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수록 닮은 아버지와 딸은 살짝 거리를 둔 채 의자에 앉았다. 일부러 아빠와 옷 색깔을 맞춰 입고 왔다는 기도영의 다정한 말에 기주봉은 빙그레 웃었다. 플래시가 몇 차례 터진 뒤, 기도영이 쑥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아무 말 없이 있으려니 어색해.” 슬그머니 딸을 돌아본 기주봉이 넌지시 해결책을 일러주었다. “맞아, 그러니까 속대사를 읊어야지. 이게 그런 시간이야.” 카메라 셔터음만 조용히 울리는 가운데 둘은 그렇게 대본 없는 연기를 함께했다. 귀를 기울이면 부녀가 속으로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가 들릴 듯했다.
기주봉과 기도영이 “속대사”를 주고받는 모습은 <정말 먼 곳>(박근영, 2021)에도 종종 등장한다. 중만과 문경은 속내를 일일이 털어놓기보다는 한 발짝 물러서서 서로의 뒷모습을 지켜봐주는 관계다. 겉보기엔 말수 적은 부녀지만, 알고 보면 누구보다 살뜰히 상대를 살피며 속으로 대화하는 사이. 두 배우의 소통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터뷰를 제안했을 때 돌아온 대답부터 똑같았다. 나야 좋은데 내 딸이 한다고 할까, 우리 아빠가 나랑 한다고 할까? 조심스러운 애정이 그득히 묻어나는 말투마저 비슷해서 가족은 가족이구나 싶었다.
두 분 모두 과묵한 편이라고 들었는데 평소에 대화는 자주 하세요?
기주봉_ 도영이가 연기 시작하고 난 다음부터는 이야깃거리가 많아졌죠. 요즘 좋아요.
기도영_ 둘 다 말이 없기는 한데 공통점이 생기다 보니 확실히 할 얘기가 늘더라고요. 아빠가 종종 “너랑 이런 얘기 해서 좋다”라고 말씀하세요. 사실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전부 기억나지는 않아요. (웃음) 그냥 그때 분위기와 마음, 아빠랑 대화하는 상황 자체가 참 좋은 거 같아요.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괜히 희망찬 기분도 들고.
박근영 감독에게 기도영 배우를 직접 추천하셨다고요. 일전에 인터뷰에서 “가능하다면 앞으로 아버지 역할로 뭔가를 좀 남겨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셨는데, 어쩌면 이런 마음이 <정말 먼 곳>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싶어요.
기주봉_ 결국 모든 일은 스스로 알아서 찾아내야 하고, 도영이도 여태 그래 왔어요. 근데 시나리오 받고 감독과 이야기를 해보니 문경 역할만 아직 배우를 못 찾았다는 거야. 내 딸도 연기하는데 만나 보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제시했죠. 꼭 해달라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때 영화에 어울린다 싶으면 같이 하자고.
좋은 작품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선뜻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으셨겠지요.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어떤 점이 눈에 들어오던가요.
기주봉_ 영화에 “잘 알지는 못해도 이해할 수 있다”라는 대사가 있어요. 아직도 많은 관객이나 대중은 성소수자를 마냥 멀리 있는 존재처럼 여기는데, 우리 주위에 분명히 있거든요. 본질적으로, 인간 자체로 이해해야 할 존재를 자꾸 도덕이나 윤리로 규정하려고 하니까 어려운 거죠. 그런 측면에서 영화에 담긴 메시지가 좋았어요. 우리가 영화를 통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그렇게 인식을 넓히는 일이 참 중요하거든요. 가깝게 느끼고, 더 이해하려 노력하고, 긍정할 건 긍정하고. 성숙한 자세로 조금씩 관객을 일깨워줘야 해요.
기도영 배우 입장에서는 어려운 작업이었을 거예요. 아버지와 한 작품에 출연한다는 것도 부담스러울 텐데 ‘부녀’를 연기해야 했으니까요.
기도영_ 처음에는 부담감이 앞섰어요. 주변 시선이 어떨지 걱정스러웠고, 그러다 보니 더 잘해야 할 것만 같았죠. 근데 시나리오를 읽고 반했어요. 감독님과 미팅했을 때는 ‘이분과 꼭 한번 작업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감독님도 말씀이 없으신 편이에요. 그냥 편하게 지켜보면서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어요. 캐스팅된다면 부담은 버리고 최선을 다하자고,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아빠한테도 감사하죠. 어떻게 보면 아빠 덕분에 만난 작품이니까.
기주봉_ 그렇지, 내 덕분이지. (웃음)


문경이라는 인물은 어떻게 다가왔나요. 문경은 집안의 가장 늙은 사람과 가장 어린 사람 곁에 머물며, 그들을 입히고 씻기고 재우는 역할을 도맡아요. 말하자면 약자를 돌보는 ‘착한’ 사람인데, 신기하게도 그런 모습이 희생이나 선행이라고 느껴지진 않았어요.
기도영_ 그저 할 일을 하는 느낌에 가깝죠. 그래서 매력적이고요. 문경은 문경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지, 누구를 위해 특별히 희생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영화도 문경을 딱히 미화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인물로 그려내고 싶었어요. 제가 쓸데없는 생각하기를 좋아하는데, 문득 책임감이라는 말을 곱씹게 됐어요. 으레 책임감이라고 하면 대단히 멋진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어쩌면 그건 고집일 수도 있겠더라고요. 문경이 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물론 사람들을 아끼는 마음이 크지만, 한편으로는 책임감이라는 고집 때문에 그곳에 머무는구나 싶기도 했어요. 영화를 마친 후에 가만히 문경을 들여다보니 그런 마음도 보이더라고요.
문경은 등장인물 중 가장 단단한 사람 같아요. 설령 불행이 닥친다고 해도 완전히 무너지진 않겠구나 싶었죠.
기도영_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문경은 끝까지 덤덤하게 받아들이죠. 그래, 이런 일도 있구나, 하면서요.
디테일에 감탄한 순간도 여러 번이에요. 설(김시하)의 머리를 묶어주다가 빗을 자신의 머리에 꽂는다든지, 짜장면을 먹는 명순(최금순)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처럼요.
기도영_ 짜장면 먹는 장면에서는 감독님이 디렉팅을 하셨어요. 오랫동안 지켜보고, 맛있게 먹다가도 할머니를 챙기는 느낌이 났으면 좋겠다고. 근데 막상 해보니 먹는 일과 챙기는 일을 동시에 하기가 어렵더라고요. 결국 젓가락질을 멈추고 그냥 바라봤어요. 머리빗을 꽂는 건 ‘어떻게 하면 문경의 털털하고 거침없는 성격을 좀 더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떠올린 거예요. 그때 제가 펌을 한 상태여서 빗이 잘 꽂히더라고요. 그걸 알아봐주시다니! (웃음)
기주봉_ 집중력을 갖고 연기하는 배우들은 그렇게 잔여 시간을 없애는 거야. 빗을 바닥에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고, 그런 동작을 할 필요가 없지. 인물로서 행동하니까.
기도영_ 세세한 부분을 많이 신경 썼어요. 최근에 길우 오빠가 좋았다고 얘기해준 장면이 있어요. 은영(이상희)이 양들에게 사료를 주다가 넘어지는 장면이요. 그때 괜히 양 등을 털면서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를 빼주는 척했어요. 그래야 문경다운 느낌이 날 거 같아서요. 길우 오빠가 그 부분을 잡아내더라고요. 언뜻 볼 때는 모르고 넘어가겠지만, 그렇게 마음을 쓰면서 보는 사람들 눈에는 다 드러나는구나 싶어요.
영화 속 중만과 문경은 아주 살갑지도, 그렇다고 냉랭하지도 않은 부녀예요. 자애나 효심이라는 단어보다 ‘의리’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나 싶어요.
기주봉_ 현장에서 도영이랑 나도 그랬어요.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배우들끼리 기본적으로 맞춰야 할 부분만 딱 정하고. 사실 배우가 진정으로 캐릭터를 구축했다면 그런 약속도 불필요하죠.
기도영_ 실제로 감독님이 아빠와 저의 평소 모습에 끌려서 캐스팅했대요. 되게 무심한데 서로 등지는 느낌은 아니고, 툭툭 챙겨주면서도 살갑진 않아서 매력적이라고요.
기주봉_ 그랬어?
기도영_ 응, 우리 성격이 좀 비슷하잖아.
어떤 면이 가장 닮았어요?
기도영_ 긍정적이에요. 편견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면도 비슷하고. 타인을 바라볼 때 좋다 혹은 나쁘다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 사람이다’ 하고 받아들이거든요.
기주봉_ 그래, 나는 다르다고 편을 나누는 거 별로야. 얘는 우리 편이니까 잘못해도 다 받아주겠다는 사고방식은 문제가 있잖아요. 아무리 내 가족이고 자식이어도 전부 옳다고 하면 안 되죠.
기도영_ 그래서 아빠가 저한테 많이 혼나셨어요. (웃음)

늦은 밤 목장 사무실에서 중만과 문경이 나눈 대화가 떠올라요. 혼자 술을 마시던 중만이 불쑥 “아빤 걱정이 많아”라고 하자, 문경은 곧장 “어이구? 됐어. 나는 알아서 잘 살아.”라고 해요. 중만에게 묻지 않아도 무엇을 그리 걱정하는지 이미 아는 거죠.
기도영_ 사실 아빠와 저의 대화도 좀 그래요. 함축적이라고 해야 하나. 맥락을 건너뛰고 그래?, 하고 물어도 그래, 라는 답이 돌아와요. 덕분에 영화에서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은 거 같아요. 원래 아빠가 제 연기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데, 유독 그 장면을 찍을 때는 자꾸 뭐라고 하면서 쫓아오셨어요. 제가 약간 정색하면서 “그만해”라고 했더니 “오케이, 오케이” 하면서 바로 가시더라고요. (웃음) 그래도 아빠가 해준 이야기를 참고해서 연기하니 촬영이 수월하게 끝났어요.
두 분은 같이 술도 한 잔씩 기울이는 사이인가요?
기도영_ 그럼요, 아빠가 술을 워낙 좋아하시니까.
기주봉_ 나는 담배도 같이 피우고 싶은데 내 딸은 안 피워요.
기도영_ 그걸 되게 서운해하시더라고요.
기주봉_ 피워라, 피워라, 할 수도 없잖아. (웃음)
화천에서 합숙하며 촬영했다고 들었어요. 부녀에게는 이 또한 추억으로 남을 듯해요.
기주봉_ 아무래도 그렇죠. 서로 존재를 인정해주자는 메시지를 담은 영화이고, 그게 우리한테도 참 좋은 영향을 준 거 같아요.
기도영_ 여행하는 기분이었어요. 아빠랑 이때까지 한 번도 같이 여행 간 적이 없거든요.
기주봉_ 우리 일본 갔잖아. 일 때문이긴 했지만. 그거 무슨 영화였지?
기도영_ 맞다, <강변호텔>(홍상수, 2019). 그때 말고는 없었지. 저도 여행을 좋아하고 아빠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 좋아하시니까 계속 이야기는 했거든요. 아무래도 따로 살다 보니 아빠랑 오래 붙어 있을 시간이 없었는데, 영화 찍는 동안 재밌게 놀았어요. 쉬는 날에는 근교로 놀러 가고. 순간순간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기주봉_ 춘천에 가서 데이트 많이 했어요. 둘 다 고소공포증이 있는데 스카이워크에서 사진도 찍고, 도영이가 좋은 카페를 알아 오면 커피도 마시러 가고.
젊은 시절에는 형인 기국서 연출가와 무대를 만들었고, 이제 배우가 된 딸과 함께 영화에 출연하시잖아요. 시간의 흐름을 되새기는 동시에, 딸 앞이라 좀 더 긴장하고 마음 쓰는 순간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기주봉_ 오히려 형은 어떤 면에서 의식이 돼요. 각자 고유한 예술 세계를 꾸려 가는 입장이니까. 딸은 훨씬 편하죠. 어떤 연기를 해도 긴장되거나 그럴 일은 없어요. 평소에 연기에 관해서도 많이 얘기하고. 근데 가끔은 보편적인 부녀관계가 부럽기도 해요. 매일 전화하고 살갑게 챙기고, 우리는 그런 게 없어.
기도영_ 하루에 한 번씩 전화하는 부녀는 보편적이지 않아요. (웃음) 근데 또 아빠는 절대 먼저 전화 안 하세요. 서운해하면서도 제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거예요.
기주봉_ 난 기다리지. 인생이 기다림이야. (웃음)
기도영_ 그걸 아니까 저도 신경 쓸 때는 자주 연락드리는데, 제 인생에 집중하다 보면 또 그렇게 못하죠. 그럼 자꾸 마음에 걸리고.
기주봉_ 걸리면 해. 그럴 때는 해야지. 그때마저 안 하면 안 돼.
기도영_ 사실 저도 아빠만큼이나 먼저 연락 안 하는 스타일이거든요.
기주봉_ 말은 이렇게 하는데, 뭐 전화해봤자 별로 할 얘기도 없어요. (웃음) 일부러 먼저 연락을 안 한다기보다는 다른 일 생각하다 보니 그냥 시간이 흐르는 거지.
기도영_ 나도 똑같아.
기주봉_ 새 작품에 들어가면 연락하겠지. 같이 작업 얘기하는 게 좋아.
최근에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어요?
기주봉_ 이번에 도영이가 찍은 작품에서 어떤 캐릭터를 맡았는지 물어봤어요. 벌써 얘한테 아내 역할, 엄마 역할이 오는 거예요. 인물을 소화하는 방법이나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캐릭터 폭에 관해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죠. 예전에 탤런트들이 “청춘 지나면 삼촌밖에 할 게 없어”라고 이야기하던 거랑 비슷해요.

변화한다 해도 여전히 여성 배우에게는 다양한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이죠.
기주봉_ 맞아요, 사회의 여러 분야에 더 많은 여성이 참여했으면 좋겠어요. 일하면서 자기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여성들이 필요해요. 그런 태도가 확장되어야 이야깃거리도 풍성해지지.
기도영_ 최근 독립영화에서는 여성 서사를 적극적으로 다루려는 노력이 확실히 느껴지잖아요. 배우로서든 관객으로서든 그런 작품을 많이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주봉_ 더 많아져야 해. 더 다양해지고.
기도영_ 아빠랑 이런 고민도 나눌 수 있으니 좋죠.
두 분을 같은 작품에서, 또 부녀로 만날 일은 한동안 없겠죠?
기주봉_ <정말 먼 곳>을 끝으로 아예 없을 수도 있다고 봐요.
기도영_ 연기를 시작하고 얼마 안 지났을 때, 아빠가 “나중에라도 너랑 작품에서 아빠와 딸로 만나면 좋겠다”라고 하셨어요. 그 바람이 생각보다 아주 빨리 이루어진 거죠. 앞으로 이런 기회를 또 만나기는 어려울 듯해요.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시나리오를 쓰지 않는 이상. (웃음)
도영이라는 이름은 직접 지으셨나요.
기주봉_ 나랑 얘 엄마가 한 자씩 골랐어요. 내가 젊을 때부터 道(도)라는 글자를 좋아했거든. 도인, 도사, 도통한다. (웃음)
기도영_ 길을 비춘다는 뜻이에요. 저는 제 이름을 참 좋아해요.
기주봉_ 엄마 의견을 존중해서 한 글자씩 나란히 골랐지. 근데 배우들은 별수 없이 이기적인 데가 있나 봐. 생각하고 배려한다고 하는데도 결국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들어. 남한테 많이 받으며 살아서 그런가.
기도영_ 자기 세계가 워낙 강하니까.
자의식을 기르고 훈련해야 하는 직업이기도 하고요.
기주봉_ 그렇죠. 죽을 때까지. 생각해보면 도영이나 나나 그런 자존심이 있어요. 내가 그랬듯 얘도 ‘기주봉의 딸’ 같은 수식어를 원하지 않는 거지.
기도영_ 제 이름으로 뭔가를 해내는 게 중요하잖아요. 아버지나 다른 무엇에 기대고 싶지는 않아요. 제가 할 만큼은 한다,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겠다고 말씀드렸고요.
데뷔작은 방은진 감독이 연출한 영화 <메소드>(2017)예요. 배우가 되고 싶다고 처음 생각한 건 언제였나요?
기도영_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나는 뭘 해야 할까?’ 생각하면서 버스를 타고 가는데, 고개를 돌리니 창밖으로 연기 학원이 보이는 거예요. 운명처럼 느껴졌어요. 그래, 저거다! (웃음) 어릴 적부터 아빠를 지켜보기도 했고, 저도 기운을 받았는지 연기에 거리감은 딱히 없었어요. 다음날 바로 엄마한테 학원에 보내달라고 했죠. 아빠한테는 일 년쯤 지나서 입시를 준비할 때 말씀드렸어요.
기주봉_ 그때 나는 속으로 박수쳤어요.
기도영_ 아니야, 아빠 처음에는 나한테 안 했으면 좋겠다고 했어.
기주봉_ 그래? 아닐 텐데? (웃음)
기도영_ 반대라기보다는 걱정이었어요. 연기 말고 좀 더 안정적인 일을 찾아보면 어떻겠냐고 하시더라고요. 근데 그때 딱 한 번뿐이었어요. 이후로는 쭉 응원해주셨죠.
직접 듣기 전엔 전혀 모르셨어요? 언젠가 내 딸이 연기를 하겠구나, 어쩌면 우리가 같이 해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짐작하셨을 것도 같은데.
기주봉_ 얘 위에 아들이 하나 있어요. 어릴 때부터 매일 연습장 데려가서 연기하는 거 보여줬지. 좀 키워보려고 기대를 했어요. 실제로 몇 년은 대학로에서 연극 일도 하고 연기에 관심을 보였는데, 군대 다녀오고 나서 달라지더라고. 그러다 생각지도 않은 도영이가 하겠다고 한 거죠.
기도영_ 오빠도 전혀 말이 없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갑자기 연기하겠다고 통보했거든요. 그때도 속으로 ‘나도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오빠는 입시를 준비하다가 잘 안 돼서 관두고 군대에 갔어요.
기주봉_ 도영이도 1년 재수했어요.
기도영_ 2년이야, 아빠. (웃음)

어릴 적에 기도영은 어떤 아이였어요?
기도영_ 기억나? 또 지어내는 거 아니야? (웃음)
기주봉_ 기억하지.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어요. 임대 아파트 1층에 살았을 때인데, 얘가 왜인지 그렇게 창가에 매달려서 놀았어요. 대여섯 살쯤 됐을 거야. 무슨 곡예라도 하듯 창틀에 다리를 걸고 헤헤 웃어요. 아직도 그 모습이 이따금 떠올라요.
기도영_ 제가 창문을 좋아했대요. 거기 붙어서 지나가는 사람한테 말 걸고.
기주봉_ 맞아, 동네 사람들이 다 귀엽다고 했을 거야. 그리고 강가에서 놀던 거. 아마 가양동 살 때지? 나는 일 없으면 사색하고 그러니까 얘를 데리고 한강에 자주 나갔거든. 도영이는 털렁털렁 돌아다니면서 놀았지. 아이 때부터 움직이는 걸 좋아했어요. 달리기도 잘하고.
몸 쓰기를 좋아했네요. 배우로서 ‘싹’이 보였던 걸까요.
기주봉_ 언젠가 한 번은 진지하게 얘기했어요. 자기는 춤추고 노래하는 것도 좋다고. 특히 무용은 제대로 해보고 싶어 해요. 춤은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아도 본인이 느끼는 대로 즐기면 되잖아요. 거기에 퀄리티까지 갖추면 진짜 멋있을 거 같아요.
기도영_ 무용하면서 생각도 많아지고 긍정적으로 변했어요. 누구나 할 수 있고,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죠. 굉장히 자유로워요. 어쨌든 연기는 텍스트를 바탕으로 움직이잖아요. 극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상대와 합을 맞추는 과정이고요. 반면에 춤은 정말 혼자서, 무엇 하나 걸치지 않고서도 창작이 가능한 영역이구나 싶어요.
기주봉_ 영화나 연극은 종합예술이라 뭐든 호흡을 맞춰야 하니까. 가능하면 도영이가 연기 활동을 지속하면서도 다른 일을 병행했으면 싶어요. 배우에게 작품이 끊임없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사실 쉼 없이 연기할 수 있다고 해도 꼭 좋기만 한 일은 아닌 거 같거든. 연기하지 않는 시간에는 아이들을 가르친다든지 다른 일을 해보면 어떨까. 그럼 힘든 현실에서 좀 벗어날 수 있지 않나 싶은 거죠. 우린 자유를 얻었지만 경제력은 없잖아.
아버지가 배우라는 사실은 기도영 배우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유명한 아버지는 꿈을 부추기는 존재였는지, 망설이게 하는 존재였는지도 궁금해요.
기도영_ 어릴 때는 아빠가 마냥 자랑스럽고 대단하게 보였어요. 물론 사실이지만, 생각이나 시각에 막연한 데가 있었죠. 돌이켜보면 둘 다 맞는 말인 거 같아요. 연기를 시작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셨고, 그와 동시에 아버지로 인해 망설이게 되는 순간도 있어요. 일단 어디를 가서 말하기도 뭐하고 안 하기도 그렇거든요. 사실 일반적인 관계에서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할 이유가 없잖아요. 예전에 연극을 할 때 아빠가 보러 오신 적이 있어요. 그때 한 선배가 절 불러서 “너는 진짜 나쁜 놈이야”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일전에 저한테 작은 아빠가 연출한 공연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자기는 기 씨를 싫어한다고 했거든요.
기주봉_ 뭐라고?
기도영_ 기 씨를 싫어한다고.
기주봉_ (책장을 가리키며) 야, 저기 기형도도 있다. (웃음)
기도영_ 아무튼 선배 입장에선 아빠를 발견하고 당황한 거예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숨겨야 할 일인가 싶으면서, 숨긴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구나 싶고. 그러고 보면 제가 배우 생활하는 과정에서 조금은 걸리는 부분이죠. 아빠한테 폐를 끼치면 어떡하나 싶어서 걱정도 되고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네가 행동을 잘못하면 부모님이 욕먹는다”라는 말을 듣고 자라잖아요. 아무래도 조심스러워요. 잘 자랐다는 걸 보여주고 싶으니까요.
기주봉_ 아휴.
기도영_ 그러다 보니 때로는 갇히는 느낌이 들기도 하죠. 뭐랄까, 더 정직해야만 할 것 같고. 사실 아빠가 저보다 더 정직하지 않게 사는데! (웃음)
기주봉_ 근데 너 삼수 했어?
기도영_ 응, 처음에 예비 2번 받아서 될 줄 알았는데 떨어졌지.
기주봉_ 나하고 비슷한 데가 있다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남한테 약한 소리 하기는 싫은 거야. 배우들은 나름대로 자부심이나 자존심이라는 게 있잖아요. 여태 한 번도 도와달라거나 뭘 부탁한 적이 없어요. 결국에는 삼수 하고 혼자 학교에 들어갔네.

<정말 먼 곳> 이전에는 기주봉과 기도영이 부녀라는 것조차 알리지 않았을 정도로요.
기주봉_ 음, 내가 한 번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빠가 배우잖아. 내 딸이 연기하겠다는데 적어도 길은 터줘야 할 거 같은 거예요. 방법을 고민하던 차에 <정말 먼 곳>을 만난 거죠. 그동안 나도 영화를 많이 했잖아요. 딸을 얘기할 기회가 분명히 있었는데, 안 했어. 어디서든 스스로 커야 한다는 마음이었지. 도영이도 됐다고 했을 거고. 내가 얘 근성을 알아요. 연기자 후배로 볼 때 높이 사는 부분이에요.
기도영_ <정말 먼 곳> 개봉하고 연락을 많이 받았어요. 친구들도 대부분 몰랐거든요. 굳이 아빠에게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어요. 기도영으로서 인정받는 게 아니잖아요. 뭔가 시작부터 의심을 사고, 고개 숙인 채 들어가는 느낌은 싫더라고요. 근데 요즘에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주변을 둘러보니 부모님이 가게도 내주고 집도 사주더라고. 나도 아빠한테 받을 수 있는 건 다 받아야겠어. (웃음)
기주봉_ 야, 줄 게 없다. 이제 네가 날 좀 어떻게 해주면 좋겠는데. (웃음)
기도영_ 사실 이전에는 서로 어떻게 사는지도 잘 몰랐어요. 일 년에 한 번 소식을 전하는 정도였죠. 연기하고 싶다고 말씀드린 다음부터는 걱정이 되셨는지 종종 찾아오셨어요. 고등학교 ‘야자’시간에 아빠랑 밥 먹으러 나갔던 게 기억나요. 이제는 진짜 동료 같고 친구 같아요. 변치 않을 거라는 확신을 주는 사람이 가까이 있어서 참 좋죠.
서로 작품은 챙겨 보세요? 그중에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있다면요.
기주봉_ 난 사실 네 데뷔작도 안 봤다.
기도영_ 우리 서로 안 봐요. 제가 나온 작품 하나도 안 보셨을 걸요?
기주봉_ 연극은 봤지. 학교 다닐 때 발표회도 가고.
기도영_ 그래도 기억은 못 하실 거예요. (웃음) 저는 최근에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아빠가 나온 작품들이 다 좋더라고요. <강변호텔>과 <69세>(임선애, 2020)도 좋았고, <공공의 적>(강우석, 2002)도 임팩트가 상당했어요. 초반에 잠깐 등장하시는데 깜짝 놀랐죠.
기주봉_ “여보, 미안해, 탕!”
기도영_ 이게 배우의 힘이구나 싶었어요.
기주봉_ 나 때문에 ‘신 스틸러’라는 말이 생긴 거 아니야. (웃음)
기도영_ <강변호텔>에서 영환이 아들한테 인형을 주잖아요. 실제로 아빠가 인형을 모으세요. 종류도 되게 다양해요.
기주봉_ 백 개도 넘을 거야.
기도영_ 저랑 만나면 “이거 가져갈래?”라면서 챙겨주시고요. 물어보니까 그냥 적적해서 하나둘 모은다고 하시더라고요. 얘네가 뭔가를 채워주는 거 같다고. 그래선지 <강변호텔>이 마음에 더 와닿았어요. 남이 보기엔 짠한 순간인데 영화에서 절대 울지 않잖아요. 덤덤하게 지나가는 모습이 꼭 아빠 같아서 오래 남더라고요.
연기에 관해 일찍부터 고민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어떤 배우가 되어야겠다 혹은 어떻게 연기해야겠다 같은 나름의 기준도 생겼을 테고요.
기도영_ 옛날에는 무조건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빈틈없는 배우. 근데 배우는 결국 쓰이는 직업이더라고요. 누가 날 찾아주지 않으면 절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요. 이제 쓰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요. “이 작품에는 이 배우가 어울리지”라는 것도 쓰임이고, “이 배우는 연기를 못하는데 자꾸 눈길이 가네”라는 것도 쓰임이죠.


배우로서의 ‘쓸모’를 고민하는 거네요.
기주봉_ 참 어려운 일이에요. 그런 말이 있잖아요. 있으나 마나 한 사람, 꼭 필요한 사람, 필요도 없는 사람. (웃음) 아니다,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은 없을 거야.
기도영_ 고등학교 3학년 때 연기 선생님이 “너희는 앞으로 다 잉여 인간으로 살 거야”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기주봉_ 심한 말을 했네.
기도영_ 심한 말이지. 근데 20대 후반에는 그 말이 되게 실감 났어요. 잉여 인간이라는 게 이런 뜻이구나. 꾸준히 연기하려면 어떻게든 쓰이는 수밖에 없겠다 싶어요.
기주봉 배우는 “누구 때문에 영화를 시작하게 됐다거나 누굴 보며 ‘저 배우를 따라 해야지’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어요. 기도영 배우는 어떤가요.
기도영_ 저도 아빠랑 비슷해요.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니까요. 누구처럼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요. 나답게 연기하는 게 중요하죠.
기주봉_ 그래, 그 ‘나’를 찾아야지.
기도영_ 어렵지만 재밌는 과정이에요. 아, 좋아하는 배우는 있어요. 탕웨이요. 왠지 모르게 자꾸 마음이 가죠. 연기력도 출중하지만, 일단 연기보다도 사람한테 혹해요. 그가 풍기는 고유의 매력이 좋아요.
<정말 먼 곳>은 어떤 시간이었나요. 개봉을 처음 경험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때보다 이 과정을 충분히 음미하고 싶을 듯해요.
기도영_ 지금이 너무 좋아요. <정말 먼 곳> 찍는 내내 행복했고, 촬영 마치고 나서도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했어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질 정도로요. 이 작품을 통해 ‘더불어 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기주봉_ 그러고 보면 참 좋은 직업이야. 예술 작업하면서 누릴 수 있는 귀한 시간이지.
기도영_ 원래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개인적인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정말 먼 곳> 찍고 나서는 성격이 바뀌었어요. 제가 의외로 여럿이 어울리는 걸 좋아하더라고요.
기주봉_ 연기는 결국 상대를 배려하고 호흡을 맞추고, 그렇게 다 같이 어우러지는 작업이잖아요. 특히 영화는 연극보다 현장성이 넓죠. 무대라는 한 공간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라, 계속 옮겨 다니면서 무대를 넓혀가니까. 좋은 협업을 경험하는 게 중요해요.
기도영_ 사실 모든 현장이 그렇지는 않잖아요. 정말 일로만 여기는 사람도 있고,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게 가장 중요한 사람도 있고. 돌이켜보면 그 사이에서 때때로 힘에 부쳤던 거 같아요. 근데 이번 현장은 너무 평화롭고 즐거웠어요. 영화가 빛을 보면서 저한테도 많은 기회가 찾아왔고요.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는 느낌이에요.
이후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올해 예정된 작품이 있는지요.
기도영_ 3월 초에 길우 오빠랑 단편영화를 찍었어요. 아까 말했던 엄마 역할로 출연한 작품이요. 후반 작업을 기다리는 중이에요.
기주봉_ 홍상수 감독과 작업하기로 했어요. 그 외에는 3월 이후로 정해진 게 없네. 이제 돈 벌고 싶어요. 우리 다 돈 벌자!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