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말하지 못한
<비밀의 정원>
손시내 / Choice / 2021-04-09

<비밀의 정원>에서 ‘비밀’은 서사의 굴곡을 만드는 설정이나 감정의 요동을 만드는 장치와 거리가 멀다. 비밀의 내용은 진지하게 다뤄지나, 비밀 그 자체가 극에 드리우는 명암은 그리 크지 않다. 그래서 이야기의 밀도가 종종 느슨하게 느껴지지만, 오히려 여기엔 인물이 깊게 호흡하고 충분히 생각에 잠길 여유로운 틈이 있다. 그 열린 틈이야말로 <비밀의 정원>이 비밀을 경유해 주시하려는 특별하고 고유한 지점이다. 영화는 사건의 해결과 정념의 해소를 목표로 내달리지 않는다. 대신, 삶의 한 기점에 선 정원(한우연)의 예민한 기척을 담담하고 섬세하게 포착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버리는 게 많네.” “사람이 버릴 줄도 알아야지.” 자그만 아파트에서 오래된 주택으로 이사하게 된 정원과 상우(전석호)는 세간을 꺼내두고 한참을 투덕거린다. 결혼한 지 2년째인 젊은 부부는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평범한 일상을 꾸려가는 중이다. 언제나 다정하고 그토록 친밀했던 두 사람, 그러나 정원과 상우 사이는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조금씩 금이 간다. 10년 전 고등학생이던 자신을 성폭행한 가해자가 특정됐다는 경찰의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 정원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상우에게 과거의 사건을 미리 털어놓지 못했다는 뒤늦은 미안함과 죄책감이 정원을 힘들게 한다.

정원의 비밀을 영화는 오래 함구할 생각이 없다. 전반부가 채 끝나기 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가 드러난다. <비밀의 정원>은 박선주 감독이 2016년에 연출했고,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아시아 단편경선 부문에서 수상한 <미열>로부터 시작된 작품이다. <비밀의 정원>과 주요 설정을 공유하는 <미열>은 공개 당시 “그 일은 전혀 아무렇지 않은 일도 아니지만, 우리를 무너트릴 일도 아니다.”라는 홍보문구를 달았는데, 이는 이번 장편에도 고스란히 적용할 만한 카피다. 카메라는 ‘비밀 아닌 비밀’에 제각기 달리 반응하는 인물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방식으로 유사 소재 영화들과 궤를 달리한다.

<비밀의 정원>
<비밀의 정원>

주변에서 갈등을 부추기거나 증폭시키는 것도 아니다. 수면 위로 떠오른 기억으로 정원은 자꾸만 멈칫거린다. 그녀는 상우의 평범한 장난에도 불안을 느끼고, 말없이 생각에 잠기는 때가 많아진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정원의 엄마(오민애)와 동생 소희(정다은)의 읊조림에도, 사실을 알게 된 후 대화의 기회를 노리는 상우의 물음에도 정원은 입을 다문다. 그 때문에 관계가 조금씩 어긋난다. 서먹해진 인물들은 오해하고, 상처받는다. 하지만 선하고 친절한 정원의 주위 사람들은 너무 가까이 다가서 개입하기보다 한발 물러선 채로 정원의 곁을 묵묵히 지킨다. 가해자에 대한 재판도 조용히 진행된다.

그렇다면 정원의 내면에 쉼 없이 차오르는 것은 뭘까. <비밀의 정원>은 쉽게 단정하지 않는다. “왜 성폭행 피해는 마치 씻을 수 없는 상처처럼 말해질까?”라는 질문에서 비롯된 영화는 자극을 통해 공감을 끌어내기보다 관객이 직접 정원의 자리에서, 말할 수 없었던 비밀과 대면토록 유도한다. 영화는 사건에 관해 대화하고 싶어 하는 엄마와 동생, 상우에게 좀처럼 응하지 않는 정원의 모습을 세심히 담아뒀다. 이는 인물의 성격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경험과 감정을 재현하는 것에 대한 영화의 고심을 드러낸다. 그 일은 어떻게 말해져야 하는가? 적나라한 폭로를 피하고 인물의 현재에 집중하는 <비밀의 정원>은 성실하고 사려 깊은 하나의 답이다

일상의 묘사와 인물의 표현이 그래서 중요하다. 정원과 상우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물론 일터의 풍경도 주의 깊게 담고 있다. 정원은 문화센터에서 수영 강사로 근무하고, 상우는 정원의 이모(염혜란), 이모부(유재명)가 운영하는 목공소에서 일한다. 물속의 정원은 때로는 자유롭고 때로는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간다. 늘 같은 자리에서 나무를 깎고 가구를 만드는 상우는 다감하고 든든한 사람이다. 둘은 강인함이나 무해함을 티 내 증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실적 인물이기도 하다. <미열>에 이어 부부로 출연한 한우연과 전석호는 마지막까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져버리지 않는 씩씩한 커플을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비밀의 정원>
<비밀의 정원>

 

비밀의 정원 Way Back Home 감독 박선주 출연 한우연, 전석호, 정다은, 염혜란, 유재명, 오민애 제작 몬순픽쳐스 배급 필름다빈 제작연도 2019년 상영시간 110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1년 4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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