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진짜 이름은
<스파이의 아내>
박동수 / Choice / 2021-03-28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인 1940년. 일본 정부는 물자 비축, 출판 검열 등 강력한 통제 정책을 실시한다. 식민지에서 자행한 감시와 수탈은 이제 본토에서도 당연한 처사. 외국인 사업가는 긴급 체포되고, 도열한 군인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사람들은 양복 대신 국민복을 착용해야 한다. 모두가 전쟁 준비에 혈안이지만,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와 사토코(아오이 유우)만은 예외다. 고베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유사쿠 부부는 전시 총동원 명령을 비웃기라도 하듯 위스키를 마시고 만찬을 즐긴다. 사토코의 고향 친구인 헌병 분대장 타이지(히가시데 마사히로)는 이들의 행실과 처신이 몹시 불쾌하다.

젊은 부부의 안온한 일상은, 유사쿠의 위험한 여행 직후 급격히 균열한다. 유사쿠를 따라 만주에서 몰래 귀국한 여인 히로코가 사체로 발견되고, 이 사건으로 헌병대 조사까지 받게 된 사토코. 행적을 추궁해도 일절 침묵하는 남편을 의심하는 그녀는 유사쿠와 함께 여행을 다녀온 조카 후미오(반도 료타)를 찾았다가 뜻밖의 문서를 건네받는다. 일본 관동군이 대륙에서 벌인 잔악한 만행을 낱낱이 기록한 생체 실험 자료다. 기밀 문서를 내밀자 그때서야 유사쿠는 만주에서 목격한 끔찍한 일을 털어놓지만, 남편의 진심을 확인한 사토코는 돌발 행동을 취하고, 사건은 종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빠져든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을 차지한 <스파이의 아내>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첫 번째 시대극으로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보다 특유의 태도가 더 눈에 띈다. 오래전에 감독은 개인과 사회의 불화야말로 자신이 영화를 만드는 동기라고 말하면서, 불안과 공포를 견디지 못해 체제 바깥으로 뛰쳐나갈 수 있는 방법은 “죽거나 범죄자가 되거나 미치거나”, 이 세 가지뿐이라고 덧붙인 적 있다. <스파이의 아내>에서도 그의 지론을 쉽사리 확인할 수 있다. 유사쿠와 사토코, 후미오와 히로코 모두 구로사와 기요시가 정해둔 운명의 회로를 충실히 따른다.

<스파이의 아내>
<스파이의 아내>

특히 사토코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관심을 또렷이 보여주는 인물이다. 만국 공통의 정의를 따르겠다는 유사쿠에게 “스파이의 아내로 매도당해도” 괜찮다는 것이냐고 반문하던 사토코는, “난 스파이가 아냐”라고 말하는 유사쿠에게 “당신이 스파이라면 스파이의 아내가 될게요”라고 웃으며 다짐한다. 운명적 상황에서 사랑을 선택하는 이는 감독의 전작 <해안가로의 여행>(2015)이나 <산책하는 침략자>(2017)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명>(1946)을 비롯한 히치콕 영화나, 각본 작업에 참여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2018)의 인물들도 연상될 것이다. 

극 중에 삽입한 두 편의 8mm 필름을, 사토코와 유사쿠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변화시키는 장치로 활용한 것도 흥미롭다. 하나는 유사쿠와 사토코가 찍은 홈메이드 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유사쿠가 만주에서 반입한 기록 이미지다. 교차하고 반복해서 쓰이는 이 영상들은 두 인물의 갈등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사건 전개에 있어 중요한 장치로 쓰이며, 대단원의 장면에서 사토코가 목격하는 참상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사토코와 유사쿠가 사는 집은 물론이거니와 두 사람이 같이 전차를 타고 이동할 때조차 창밖 풍경을 차단한 것 또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 영화는 전쟁영화가 아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단언처럼, <스파이의 아내>는 ‘전쟁’ 자체를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만주로 향하는 것은 감독의 카메라가 아니라 유사쿠의 카메라다. 유사쿠의 카메라 또한 대륙의 참상을 직접 찍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 촬영한 영상을 재촬영했을 따름이다. 유사쿠의 카메라로 촬영된 두 편의 필름은 사토코가 아는 세상의 전부다. 낭만적인 영화의 주인공 ‘유리코’로 살아갈 것인가, 끔찍한 진실을 알아차린 ‘스파이의 아내’로 남을 것인가. 사토코의 마지막 울부짖음은 마침내 세상을 마주한 이의 광기에 다름 아니다.

<스파이의 아내>
<스파이의 아내>

 

스파이의 아내 スパイの妻/Wife of a Spy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출연 아오이 유우, 타카하시 잇세이, 히가시데 마사히로 수입/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 제작연도 2020년 상영시간 116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21년 3월 25일

 

 

Choice
지금, 우리는
<해야 할 일>
손시내
2024-09-26
Choice
가족의 조건
<장손>
손시내
2024-09-14
Choice
투정이 아니라고
<한국이 싫어서>
차한비
2024-08-30
Choice
거울 없이도
<러브 달바>
차한비
2024-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