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우지현)은 집을 버렸다. 생존을 보장하는 안락한 울타리와 취향대로 꾸민 자기만의 공간을 포기했고, 그곳 안팎에서 함께 웃고 울던 여러 사람과도 연락을 끊었다. 삶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여기며 고립을 택하기 직전, 그는 화재 사고로 친구를 잃었다.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무력하게 숨을 고를 때, 누군가가 태산에게 다가와 “너는 왜 살아 있느냐”고 다그쳤다. 나는 왜 사는지, 어째서 나만 살아남았는지 되물을수록 존재의 이유는 희미해지고 죄책감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원망 섞인 말보다 그 안에 담긴 슬픔이 괴로워서 태산은 도망치듯 떠났다. 길 위에서 맞이한 겨울은 혹독하리만치 춥고, 희뿌연 하늘만큼 태산의 얼굴에도 그늘이 짙다. 시도 때도 없이 미세먼지 경보가 울리는 도시에서 먼지처럼 떠도는 이는 태산만이 아니다. 그가 가족처럼 챙기는 도준(강길우)과 김씨(민경진) 역시 저마다 사연을 지닌 채 서울역으로 왔다. 태산은 두 사람을 각각 동생과 삼촌으로 대하며 결속감을 느낀다. 다만, 과거의 죽음과 해소하지 못한 감정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태산은 종종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긴 밤을 홀로 보낸다. 모아(심달기)와 처음 마주친 밤도 마찬가지다. 멀리서 들려 오는 사이렌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거리를 헤매던 그는 우연히 굴다리 아래에서 벽화를 그리는 미대생 모아를 발견한다. 벽면 가득히 초록색 잎사귀가 피어나는 풍경을 지켜본 후, 태산은 집과 함께 버렸던 것 중 하나를 떠올린다. 제 손으로 해내던 일이자 삶을 더없이 풍요롭게 채워주던 예술, 바로 그림이다. 그날 이후, 태산은 먼지 쌓인 유리를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한밤중에 굴다리 아래에서 다시 마주했을 때, 벽은 이미 잎사귀의 흔적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페인트칠 되어 있다. 어차피 사라질 그림을 그토록 정성스레 그리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모아는 뜻밖의 대답을 들려준다. “지워질 그림이니까요. 평생 가는 게 어딨어요.” 해맑게 웃는 모아에게 태산은 먼지로 뒤덮인 캔버스를 소개해준다. 오랫동안 주차된 차와 재개발 지역의 건물 사이를 돌아다니며 둘은 밤새 그림을 그린다. 시종일관 과거에 짓눌려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하던 태산은 그때 처음으로 “기분이 좋네요”라고 말한다.


두 인물의 교류는 변화를 일으킨다. 태산은 그림과 대화를 통해 조금씩 일상을 복구한다. 단지 미소를 되찾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갇힌 상태에서 벗어나 타인에게 다가가는 법을 하나둘 배운다. 아버지를 잃은 트럭 운전사를 위해 태산은 트럭 뒷면에 ‘기도하는 손’을 그린다. 이는 과거를 후회하며 차마 죽음을 애도하지 못하던 운전사에게는 물론, 슬픔에 빠진 여러 사람에게 조용하고 강력한 위로로 가닿는다. 한편, 모아는 태산을 통해 새로운 출구를 찾는다. 졸업 전시회를 앞두고 재능을 의심하며 고민에 빠진 모아에게 태산은 무얼 말하고 싶은지 먼저 찾아보라고 일러준다. 영화는 로맨스라는 쉬운 길을 택하는 대신 좀 더 폭넓은 화학 작용에 주목한다. 태산과 모아를 이어주는 것은 연애 감정이 아니라, 무구한 호의와 느슨한 유대에 기반한 예술적 교감이다. 태산은 “잘 안 보이는 존재라도 각자 이야기가 있어요”라며 먼지가 빛을 받으면 반짝거리는 ‘틴들현상’에 관해 들려준다. 영화 속 두 인물의 만남이 곧 ‘틴들현상’이다. 둘은 일방적인 헌신과 구원의 구도에서 이탈하여 서로 힘을 불어넣는 관계로 자리 잡는다.
먼지에 빛을 비추듯 카메라는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을 조명한다. 클로즈업 샷은 미세하게 진동하는 태산의 얼굴을 기록하고, 태산과 모아가 경험하는 잊지 못할 순간에 집중한다. 먼지 위에 그린 그림은 금세 바람에 날려 지워지지만, 그림이 사라진 곳에는 추억과 현실이 남는다. 인물들은 이를 바탕으로 제 쓸모와 아름다움을 찾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과 직면한다. <더스트맨>은 타인과의 소통이 자신을 지키는 힘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말하는 동시에, 예술이 품은 위로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설득한다. 그리고 나누는 행위와 더불어 태산은 세상으로 한 발짝 걸어 들어가고, 모아는 포기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단편 <내 차례>(2017) <대리시험>(2019) 등을 연출한 김나경 감독의 첫 장편으로,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세밀하게 표현하는 우지현과 싱그러운 에너지를 내뿜으며 빛나는 심달기의 연기가 조화롭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앰비언트 음악은 도시의 소음을 재현하는 동시에, 인물들이 말없이 교감하는 순간을 풍성하게 채운다. 실제 더스트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니키타 골루베프와 동양화가 이자윤이 참여하며 완성도 높은 미술을 선보인다.


더스트맨 DUST-MAN 감독 김나경 출연 우지현, 심달기, 강길우 제작 한국예술종합학교 배급 트리플픽쳐스 제작연도 2020년 상영시간 92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1년 4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