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빛>은 오래전 요절한 가수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어제는 두 사람이 걷던 이 길을 이 밤에 나 혼자서 걸어가는데”로 운을 뗀 노랫말은 사실상 영화를 요약하는 문장이다. 나직하고 처연한 음성이 잦아들면, 카메라는 노래 속 주인공처럼 홀로 걷는 남자를 비춘다. 강은 얼어붙고 산에는 눈이 쌓이는 계절에 희태(송재룡)는 죽음을 선고받는다. 구체적인 병명은 나오지 않지만, 숨통을 끊어낼 기세로 터져 나오는 기침은 그의 시한부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고한다. 오랜만에 만난 누나는 희태를 더는 도울 수 없다고 말하며, 대신 그에게 편지 한 통을 건네준다. 10년 전 헤어진 아내가 보낸 편지다. 그날 저녁, 희태는 화장실에서 한참 구토하다가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발견한다. 누나 앞에서는 애써 감추었던 원망과 공포, 수시로 몰아치는 고통에 이마가 잔뜩 일그러진다. 거울 속 자신을 노려보던 희태는 이내 전부 지우고 싶다는 듯 손으로 거울을 가려버린다.
치료를 포기한 희태는 다시 산으로 돌아간다. 그에게 산은 평생 몸담고 살아가는 터전이지만, 죽는 날까지 마음 놓고 머무를 수 없는 공간이다. 약초와 버섯을 제공하고 맑은 샘물을 허락할 때를 제외하면, 산은 대개 불친절하고 냉혹하다. 희태는 그런 산에서 고독을 배운다. 산은 자신을 품어주거나 감싸 안으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온기를 바라지 않는 법도 깨우친다. 아내와 이별하는 동시에 인연이 끊어진 아들 민상(지대한)이 등장하기 전까지 희태는 줄곧 혼자다. 마주 보고 대화할 사람 하나 없이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작은 집에서 칠흑 같은 밤을 견딘다. 긴 겨울이 끝나고 매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여름날, 민상 역시 혼자 기차를 탄다. 생면부지인 아버지를 찾아가는 소년의 눈에는 아이답지 않게 쓸쓸한 기운이 감돈다. 민상에게는 산으로 둘러싸인 풍경부터 처음 본 아버지까지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다. 어색하기는 희태도 마찬가지다. 늘 혼자 걷던 길을 둘이서 걷는 한여름은 그의 삶에 찾아온 예외의 시간이다.


김무영 감독이 “1박 2일은 너무 짧고 3박 4일은 너무 길어서”라고 밝힌 것과 같이,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2박 3일은 애매해서 적당한 기간이다. 희태와 민상 사이에는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기실 2박 3일이란 관계에 뚜렷한 변화를 만들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영화는 부자지간이라는 이유로 둘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도리어 마음을 주고받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다만, 둘은 번번이 어긋나면서도 따로 떨어지지 않는다. 희태는 민상을 홀로 내버려 둘 수 없고, 민상은 전화조차 터지지 않는 깊은 산속에서 딱히 할 일이 없다. <밤빛>의 인물들은 고립을 각오해야 하는 산이라는 공간과 2박 3일이라는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않는다. 그저 그 안으로 들어가서 다가오는 것을 담담히 겪을 뿐이다. 줄거리를 읊는 노랫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처럼 영화는 대단한 사건에 기대지 않으며, 둘의 낮과 밤을 기록하는 일에 열중한다.
민상은 장작을 패던 희태를 흉내 내며 도끼를 휘두르고, 희태는 민상에게 버섯을 캐보라고 권한다. 물론 도끼질은 소득 없이 끝나고 버섯을 손에 쥐는 이는 희태지만, 산에서 주먹밥을 나눠 먹을 때 두 사람의 거리는 분명 처음과는 다르다. 그때 희태는 아들을 살리지 못하고 죽은 후 귀신이 되어 이승을 떠도는 약초꾼 이야기를 들려준다. 민상은 심드렁하게 대꾸하면서도 마치 희태의 앞날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 덧붙인다. “근데 그 귀신 불쌍하네요. 자기 아들보다 먼저 죽었으니까요.” 이처럼 영화는 관객만이 알 수 있는 교감과 대화의 순간을 곳곳에 심어둔다. 화풀이하듯 거울 속 자신을 밀어낸 희태와 달리, 민상은 얼룩진 거울에 물을 끼얹고 가만히 제 얼굴을 비춰본다. 한밤중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희태의 손길을 민상이 알 까닭이 없듯, 희태 또한 이처럼 자신과 무척 다르면서도 꼭 빼닮은 민상을 볼 수 없다.


무엇보다 <밤빛>은 인물을 조명하는 일에 얼마간 무심한 태도를 취한다. 대사 대신 산새가 지저귀고 풀벌레가 우는 소리로 공백을 채우고, 희태와 민상이 서로를 바라보는 표정이 아니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안개가 자욱하게 낀 산으로 시선을 옮긴다. 거대한 자연에 매혹당한 카메라로 인해 영화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장면이 이어지는데, 다행히도 이러한 감상이 지속되진 않는다. 양팔 벌려 끌어안을 의도가 없는 산은 두 인물을 가두어 놓지도 않으며, 희태와 민상이 만날 때 그랬듯 헤어질 때도 같은 자리를 지킨다. 공간을 받아들임으로써 영화에는 안도감이 깃들고, 덕분에 둘의 짤막한 동거는 가까워지기엔 애매하지만 기억하기엔 적당한 시간으로 남는다.
엔딩에는 꿈처럼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장면들이 연속한다. 민상이 떠난 후 다시 혼자가 된 희태의 머리 위로 별이 쏟아질 듯한 하늘이 펼쳐지고, 그의 밤은 민상의 낮으로 오버랩된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는지 산은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다. 희태가 혼자 오른 길을 민상이 아무도 없이 내려갈 때, 카메라는 오래도록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영화는 그렇게 다시금 관객만이 헤아릴 수 있는 순간을 준비해둔다. 김무영 감독의 첫 장편 <밤빛>은 앞서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제4회 울주세계산악영화제 등에서 소개됐다.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선 열혈스태프상(김보람 촬영감독)을 수상했으며 제작한 지 3년 만에 개봉한다.
밤빛 Night light 감독 김무영 출연 송재룡, 지대한 제작 보이드 스페이스 배급 씨네소파 제작연도 2018년 상영시간 98분 등급 전체관람가 개봉 2021년 3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