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호 감독이 또 한 편의 강인한 탈북 여성 서사를 완성했다. 괴물 같은 생명력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중년 여성에 관한 다큐멘터리 <마담B>(2018), 역사적 비극이 낳은 가족의 복잡한 정체성을 캐묻는 극영화 <뷰티풀 데이즈>(2018)를 내놓은 윤재호 감독은 <파이터>에서 한층 더 건강한 기운으로 삶을 일구고 사랑을 탐색하는 여성을 앞세운다. 가족을 뒤로하고 홀로 한국으로 이주한 여성들의 선택과 결단, 그 복잡다단한 감정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자식과의 재회와 갈등에 초점을 맞춘 전작과 달리 젊은 세대가 이야기의 중축이 돼 가족과의 해후 이후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까지 타진하는 점이 특색이다.
하나원에서 갓 출소한 진아(임성미)는 일자리 찾기에 분주하다. 제힘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중국에 있는 아버지도 하루빨리 모셔야 한다. 한국에 먼저 정착한 엄마(이승연)를 찾아가지만, 그새 가정을 꾸린 그녀에게 손 벌릴 엄두는 나지 않는다. “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진아의 다짐처럼, 한국에서의 정착은 탈북과는 또 다른 싸움이다. 낯선 이들의 경멸을 무거운 침묵으로 견뎌내도 갖가지 시비가 따라붙는다. 복싱 체육관에서 청소 일을 하게 된 진아가 망설임 끝에 링에 오르는 이유도 프로로 데뷔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귀띔에 혹해서만은 아니다.
“여자 복서들 처음 봐요?” 체육관을 드나드는 여자 선수들을 훔쳐보다 눈치 빠른 태수(백서빈)에게 들킨 진아는 그녀들이 지닌 단단한 육체와 당당한 눈빛에 이끌린다. 이러한 매혹이 색다름에 대한 잠깐의 호기심이 아님은, 진아가 처음 체육관에 들러 남자 선수의 훈련 모습을 지켜볼 때의 모습과 비교하면 쉽사리 알아챌 수 있다. 누구에게도 신세지기 싫어 “괜찮습니다”를 입버릇처럼 달고 살지만 정작 뒤돌아서면 한숨과 눈물을 쏟고 마는 진아. 사각의 링에 오르기 위해 끊임없이 단련하는 여성 복서들을 힐끔거리면서 그녀는 오직 맨몸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한계를 돌파하는 권투에 조금씩 빠져든다.


자신과 가족을 버리고 도망간 엄마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삶의 의지를 확인하고 자기와의 싸움을 시작한 진아는 오랫동안 품어온 마음의 응어리, 여전히 풀리지 않는 해묵은 숙제를 해결하고자 먼저 나선다. <파이터>는 엄마를 찾아가는 진아와 진아를 찾아오는 엄마와의 몇 차례 만남을 보여주면서 잠정적이긴 하지만 감정의 화해 과정을 조심스레 보여준다. 만남의 끝에 엄마는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시간이”라며 진아에게 속내를 고백하는데, 진아를 타이르듯 전하는 이 짧은 답변은 관계의 복원을 위한 기다림의 시간을 수긍하면서 동시에 언젠가 관계가 회복될 것이라 의심치 않는 기대가 담겨있다.
<파이터>는 탈북 여성, 특히 젊은 여성을 향한 사회의 비아냥과 성적 희롱, 편견과 무시를 묘사하지만, 그 전형에 몰두하거나 이를 자극할 생각은 없다. 대신 뿌리 뽑힌 삶을 재건하려고 과거의 자신과 정면 대결하는 진아의 용기를 응원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혼자서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삶의 의미는 다른 이들과 함께할 때 찾아지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의 영적 금언을 인용하면서까지 영화가 전하고 싶은 것은 진아의 사랑이다. 복싱에 대한 진아의 열정은 엄마에 대한 사랑의 확인, 태수를 향한 사랑의 발견, 자신을 위한 사랑의 시작과 운명처럼 한데 묶여 있다.
<파이터>는 그간 해외에 머물며 작업하거나 외국 스태프와 협업했던 윤재호 감독이 온전히 한국 자본, 한국 제작진과 함께 만들어 낸 첫 번째 장편으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서 상영됐으며, 넷팩상(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도 차지했다.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거칠고 탁한 저음으로 무뚝뚝하지만 연약하고, 내성적이지만 솔직한 진아의 면모를 다채롭게 보여준 임성미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단편 <복자>(2008) 이후 크고 작은 작품에서 조연, 단역을 맡았던 임성미 또한 주연으로 참여한 첫 장편영화 <파이터>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품에 안았다.


파이터 FIGHTER 제작 영화사 해그림 감독 윤재호 출연 임성미, 백서빈, 오광록, 이승연 배급 인디스토리 제작연도 2020년 상영시간 104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1년 3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