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은과는 재작년 봄에 처음 만났다. <내가 사는 세상>(최창환, 2019) 개봉을 앞두고 진행한 인터뷰에서 김시은은 활기차고 거침없었다. 시원시원하게 이야기를 풀어 놓는 모습을 보며, 누구보다 자신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일 거라 여겼다. 2년 만에 <빛과 철>(배종대, 2021)로 돌아온 김시은은 사뭇 달라 보였다. 목소리는 한결 차분했고, 말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히 골랐다. 예상치 못한 분위기에 당황해서 밑도 끝도 없이 괜찮은지 묻자, 김시은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마치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생긴 것처럼, 혹은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시간을 보낸 것처럼.
<빛과 철>의 희주는 고립을 자처하는 인물이다. 2년 전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려 왔고, 이제 그 죽음에 얽힌 진실을 향해 홀로 돌진한다. 비밀을 알고 싶다는 욕망은 희주를 위태로운 길로 내몰지만, 희주는 아득하고 어지러운 정념의 파고 앞에서도 좀처럼 항로를 변경하지 않는다. 김시은은 그 시간을 “희주만큼 혹독하게” 통과했고, 그 여정을 “한 번쯤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제야 김시은을 둘러싼 차분함이 우울과는 다른 것임을, 조심스럽지만 결코 주눅 든 태도는 아님을 알아챌 수 있었다. 새로운 자아와 대면하며 좀 더 단단해진 김시은과의 대화를 옮긴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1년 정도 느슨히 쉬어보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요.
스페인으로 여행도 다녀오고 정말 잘 쉬었어요. <빛과 철>을 찍고 나서는 확실히 휴식이 필요했거든요. 그러다가 <내가 사는 세상>을 함께했던 최창환 감독님한테 연락이 와서 작년에 <레이오버 호텔>과 <숨어드는 산>을 연달아 찍었어요.
감독이 배우를 한번 만나면 잘 안 놓아주나 봐요.
(최창환 감독과) 작업하면 적어도 세 작품 정도는 같이 해야 해요. (웃음) 곽민규 배우는 <파도를 걷는 소년>(최창환, 2020)으로 마쳤고, 저랑 강길우 배우가 배턴을 넘겨 받았던 거죠.
곽민규 배우는 약간 서운했을 거 같은데요.
그래도 특별 출연으로 잠깐 나와요. (웃음) 민규는 저도 참 좋아하는 배우이고 친구인데 주변에서 하도 저희를 세트처럼 보니까 이제 그만 좀 만나자, 싶거든요. 다시 작품을 같이 한다고 해도 당분간 공백기를 두고 싶고요. 사실 창환 감독님이 민규랑 같이 출연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셨을 때도 “그럼 제가 빠지겠습니다”라고 했어요. (웃음)
쉰다고 했지만 계속 연기를 해왔네요. 2019년 말에는 드라마 <모두의 거짓말>(OCN)에도 출연했고요.
쉰다는 게 저한테 와주는 작품을 모두 마다하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예전에는 작품이 없는 기간을 못 참았어요. 어디 뭐 없나 하면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기회를 찾아다녔죠. 쉬는 동안에는 그걸 안 했던 거 같아요. 창환 감독님이 불러주셨을 때는 기쁜 마음으로 참여했고요.
<빛과 철>은 언제 촬영했어요?
2018년 12월부터 2019년 1월까지요.


따지고 보면 오래전 일인데, 다시 끄집어내 말하기도 쉽지 않을 듯해요.
그래서 영화가 참 신기한 것 같아요. 촬영이 끝났을 때는 다 끝났구나 싶은데, 이렇게 지난 시간을 되짚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와요. 인터뷰할 때는 최대한 기억을 살려서 잘 전달해야 하잖아요. 먼지 묻은 상자를 꺼내서 열어보는 기분인데, 심지어 그 상자를 어디에 두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웃음) 창고에 들어가서 한참 헤매는 거죠. 촬영이 끝이 아니라는 걸 이렇게 깨달아요.
피곤하지는 않아요?
솔직히 인터뷰가 쉽지는 않아요. 오로지 김시은으로서 생각하는 바를 편하게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예전에는 그러기도 했는데, 나중에 기사를 읽으면 이런저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때로는 의도한 바와 다르게 쓰이기도 하고, 진짜 제 마음 그대로 적혀 있긴 한데 글로 보면 좀 더 세게 느껴지기도 하고. 결국 해야 할 말을 머릿속에 정리해두지 않으면 인터뷰 현장에서 횡설수설하더라고요. 완전히 자유롭게 얘기할 수는 없어요. 영화는 공동 작업이고, 저는 어떤 작품에 출연한 배우로서 대화에 참여하는 거잖아요.
오늘은 <빛과 철>의 김시은인 것처럼 말이죠.
네, 작품을 대변해서 나온 거니까 어렵네요. 그래도 조금씩 받아들이는 중이에요. 물론 배우는 연기하는 사람이고 촬영에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지만, 영화가 세상에 나왔을 때 이렇게 앞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 또한 이 직업의 일부분이구나 하고요. 너무 힘들게만 느끼지 말고 적응해보자고 마음먹었어요.
그럼 희주에 관해 먼저 말해 볼까요. <빛과 철>은 희주를 놓치면 끝까지 따라가기 어려운 영화에요. 보는 내내 ‘희주는 뭘 원할까?’라고 묻게 되죠.
희주 외에는 아무도 모를, 희주가 스스로 부여한 죄책감이 있잖아요.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가장 크다고 봤어요. 은영(박지후)과 영남(염혜란)을 만나면서 어떤 출구를 발견한 거죠. 어쩌면 가해와 피해 구도가 뒤바뀔 수도 있겠구나. 희주에게는 그런 가능성이 아주 가느다란 빛 한줄기처럼 다가왔을 거 같아요. 심지어 그게 진실이라고 믿기도 하고요. 그래야만 자기가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는 어땠어요? 극을 이끌어나가는 인물인 데다 이야기 자체에 강도가 있다 보니 욕심과 부담을 두루 가졌을 듯해요.
정확해요. 욕심이 났지만 그와 동시에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죠. 고민하다가 감독님을 믿고 가보기로 했어요. 어쨌든 감독님은 제가 할 수 있을 거라고, 해낼 거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니까.

감독과는 원래 아는 사이였나요.
전혀 친분이 없었어요. 캐스팅을 제안하며 시나리오를 보내주셨어요. 읽어 본 다음에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만나자고 하시더라고요. 처음 만난 자리에서 물어봤어요. 왜 저랑 작업하고 싶냐고. 감독님은 저한테서 독한 눈을 봤대요. 밝고 쾌활한 인물을 연기할 때도 슬쩍슬쩍 내비치는 표정에서 독기 어린 눈빛이 보였다고요. 특히 <귀향>(조정래, 2015)이나 <수색역>(최승연, 2016)처럼 마냥 밝기보다는 어두운 면도 있고 강인함을 지닌 인물을 연기했을 때가 인상에 남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전작과 비교하면 희주는 정말 독한 인물이죠. 변신이라고 할 만큼 낯선 모습을 보여줬어요.
특별히 어떤 인물로 보여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당시에 장편에 대한 욕구는 있었죠. 제가 표현하는 인물을 좀 더 긴 호흡으로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빛과 철>의 희주는 잘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이기보다는 도전에 가까웠지만요.
어떤 면에서 도전이었나요.
인물 자체에 대한 거리감은 그리 멀지 않았어요. 물론 희주가 놓인 구체적인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질 수는 없지만, 가족이라든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잃는 경험 자체만 놓고 보면 공감이 됐어요. 오히려 저는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들, 희주의 선택에 관해 감독님과 많은 대화를 나눠보고 싶더라고요.
전체 서사를 담아내려면 인물에 관한 또 다른 이해와 고민이 필요했다는 뜻인가요.
맞아요,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가 있잖아요. 희주가 죄책감을 갖는 이유와 배경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니까요. 결국 제 안에 이야기를 담아내는 과정이 어려웠던 거 같아요. 영화에서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희주는 전부 알고 겪어낸 상태여야 하니까요. 작업 초반부터 감독님과 꾸준히 의견을 나누면서 인물의 전사를 만들어나갔어요.
프리 프로덕션이 꽤 길었나 봐요.
그리 길지는 않았어요. 촬영 한 달 전쯤 시나리오를 받았거든요. 사실 감독님이 저를 캐스팅하고 싶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대요. 여러 배우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감독님이 강력하게 주장하신 덕분에 성사된 거죠.
감독과는 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요.
레퍼런스 작품으로는 <아내는 고백한다>(마스무라 야스조, 1961)와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아쉬가르 파라디, 2011) 등을 추천하셨어요. 대화할 때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많이 물어보셨고요. 제가 희주에게 이입한 상태로 말하기를 원한다기보다는 실제 김시은은 어떤 사람인지를 더 궁금해 하셨죠.

최창환 감독과 작업했을 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어요. 당연히 리딩을 위해 모인 줄 알았는데, 감독이 “우리 리딩 대신 각자 살아온 얘기 하자”고 해서 놀랐다고요.
창환 감독님은 그렇게 접한 이야기를 실제로 캐릭터에 녹여 내요. “이거 좋다. 좀 넣을게요.”라면서 시나리오에 바로 추가하시고. (웃음) <빛과 철> 작업할 때는 저와 인물이 맞닿는 부분을 찾아내려고 애썼던 것 같아요. 제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동시에, 감독님과 서로 끊임없이 질문을 주고받았어요. 희주와 남편의 관계는 어땠을까? 둘은 어떻게 만나고 왜 멀어졌을까?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에 드러나지 않는 내용을 채워 갔어요.
희주가 누군지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네요.
네, 희주는 충분한 사랑과 관심 속에서 자라지는 못했을 거라고 봤어요. 적어도 희주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환경은 아니었고, 가족 사이에서도 늘 외로움을 느꼈을 거라고요. 그러다 보니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안정감이 중요했는데, 결혼 생활에서 기대했던 바가 충족되지 않았죠. 그때 자연스레 남편에게로 화살이 돌아가지 않았나 싶어요.
그게 곧 희주의 죄의식으로 이어지고요.
과거를 돌이켜보는 과정에서요. 당시에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남편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지난 기억이 하나둘씩 떠오르는 거죠. 남편 앞에서 본인이 취했던 태도와 그를 향해 품었던 마음 같은 것들. 남편 역시 알게 모르게 그런 걸 느꼈을 테니까요.
감독은 배우 간에 친밀감이 생기는 걸 막고자 사전 리딩을 안 했다고 했어요. 준비하면서 불안하지는 않았어요?
저도 감독님 의견에 동의했어요. 작업하기 전까지 혜란 선배와 만난 적은 없지만, 분명히 좋은 분일 거라 생각했거든요. 만나면 만날수록 제가 선배를 너무 좋아하게 될 것 같은 거예요. (웃음) 친밀감이 쌓이지 않도록 대면하는 자리를 최소화했고, 실제로 연기하는 과정에서 그게 효과적이기도 했어요. 희주는 영남을 싫어해야 하는데, 저는 촬영하면서 혜란 선배가 점점 더 좋아졌거든요. 미리 만나기까지 했으면 연기하기가 너무 힘들었을 거예요. 반면에 리딩을 하지 않아서 어려웠던 부분도 있죠. 현장에서 감독님이랑 여러 가지를 시도했어요.
테이크를 여러 번 가는 방식이었나요?
꽤 많이 갔어요. 특히 초반에는 현장이 전쟁터처럼 느껴졌죠. 저는 나름대로 희주를 준비해서 갔는데, 감독님이 생각했던 모습과는 다른 지점이 있는 거예요. 이전까지 감독님과 장면 하나씩 놓고 말투나 표정 같은 구체적인 부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었으니까요. 현장에서 그걸 조율하다 보니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실은 촬영을 마치고 나서 감독님한테 물어봤어요. 여전히 그런 방식을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으시냐고. 우리 되게 힘들었거든요. (웃음) 근데 감독님은 현장을 생생하게 담아낼 수 있어서 만족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여기서는 이럴 거야’라고 사전에 선을 그어버리면, 현장에서 새로운 걸 발견하기 어려웠을 거라고요. 저 역시 헤매는 동안 힘들기는 했지만, 다양한 시도를 통해 길을 찾아 나갈 수 있어서 좋았어요. 또 힘들 때 나오는 힘이란 게 있잖아요. (웃음)
염혜란 배우와는 공장 탈의실에 마주 앉아서 대화하는 신을 촬영할 때 처음 만났다고 들었어요.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신인데 당시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요.
감독님이 그 장면을 제일 좋아하세요. (웃음) 실제로 현장에도 긴장감이라고 해야 하나,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어요. 오죽하면 혜란 선배는 처음에 제가 선배를 싫어하는 줄 알았대요. 눈에서 자꾸 레이저를 쏘아대니까. (웃음) 그날 만나서 인사하는데 웃음이 안 나오더라고요. 보통 후배가 선배한테 하듯 살갑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괜히 뒤로 물러서게 되는 거예요. 이전까지는 혜란 선배님을 사진으로만 보면서 감정을 쌓았으니까요. 저도 모르게 희주로서 영남을 상상했던 시간이 몸에 배었던 거죠. 두 인물이 딱 마주했을 때, 감독과 배우가 의도한 대로 불꽃이 튀었던 거 같아요.

감독의 바람처럼 “알 수 없는 힘”에 휘말린 순간도 있나요.
방금 말한 장면이 그랬고, 영남이 처음 희주에게 말을 거는 장면도 떠올라요. 그때 희주는 영남에게 공포를 느껴요. 어떤 사람인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는 데서 오는 공포요. 내가 누구인지 아나? 모르고서 이러는 거라면 너무 미안해서 무섭고, 알고도 그런다면 더 무섭죠. 인물들이 그렇듯 배우들도 서로 속을 모르는 상태에서 만났어요.
그때 희주는 날이 바짝 선 말투로 “저 아세요?”라고 묻죠.
그것도 톤을 바꿔 가며 여러 차례 찍었어요. 당시에는 제가 희주의 마음을 모른다는 생각에 답답했어요. 왜 이렇게 어려울까, 왜 못 찾을까. 근데 희주가 그런 마음이었던 거 같아요. 정말 모르는, 모르니까 너무 힘든 상태요.
배우와 인물이 만나는 순간이었네요.
맞아요. 시간이 지나고 몇 발짝 떨어져서 보니 그렇더라고요. 당시에는 제가 놓인 상황, 제가 느끼는 감정이 곧 희주라는 사실을 몰랐어요. 저는 뭐라도 좀 알고 현장에 들어가고 싶은데,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다 보니 대처할 겨를도 방법도 없었죠. 사실 우리 인생과 비슷한 거예요. 미래에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고, 그래서 불안하잖아요. 연기에 그런 불안과 두려움이 녹아들었던 거 같아요.
배우로서든 인물로서든 외로웠겠어요. 게다가 희주는 모두와 싸우고, 그나마 유지하던 관계마저 끊어내니까요.
너무 외로웠어요. 일부러 다른 배우들과 거리를 두기도 했고요. 혜란 언니와 수다를 떨면, 감독님이 슬쩍 다가와서 너무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웃음) 그러다가 촬영 중간에 (강)진아 언니가 왔어요. 언니와는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이다 보니 더 마음이 가는 거예요.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와서 참느라 고생했어요. 희주가 오빠랑 새언니 집에 가서 삼겹살을 구워 먹는 장면을 찍을 때 힘들었죠. 감독님이 너무 맛있게 먹어서 다시 찍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왜 이렇게 입맛이 살아 있냐고. (웃음)
그러고 보면 이번 현장에서는 여자 배우들과 호흡을 맞춘 것도 차이점이에요. 기존에는 상대 배우가 대부분 남성인 경우가 많았죠.
진아 언니 외에는 전부 처음 만났어요.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여성이기는 한데, 서로 연대하거나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잖아요. 도리어 이전에는 늘 어떤 식으로든 유대 관계에 놓인 인물을 연기했다면, <빛과 철>에서는 단절을 경험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 같아요.

희주와 영남은 대척에 있지만, 멀리서 보면 동전의 양면처럼 동질감을 공유하는 관계이기도 해요.
그래서 촬영 중에는 몰랐는데, 완성된 영화를 보면서 새삼 감탄했어요. 제가 현장에서는 지켜보지 못했던 혜란 선배의 시퀀스들까지 전부 담겨 있으니까요. 관객 입장에서 강인한 여성들이 극을 이끌고 가는 모습을 보니 좋더라고요.
영화의 결말과 상관없이, 연기하는 동안 인물의 미래를 상상해본 적이 있나요.
희주는 남편의 사망 이후 살던 곳을 떠났다가 2년 만에 돌아와요. 이제 좀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면서요. 누구나 그렇잖아요. 저도 힘들면 잠시 쉬면서 시간을 갖고, 어느 정도 회복했다는 확신이 들면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거든요. 희주 역시 고향에 돌아갈 때는 새로 적응해보려는 의지를 가졌을 거예요. 근데 2년이라는 기간을 보낸 후인데도, 영남과 마주치는 순간 또다시 과거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 거죠. 희주는 어떻게든 짐을 내려놓고 싶지 않았을까요. 어깨에 이고 지고 다니는 무거운 짐을 훌훌 털어버린,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희주의 모습을 그렸어요.
완성된 영화를 본 건 언제였나요.
촬영 마치고 꼬박 한 해를 보낸 후에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봤어요. 영화제 장기 상영회가 열렸을 때 극장에서 한 번 더 봤고요. 근데 요즘도 감독님과 만날 때마다 영화를 봐요. 감독님이 핸드폰에 영화를 저장해서 다니시거든요. 대화하다가 “볼래요?” 하면서 틀어주시죠. (웃음) 촬영은 오래전에 끝났지만, 여전히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눠요.
긴 뒤풀이를 하고 있네요.
맞아요. 촬영 당시에 서로 의견이 달랐던 지점들이 있잖아요. 둘 다 생각이 바뀌었는지 아니면 아직도 그대로인지 묻고, 그러다가 연기했던 장면도 다시 보고 그러죠.
스크린에서 본인의 얼굴을 봤을 때는 어떤 느낌이었는지도 궁금해요.
엄청나게 떨렸어요. 그날 전주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죠.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닌 듯해서 걱정했는데, 신기하게도 어느새 제가 영화를 따라가고 있더라고요. 그건 영화에 힘이 있다는 뜻이잖아요. ‘어, 영화가 재미있네?’ 하면서 점차 빠져들었어요. 감독님의 노고를 느낄 수 있었죠. 편집에만 1년을 쏟으셨거든요. 저를 희주라는 인물로 잘 담아주셔서 감사했고, 모든 인물이 한 편의 영화로 엮인 모습에 뿌듯함을 느꼈어요.
왜 그토록 긴장했을까요?
초반에 감독님과 의견이 대립했을 때, 결을 맞추느라 고생했거든요. 제가 A이고 감독님이 Z라면 A부터 Z까지 다 찍어 봤을 정도로요. 톤을 달리하며 다양하게 찍었던 터라, 편집 과정에서 어떤 테이크를 쓰실지 감이 안 잡히더라고요. 일관성 있게, 들쑥날쑥하지 않게 연결이 될까? 이 부분을 가장 걱정했는데 편집을 잘해주셨어요.

장편 주연으로서 느끼는 책임감도 컸을 거예요.
하고 싶었는데도 막상 눈앞에 닥친 일이 되니 쉽지 않더라고요. <내가 사는 세상>도 주연이었지만, 시은보다는 민규가 이야기 중심이었으니까요. 심지어 촬영할 때는 단편을 찍는 줄 알았고 개봉을 계획하신 줄도 몰랐어요. 나중에 장편으로 완성되고 개봉까지 했을 때는 깜짝 선물을 받는 느낌이었죠. 그런 면에서 <빛과 철>은 처음부터 장편, 주연, 개봉 등 정해진 바가 명확했고, 개인적으로 너무 잘 해내고 싶었어요. 욕심과 비례해서 부담을 느끼다 보니 더 어려웠나 봐요. 영화에서 희주가 뭔가에 잔뜩 짓눌려 있는 것처럼 제가 촬영하는 동안 그랬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는 도움을 준 면이 있겠네요.
맞아요, 근데 촬영 당시에는 저랑 희주가 닮았다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서야 알았죠. 희주는 그때 내 모습과 참 비슷하구나. 우리가 무척이나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구나. 실은 영화를 보면서 울컥했던 적이 있어요. 인물에 이입해서가 아니라, 당시 제 모습이 떠올라서요. (웃음)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던 저를 다시 마주하는 거 같더라고요. 주연으로서 극을 끌고 나간다는 의미를 실감한 작업이에요. 쉽지 않은 일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한 인물의 서사를 오롯이 보여줄 수 있어서 참 좋았고요.
뭘 가장 잘하고 싶었어요?
다, 전부 다 잘하고 싶죠. 희주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어떻게든 저와 일치하게끔 만들고 싶었어요. 사실 리딩을 안 하고 현장에 들어가다 보니, 내심 감독님이 많이 이끌어주시리라 기대했어요. 근데 감독님은 제가 스스로 희주를 찾아내기를 바라셨던 거 같아요. 감독님의 틀에 맞춘 희주가 아니라, 저만의 희주요. 솔직히 말하면 당시에는 감독님이 너무 밉기도 했어요. 나를 너무 내버려두는 것만 같아서 외로웠고, 촬영만 끝나면 다시는 안 만날 줄 알았죠. (웃음) 지금은 감사하게 생각해요. 제가 정답을 찾아내기까지 감독님이 묵묵히 기다리며 함께 노력해주셨거든요. 덕분에 작업하면서 자립심을 키울 수 있었어요. 스스로 생각하고 만들어나가는 힘을 기른 거 같아요. 이번 작업이 배우로서 저에게 아주 좋은 자양분이 됐어요.
그러니까 감독과 계속 만나며 영화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거겠죠.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쌓여서요. (웃음) 사실 감독님이 현장에서 모든 걸 만들어낼 수는 없는 일이고, 배우가 해내야 할 몫이 분명히 있어요. 어떤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감독님이 해결사처럼 나서서 저를 끌어갈 수는 없잖아요. 당시에는 현장에서 계속 그 상황을 맞닥뜨리다 보니 연기에 관해서도 많이 자책했어요. 희주처럼 모든 화살을 저한테 돌린 거죠. 영화를 마치고 충분히 쉬었던 게 도움이 됐어요. 제 속도에 맞춰서 얼마간 시간을 보내고 나니, 결국 제 고민과 선택으로 답을 찾아 나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히려 감독의 지시에만 의지했다면, 지금 더 힘들지도 모르겠네요.
당시에는 편했을 수도 있는데, 다른 현장에 가서 고생했을 거예요. 현장이란 게 참 살벌하구나, 앞으로는 더 철저히 준비해야겠구나 싶었어요. <빛과 철> 한 작품으로 제가 완전히 발전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가는 거 같아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빛과 철>은 김시은의 분기점처럼 느껴져요.
처음으로 ‘계속 배우를 해도 될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 작품이에요. 여태 연기하면서 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물론 힘든 순간은 있었지만 금세 괜찮아졌거든요. 근데 이번에는 자괴감에 시달렸어요. 아무래도 희주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자신을 계속 가두고 압박하는 인물이니까요.
자괴감이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는 뜻이잖아요. 자신을 끌어안고 다시 회복하는 과정은 어땠나요.
다행히 ‘계속해도 될까?’라는 질문은 지금 제 안에 건강하게 남아 있어요. 고민해본 적 없던 걸 고민하며 진짜로 그만둘까 싶은 생각에 한동안 작품을 멀리했어요. 그게 저한테는 참 중요한 시간이었던 거 같아요. 연기하면서 한 번쯤 이런 과정이 필요했던 건가 싶기도 해요. 이전까지는 재능을 믿었어요. 연기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나는 잘하고 있다고, 이 정도 재능이면 충분하다고요. 근데 <빛과 철>을 찍으면서 많이 깨졌죠. 아, 이걸로는 한계가 분명히 있구나.
재능 말고 뭐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저 자신으로 바로 서는 힘이요. 감독님에게 의지하려는 마음과 습관을 없애고, 좀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 해요. 그래야 의견을 전달하고 함께 대화할 수 있으니까요. 설령 갈등을 빚더라도 제 생각을 설득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는 자세도 필요하고요. 예전에는 눈앞에 놓인 대본에만 충실했다면, 요새는 연기하지 않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현장이 즐거워질 수도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장에 안 나가는, 작품이 없는 시간을 알차게 쓰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배우로서 두 번째 시즌을 맞이한 느낌이네요.
맞아요, 인생 2막 같아요. 겉으로는 큰 변화가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제 안에서는 많은 것이 달라지고 있어요. 저 요즘 연기할 때 좀 재밌거든요. (웃음) 20대 때는 무조건 “Do!”였어요. 뭐든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못해도 일단 해보자 싶었죠. 내가 하면 하는 거지, 라고 여길 만큼 의욕이 넘쳤으니까요.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사람이 한 차례 꺾인 다음이니 지금은 얼마나 조심스럽겠어요. 근데 저는 지금 제 모습이 좋아요. 내가 좀 더 깊어지려나 보다, 기대하면서 지켜보고 있어요.
<빛과 철>이 공개된 후에는 훨씬 폭넓은 인물을 만나리란 예감이 들어요. 앞으로 하고 싶은 작업이 있다면요.
작품 규모나 역할에 상관없이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요. 지금은 3월에 촬영하기로 한 심지현 감독님의 단편 <꿈의 자격>과 김진황 감독님의 신작 <야행>을 준비하는 중이에요. 직업인으로서 열심히 일하는 게 올해 목표죠. 이제 기름을 ‘만땅’ 채운 채로 달려볼까 해요.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