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빛>의 희태(송재룡)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인적 드문 산에서 홀로 지내는 그는 시시각각 덮쳐오는 공포를 견뎌낼 기력이 없다. 훅하고 불면 쉽사리 꺼질 촛불처럼, 어둠이 어서 빨리 자신을 거두길 바라는 남자. 그런 희태에게 민상(지대한)은 작은 기적이다. 민상의 등장으로 희태는 부질없는 삶을 찬찬히 곱씹어 볼 마지막 시간을 얻는다. 얼어붙은 땅이 녹고 밤이 조금씩 짧아지기 시작할 무렵, 마침 <밤빛>이 개봉 소식을 알려왔다.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한 뒤 배급사까지 구했지만, 여건이 녹록치 않아 더 많은 관객과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던 영화의 환생을 가장 기뻐한 건 민상을 연기한 배우 지대한. 촬영 당시 깡마른 중학생이었던 소년은 어느새 스물한 살 대학생이 되어 나타났다. 김무영 감독과는 오랜만의 대면이라는데, 그다지 서먹해 보이지도 않았다. 외려 사전에 입 맞추고 들어온 것처럼 감독과 배우는 농담과 진담을 두루 섞어가며 대화를 이끌었다. 나란히 앉아 서로의 말에 맞장구칠 때는 우애 깊은 형제라고 해도 좋았다. 영화와 연기를 왜 택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도 꼭 닮은 꼴이었다. 김무영 감독은 “영화와 현실의 경험이 맞닿는 순간”을 꼽았고, 지대한 배우는 “나를 잊고 인물에 푹 빠지는, 드물게 찾아오는 그 순간” 때문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순간’을 담기 위해 동행했던 지난날을 마음 깊숙이 각인해서일까. 그들은 겨울잠에서 이제 막 깨어난 <밤빛>에 연신 온기를 불어넣었다.
2018년 서울독립영화제 상영 당시 <리버스>와 인터뷰했다. 개봉 소식을 전하기까지 오래 걸렸는데.
김무영_ 2019년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상영했을 때 배급사인 씨네소파에서 먼저 연락해서 2년 동안 같이 노력해왔는데. (웃음) 영화진흥위원회 코로나19 관련 특별지원을 통해서나마 개봉하게 돼서 다행이다.
배우 입장에서는 뜻밖의 선물을 받은 느낌이겠다.
지대한_ 감독님이 연말에 전화해서 갑자기 내년에 개봉한다고 하시더라. 감독님은 늘 그렇듯 담담한 목소리였다. 나만 들떴지, 뭐.
김무영_ 나도 좋다. (웃음) 좋기는 한데, 시기가 이렇다 보니 아쉽고 걱정도 든다.
스튜디오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시간이 흘렀다는 걸 느꼈다. 영화에서 중학생이었던 민상을 기억하는 관객들은 청년이 된 지대한 배우의 모습에 깜짝 놀랄 듯하다.
김무영_ 벌써 5년이나 됐구나. 세월 빠르네.
지대한_ 그러니까. 열다섯 살과 열여섯 살에 <밤빛>을 찍었다. 그땐 ‘어떻게 살아야 하지?’ 같은 생각은 안 했는데.
김무영_ 생각 안 했지. 우리 그냥 재밌었잖아.
지대한_ 맞다. 요즘 사춘기인가 보다. (웃음)


작년에 서울예술대학교 연기 전공으로 입학했다고. 코로나19로 대학 생활을 맘껏 즐기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한 해를 보냈나.
지대한_ 코로나19가 조금 잠잠해지면 학교에도 나가고, 학생들끼리 연극도 하면서 나름 즐겁게 지냈다. 어이없는 게 스무 살이 됐는데 연극에선 또 열두 살 소년을 연기했다. 대사와 상황이 마음에 들어서 맡긴 했지만. (웃음) 엄마 역을 맡은 배우가 나보다 몸집이 작았다.
김무영_ 작품이 뭐였나.
지대한_ <맥베스>. 화형으로 죽는 아이 있잖아. 엄마가 죽을 위기에 닥쳤을 때 “안 돼!” 하고 자리에서 딱 일어났는데, 내가 열두 살치곤 키가 너무 큰 거지. (웃음)
오랜만에 만났다고 들었는데도 어색함이 없다. 촬영하며 동고동락해서인가.
지대한_ 나는 촬영장에서도 재밌게 놀았다. 어른들이 힘들었지. 맞지?
김무영_ 쉽지는 않았어. (웃음)
지대한_ 그 땐 내가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
김무영_ 너는 잘 놀기만 해도 훌륭하지. 나는 대한이를 동생처럼 생각한다. 촬영 마친 후에도 가끔 불러내서 같이 놀곤 했는데, 대한이가 바빠지면서 연락만 하고 지냈지.
지대한_ 에이, 감독님이 더 바쁘면서! 한참 놀 때는 같이 피시방에서 게임하고 그랬다. 감독님은 그때 ‘오버워치’를 처음 해봤다고 하더라. (웃음) 작년에는 상영회 GV를 마치고 뒷풀이에 가서 처음으로 같이 술을 마셨다.
어린 나이에 연기를 시작했다. 데뷔작 <마이 리틀 히어로>(김성훈, 2012)에선 곧장 주연을 맡았고, 그해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상도 거머쥐었다.
지대한_ 운이 좋았다. <마이 리틀 히어로> 감독님과 제작진이 진짜 다문화가정 어린이를 찾고 싶어서 센터를 중심으로 돌아다녔는데, 마침 처음 방문한 곳에 내가 있었던 거다. 당시에는 “얘를 기준점으로 삼고 더 나은 애를 찾자”라고 했다더라. 결국 1년 후에 내게 다시 돌아오셨다. (웃음) 이후에 오디션을 치르기는 했는데, 별로 준비한 건 없었다. 그때만 해도 연기한다는 사실을 크게 자각하지 못했고, 센터 선생님이든 감독님이든 딱히 뭘 연습해 오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거든. 노래도 뭘 불러야 하나 싶어서 그냥 애국가를 불렀을 정도였다. (웃음)
김무영_ 학교에 다녀보니 어때? 연기를 생각하는 관점에 변화가 생겼어?
지대한_ 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연기는 분명히 따로 있는데, 말하자면 테크닉이 필요한 연기도 있잖아. 왜 이렇게 연기를 못 하나 싶어서 자격지심도 생긴다.
김무영_ 자격지심이 왜 생겨. 하나씩 배우면 되지.
지대한_ 맞다, 재밌는 고민이지. 막상 무대에 올라가서 연기할 때는 또 나답게 했다. 연출하는 선배가 “대한이 연기는 카메라로 보면 진짜 좋겠다”고 하더라. 내가 목소리를 좀 작게 냈거든. ‘이 상황에서 크게 말하는 게 필요한가? 어울리나?’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어떤 연기를 잘하고 또 좋아하나.
지대한_ 기본적으로 어떤 상황에,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 즈음에 놓이는 걸 좋아한다. 극과 극으로 치달으면서 감정을 폭발하기보다는, 한 지점에 머무르며 세밀하게 인물을 표현해낼 때가 즐겁다. 일상에서도 감정이나 태도에 예민한 편이라 더 그런 것 같다.
김무영_ 예전에 대한이와 연기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연기를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아서 걱정된다고 하더라.
지대한_ 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학원에 다니기도 했지만, 여전히 방향에 관해서는 여러 고민이 든다. 학원에 가면 어떤 방법을 제시해주지 않나. 물론 도움을 받긴 하지. TV를 보면 그렇게 연기하는 게 옳다는 생각도 들고. 근데 한편으로는 내게 적합한 방향이 뭘까, 그걸 찾아 나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남는다.
김무영_ 네가 잘하는 게 있으니까.
지대한_ 아직 안 해본 게 너무 많다. 사실 그동안 나는 비슷한 결의 인물을 연기하지 않았나. 말수 적고 좀 내성적인 애들.
김무영_ 근데 너는 쾌활한 면이 더 많잖아.
지대한_ 맞다, 이제 그런 거 하고 싶다. 영화과 친구들 과제에 출연했을 때, 그냥 마음대로 해봤더니 재밌더라. 대사도 없는데 계속 말하고. (웃음)
감독의 시작도 궁금하다. <밤빛> 이전에는 단편 <콘크리트>와 <랜드 위드아웃 피플> 등을 만들었는데,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김무영_ 어릴 때부터 영화를 많이 접해서 매체 자체에는 익숙한 상태였다. ‘영화를 재미로만 보는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 무렵부터는 나름 특이한 영화를 찾아보면서 점점 관심을 키웠다.
직접 만들고 싶을 만큼 매력을 느낀 부분은 뭐였나.
김무영_ 글쎄, 좋은 영화에는 어떤 순간이 있는 거 같다. 현실감이 깨지는, 영화와 현실의 경험이 맞닿는 순간. 그 순간을 겪고 나면 영화를 마냥 유희의 대상으로만 여길 수 없다.
때로 그런 순간은 배우가 만들어낸다. <밤빛>의 중심에는 희태가 있지만, 그를 방문하고 떠나는 인물로서 민상 역시 못지 않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민상 역을 믿고 맡길 배우를 어떻게 찾았나.
김무영_ <마이 리틀 히어로>를 보고 센터에 연락해서 만났다. 중간에 대한이가 아니라, 다른 비전문 배우와 준비한 적도 있다. <밤빛>은 애초 다큐멘터리 요소가 강한 작품으로 구상했다가 여러 사정에 의해 극으로 전환한 작품이다. 송재룡 선배님이 상당히 안정적인 톤을 가지고 있어서 민상 역은 아마추어 배우여도 괜찮겠다 싶었는데 막상 맞춰보니 기본적인 것에서 막히더라. 액션과 리액션조차 수월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과감히 포기하고 다시 대한이에게 연락했다.
지대한_ 감독님과 연락이 안 닿는 시기가 있었지. 근데 나는 확신했다. 저 사람은 분명히 나랑 할 거라고. (웃음) 센터 선생님들도 “너 캐스팅 안 된 거 같아” 하셨는데, 나는 속으로 ‘응? 아닌데? 나 이거 할 건데?’라면서 별 걱정 없이 기다렸다. 내가 은근히 촉이 좋다. 감을 따르지 않고 망설이면 꼭 후회하게 되기도 하고.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도 ‘촉’이 발동했나. 촬영 환경을 포함해서 여러모로 어려움이 예상될 법한 시나리오였을 텐데, 왜 출연을 결심했나.
지대한_ 감독님이 처음부터 시나리오를 들고 오신 건 아니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때는 그냥 사는 얘기를 두서없이 나눴다. 지금도 그런데, 감독님이랑 대화했을 때 느낌이 좋았다. 어른이지만 격이 없다고 해야 할까? 나이나 위치 같은 걸 내세워서 벽을 만드는 분이 아니거든. 마음이 금세 열렸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 순간 ‘이 작품은 무조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함께라면 뭘 하든 재밌을 거 같았다. 물론 시나리오도 흥미롭게 읽었고, 나중에 송재룡 형님이랑 리딩할 때도 즐거웠다. 어려서 그랬는지 나한테는 촬영하러 가는 것도 여행 같았다.
산이라는 공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작품이고, 그 안에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머물러야 했다. 공간을 해치지도 공간에 짓눌리지도 않는 적정선을 찾기까지 배우들과 함께 하는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 같다.
김무영_ 촬영감독과 쇼트를 만들고, 배우들과는 어떤 동선이 어울릴지 고민하는 과정이었다. 콘티가 없었기에 현장에서 공간을 보며 대화를 많이 했다.
일부러 콘티를 준비하지 않은 건가.
김무영_ 맞다. 나는 콘티를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처음에 만든 단편 두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콘티 없이 촬영했다. 나랑은, 내가 만들려고 하는 영화에는 안 맞는 방식 같다. 다만 촬영 전에 영화의 배경인 방태산과 함백산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혼자 산을 둘러보며 기본적인 쇼트를 구상했고, 그 내용을 정리해둔 글을 바탕으로 촬영감독과 구체적인 프레이밍을 논의해 나갔다.
“내가 만들려고 하는 영화”에 관해 좀 더 이야기해준다면?
김무영_ 영화를 찍을 때 장소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장소의 특성과 정서를 최대한 활용하고 싶다. 예를 들어 장르 영화나 서사 중심의 영화를 만든다면 콘티가 필요하겠지. 여러 사람이 빨리빨리 찍어야 하는 상황인데, 콘티도 없이 현장에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무모한 시도일 테니까. 근데 내 경우에는 장소에 적합한 쇼트를 찾아내는 것이 과제이다 보니, 오히려 콘티가 없을 때 더 편안하다. 어떤 면에서는 그게 자연스럽다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아쉬운 부분도 있다. 현장에서 공간을 급히 섭외한 경우에는 애초 의도한 대로 촬영할 수가 없더라.
지대한_ 방태산 약초! 민상이 약재 상점에서 메모지에 낙서하는 장면을 찍을 때 그랬다.
김무영_ 거기는 정말 당일에 섭외했거든. 주인 분이 빨리 찍고 나가라고 계속 그러셔서. (웃음) 쇼트를 분할하기가 힘들었다.
감독은 연기에 관해서는 배우에게 많은 부분을 맡겼다고 했다. 배우 입장에서는 어땠나.
지대한_ 감독님이 방향을 제시해주지 않은 건 아니다. 큰 방향을 설명하신 다음 자유롭게 풀어주셨다. 무엇보다 ‘이건 이래서 좋았다’는 식으로 피드백을 해주셔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감독님이 과묵하긴 한데, 나를 세상에 혼자 떨어진 애처럼 내버려 두진 않으셨다.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모를 때는 의지할 수도 있고. 덕분에 신기하리만치 부담이 없었다. 지금이라면 절대 못 그럴 거 같은데, 어려서 그랬나? 송재룡 형도 옆에서 많이 도와주셨고.
원래 ‘형’이라는 호칭을 쓰나.
지대한_ 처음 리딩에서 만난 날, 형으로 부르라고 하셔서 그때부터. (웃음) 핸드폰에 전화번호도 ‘송재룡 형’으로 저장해뒀다.
민상은 경계에 선 소년처럼 보인다. 희태에 관해 아는 바가 없는 듯한데, 그렇다고 전혀 모르는 것 같지도 않다. 제 나이다운 미숙함을 지닌 동시에 묘하게 어른스러운 표정이나 말을 내비치고 내뱉는다.
지대한_ 현장에서 문득 ‘얘는 이런 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나와는 굉장히 다른 사람인데, 영화를 찍다 보니 어느새 그 인물에 가까워졌던 거 같다. 사실 민상이 희태를 만났을 때, 아예 말도 안 하고 자기를 다시 집으로 보내 달라고 할 수도 있잖아. 근데 민상은 그냥 조용히 거기에 있단 말이지. 어차피 2박 3일 동안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니까. 민상은 그런 애다. 굳이 마음을 열려고 하지도 않고, 연다고 해도 살짝 틈이 벌어진 정도다. 처음에는 ‘나도 희태한테 잘해줘야 하나? 관객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나?’ 싶었는데, 결국 드러내지 않았다. 그게 감독님이 추구하는 방향과도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태는 민상의 아빠이지만, 그건 관객들만 아는 거고 영화 속 나는 모르는 거니까. 우리 사이에 유대감이 조금이라도 깃든다면 그것 또한 관객들의 몫이라고 여겼다. 내가 관여할 수는 없는 영역이라고. 다만 후반부에는 ‘저 사람은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지?’라는 생각이 드니까 민상 입장에서도 미안함이나 걱정스러운 마음이 생겼던 거 같다. 처음엔 눈도 안 맞추고 퉁명스럽게 대하다가 나중에는 사람을 좀 바라보기도 하고.
희태는 민상에게 끝내 먼 사람일 테지만, 함께하는 동안 민상에게 뭔가를 가르치거나 남겨준다. 송재룡 배우와 연기하며 친밀감 혹은 거리감을 조정하기 위해 이야기를 나눈 바가 있다면.
지대한_ 영화와 상관없이 배우로서는 그저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후반부로 갈수록 영향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닌 듯하고.
김무영_ 송재룡 선배님은 확실히 영향을 받으셨지. 대한이한테 왠지 모르게 더 잘해주고 싶다고 하시더라.
지대한_ 맞다. 감독님은 희태도 좀 더 무심해 보이면 좋겠다고 했거든. 근데 송재룡 형은 “마음이 가는 걸 어떻게 하겠냐”고 하시더라. 그래서인지 영화에 어쩔 수 없이 담기는 감정들이 있는 거 같다.


희태가 민상의 자는 모습을 지켜보며 머리를 쓰다듬는 장면도 그중 하나 아닌가.
김무영_ 본래 그 장면을 쓸 생각이 없었다. 재룡 선배님께 쓰다듬지 마시라고도 했고. 결국 현장에서는 두 버전을 다 찍었는데, 아예 장면 자체를 들어낼까 고민도 했다. 근데 나중에 편집하면서 보니 그 장면을 살리는 게 좋겠구나 싶더라. 촬영감독도 둘 사이를 이어주는 장면이 필요할 거 같다고 말했고.
혹시 감독과 배우에게도 희태 같은 사람이 있나. 내가 몰랐던 세상으로 잠시 데려가는, 어긋나면서도 어딘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존재가 있다면.
지대한_ 좀 더 기다려볼 걸 그랬나, 싶은 관계가 더러 있다. 언젠가부터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상태에서도 내가 먼저 다가가서 빨리 친해지려고 노력하거든. 어쩌면 이런 태도 때문에 오히려 관계가 얕아지는 건 아닐까 싶더라. 그 사람이 나한테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도 전에 내가 나서서 거리를 좁혀 버리니까. 그럼 더는 속마음을 안 보여줘도 괜찮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한편, 내가 진짜 진짜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겉보기에 나는 모두와 친한 사람처럼 보이니까. 잘 모르겠다. 내 사람을 잘 챙기고 싶은데, 마음처럼 쉽지 않다. 인간관계에 고민이 많은 걸 보니 아직 성장기인가 보다.
김무영_ 나도 친구들이 떠오른다. 지금은 인연이 끊어졌지만, 나한테 많은 걸 나눠주고 가르쳐주었던 친구들.
산속에 자리한 희태의 집은 어떻게 발견한 공간인가. 새로 더하거나 빼낸 부분이 있었는지도 궁금하다.
김무영_ 동네 이장님께 부탁해서 실제로 산에 살고 계신 분을 소개받았다. 옛날에는 그 집에 화전민이 살았다고 하더라. 그분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데, 묘하게도 주인공과 상황이 무척이나 비슷했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병원 신은 그분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었다. 여름에 찾아가서 촬영을 마친 다음, 다시 방문했을 때는 그분이 병원에 입원하신 상황이었거든. 그때 들려주신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고 인트로에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후 겨울 촬영 때 그걸 새로 찍고 인트로에 넣었다. 집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주셨다. 약초와 버섯을 채취하는 법도 그분께 배웠다. 촬영할 때 방을 정리하고 일부 꾸미기는 했지만, 인위적으로 손을 본 곳은 특별히 없다. 다만 집이 아주 넓지는 않아서 앵글을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뒤쪽 벽에 문이 하나 있어서 그걸 열고 촬영했다. 최대한 단조롭지 않게 찍으려고 애쓴 기억이 난다.
그곳에서 희태와 민상이 읽는 책은 감독이 직접 고른 소품인가.
지대한_ 그 집에 원래 있던 책들이다.
김무영_ 아니, 내가 가져온 건데.
지대한_ 뭐라고? 소름인데? (웃음)
김무영_ 네가 읽는 책들은 전부 내가 가져온 거야. 당시에 나름 내용을 연결해서 책을 준비했다.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랑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같은 소설이었다.
몸과 마음 모두 고생해서 만든 작품이다. 특히 민상이 희태와 보내는 2박 3일에는 한여름의 무더위가 물씬 묻어난다. 현장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많을 듯하다.
김무영_ 희태 집 앞에 평상을 놓는다고 고생 좀 했다. 마을 민박집에서 빌린 평상을 산 중턱까지 옮겨야 했으니까.
지대한_ 산이라서 길이 진짜 가파르고 좁거든. 차로 운반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김무영_ 스태프들이 <피츠카랄도>(베르너 헤어조크, 1982) 찍느냐며 엄청나게 욕했지. (웃음) 평상을 아예 사려고 했는데 민박집에서 안 판다고 해서 올렸다가 또 내려야 했거든. 겨울에 두 번째로 촬영할 때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평상을 안 옮기고, 나무로 다리만 세운 후에 비닐을 덮어서 만들었다. 촬영하며 그게 제일 힘들었다. 나, 촬영감독, 조명감독, 조연출까지 이렇게 네 사람이 평상 한 귀퉁이씩 붙잡고. (웃음)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다니. 감독 입장에서 가장 욕심을 내서 찍은 장면은 뭔가.
김무영_ 엔딩. 처음 영화를 구상할 때 떠올린 장면이다. 어둠에서 확 밝아지면서, 환한 풍경으로 끝나길 바랐다. 대부분 처음에 생각한 장면을 후반부에 배치하게 되더라.
지대한 배우에게 <밤빛>은 어떤 작업으로 남아 있나.
지대한_ 영화를 찍고 나면 그때 보낸 시간이 영화와 함께 떠오른다. 촬영하면서도 무척 재밌었고, 영화제에서 상영하며 관객과 만난 경험도 특별하게 남았다.
김무영_ 내가 영화 보여줬을 때 별로 기대하진 않았잖아. (웃음) ‘아, 그렇구나’ 하면서 시큰둥한 반응이었는데.
지대한_ 아니, 그때는 여름 장면만 편집해놓은 상태였으니까. 뚝뚝 끊겼지. (웃음)
김무영_ 하긴 여름 장면만 봤을 때는 다들 그랬다. 애초 울주산악영화제에서 단편으로 제작지원을 받았거든. 찍고 나니 장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어서 난감했지.
지대한_ 그럼 원래 단편이 목표였던 건가?
김무영_ 그렇지. 안 그래도 현장에서 촬영 감독님이 묻더라. 지금 우리가 단편이 아니라 장편을 찍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웃음) 시퀀스마다 길이가 꽤 되니까. 내 입장에서도 이미 촬영한 분량이 아깝기도 하고, 겨울 장면까지 넣어 확장하면 더 좋겠더라. 결국 영화제에는 35분 러닝타임에 맞춰 상영하고, 이후 장편으로 완성했다.
지대한_ 앞, 뒤로 겨울 장면이 붙고 나니 훨씬 좋더라. 나는 이 영화 좋아한다니까! (웃음) 사실 친구들은 안 좋아할 거 같기는 했는데, 그래도 열심히 설명했다. 영화가 많이 느리다. 보다가 잘 수도 있다. 그러니 전날 잠 잘 자고 와라.
김무영_ 이해한다. 나도 내 친구들한테 그렇게 말한다.
지대한_ 친구들이 즐겨 보는 영화에선 보통 인물과 인물이 만나면 바로 대화하고 사건이 벌어지는데, 우리 영화는 그렇지 않으니까. 요즘은 유튜브 시대 아닌가. 5분 미만인 영상도 지겨워하는 상황이다 보니 관람하기 전에 미리 당부를 좀 해야겠더라. 힘들 수 있는데, 견뎌 봐라. 그럼 좋을 거다. (웃음)


개봉하고 나면 또 다른 기억이 쌓이겠다. 요즘에는 무엇에 관심이 있나. 대학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지대한_ 혼자 여행 가기. 원래 혼자 있는 걸 힘들어하는데, 마음 같아서는 핸드폰도 없이 어디론가 훌쩍 떠나보고 싶다. 최근에 친구들과 바다에 갔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바다를 오래 보고 싶은데, 옆에서 친구들이 사진도 찍고 말도 거니 그럴 수가 없더라. 왠지 휘둘리는 느낌이 들어서 이제는 혼자 있는 시간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여도 괜찮아!”라는 느낌으로. (웃음)
김무영_ 학교에서 해보고 싶은 건 없어? 연극을 할 때는 어때?
지대한_ 좋은데, 영화와는 또 다른 경험이다. 물론 영화도 마찬가지겠지만, 연극에서는 정말 관객을 속일 수가 없더라. 전쟁에 나간 병사가 된 기분이랄까. 옆에 되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한 명이 겁나서 도망가버리면 다른 사람까지 전부 도망가는 거다. 말 그대로 한순간도 지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해서 무대라는 곳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공부가 필요하다.
연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크다 보니 고민도 깊어지는 거 같다. 왜 연기를 좋아하나.
지대한_ ‘멀티 플레이’를 못하는 성향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정말 연기하는 순간에만 푹 빠질 때가 있다. 아예 다른 세상으로 간 것만 같은, 내 기억이 통째로 어딘가에 다녀온 듯한 느낌.
김무영_ 배우들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거 같다고.
지대한_ 그때는 내가 아는 나는 없어진다. 자연스럽게 인물이 고민할 법한 문제를 내가 고민하지. 빠져들고 싶다는 생각조차 안 하고 푹 빠져 있을 때, 드물게 찾아오는 그 순간을 참 좋아한다. 다른 이유는 전부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김무영 감독은 지난 인터뷰에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동시에 준비하는 중이라고 했는데.
김무영_ 극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프로젝트마켓에 참가한 이후 트리트먼트와 시나리오를 완성해나가는 단계이고, 다큐멘터리는 현재 촬영을 40퍼센트 정도 완료했다. 사실 돈이 너무 안 구해져서 고민이었는데, 같이 작업하는 분이 “정 어려우면 우리끼리 소소하게 만들자”고 하더라. 아카이브 푸티지를 사용하다 보니 저작권료가 꽤 많이 나온다. 그것만 해결할 수 있으면 올해 안에는 완성하려고 한다.
지대한_ 기대된다. 각각 주제가 다른가?
김무영_ 다큐멘터리는 이념과 재현의 관계를 다룬다. 장충동에 위치한 남산 자유센터가 시작점이다. 예전에는 반공센터였다가 지금은 결혼식장으로 사용하는데, 김수근 건축가의 초기 작품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이념의 영향 아래에서 작업했던 예술가와 창작자, 실제 반공 사건에 엮였던 당사자, 폭력과 연결되는 이념 문제 등을 살펴보고, 이념이 사라진 현대에는 재현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담아내려고 한다. 극영화는 자동화된 공장을 배경으로 한다. 처음 시나리오는 코로나19 이전에 썼는데, 이야기를 좀 더 추가하려고 한다. 주제 자체가 사람 사이의 거리감이다 보니, 요즈음 더 와닿는 부분이 생기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