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후의 말을 받아 적다가 금세 관두었다. 쉼 없이 부딪혀오는 시선을 피할 도리도 없을뿐더러, 조목조목 털어 놓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부지런히 눈을 맞추는 박지후에게 감탄하자, 워낙 대화하기를 좋아한다며 그는 미소지었다. 말하기와 듣기를 능숙하게 오가고 지난 시간을 생동감 어린 장면으로 펼쳐놓는 박지후를 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박지후는 대화를 좋아하고, 또 잘했다. “은영은 순수한 눈으로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잖아요. 그래서 더 미스터리한 인물인 거 같아요.” 박지후가 설명하는 <빛과 철>(배종대, 2021)의 은영은 곧 배우 자신을 소개하는 말처럼 들린다. 눈으로 말을 걸고 자꾸 붙잡는 사람, 박지후는 스크린 밖에서 그렇듯 영화에서도 열심히 눈을 빛내며 교감을 청한다. 남편의 사고를 둘러싸고 진실을 다투는 희주(김시은)와 영남(염혜란) 사이에서 스스로 다리가 되고자 하는 소녀 은영은 그야말로 박지후다운 인물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속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미스터리”할 때조차 그 저의를 의심할 수 없는 걸 보면 과언은 결코 아니다.
<빛과 철>로 2년 만에 극장을 찾아요. <벌새> 이후 여러 시나리오를 받았으리라 예상하는데, 그중 <빛과 철>을 선택했던 이유는 뭐예요?
딱 좋은 인연이었던 거 같아요. 감독님이 말씀하시길 사람에게는 구처럼 다양한 면이 있는데, 저한테서 어느 순간 날카로운 면을 보셨대요. 나도 모르는 날카로움이 감독님을 통해서 어떻게 표현될지, 또 관객들은 그런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궁금하더라고요. 무엇보다 시나리오 자체가 탄탄하고 재밌었어요. 다만, 처음에는 좀 어렵게 느껴졌어요.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싶었죠. 잠시 고민하다가 은영이라는 캐릭터에 집중하며 시나리오를 다시 읽었어요. 모두가 침묵할 때, 은영은 혼자서 끙끙 앓다가도 결국 이야기를 하잖아요. 은영이 말함으로써 또 다른 이야기들이 시작되고요. 사건의 중심에 놓인 인물이다 보니 일면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이런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어떤 게 가장 어렵게 느껴졌어요?
영화 초반에는 비교적 잔잔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였다가, 은영이 희주를 만나고 또 집까지 따라가는 시점부터 긴장감이 조성되잖아요. 지켜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은영의 속내를 알 수 없어 조마조마하고요. 저는 그런 감정과 사건을 부드럽게 이어야 하는데, 연기로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배우가 만난 은영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부드럽게 이어”내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듣고 싶어요.
혼자서 은영이의 전사를 이리저리 생각해봤어요.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평범한 가정의 딸이었을 거예요. 학교에 갔다가 학원에 가고,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서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었겠죠. 그러다 하루아침에 상황이 달라져요. 아빠는 의식불명으로 병원에 누워 있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대신해서 더 바쁘게 일하죠. 은영이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혼자가 된 경우예요. 시나리오에는 유령 같은 존재라고 나와 있었어요. 학교에서도 친구 없이 겉돌고, 주변에 기댈 만한 곳도 없는 애라고요. 그렇다고 아픈 아빠랑 고된 엄마 사이에서 힘들다고 내색할 수도 없죠. 제가 볼 때 은영이는 늘 불안했을 거 같아요. ‘내가 여기서 징징대고 칭얼대면 엄마마저 무너져버릴지도 몰라. 지금도 위태로운데 나까지 힘들게 하면 큰일 날 거야.’라는 생각에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거죠. 엄마 앞에서도 괜찮은 척하고, 학교 수업을 마치면 곧장 병원으로 가서 아빠를 간호하고요. 계속 그렇게 살다 보니 은영 역시 마음의 짐이 컸을 거예요. 은영이를 생각하다 보면 ‘얘가 속내를 털어놓을 곳이 참 없겠구나’ 싶었어요.


은영은 극에서 제일 어리지만, 또 가장 강단 있는 캐릭터예요.
은영의 말 한 마디에 아빠가 피해자였다가 가해자로 바뀌는 상황이 벌어지잖아요. 이건 은영 개인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파장을 미치는 중대한 사건이고요. 초반에는 놀랐어요. ‘얘는 진짜 강하구나, 양심을 추구하는 아이구나’라고 생각했죠.
정의로운 인물에 끌리나요.
그런 것 같아요. 실제 성격도 정의롭다면 정의롭거든요. (웃음) 그래선지 은영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되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근데 촬영하고 완성된 영화를 보면서 문득 ‘나 같아도 그랬을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우리 가족의 일로 누군가가 망가져 가는 상황이잖아요. 2년 동안 은영은 은영대로 얼마나 괴로웠을까.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잠도 설치고 그랬을 거 같더라고요.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은영의 선택을 진심으로 납득할 수 있었어요.
감독은 “혹시라도 전작과 캐릭터가 겹쳐 보일까” 염려했다는데, 배우 입장에서는 어땠나요. <벌새>의 은희와 <빛과 철>의 은영, 공교롭게도 이름마저 비슷하잖아요.
안 그래도 리뷰를 찾아봤는데, 다행히 많은 분이 <벌새>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일단 외적으로도 은희는 1994년도에 사는 단발머리의 중학생이고, 은영이는 그보다 조금 성숙한 모습이라 그렇게 느낄 수 있을 거 같아요. 제가 봤을 때는 은희와 은영이 모두 외로운 애들이긴 하지만, 은희에게는 주변에 여러 인물이 있잖아요. 그들과 계속해서 대화하고, 잠깐이지만 사랑도 나누면서 서로 많은 걸 공유하죠. 근데 은영한테는 그럴 수 있는 존재가 거의 없어요. 굳이 꼽자면 희주인 거예요. 단절된 상태에서 은영의 마음은 어떨지, 은영이 지닌 애처로움을 좀 더 와닿게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한편으로는 미스터리도 중요했고요. 관객은 은영의 의도를 몰라야 하니 일부러 표정에서는 감정 변화를 크게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어요.
<빛과 철>의 모든 인물이 각자 비밀을 품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은영은 특히 종잡을 수 없어요. 감독과는 주로 무엇에 관해 이야기했어요?
시나리오를 읽을 때 궁금한 점이 생기면 감독님한테 항상 여쭤봤어요. 매번 “정해진 답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고요. (웃음) 가장 먼저 물어본 건 은영이 처음으로 희주의 집에 가는 장면이에요. 그때 은영은 배가 아프다고 하잖아요. “은영이 진짜 배가 아픈 거예요? 진짜 희주를 따라가고 싶어서 따라간 거예요?”라고 물으니, 관객 역시 저처럼 긴가민가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은영의 의도가 무엇인지 확정하지 말자고. 미묘한 인물이다 보니 연기하기가 쉽지는 않았어요. 촬영할 당시에는 속으로 상황을 설정하기도 했어요. 희주에게 호기심이 생긴다, 발이 이끄는 대로 걷다가 우연히 희주를 만난다, 그때 갑자기 배가 아프다, 이런 식으로요.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현장이었네요.
처음 촬영장에 갔던 날이 크리스마스이브였어요. 첫날에는 긴장할 수밖에 없는데, 다행히 3회차까지 저는 걷고 밥 먹는 신이 대부분이라 편안한 마음으로 찍었어요. 감독님도 병원 로비 장면을 찍기 전까지 감정을 차근차근 쌓아 나가면 된다고 말씀해주셨고요. 힘들지 않게 촬영을 시작하는 동시에, 내심 떨리기도 했어요. 뒤에 나오는 신에서는 진짜 감정을 잘 표출해야겠구나 싶어서요. 실제 그 장면을 찍을 때는 선배님들이 워낙 잘 맞춰주셔서 제 감정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감독님도 제가 느끼는 대로 표현하기를 바라셨고요.

영남과 희주 사이를 오가며 긴장감을 자아내던 은영은 영화 후반부쯤 행방이 묘연해지죠. 관객 스스로 해석할 여지를 남겨둔 퇴장인데, 배우 입장에서는 어땠나요. 어디로 갔는지, 어째서 돌연 사라졌는지 생각해본 바가 있다면요.
열린 결말이잖아요. 처음에는 큰 고민 없이 시나리오를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계속 보니까 감독님이 왜 그렇게 쓰셨는지 짐작할 수 있었어요. 결말에서 참과 거짓을 단정하기보다는 이렇게 열어 두어야 은영이라는 인물도 좀 더 미스터리하게 남을 거 같았고요. 무엇보다 후반부로 갈수록 은영은 딱히 생각나지 않잖아요. 희주랑 영남이 은영을 떠올리지 못하듯, 감독님은 관객들이 은영이 아닌 영화 자체를 따라가도록 연출하신 게 아닐까 싶어요. 물론 감독님과 이야기는 나누었어요. 열린 결말이지만, 절대로 은영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건 아니라고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은영은 제 말에, 자신이 시작한 일에 책임을 지는 아이일 거라는 확신이 들어요. 혼란스러운 마음에 잠시 어딘가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겠지만, 영남과 희주가 은영을 찾으러 돌아갈 때쯤이면 은영도 두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을까요.
실제로는 ‘인싸’ 체질에 수다스러운 사람이라고 밝혔어요. 은영처럼 본인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인물을 연기하는 건 어떤 경험인가요.
인물이 놓인 상황을 그대로 믿어요. 연기할 때만큼은 박지후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머릿속은 그저 ‘은영이라면 이러겠지’라는 생각뿐이죠. 인물과의 거리감을 의식하면서 일부러 다가가려고 애쓴 적은 거의 없는 거 같아요. 사실 누구나 그렇잖아요. 아무리 밝고 쾌활한 사람이라고 해도 어느 한구석에는 어두운 면이 있죠. 저 역시 연기하는 과정에서 그런 모습을 찾으려고 했어요.
상황에 대한 믿음은 어떻게 생기나요. 곧바로 믿어지나요.
최대한 고민하되 부담을 갖지는 말자 싶어요. ‘꼭 은영이 되겠어!’라기보다는 은영을 박지후 화했다고 말해야 할까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제 식으로 하다 보면, 결국 연기하는 동안 어떻게든 인물 안으로 제가 포함되니까요.
한편, 배우가 타고난 기질이 연기하는 일에 도움을 주는 면도 있으리라 짐작해요. 적극적인 에너지와 활기 같은 거요.
사람들과 대화하는 걸 좋아해요. 시나리오를 놓고 말하든, 사적인 이야기를 하든 누군가랑 생각을 주고받는 과정이 참 좋아요. 그러다 보니 현장에 있을 때 너무 즐거운 거예요. 같은 직종에 있는 사람들과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요.
이번 현장은 어땠어요? 김시은, 염혜란 배우와도 처음 만났고, 또래 배우가 전혀 없다 보니 조금 심심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선배님들만 계시기도 하고, 영화도 다소 무거운 편이잖아요. 다들 집중한 상태라서 선뜻 말을 건네기가 어려운 분위기였어요. 그러다 보니 저도 덩달아서 연기에 몰입하게 되더라고요. 현장에서는 정말 연기만 했던 거 같아요. 지난 11월에 포스터를 촬영하러 모였을 때 깜짝 놀랐죠. 저도 그렇고, 다들 너무 홀가분한 상태로 오신 거예요. 영화도 편집을 거쳐 완성됐고, 배우들도 전부 작품을 본 다음이니까요. 사진 찍을 때는 그때 감정을 떠올리면서 집중하다가 대기실에서는 다 같이 둘러앉아 수다를 떨었죠. ‘아니, 이렇게 유쾌하신 분들이라니!’ 싶었어요. (웃음) 저도 신나서 같이 떠들고, 그렇게 개봉 앞두고 좀 더 가까워졌던 거 같아요.

영화를 볼 때까지 계속 긴장했나 봐요.
아무래도 기다리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드니까요. 처음 영화 볼 때도 엄청나게 긴장한 상태였어요. 극장에서 많은 관객과 함께 봤는데, 아쉬운 점이 계속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저는 제 목소리를 듣는 게 여전히 어색해요. 은영이 말하는 장면에서는 왠지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그래도 영화 자체는 재밌었어요. 선배님들은 역시나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을 만큼 멋진 연기를 보여주셨고, 굳이 피해자와 가해자를 따지지 않아도 되는 영화라는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시나리오만 봤을 때보다 확실히 이해하기가 수월했어요. 마음에 드는 장면을 하나 꼽자면, 은영이 아빠를 돌보다가 아빠 손가락을 바늘로 찔러보는 장면이요. 은영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 거 같았어요.
관객 반응을 마주했을 때는 어땠는지도 궁금해요. 영화가 끝난 직후에는 다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게 되잖아요.
맞아요, 처음에는 당황해서 ‘왜들 그러시지?’하며 눈치를 봤어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데 모두 자리에 가만히 앉아 계셨거든요. 이후에 영화를 다시 보고 나니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싶더라고요. 처음 관람할 당시에는 제 연기와 표정을 확인하느라 작품에 온전히 집중하지는 못했던 거죠.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느끼셨을 텐데,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엔딩이잖아요. 뭐랄까, 한 방 맞은 기분이 들죠.
<빛과 철>에 참여하는 동안 영화 외적으로 영향을 준 것에는 뭐가 있을까요. 다른 작품을 봤다든지, 어떤 음악을 주로 들었다든지.
감독님께서 추천해주신 영화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아쉬가르 파라디, 2011)랑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2013)였어요. 되게 어렵더라고요. 근데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 딸이 나오잖아요. 부모님을 포함한 어른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딸의 모습이 은영이랑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그걸 보면서 연기에도 많이 참고했던 거 같아요. 음악은 <벌새> 찍을 때 그랬듯 무겁고 잔잔한 걸 주로 들었어요. 원래 힙합을 좋아하는데 촬영할 때는 일부러 다양하게 찾아 들어요.
여전히 랩 좋아하는지 물으려고 했어요. 우원재를 향한 ‘팬심’도 그대로인지 궁금하고.
그대로예요. 계속 좋아하는데, 요즘에는 카더가든에 푹 빠졌어요. 집에서 하도 들으니까 엄마가 무슨 오디션 프로그램 나갈 거냐고 묻더라고요. (웃음) 또 래퍼 이영지 님도 너무 좋아요. 솔직하고 재미있고 다 잘하는 분이잖아요. 가사도 정말 좋고. 저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생각하는 것도 참 곧고 바르구나 싶어서 볼 때마다 감탄해요.
어려운 일 생기면 상담하고 싶은 분이죠. (웃음)
맞아요, 유튜브에서 또래 상담해주시면 좋겠어요. 친해지고 싶어요.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남달랐어요, 진짜로.

박지후 배우도 그렇죠. 이제 열아홉인데 남 부럽지 않은 필모그래피를 쌓아나가는 중이잖아요. 십 대를 연기와 더불어 보내는 소감은 어때요?
어느 영화 속 장면을 올린 유튜브 영상에서 이런 댓글을 봤어요. “이 배우들은 좋겠다. 자신의 한 시절을 영구보관한 작품이 있으니까.” 그 말이 마음에 와닿더라고요. 정말 맞는 말이잖아요. 저는 이제 ‘내가 열여섯에 뭐했더라?’ 싶으면 <빛과 철>을 보면 되니까요. 신기하고 뜻깊은 일이에요. 또 제가 연기에만 신경을 쏟느라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못한 게 아니거든요. 평범하게 학교도 다니고 친구들과 보낸 시간도 꽤 많다 보니, 나중에라도 연기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는 않을 거 같아요. 그냥 하루하루를 값지고 알차게 보냈으니까.
열두 살에 길거리 캐스팅으로 연기를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대구에 있는 연기학원에서 제안을 받았어요. 연기를 배워보면 어떻겠냐고 해서 처음에는 취미로 다니다가, 중학교 1학년 때 단편 <나만 없는 집>(김현정, 2017)을 만났어요. 이후 <페노미나>(홍두현, 2017)라는 단편을 하나 더 찍고 만난 작품이 <벌새>예요.
<나만 없는 집>에서는 자매 중 언니였죠. 말하자면 은희 같은 동생을 둔.
맞아요, 인터넷에서 그런 글을 봤어요. <나만 없는 집>에 나오는 나쁜 언니가 <벌새>의 은희라고. 갑자기 날라리가 됐죠. (웃음)
계속 대구에 살죠? 전학하지 않고 쭉 같은 학교에 다니더라고요.
네, 꼭 필요하다면 서울로 왔을 텐데 계속 오갈 수 있는 환경이었어요. 웬만하면 친구들이랑 같은 학교에서 졸업하고 싶은 마음도 컸고요. 3월에 개학하면 한동안 대구에 머물겠죠. 코로나19로 작년까지는 비대면 수업을 병행했는데, 고등학교 3학년은 매일 등교하더라고요. 저도 그렇고 친구들도 다들 대학 걱정, 입시 걱정하는 시기예요. 원래 언론 미디어나 심리학에 관심이 있었는데, 지금은 연극영화과 쪽으로 마음을 정했어요.
자기 자신을 탐색하는 시간이기도 할 거 같아요. 배우로서 박지후의 장점은 뭐라고 생각해요?
음, 저는 사실 몰랐는데 감독님들이 눈을 많이 칭찬해주셨어요. 깊이가 느껴지는 눈빛이라고요. 정말 그런가 하고 보니까 그래 보이기도 하고. (웃음) 스크린에서 제 얼굴을 볼 때도 눈 때문인지 좀 짠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아무래도 저는 아직 대사로 감정을 표현하는 부분에 미숙하고 감정 자체도 부족한 게 많은데, 눈빛으로 그걸 보완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화면에도 자연스레 드러나는 거 같아요.
김보라 감독은 “고전적이면서도 우아한 느낌”이라고 했어요. 기품이 있는 눈이라고요.
최근에 <벌새> 블루레이 코멘터리 영상을 촬영했어요. 김보라 감독님을 오랜만에 뵀는데, <빛과 철>을 얘기하시더라고요. 영화 잘 보셨다면서 왜 거기서도 불쌍하냐고, 괜히 눈물 날 것 같았다고. (웃음) 생각해보면 <벌새>에서도 그렇고, <빛과 철>에서도 제가 병원을 왔다 갔다 하잖아요.

얼마 전에 촬영한 넷플릭스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는 드디어 학교로 공간을 옮기는데, 또 평화로운 곳은 아니네요.
그렇죠. 아주 스펙타클한 인생을 살고 있어요. (웃음)
<지금 우리 학교는> 촬영을 꽤 길게 했죠?
촬영이 끝난 지 이제 딱 10일 됐어요. 8개월에 걸쳐 찍었는데, 중간에 코로나19로 쉬었던 걸 빼면 실제 기간은 6개월쯤 되는 거 같아요. 이렇게 긴 촬영은 처음이었어요. 지금까지 참여한 작품 중에 또래 배우를 가장 많이 만난 현장이었고요. 장르물이다 보니 저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었죠. 언제 또 이렇게 와이어를 타고 좀비와 싸워보겠나 싶더라고요.
“털털하고 유쾌한 ‘인싸’ 캐릭터”를 맡았다고요. 지금까지 연기한 인물 중 ‘싱크로율’이 가장 높은 캐릭터 아닌가요?
맞아요, 실제 제 성격이랑 가장 비슷했어요. 근데 아무리 제 모습이라고 해도 그걸 카메라 앞에서 연기로 보여주려니 어색할 때가 있더라고요. 아직 표현에 서툴기도 하고요. 다행히 감독님께서 현장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셨고, 저도 점점 또래들과 어울리면서 연기하는 시간 자체를 즐겼던 거 같아요. 드라마가 어떻게 완성될지 기대돼요. 기존에 다양한 좀비물이 나왔지만 학교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없잖아요. 학생들이 위기 상황을 헤쳐나가는 과정이 관전 포인트가 될 거 같아요.
표현에 서툴다는 말을 여러 번 했어요. 연기에 욕심이 있다는 뜻이니 꾸준히 공부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촬영 후에 모니터링하면서 보완하고 싶은 면을 다이어리에 기록해요. 일부러 제작기 영상도 찾아보고요. 거기엔 감독님이 디렉션을 주시는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어서 ‘아, 그래서 이런 장면이 만들어졌구나’ 하고 파악하는 데 도움이 돼요. 다른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도 스토리뿐만 아니라, 연기에 집중해서 보게 되고요. <지금 우리 학교는> 촬영할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연기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원래 다이어리에는 그날의 감정이나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주로 썼는데, <지금 우리 학교는>은 촬영 기간이 길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쌓이더라고요. 촬영 끝나고 와서 하나씩 복기하며 적었어요. 오늘은 뭐가 어려웠고, 대사를 이렇게 치니까 편했다. 어떤 감정을 표현할 때는 이렇게 하니 좀 되더라, 하는 식으로요. 글로 쓰니까 한결 마음이 편안하더라고요.
혼자서 생각하고 정리할 시간을 갖는 거네요. 다이어리는 언제부터 썼어요?
중학교 3학년 때부터요. 첫 다이어리는 제가 샀는데, 그 뒤에는 선물 받은 걸 쓰는 중이에요. ‘벌새단’에서도 노트를 많이 선물해주셨거든요. 보라색 노트. (웃음) 그건 아직 못 쓰고 있어요. 지금 세 권째인데, 처음에는 그날 뭐 했는지 정도만 적다가 이제는 좋은 글귀도 찾아서 쓰고 영화 감상평도 짧게 남기게 되더라고요. 점점 페이지를 풍성하게 채우고 싶어져요. 괜히 글씨가 이상해 보이면 처음부터 다시 쓰고.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혼자서 오기를 부려요. (웃음) 그러다가 감정이 휘몰아칠 때는 글씨체에 신경쓸 겨를도 없이 막 휘날려 쓰고요. 항상 자기 전에 음악을 틀어놓고 일기를 쓰는데, 그 시간이 자꾸 길어져요. 가족들이 왜 우리랑 얘기 안 하고 일기장에만 적냐면서 섭섭해하기도 했어요. “미안한데 여기에 쓸 게 너무 많아.”라고 했죠. 이제 포기했는지 별말이 없어요. 그냥 책상에 편하게 올려두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아무도 제 일기에 관심 없는데, 저는 보물찾기 쪽지 넣어두는 것처럼 꼭꼭 숨겨 놓거든요.

어떤 이야기가 적혀 있을지 궁금한데요. 대화를 참 열심히 하는 사람이구나 싶어요. 일기를 쓰며 자신과 대화하고, 현장에서는 동료와 피드백을 주고받고.
안 그래도 <지금 우리 학교는> 촬영하기 전에는 배우들이랑 모여서 “우리 진짜 솔직하게 말해주자. 연기가 별로면 꼭 별로라고 알려줘야 한다. 그게 서로를 위하는 길이다.”라고 약속했어요. (웃음) 실제로도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나눴어요. 저는 그동안 동료 배우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벌새>로 만난 친구들뿐이었는데, 이번 작품을 계기로 새로운 동료가 확 늘어나서 너무 기쁘고 좋아요. 가족한테 말하지 못하는 연기 고민이나 생각도 폭넓게 나눌 수 있고요. 사석에서 만나면 종일 연기 얘기만 하는데 진짜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연기 얘기만 해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연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뭐예요?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음, 일단 연기하면서 행복하고 즐거우니까 계속하는 거 같아요. 저는 아직 저 자신에 관해 잘 모르는데, 연기할 때마다 제 안에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거든요. 내가 나를 찾아가는 그 과정이 좋아요. 나랑 좀 더 가까워지고 친해지는 느낌이에요.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어요? 앞으로 나는 이걸 할 거야, 라고 생각한 순간.
<벌새> 개봉했을 때 관객과의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 앞에서 운 적이 있어요. 밥을 먹다가 갑자기 “엄마, 나는 이 일이 너무 좋아”라면서 막 울었어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쁨에 북받쳤던 순간 같아요. 내가 연기를 하고, 누군가 그걸 봐주고, 또 우리가 영화를 사이에 놓고 대화하는 모든 과정이 아주 행복했나 봐요. 관객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저 역시 많은 위로를 받기도 했고요. 계속 연기를 한다면 그 감정을 쭉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물론 힘든 순간도 겪겠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즐거움이 제일 클 테니까요. 그래서 그냥 믿고 계속하는 거 같아요.
데뷔한 이래 아역 배우에서 주목해야 할 신예로 기다렸다는 듯 타이틀을 갱신하고, <벌새>로는 여러 영화제에서 신인상과 최연소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어요. 이런 관심과 애정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우선 저를 긍정적으로 봐주셔서 감사하죠. 저는 그냥 연기하고 싶었던 대구 소녀일 뿐인데, 이렇게 멋진 말들로 칭찬해주시니 기분도 좋고요. 다만 마음 한쪽에 걱정은 있어요. 혹시나 제 부족한 연기력 때문에 관객분들께서 실망하면 어쩌나 싶어서요. 그래도 연기는 연습하면 늘고, 또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절대로 쉽지는 않겠지만요. 그래서 항상 노력하자고 다짐해요. 생각해보니 제 앞에 붙은 수식어는 저한테 자신감을,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주는지도 모르겠어요.
2021년 현재, 박지후의 꿈은 뭔가요. 어떤 배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궁금해요.
우선 첫 번째 소망은 <빛과 철>로 많은 관객을 만나는 거예요. 몇만 명 돌파! (웃음) 그리고 올해 다양한 작품을 만나서 열심히 촬영하고 싶어요.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열아홉에 찍은 작품들이 공개되면 의미가 남다를 거 같아요. 최근에 연기 욕심이 더 커졌어요. 드라마 촬영하면서 많은 배우의 연기를 오랫동안 지켜보다 보니, 제 부족함을 확연히 느꼈던 거죠. 새삼 연기 잘하는 배우가 이렇게나 많구나 싶더라고요. 매일 성찰 일기 쓰고 그랬어요. (웃음) 배우라는 이름에 걸맞은, 진짜 연기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가끔 화면에서 제가 아는 표정을 볼 때가 있어요. 분명히 배우의 얼굴이고 연기인데, 속으로 ‘저거 내 표정인데? 우리 엄마한테서 본 얼굴인데?’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런 연기가 진짜 표현이고 묘사구나 싶어요. 마음을 움직이는 연기요. 끝으로 하나 더 덧붙이면 좀 더 깊고 바르게 사고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요. 이건 항상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건데, 제 기준을 갖고 주변을 바라보며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해내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