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시선도
<고백> 하윤경
글 정지혜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1-03-02

“예쁠 땐 되게 예쁜데 못생길 땐 되게 못생겼다.” 허물없는 친구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이 말을 하윤경은 더없는 칭찬이라 여긴다. 그때그때 달리 보이는 얼굴이 싫었던 적도 있었지만, 배우로서의 자존을 믿어 의심치 않는 지금은 독특한 생김새가 그만의 개성이고 장점이며, 무기다. 실제로 마주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니 하윤경은 생각지 못한 얼굴을 지녔고, 생각보다 많은 얼굴을 가졌다. ‘현피’를 주도하고 도발하다 파국에 이른 <소셜포비아>(2014, 홍석재)의 하영 혹은 황폐한 사막의 끝에 버려진 <타클라마칸>(2017, 고은기)의 수은처럼 불안으로 일그러진 인물을 먼저 떠올렸던 터라 적잖이 당황했다. 여유롭고 편안한 표정에 털털하고 건강한 활력까지 더한 하윤경의 얼굴은 <고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영화에서 그녀는 아동학대를 비롯해 온갖 폭력에 얼룩진 여성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분투하는 신입 경찰 지원 역을 맡았다. 피해자에게 과도하게 몰입하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피해자의 곁에 서 있고자 하는 미더운 인물이다. 수더분하고 구김살 없는 신경과 전문의 선빈(<슬기로운 의사생활>)이나 살갑고 무구한 태도로 일상을 꾸려가는 연승(<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은 얼핏 <고백>의 지원과 같은 얼굴을 지닌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 뜯어보면 분명 다른 매력을 지닌 인물일 것이다. 이제껏 억누른 에너지를 마음껏 분출할 수 있는 강렬한 캐릭터를 만나고 싶다는 바람으로, 하윤경은 주어진 자리를 맴돌지 않겠다는 배우로서의 욕심도 스스럼없이 내놓았다.

 

 

한창 드라마 촬영 중이겠다.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는 내 분량이 다 끝났다. 연승이 남편의 비밀을 맞닥뜨리게 된 만큼 다음 주가 어떻게 전개될지. 시청자의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2>는 찍고 있다. 시즌2에 다행히 합류했다. (웃음)

 

시즌1에서 허선빈은 같은 과 선배 의사 용석민(유태유)의 수줍은 고백을 들었는데. (웃음)

과연 어떻게 될까. 정말 궁금하다!

 

마침 오늘이 <고백> 개봉이다.

실감이 잘 안 난다. 2년 반 전에 촬영했다. 코로나로 영화계가 침체돼 있는 상황에서 개봉하게 됐다. 그저 감사하다. <고백>이 그리는 아동 학대 문제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이기도 하잖나. 영화를 통해서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짚고 갈 수 있다면 다행이다. 이런 소재의 영화가 계속 등장할 수밖에 없다는 걸 생각하면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사회가 많이 변하지 않았구나 싶어 씁쓸하기도 하다.

 

오디션으로 합류했나.

감독님의 전작 <초인>(2015) 때 오디션을 봤다. 그때 감독님께서 같이 작업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연극 <록산느를 위한 발라드>(2015)에 참여하느라 함께하지 못했다. 그 인연을 잊지 않고 감독님께서 <고백>을 준비하며 먼저 전화를 주셨다. 오디션이 아닌 미팅으로 만나 편안하게 이야기 나누고 시나리오도 같이 읽고. 그렇게 시작해 2018년 여름, 첫 촬영에 들어갔다.

<고백>
<고백>

어떤 면이 지원 역에 부합한 것 같나.

당차고 똑 부러지게 할 말을 하는 편이다. 감독님께서 그런 모습을 좋게 봐주신 게 아닐까. 정의로운 인물을 잘 표현할 것 같다고 하시더라.

 

지원은 선배 남성 경찰들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소신껏 자기 일을 찾아서 해낸다. 무엇보다 도움이 필요한, 위험에 처한 여성들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미는데.

‘경찰이니까 사람들을 도와야 해’라는 단순하고 막연한 정의감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굉장히 섬세한 사람이다. 지원도 나름 내면의 상처가 있다. 그렇기에 폭력과 위험에 노출된 여성들에게 더 공감하고, 약자의 입장을 더 깊게 생각할 줄 안다. 연기할 때 그 부분을 가장 많이 신경 썼다. 너무 감정적으로 내달리면 지원이 서사와 동떨어져 보일 것 같았다. 지나치게 정의로워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소극적이어도 안 되는 감정의 균형을 유지하는 게 관건이었다. 영화에서 지원은 일종의 서술자와 같은 역할이니까. 전체 이야기를 풀어가야 하는 만큼 내 존재감이 두드러지면 안 된다. 감독님과도 그 부분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감정적인 부분 외에 또 어떤 준비 과정이 있었나.

제일 쉽게 빠질 수 있는 오류가 ‘경찰 역할이니까 경찰답게 행동해야 해’가 아닐까. 캐릭터에 접근할 때 인물의 직업적 특성에 과도하게 몰두하려 하지 않는다. 인간 김지원을 더 깊게 생각했다. 신입 경찰이니까 타성에 젖진 않았을 테고 무엇보다 20대 여성으로서 아동학대, 여성들이 직면한 폭력적인 상황에 이해도가 높을 거다. 준비라고 한다면, 아동 학대와 관련된 기사를 많이 찾아봤다. 내면적으로 공감이 되면 연기할 때도 도움이 되더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더라도 서로 걱정하는 여성 캐릭터들이 있다. 실제 촬영 현장은 어땠나.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이슈를 다루는 영화지만 촬영 현장은 문제가 많을 때가 있다. 그러면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든다. 물론 <고백> 현장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감독님께서 굉장히 세심하게 배우들의 마음의 상태를 고려해주셨다. 아역 배우의 경우도 일정 이상 감정을 쓰지 않도록 배려하시더라. 때때로 독립 영화 현장은 열악하다 보니까 의도치 않게 스케줄을 몰아붙여야 할 때도 있는데 <고백>은 전혀. 감독님께서 꼼꼼하게 계획을 짜고 그대로 딱딱 진행하셨다. 감동이었다. 오히려 걱정될 정도였다. 이렇게 금방 오케이가 나도 될까? 감독님께서 좀 더 욕심부려도 되는 게 아닐까? (웃음) 이런 감독님이 앞으로 더 잘되셨으면 좋겠다.

ⓒ이영진

지원을 연기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촬영이 있다면.

영화 말미에 지원이 보라와 이야기 나누는 장면이 있다. 아버지의 학대로 아픔을 겪었을 보라를 진심으로 안아주고 싶었다. 그전까지 지원은 경찰이니까 보라에게 일정 부분까지만 마음을 썼고 그 이상을 내비치거나 뭔가를 더 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찍을 땐 왠지 울컥하더라. 보라에게 “나도 네 편이 되고 싶다”고 하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지원이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지원은 “말 못 할 사정이 있으면 도와주겠으니 말해보라”, “네 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실제 하윤경은 어떤가.

MBTI 검사를 했는데 감정적으로 상대방을 잘 위로해주는 유형이 나왔다. 사랑하고 아끼는 친구들이 힘들 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싶지만 그게 어렵다면 공감하며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상대를 향한 진심 어린 관심이라면 그것만으로도 힘이 되잖나. 그릇이 큰, 품이 넓은 사람이길 바란다.

 

반대로 최근에 누군가의 말로 위로 받은 경우가 있나.

<고백> 홍보 차 영화에 함께 출연한 정은표 선배와 박하선 선배가 진행하는 라디오 <박하선의 씨네타운>에 출연했다. 정은표 선배와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는데 <고백> 촬영하던 2년 전과 비교해 내 연기가 많이 늘었다, 좋은 쪽으로 많이 달라졌다고 말씀해주시더라. 큰 위로가 됐다. 지금은 소속사가 있지만 <고백> 촬영 땐 혼자 활동했다. 의상부터 하나하나 다 챙겨 다니며 연기하던 그때의 나를 기억하고 계시더라. 누군가가 나를 지켜봐 주고 있다는 것조차 생각지 못했던 당시의 나를 가만히 지켜봐 준 분이 있었다는 데 새삼 감사했다. 초심을 다시 생각했다.

 

초심이라면.

연극, 영화 등 작업을 이어왔지만 때때로 지치기도 했다. 연기를 그만두고 싶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작디작은 보상이 찾아왔다. 결과와 상관없이 정말 즐겁게 오디션을 본 경우라든지, 출연료는 택시비 정도밖에 안 되지만 촬영하는 재미가 있었던 작품을 만난다든지 하는. ‘그래, 내가 이런 것 때문에 연기했지!’ 싶었고 그 힘으로 버텼다. 언젠가는 연기를 더 잘 할 수 있겠지 하면서. 무엇보다 연기를 통해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생겼다. 아무래도 배우는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이니까 공감 능력이 더 생겼고 연기하며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도 하고.

ⓒ이영진

언제부터 배우를 꿈꿨나.

고교 시절 진로 탐색을 하던 때다. 운동신경이 좋아서 체육 선생님이 체대 진학을 권유하기도 했다. 미술에 관심이 있기도 했고. 그러면서 좀 더 좋아하고 오랫동안 재밌게 할 일이 뭘까 찾았다. 가만 보니까 영화 보는 걸 정말 좋아하더라. 부모님이 맞벌이하셔서 하교 후에 늘 혼자였다. 집에서 TV로 방영하는 영화들을 보고 또 보며 배우들 연기를 관찰했고 어느새 연기해보고 싶어졌다. 연기학원에 가겠다고 하니 처음에는 부모님이 반대하셨다. “너처럼 평범한 애가 무슨 연기냐”며. (웃음) 일산에 살았는데 일부러 멀리 서울에 있는 연기학원으로 보내시더라. 힘들면 그만두겠지 하고. 근데 웬걸. 예상과 달리 너무나 신나 하며 다녔다. 나름 학원에서 성적도 좋았고. 그때부터 부모님이 마음을 열고 지원해주셨다.

 

<슬기로운 의사생활>도 오디션을 거쳤나.

소속사 없이 홀로 활동하던 때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와 오디션을 보자고 하셨다. 선빈을 보면서 선빈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웃음) 좋은 가정에서 자란 선하고 모나지 않은 건강한 사람. 자기감정에 솔직하고 예의 바른 사람. 정말 더없이 좋은 사람이 아닌가.

 

드라마 경험이 많지 않았을 텐데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

선입견이 있었다. 드라마는 참여하는 사람도 많고 촬영 스케줄도 빠듯할 테니 정신없을 테고 그런 분위기에 압도될 것 같았다. 전혀 달랐다. 작업 결과가 좋은 이유가 다 있더라. 좋은 스태프와 훌륭한 배우가 한가득이다. 무엇보다 배우들이 다들 연기를 굉장히 잘하셔서 내가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선배들 연기를 보며 많이 배운다.

 

연기의 어떤 부분을 좀 더 눈여겨보게 됐나.

되게 자유롭게 연기하는 것. 지금까지 나는 안전한 길을 택했다. 튀거나 거친 연기 대신 안정적인 연기였다. 도전적인 연기, 남들이 안 하는 선택도 과감하게 해보고 싶다.

 

인터뷰하면서도 느꼈지만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얼굴이 상당히 달라 보인다.

친구들이 하는 말이 있다. “너는 예쁠 땐 되게 예쁜데 못생겼을 땐 되게 못생겼다.” 완전히 동의한다. 과거에는 연기할 때마다 다르게 나오는 내 얼굴이 콤플렉스였는데 생각해 보면 그 말처럼 최고의 칭찬이 또 어디 있겠나. 작품마다 얼굴이 달리 보인다는 건 개성 있다는 거고 감사할 일이다. 가지고 있는 걸 잘 활용하는 게 중요하다. 결국, 자존감 문제일 텐데 자신을 아끼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빛나는 얼굴을 보면 더없이 멋져 보인다.

<울보>
<우산을 안 가지고 와서>

연기의 매력을 꼽아보자면.

앞서 잠깐 말했듯,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한다. 롱런하는 배우들을 보면 자기 연기를 끝없이 의심할 뿐 아니라 평소 일상생활을 건강하게 유지하더라. 연기할 때 나 자신에게 떳떳해지고 싶은 마음도 크다. <고백>으로 이렇게 인터뷰도 하는데 돌이켜보면 <고백> 이전에 아동 학대 문제에 얼마나 관심이 있었나 싶다. 많이 부족했구나 싶어 더 공부하게 된다. 연기를 통해 나라는 사람이 선한 영향을 받는다. 연기로 대단한 부와 명예를 누리지는 않더라도 이런 영향을 받고 변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

 

건강한 일상을 유지하는데 무엇이 가장 큰 힘이 돼주나.

2년 가까이 함께하고 있는 반려묘 재재와 다다 덕분이다. 정말 큰 힘과 위로를 받는다. 생명에 관한 생각 자체를 바꿨다.

 

혹시 촬영장에 갈 때 항상 갖고 다니는 물건이나 준비하는 게 있을까.

연기도 삶도 결국 마인드의 문제다. 모든 게 멘탈 싸움이다. 연기는 집에서만 준비하고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현장에 갈 때까지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다. ‘오늘 현장은 어떨까? 현장 스태프들 간에 이견이 생기면? 누군가 내게 싫은 소리를 한다면? 대사를 틀린다면?’ 상황별로 시뮬레이션을 하고 대안을 만들어둔다. 현장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도 발생하지만, 경우의 수를 여럿 따져두면 대개 그 안에서 일어난다. 피곤하게 사는 거지. (웃음) 그래도 이런 시뮬레이션이 내 연기를 보완하는 방법이다.

 

이후 또 어떤 작품을 준비하나.

내일 또 한 편의 독립영화 첫 촬영을 앞뒀다. 오늘 밤에도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야지. 오디션도 계속 봐야 한다. 노하우? 사람은 상호 간의 기운을 느끼잖나. 물론 연기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건 두 번째이고 우선 사람이 매력적이어야 한다. 코로나로 비대면 영상 오디션을 많이 보는데 못내 아쉽다. 서로 눈을 마주치고 얘기를 할 때 교감하게 되는 법인데. 그때 나름의 승부수를 던져야 하는데! (웃음)

 

꼭 해보고 싶은 탐나는 역할도 많을 것이다.

연극을 할 땐 캐릭터가 명확히 잡히는 역할을 했는데 아무래도 드라마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상생활 연기를 많이 하게 됐다. 갈증이 생기더라. 장르영화 속 도드라지는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다. 악역도 좋다. 발산하는 역할이면 좋겠다. 성격이 밝아도 극적으로 밝거나 아예 어둡거나. 에너지가 꽤 있는 사람인데 최근에 항상 에너지를 누르며 연기했다. 그 에너지를 마음껏 분출하고 싶다.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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