. (웃음) 아쉽다.

이유미_ 마지막에 감정이 정말 세게 오지.

 

세진이 간간이 보여주는 서늘한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대책 없어 보이지만, 뼈아프게 터득한 생존방식이 있는 인물 같다.

이유미_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다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폭력을 당할 때도 그걸 다 흡수하지 않나. 유산하기 위해 돌아다니면서도 상황을 전부 받아들인다. 자신을 지킬 방법이 그뿐인 거다. 그런데 그걸 누가 짜주지 않는 이상은, 점점 무거워지기만 할 뿐 다시 내보낼 수 없는 거지. 점점 버거워지니까 그런 서늘한 표정이 나왔던 게 아닐까. 그걸 짜준 게 동생인 세정(신햇빛)이라고 봤다. 그래서 다시 동생에게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고.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강하고 안타까운 아이다.

 

집 나온 지 4년째인 주영은 시원시원하고 자기감정에도 솔직한 한편, 여리고 약한 구석도 있다.

안희연_ 어떤 인물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안희연이라는 사람이 주영 같은 환경에 놓여있을 때 어떤 모습인지를 찾아간 결과 같다. 굉장히 나 같은 주영이 나왔다고 생각했다. 영화에 드러나지 않는 주영의 과거나 감정을 우리는 정확히 다 알고 있었다. 워크숍을 통해 그런 것을 구체화하는 과정이 있었거든. 사실 외적인 모습을 많이 고민했다. 나는 아이돌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가진 정돈된 느낌이 있다. 처음에 테스트 촬영하고 놀랐지.

이유미_ 우리가 다 뮤비라고 했다. (웃음)

안희연_ 아 이걸 어떡하지 싶더라. (웃음) 손톱 뜯는 버릇도 내버려 두고, 밥도 잘 안 먹고, 트리트먼트도 관뒀다. 그렇다고 일부러 상처를 낸다거나 하는 식의 인위적인 외양을 만들긴 싫었다.

이유미_ 뮤비 같았던 건 언니가 포즈를 너무 잘 취해서야. 카메라도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고.

안희연_ 감독님과 유미 따라서 옷도 싹 새로 샀다. 크고 펑퍼짐하고 편한 것으로.

이유미_ 전자제품 훔치고 천장에 올라가는 장면에 주영의 발바닥이 보인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좋았지. 진짜 집 나온 사람 같았다.

안희연_ 각질이 많이 올라왔거든. (웃음)

 

세진은 어땠나.

이유미_ 내 모습 그대로였다. 세진은 나중에 집을 나온 아이니까. 다만 롱보드 연습하면서 다리에 멍이 많이 들었는데, 세진이가 워낙 롱보드를 많이 타니까 자연스러운 설정으로 뒀다. 롱보드는 보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막상 해보면 정말 어렵다. 중심은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고, 발도 막 떨렸다.

 

<땐뽀걸즈> 찍을 때도 춤을 배웠는데, 당시에 부상도 있었다. 천천히 익숙해지는 타입인가?

이유미_ 감을 잡을 때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다. 그래도 감을 잡으면 빨리 익힐 수 있는? 롱보드 가르쳐주신 분들이, 이건 타는 리듬이 사람마다 달라서 누군가를 단순히 따라 하는 걸로는 안 된다고 하더라. 자기만의 리듬을 찾아야 한다고. 그걸 찾으려고 애썼다.

이유미 ⓒ이영진

안희연 배우도 체육 종목에 능통하고 몸을 잘 쓰지 않나. 스포츠 종목 연기에도 욕심이 있을 것 같다.

안희연_ 롱보드는 못 타겠더라. 겁이 많아서. (웃음) 스포츠 종목 연기나 전사 역할 같은 건 해보고 싶다. 툼 레이더나 캣니스 에버딘? (활 쏘는 시늉을 한다)

이유미_ 활 진짜 좋다! 배구선수도 잘 어울릴 것 같고.

 

촬영 전에 워크숍을 길게 진행했다고 했다. 즉흥극을 통해 시나리오에 없는 상황도 경험해보고, 감정을 키워보는 작업이라고. 배우 입장에선 어떤 경험이었나.

안희연_ 맨 처음에는 상대가 지르는 악 소리를 받아서 소리를 다시 지른다든지, 앞을 막고 있는 사람들을 뚫고 지나간다든지 하는 걸 했다. 이게 뭘까 싶었지. 그런데 하다 보니 감정이 올라오더라. 짜증 나고, 욕도 나오고. 일단 그냥 시작했는데, 하면서 점점 욕심이 생겼다. 이렇게 해볼래, 저렇게 해볼래, 하면서 시도도 많이 하고. 그걸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재밌게 할 수 있었다. 촬영 들어간 후에도 우리가 요청해서 계속 워크숍을 진행했다.

이유미_ 촬영할 때는 앞에 카메라가 있고 거기 맞게 연기를 해야 하는데, 워크숍 할 때는 제약이 없으니까 너무 자유롭다.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본 것 같다. 세진으로서, 혹은 이유미로서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었다. 몸에 힘이 다 빠져있는 장면을 연기해야 하는데 힘이 남아돌아서 밖에 나가 진이 빠질 때까지 뛰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더 잘 된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까지 해봤다는 게 좋더라. 계속 성장하는 느낌이었다.

 

이환 감독은 인물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배우들에게도 계속 그 얘기를 했다고 하더라.

이유미_ 서로 눈만 봐도 뭔지 알 것 같은 순간이 있다. 마음이 오가는 거다. 그리고 그게 카메라 앞에서도 드러나는 거지.

안희연_ 나만의 것을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돼서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워크숍 하면서 유미가 나를 정말 많이 도와줬다. 배역을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고, 감독님이 그걸 영화에 녹여낸 거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감독님은 우리가 이렇게 잘 맞을 걸 어떻게 알았을까? (웃음) 농담으로 감독님 진짜 자리 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니까. 현장이 처음이니까 유미를 졸졸 쫓아다녔다. 하루는 유미가 스태프들 사진과 이름을 죄다 편집해서 만든 파일을 보내줬다. 내가 현장에서 좀 더 편해지라고. 그러니 상호작용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진짜 관계가 캐릭터에 드러났던 것 같다.

 

세진과 주영은 보고 있으면 유일하게 안심이 되는 쌍이다. 헤어지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군더더기가 없다고 할까. 척하면 척, 하는 느낌으로 헤어지잖나.

이유미_ 때 많이 묻고 무거운 애들 같지만, 둘이 제일 순수하기 때문에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조합이지. 세진에게는 가족 외에 주영 만이 자신을 해하지 않는 사람일 거다. 너무 나쁜 상황을 많이 겪었는데, 그 과정에서 피해를 주지 않은 사람은 주영뿐 이다. 그렇기 때문에 떠나보낸 게 아닐까.

 

납득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나 행동도 있었을 법하다.

안희연_ 처음에 받았던 시나리오에는 (세진을) 돌로 치는 장면이 없었다. 그 장면이 추가됐을 때, 처음엔 반대했다. 주영은 그럴 사람이 아니기도 하고, 그렇게 되면 이 세계가 너무 끔찍해진다고 생각했다. 납득이 안 됐다. 하지만,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거니까 결국 함부로 얘기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싶더라. 같은 상황에서 나라면 안 그럴 거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고민이 너무 많아서 감독님과 정말 대화를 많이 했다. 과연 주영 입장에서 진짜 어려운 일은 뭐였을까? 돌로 내려치는 거였을까, 이후에 남아서 사과하는 거였을까. 인간에게 정말 힘든 결정은 후자일 거라는 생각을 했고, 그 장면의 필요성을 받아들이게 됐다. 돼지고기를 구해 와서 연습할 정도로 너무 어려웠다. 거짓으로 하고 싶지 않았다.

이유미_ 우리가 토론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안희연_ 정말 많이 싸웠지.

이유미_ 촬영 끝나면 바로 다음 촬영에 관해 얘기하고, 날마다 그렇게 했으니까.

안희연_ 감독님이 전혀 강압적인 스타일이 아니었다. 항상 우리를 믿고 기다려줬다.

이유미_ 난 세진과 주영이 재필(이환)과 신지(한성수)를 만나고 함께 다니게 됐을 때, 세진이 재필에게 하는 대사가 잘 이해가 안 됐다. “오빠 나 좋아하죠?”라는 너무 단정적인 말 한마디를 재필에게 던지거든. 감독님과 대화하다 보니, 세진이 보기보다 생각이 엄청 많은 아이이고 그래서 그런 말도 한다는 걸 납득하게 됐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이지만, 없던 감정도 만들어내는 그런 아이인 거다.

안희연 ⓒ이영진

분노, 두려움, 울분까지, 주영은 소화해야 하는 감정의 폭이 넓다. 감독은 안희연 배우를 과감하고 솔직하다고 평했다. 두려움 없이 감정을 폭발시키고 멀리까지 가보려 한다고.

안희연_ 원래 내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서 어려웠다. 그러니까, 뭔가를 무너뜨려야 했다. 그게 무너지면 죽는 줄 알았고,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서 노력하며 살아왔거든. 물론 간혹 삐져나오긴 했지만. (웃음) 큰 용기가 필요했고, 많은 도움이 있었다. 나만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면 못 했을 텐데, 이 영화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해봤더니 자유로워지더라. 내게는 선물이었던 거지.

 

감독은 이유미 배우가 표현하는 세진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궁금했다고 말했다. 무한한 정서와 감정을 쏟아낼 수 있는 배우라는 말도 전해줬다. 막연하게 느꼈을 수도 있을 텐데.

이유미_ 워크숍 때 한 풀 듯 다양한 것을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폭이 생겨난 것 같다. 그 상태로 촬영에 들어가면서, 자유로우면서도 섬세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상태가 됐고. 모든 걸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라고 할까? 그야말로 세진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이미 세진으로서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지만, 남들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거지. 그게 너무 좋더라. 일부러 감정을 올리거나 내리려고 하지 않고.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뭘 어떻게 해도 믿어주는 사람들밖에 없었으니까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안희연_ 촬영 감독님이 정말 자상한 분이었다. 우리 이름을 쓴 부엉이 모형도 선물로 주셨다. 감정이 고갈된 것 같을 때 촬감님을 보면 눈물이 나왔다니까. (웃음) 고마운 사람들밖에 없다.

 

롱테이크가 많아서 배우는 물론이고 스태프도 다 고생했겠다 싶더라. 후반부 천변에서 주영이 감정을 터뜨리는 장면, 마지막에 이르러서 세진이 고통을 겪는 장면 등 기억에 남는 장면은 다 롱테이크로 찍었다.

이유미_ 부담스러우면서도 재밌었다. 중간에 끊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볼 수 있는 거잖나. 다들 많이 기다려줬고, 현장도 항상 즐거웠다. 한없이 믿어주는 가족 같은 느낌이었지.

안희연_ 사실 그걸 길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워크숍은 몇 시간도 하니까. 나는 모든 게 처음이라 카메라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했던 것 같고, 감독님과 스태프분들이 다 만들어주신 거다.

 

본인의 새로운 얼굴도 많이 발견했을 것 같다.

안희연_ 사람들이 다 나인 줄 모르더라. 후반 작업하신 분들이나 음악 하신 분들도 못 알아보셔서, 신기하고 재밌었다. 그런데 나는 워크숍 할 때 더 이상한 얼굴을 많이 봤다. (웃음) 그걸 다 촬영해서 모니터도 같이했거든. 그때 처음 보는 내 얼굴을 진짜 많이 봤는데, 그 모습이 전혀 싫지 않았다.

이유미_ 어렸을 때 사진 보듯이, 나인 것 같은데 겹이 하나 생긴 것처럼 낯선 느낌이었다. 촬영할 때는 세진이 바로 등 뒤에 있는 것 같았는데, 영화를 다시 보니까 낯설게 다가오더라.

 

서로의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면.

안희연_ 나와 헤어진 후 세진의 모습. 그러니까, 주영이 준 변화잖나. 주영으로서 그게 항상 궁금했나 보더라. 마지막 얼굴을 보고 안심했다.

이유미_ 나는 촬영할 때 누워있느라 못 봤던 천변에서의 언니 얼굴. 스크린으로 그 얼굴을 처음 봤는데, 다 용서되는 느낌이었다. 언니가 “아파요” 하는데, 나도 막 아프고. (웃음)

이유미 ⓒ이영진

이 영화를 보면 자연히 ‘어른’이나 ‘집’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두 사람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

이유미_ 누군가에게는 집이 편한 곳일 수도 있고 불편한 곳일 수도 있는데, 그것 또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어른 아닐까. 그냥 나이 먹으면 어른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서, 여전히 어렵다.

안희연_ 집이 꼭 공간을 이르는 건 아닌 것 같다. 내가 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게 해주는 존재나 관계, 경험일 수도 있다. 주영에게는 드디어 집이 생기지 않았나 싶거든. 어른에 대해서는 계속 고민 중이다. 그런 고민을 하게 하는 영화니까, 어른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다.

이유미_ 제목 참 잘 지은 것 같다.

 

이유미 배우는 어느덧 경력이 12년 차고, 안희연 배우는 지금 제일 재밌는 게 연기라고 말했다. 연기의 매력, 계속 이 일을 하게 되는 동력은 뭔가.

이유미_ 항상 새로워서 그런 것 같다. 많은 캐릭터를 만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게 되고 내 다양한 면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겪는다. 거기 성장이 있는 느낌이다. 아직도 연기에 대해 궁금한 게 너무 많다. 인생 같은 거라고 할까. 인간의 삶도 궁금한 것투성이잖나. 내 삶도 연기처럼, 연기도 삶처럼 계속 궁금하다.

안희연_ 똑같다. (웃음) 연기를 통해 나를 배우고, 타인을 배우고, 세상을 배우고, 관계를 배우는 것 같다. 그 과정이 정말 감사하고 재밌다. 내가 조금 더 커지는 느낌? 이걸 유미식으로 얘기하면 똑같은 표현이 될 것 같아서 웃음이 났다.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

 

좋아하는 배우는?

안희연_ 이유미. 이 친구 옆에서 처음 연기를 했다는 게 영광이다. 나중에 보니까, 다른 현장에서 내가 유미를 따라 하고 있더라. 유미가 나한테 어떻게 해줬는지를 고스란히 내가 반복하고 있었다.

이유미_ 난 어릴 때는 롤모델이 3일 간격으로 바뀌는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이 너무 많은데 어쩌지? 하면서. 그런데 계속 일을 하다 보니까, 결국엔 그때 주변에 있는 배우들을 좋아하게 되더라. 내가 가장 잘 알고 내 가까이에 있는 배우를 사랑한다. 언니도 내게는 정말 용기가 어마무시한, 본받을 만한 배우다. 너무 용감하고 멋있는 사람이다.

 

서른이 된 소감을 주변에서 많이 물었을 텐데, 지겹진 않았나.

안희연_ 새해에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오히려 서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돼서 좋았다. 물론 소감을 “구려요.”라고 하긴 했지만. (웃음) 지금까지의 시간에 감사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잘 살아낸 내 모습이 꽤 맘에 들더라. 예전에는 미래를 중요하게 여겼는데, 지금은 현재가 중요하다. 거기서 오는 안정감이 있다. 행복감도 많이 느끼고 만족스럽다.

이유미_ 나는 스물여덟인데, 서른이 됐을 때 언니 같은 마음을 느끼고 싶다. 먼저 가 있어봐라, 따라간다, 하고 있지. (웃음)

안희연_ 여기 나쁘지 않아, 빨리 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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