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가 일러준 대로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이인의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1-01-26

이인의 감독은 ‘이야기보따리’다. 짤막한 질문에도 갖가지 답변을 내놓는다. 많은 이야기를 마음에 품고만 있을 수 없어 줄기차게 영화를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도 이인의 감독의 성향을 똑 닮았다. 길고 지루한 싸움으로 하루하루 연명하는 콜트콜텍 노동자, 분단으로 가족을 잃고 그리움에 파묻힌 실향민, 소실된 정체성을 끝없이 질문하는 입양인. 손쉽게 묶이지 않는 인물들이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에서 서로 뒤섞이고, 한데 어울린다.

촬영을 그만둬야 하나, 카메라라도 팔아볼까, 한데 빌린 돈은 어떻게 갚지? 경제적 곤란으로 머리를 쥐어짜지만, 다큐멘터리 현장을 쉽사리 떠나지 못하는 민규 앞에 한나(오하늬)가 나타난다. 당차고 솔직한 성격에 톡톡 튀는 매력으로 민규의 마음을 끌지만, 그런 한나의 얼굴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얼핏 읽힌다. 여기에 어릴 때 프랑스로 입양된 주희(이서윤)가 등장하고, 다큐멘터리 감독인 상규(장준휘)와 태인(김지나)도 가세한다. ‘카메라’로 인연 맺은 인물들을 통해 한국사회의 ‘네버 엔딩 스토리’를 풀어낸 이인의 감독을 만났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공개한 지 1년 만에 개봉한다.

지난해 초에 개봉을 결정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준비가 길어졌다. 1년이 정말 후딱 갔다. 그사이 새로운 장편 시나리오를 하나 썼다. 간간이 다큐멘터리 작업도 하고,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도 하고. 그런 나를 보고 해성이가 영락없는 ‘현실 민규’라고 하더라. (웃음)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을 완성하기까지 4년 정도 걸렸다. 아마 내 13번째 영화일 텐데, 포스터도 만들고 상영관도 잡고,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서 기분이 좋다.

 

2016년에 동명의 단편을 만들었다. 실향민을 취재하는 다큐멘터리 PD가 주인공인데, 이번 영화의 출발점이었던 건가.

반대다. 콜트콜텍 투쟁을 다룬 김성균 감독의 <기타 이야기>(2009)와 <꿈의 공장>(2010)에 참여했다. 3년 정도 같이 작업했는데, 성균 형이 다큐를 만들었으니 나는 픽션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었다. 그렇게 장편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고, 2014년에 초고가 나왔다. 그때 이미 콜트콜텍과 해외입양, 실향민 이슈가 시나리오에 다 들어있었다. 그런데 제작지원이나 외부투자를 받기가 너무 어려웠다. 2016년에 통일부에서 주최한 시나리오 공모에 응한 것도 그래서다. 앵두 할머니 에피소드만 떼서 단편을 먼저 만들었다. 한데 정권이 바뀌고 나니 제작지원에 다 붙더라. (웃음) 본격적으로 준비에 돌입했지.

 

꾸준히 단편 작업을 해왔더라. 주로 어떤 소재를 다뤘나.

대부분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캐치 볼>(2008)은 말 그대로 캐치볼을 일대일 소통에 빗댄 작품이다. 캐치볼을 할 땐 마주 서서 공을 주고받지 않나.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게 익숙해지면 두 사람이 점점 뒤로 물러난다. 또 그러다 보면 공을 놓치는 극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그 공을 잡아서 상대에게 다시 던질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때가 오는 거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청각장애인이 주인공인 <아>(2005)는 결은 조금 다르지만, 타인과의 소통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본 영화다. 상대방의 중요한 말이 녹음기에 담기는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단편은 1년에 한 편씩 찍은 것 같다.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상업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일했는데, 영화사에서 요구하는 상업적인 글쓰기 때문에 아주 괴로웠다. 그때마다 단편 제작이 숨통이 돼줬다.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2016)
<캐치 볼>

다큐멘터리 제작진을 따라 여러 사회적 이슈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이런 구성을 떠올린 계기가 있다면.

다큐 작업을 10년 정도 했다. 그 경험과 지금의 상황을 픽션으로 정리해보고 싶었다. 상업영화 시나리오 쓰기가 정말 싫어졌을 즈음 영화를 접고 고향 오산에서 가게를 잠깐 했다. 앞뒤로 꽉 막혀서 무엇도 못 하고 있던 그때 다큐멘터리를 접한 거다. 막혀있던 게 뻥 뚫리는 경험이었다. 어느 날 내 단편에 음악감독으로 참여해준 가수 이장혁의 공연에 놀러 갔는데, 그 현장이 마냥 좋아서 뭐라도 찍고 싶더라. 그때까지만 해도 다큐멘터리 찍을 생각은 못 해봤지. 그저 공연 때마다 캠코더를 가져가서 촬영하는 식이었다. 2008년부터 시작한 그 작업이 결국엔 <이장혁과 나>라는 장편 다큐멘터리가 됐지만. 그 무렵 콜트콜텍 현장에 가 있는 형들이 하루만 촬영을 도와달라고 연락해왔다. 정말 하루면 될 줄 알았다. (웃음) 그런 식으로 자꾸 현장에 나갔다. 적십자와 통일부에서 주관한 실향민 아카이브 사업을 통해 어르신들 인터뷰도 했고. 역시 일주일 정도 생각했는데 예정보다 길어졌다. (웃음) 6개월 동안 전국을 돌아다녔으니까. 한데도 현장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민규 일행 역시 제법 많은 장소를 돌아다닌다.

19회 촬영에 로케이션이 24곳이었다. 참 많이도 다녔다. 그중엔 63빌딩 아쿠아리움처럼 시간제한이 엄격해서 긴장했던 곳도 있고, 인천 선착장과 미용실처럼 현장에 있던 모두가 감정에 푹 빠져들었던 곳도 있다. 작은 차에 대여섯 명이 끼어 타는 모습은 실향민들 인터뷰하러 다닐 때의 경험에서 가져온 거다. 당시에 그렇게 전국 일주하면서 겪은 재밌는 일이 정말 많다. 매일 다른 사건, 사고가 일어났다. 그때의 일화나 실향민들이 들려주신 이야기 중에는 앵두 할머니(강애심) 사연처럼 고스란히 시나리오에 들어간 것도 있다.

 

매개 혹은 계기로서의 카메라에 대한 애정이 영화에서 느껴진다. 들어보니 현장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고.

어떤 현장이든 나가면 일단 좋다. (웃음) 카메라는 다큐멘터리 하는 사람들에게는 무기고. 문제는 카메라는 비싸고 우리는 돈이 없다는 거다. (웃음) 독립 다큐멘터리 하는 사람들은 돈이 없지 않나. 예전에 <이장혁과 나> <기타 이야기>를 함께 만든 강성훈 프로듀서가 사비로 장만한 카메라가 하나 있었는데, 2010년 즈음에 사무실을 같이 쓰던 감독들이 그 카메라 한 대로 수많은 작업을 했다. 나도 그 카메라로 참 많은 현장을 오갔다. 내 촬영이 끝나고 모레까지 인천 어디 공장에 카메라 갖다주라고 해서 가보면 그게 콜트콜텍 투쟁 현장이고. 며칠 후 그 카메라는 두리반 투쟁 현장에 있고. (웃음)

 

해외입양인 이야기는 어떻게 영화에 넣게 됐나.

지인 중에 해외입양인이 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친구라, 입양인 이슈가 내겐 새롭지 않다. 그렇지만 간혹 그 친구에게 내가 모르는 감정이 있다는 걸 알게 될 때가 있었다. 어떤 영화인지 방송을 같이 볼 때였는데, 나는 그냥 조금 짠하다고 생각하는 장면에서 그 친구는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눈물을 흘리더라. 본인을 건드리는 어떤 부분이 있었던 거겠지. 어렸을 때는 잘 몰라서 제대로 위로해주지 못했는데, 그 뒤로 혼자서 조금씩 취재를 해보게 됐다. 실제로 친부모를 찾으러 한국에 온 입양인들을 만나고 자료도 모아가며 조사했다. 그렇게 접한 이야기들이 영화에 들어갔다.

ⓒ이영진

2014년에 완성한 장편 시나리오에 각각의 이슈가 모두 들어있었다고 했다. 이슈들을 관통하는 구상을 들려달라.

맨 처음에 생각했던 건 콜트콜텍 이야기를 쉽고 자연스럽게 전달하자였다. 영화 중간에 한나가 고공농성을 처음 보는 장면이 있지 않나. 나도 처음엔 한나처럼 반응했다. 고공 농성하러 올라가는 형들을 보며, 언제 내려오나 하는 철없는 생각부터 했으니까. 그런데 몇 날 며칠 지켜보면서 그 무게를 느끼게 됐다. 또 현장에 있다 보면 디테일을 알게 된다. 생필품을 밧줄에 매달아서 올려주고, 위에선 대충 처리한 배설물을 내려보내고. 분명히 내 친구들도 잘 모를 이런 절박한 현장을 영화를 통해 알리고 싶었다. 거기에 다른 이슈들을 적절히 배분해 넣으면서 내가 실제로 느꼈던 감정을 덧붙이고자 했다.

 

실제 사회 문제들을 소재로 삼았다. 접근할 수 있는 방향이 다양한데, 이를 극에 어떻게 녹여낼지가 고민스럽진 않았나.

그들이 겪는 폭력은 성질이 무척 비슷하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엇갈리겠지만, 안에서 작업하면 소수자로서 그들이 더 크게 보인다. 진영 논리와 상관없이 투쟁 사업장들끼리는 연대도 많이 한다. 콜트콜텍 시위에 ‘위안부’ 할머니들이 오셔서 한 말씀 하고 가시기도 하고. 다 같이 강정마을에 가기도 하고. 그렇게 연대가 이뤄진다. 사실 답은 거기 있지 않나. 연결지점이 잘 안 보일 뿐이지. 실향민 할머니가 느끼는 부당함이나 해외입양인이 느끼는 곤란함이나 다 똑같다. 전부 국가폭력 아닌가. 그런 점에서 각각의 이슈들을 연결해도 무리가 없다고 봤다.

 

청년 세대의 곤궁도 중요한 이야기 축이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민규와 미래를 근심하는 한나가 서로에게 이끌리는데.

처음 다큐멘터리를 시작하던 30대 초반의 내 상황을 많이 떠올렸다. 실제로 그때 형들과 나눴던 대화가 그대로 대사가 된 것도 있다. “형, 우린 왜 노조 없어? 노조 찍으면서.”, “맨날 알바하고 다큐 찍고, 또 알바하고 다큐 찍고 이거 뭐냐, 맴도는 거 같다.”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여자친구가 미술을 전공했는데, 작가로서 커리어가 잘 안 풀려서 잠깐 그만둔 적이 있다.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계속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고, 인생의 제2막을 어떻게 열어야 할지 갈팡질팡하던 시기를 보냈는데. 한나 캐릭터에 대한 아이디어는 거기서 가져왔다. 하지만 너무 무거워지진 않길 바랐다. 다루는 이슈들도 워낙 무겁지 않나. 픽션이기 때문에 장르적으로 조금은 가볍게 풀어낼 수 있는 지점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이기도 하다. (웃음)

 

주희는 한국의 모든 것이 낯설다. 근원적 상실로 괴로워하는 캐릭터를 만든 것은 단지 이슈를 소개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텐데.

해외입양은 인종 간 입양이 대부분이다. 성장 과정에서 입양 사실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모든 가정이 다 행복하진 않고, 방황을 겪는 친구들도 많다. 반면, 해외에서 오래 살다 한국에 온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자유로움이 있다. 내 주변에도 해외에 오래 거주한 몇 분이 있는데,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와는 분명히 다른 지점이 있다. 나보다 훨씬 사고방식이 유연하고 대범하다. 주희뿐만 아니라 한나를 그릴 때도 그런 점을 많이 참고했다.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촬영 현장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촬영 현장

배우들은 어떻게 만났나. 은해성 배우는 연극과 드라마를 주로 했고, 오하늬 배우는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를 부지런히 오가며 작업 중이다. 이서윤 배우는 모델 출신으로 연기는 처음이었다던데.

양상규 감독을 연기한 장준휘 배우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장준휘는 20년 친구다. 내가 만든 단편에 늘 주인공으로 출연했으니 페르소나이기도 하다. (웃음) 이번에는 출연만이 아니라 전 과정을 함께했다. 2018년 3월에 프리 프로덕션을 시작해서 2019년 3월에 촬영에 들어갔는데 그 1년을 같이 보냈다. 아, 앞서 시나리오도 봐줬으니까 기간이 더 길다. 캐스팅도 절반은 장준휘 배우가 했다. 은해성 배우는 장준휘 배우가 극단에서 알게 된 친구다. 당시 해성이가 <형제의 밤>이라는 연극을 하고 있었는데, 딱 민규라면서 빨리 가서 연극을 보라고 했다. 김경선 피디랑 같이 가서 연극을 봤을 때는 사실 확신이 없었다. 다음날 해성이가 나온 <마이보이>(2017)라는 단편을 찾아봤다. 화면 속의 은해성 배우를 보자마자 민규라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연락해서 시나리오를 보내줬다. 나중에 은해성 배우가 자신은 캐스팅 제의가 아니라 리뷰를 부탁한 줄 알았다고 하더라. (웃음) 촬영 들어가기 전까지 6개월 동안 나랑 장준휘랑 셋이서 밥 먹고 영화 보고 놀면서 형제처럼 같이 돌아다녔다. 콜트콜텍 집회에도 함께 갔고. 카메라를 들려주면서 찍어보라고 했더니 눈이 빛나더라.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민규가 된 거네. 오하늬 배우도 장준휘 배우가 캐스팅한 건가? 

맞다. 장준휘 배우가 한나 역할에 대해 유독 고민했다. 자기 할머니를 앵두라고 불렀을 때 어울릴 만한 배우가 별로 없다면서. 그러면서 이건 오하늬 배우가 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웃음) 오하늬 배우야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과연 해줄까 싶었다. 준휘 형을 통해 시나리오를 건넸는데 미팅 자리에서 하늬가 그러더라. “감독님, 이거 거절할 수 있는 제안이 아니었어요.”라고. 극 중 한나의 대사를 그대로 내게 던졌다.

 

주희를 연기할 배우를 찾는 게 가장 어려웠을 것 같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일단 불어를 네이티브 수준으로 할 줄 알아야 했다. 어느 날은 하늬가 주희 역할은 어떻게 하냐고 물으면서 아는 동생 중에 프랑스에서 살다 온 친구가 있는데 만나보겠냐고 했다. 모델이지만 연기는 해본 적이 없다기에 일단 거절했다. 그러다 촬영이 코앞에 닥쳤다. 전전긍긍하던 차에 <그리다>에 함께 참여했던 박재영 감독이 와이프의 사촌 동생이라면서 이서윤 배우를 소개해줬다. 프랑스에서 오래 살았고 모델 일을 하고 있다더라. 어려운 부탁일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일단 시나리오를 보냈다. 좋게 본 모양인지 한번 만나보겠다기에 사무실에서 미팅을 진행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주희가 들어오는 줄 알았다. (웃음) 그 자리에서 바로 캐스팅을 하고 사담을 나누는데, 일전에 오하늬 배우가 이야기했던 그 사람과 이서윤 배우의 조건이 너무 비슷한 거다. 혹시나 해 물어보니 동일인이었다. 그래서 다음 리딩 때 다 같이 모의해 하늬 배우를 놀라게 해 줬다. 서윤이가 동네를 지나다 우연히 마주친 척해놓고 연습실에 태연히 따라 들어오는 식으로. (웃음) 하늬가 워낙 순수한 사람이라 이후에도 몇 번 그런 일이 있었다. 덕분에 현장이 늘 즐거웠다.

ⓒ이영진

양상규 감독은 세 인물보다 윗세대다. 감독 자신의 상황이나 입장이 대입된 인물인데. 민규 같았던 30대를 지나고 40대가 된 내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은 김성균 감독이 모델이다. 성균 형은 똑똑하고 합리적이고 너무나 올바른 사람이다. 이번 영화도 데이터매니저로서 도움을 줬다. 독립 다큐멘터리를 오래 하는 분들은 모두 일종의 활동가라고 생각한다. 누가 활동비를 주는 것도 아닌데, 오로지 본인들이 견디고 감당하지 않나. 젊을 때는 혈기도 있고 체력도 되니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그걸 계속해나가는 분들을 정말 존경한다. 그렇게 현장을 지키는 활동가들을 떠올리며 만든 캐릭터다.

 

투쟁 현장을 그리는 것처럼 친부모를 찾아 한국에 온 해외입양인 문제를 다룰 때도 묘사가 자세하다.

취재 과정이 영화에 보이는 것과 정말 똑같다. 입양기관에서 친부모의 정보를 당사자에게도 절대 알려주지 않는다. 실제로 해외에 입양된 사람이 한국에 돌아와서 친부모를 찾을 확률이 3%밖에 안 된다. 이는 1970년대부터 아이들을 입양 보내면서 저지른 만행과도 관련 있다. 당시 입양기관에서는 아이들의 이름과 나이를 전부 다 바꿔버렸다. 호적에 부모가 있으면 입양이 안 되던 때가 있었거든.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입양 보내고 국가는 돈을 벌었다. 취재할수록 그런 어이없는 일이 많았다. 영화에선 김태인 감독을 통해 그 과정의 답답한 심정을 많이 드러내려고 했다.

 

계속 벽에 부딪히지만, 인물들은 결국 제 길을 찾아간다.

내가 취재하던 당시에 중앙입양원이라는 국가기관이 새로 만들어졌다. 그러면서 여러 입양기관에 흩어져있던 정보가 한군데로 모였다. 물론 친부모를 찾는 과정은 여전히 어렵다. 개인정보보호법이 기록 열람을 막고 있다. 몇 년 전부터 관련 법안은 계속 마련되고 있는데, 처리가 안 되고 있다. 사회적 관심도 많이 부족한 편이고. 영화를 만들면서 주로 참고한 건 아동실종센터를 탄생시킨 이건수 교수의 일화다. 그분이 경찰로 근무하던 시절에 직접 발로 다 뛰면서 해외입양인 분들의 부모를 많이 찾아주셨다. 해외입양인 커뮤니티에서 굉장히 유명한 분이다. 거기서 모티브를 얻어 주희의 엄마를 찾는 여정을 만들 수 있었다.

<꿈의 공장>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콜트콜텍 이인근 지회장(임호준)이 기타를 치며 라이브 공연을 하는 장면에선 실존 인물인 이인근 씨가 관객으로 출연한다. 지금은 투쟁이 마무리되었지만, 촬영하던 시기엔 아직 투쟁이 진행 중이었을 텐데.

2019년 3월이니까, 맞다. 그때는 '끝장 투쟁'이라고 해서 본사 앞에서 천막농성을 하고 있었다. 형들을 찾아가서 우리 영화에 ‘콜밴’(콜트콜텍 기타노동자 밴드)이 나와서 공연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날짜까지 잡았는데, 촬영 일주일 전엔가 (임)재춘 형이 단식투쟁에 들어가셨다. 인근 형, 재춘 형, (김)경봉 형 세 분이 밴드를 하시는 거니까, 결국 공연은 할 수 없게 된 거다. 촬영장엔 안 오셔도 된다고 했는데 인근 형이 굳이 미안하다며 오셨다. 관객으로 출연도 하시고 기타 연주 대역도 해주시고. 기타 치는 손이 인근 형 손이다. 임호준 배우가 기타를 못 치거든. (웃음)

 

실제 투쟁 현장 영상도 여러 군데 삽입했는데, 그 자체로 영화가 생동감을 얻는다.

그중 절반은 현장 다니면서 내가 찍은 거다. (웃음) 영상을 넣으면 영화의 흐름이 깨질 수도 있어서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넣는 게 맞을 것 같더라. 콜트콜텍 이슈를 알리려는 분명한 목적이 있고, 아무리 재현하려 해도 현장의 느낌은 살릴 수가 없으니까. 또 인물들이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설정이니 큰 문제는 없었다. 양상규 감독의 부탁으로 한나가 중간에 내레이션 녹음도 하지 않나. 삽입 영상 중 송전탑 고공농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콜트콜텍 기타 노동자분이 현장에서 직접 핸드폰으로 찍은 거다. 다른 분들이 찍은 것보다도, 마구 흔들리는 그 영상이 마음에 깊게 들어왔다.

 

주희의 여정이 마무리되고, 영화는 다시 투쟁 현장으로 향한다. 유독 귀에 들어오는 대사도 이 장면에서 나오고.

기존 미디어에서 소수자 이슈는 제한된 이미지로만 다뤄진다. 그들이 왜 싸우는지를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다. 뉴스는 물론이고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분들의 목소리는 매체 밖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그 장면을 만들었다.

 

제목의 실마리가 되어준 앵두 할머니는 단편보다 좀 더 일상적이고 편한 느낌으로 담겼더라. 영화 전체를 감싸는 느낌도 들고.

앵두 할머니는 실존한다. 할머니를 앵두라고 부르는 손녀와 살고 계신다. (웃음) 원래 앵두 할머니 인터뷰가 시나리오에서는 중간에 있었다. ‘관계의 가나다’가 어떤 건지 말씀하시고, 한나에게 민규 때문에 다큐멘터리 하는 거냐고 묻는 장면 말이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보던 준휘 형이, 제목이 가진 힘이 있으니 그걸 엔딩으로 빼자고 하더라. 생각해보니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관계의 가나다’를 알려주면서, 앵두 할머니가 영화를 닫는 느낌이 좋아 보였다.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청년 세대를 다루는 많은 이야기가 관계를 포기하는 모습을 그린다는 점에서, 영화의 마지막이 흥미롭다.

실제 모델이신 실향민 할머니 말씀을 들어보면, 남편 분과의 에피소드가 다 너무나 애틋하고 각별하다. 남녀가 겸상을 못 했던 1940년대에도 남편분이 몰래 부엌에 들어가서 같이 밥을 먹었고, 부인이 농사일하고 있으면 힘들다고 집까지 업어주곤 했다더라. 밤이 되면 촛불 켜놓고 두 분이 ‘가나다라마바사아’ 하면서 같이 한글 공부를 했고. 이야기를 듣다 보니 요즘 연애하는 친구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나 성별이나 아이템이 달라져도 관계의 속성은 다를 게 없으니까. 그분들이 한글을 매개로 연애를 했듯이, 여전히 누군가는 다큐멘터리를, 누군가는 운전을 매개로 애틋한 관계를 만들고 각별한 시간을 보낸다. (웃음)

 

영화와의 관계가 ‘가’이던 시절, 그러니까 영화를 시작한 이야기가 궁금하다.

초등학생이던 시절에 고향인 오산에는 비디오 플레이어가 흔치 않았다. 아마 동네에 딱 두 대가 있었을 텐데, 그중 하나가 우리 집에 있었다. 아버지가 영화광이다. 8살 때부터 아버지와 비디오로 영화를 봤고, 중학교 다닐 때까지도 오산시장까지 나가서 비디오를 빌려오는 심부름을 도맡았다. 앞집 사는 누나가 명보극장 매표소에서 일했는데, 매주 두 장씩 초대권을 줬고. 그렇게 너무 자연스럽게 영화 보는 아이가 됐다. 그렇다고 진로로 선택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고3 때 <아비정전>(왕자웨이, 1990)을 보게 된 거다. 비디오 가게에 갔는데 내가 못 본 홍콩 영화가 있는 게 아닌가. 아니, 그럴 수가 없는데. (웃음) 얼른 빌려서 봤더니 신세계였다. 원래 문예창작과를 지망하고 있었는데, 그 길로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지금은 ‘다’에서 ‘라’로 넘어가는 시기인 것 같다. 중간에 고비가 많았지만, 하고 싶은 건 다 해봤기 때문에 크게 미련이 남진 않는다. 그렇다고 그만두겠다는 건 아니고. (웃음) 그래서 오히려 다음 작품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이 생겼다.

 

새해 계획은 무엇인가.

작년에 써놓은 시나리오가 있는데,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어디서든 지원을 받게 되면 아마 그걸 다음 작품으로 준비하게 될 것 같다. 사실 다들 힘든 시기다 보니 버티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한 가지만 더 말해도 되나?

 

어떤 얘기인가?

해외입양인 관련해서 홍보하고 싶은 게 있다. 중앙입양원이 지금은 아동권리보장원으로 바뀌었다. 해외입양인 분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그곳에 가서 DNA를 등록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친부모를 찾을 수가 없다. 결국엔 부모님들이 DNA를 남겨놔야 서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많은 분이 죄책감에 용기를 못 내고 계신다. 해외입양 문제는 국가가 잘못한 일이지 부모들 잘못이 아니다. 조금만 용기를 내주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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