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자 배우 중에, 이 나이 대에서, 내면 연기에 능한 이가 누구일까요? 생각해보세요. 저는 유다인 말고 딱 떠오르는 배우가 없었어요.” 유다인을 응원하기 위해 스튜디오에 들른 이태겸 감독은 자신만만했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7년 동안 근무했던 회사에서 하청업체 파견 명령을 받으며 사실상 해고 위기에 내몰린 인물을 통해 노동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작품이다. 주인공 정은은 회사로부터 노골적인 압박과 차별에 시달리는데, 시시각각 숨통을 죄여 오는 상황에서도 끝내 의지를 상실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켜낸다. 단 한 순간도, 그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는 강렬한 눈빛을 스크린에 새겨 넣은 비결을 묻자, 이태겸 감독은 배우에게 공을 돌렸다. “완벽하게 준비를 마쳐 온 상태라 연기에 관해서는 디렉팅 할 부분이 거의 없었어요. 현장에서 보여준 집중력이 대단했습니다. 내가 지휘할 때는 약간 산만해지던 스태프들도 다인 씨가 연기하는 순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 없이 ‘초집중’했죠.” 장난기 어린 말투였지만 농담이나 과장으로 들리진 않았다. 영화에 유다인을 담아본 감독들은 입 모아 말한다. 대사 없이도 서사를 완성해내는 얼굴, 그 안에 자리잡은 섬세하면서도 강인한 에너지가 대단하다고. 이태겸 감독이 강조한 내면과 외면의 조화 역시 이러한 감탄이다. 특히 클로즈업을 하는 순간, 유다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영화 내내 응축해놓은 감정을 기세 좋게 터뜨려낸다. 유다인 또한 말보다는 표정의 힘을 믿는 배우다. 옛 연인과 재회하며 돌이키고 싶지 않던 과거를 마주한 <혜화, 동>(민용근, 2010)의 혜화, 협박에 쫓기면서도 끈질기게 진실을 추적하는 <용의자>(원신연, 2013)의 경희, 부와 명예를 위해서라면 양심쯤은 내다 팔 작정인 <속물들>(신아가, 이상철, 2019)의 우정에 이르기까지 유다인은 줄곧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에 도전해왔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에서 다시금 잊지 못할 얼굴을 보여준 유다인을 만났다. 지금 배우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나. 물끄러미 바라보자 유다인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웃었다.
카메라를 들고 왔네요. 최근에 시작한 유튜브 때문인가요.
맞아요, 새 영상을 올려야 할 때가 됐거든요. 요즘은 대개 집에만 있으니까 찍을 게 딱히 없더라고요.
유튜브엔 어떻게 관심을 가졌어요?
뭘 찍을지 생각하고 직접 편집하고, 그런 일이 재밌게 보였어요. 하고 싶다는 마음만 막연하게 갖다가 시작은 약간 충동적으로 했는데,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촬영, 편집, 업로드 전부 직접 해요. 자막도 만들고요.
약수터에서 찍은 브이로그 좋던데요. 느릿느릿하고 조용해서 편안하더라고요.
다행이네요. 실은 소속사 사무실에서 다른 것 좀 찍어보라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아, 이제 약수터는 더 안 되겠구나’ 싶었죠. (웃음) 남양주에 살다 보니 주변에 산이 많아요. 운동하려고 가는 게 아니라, 그냥 산 자체를 좋아해요. 산에 있는 거요.
유튜브를 보다가 연기 공부를 계속하는 모습에 놀랐어요. 특히 발성 연습처럼 기본기를 다지는 일에 꾸준히 노력을 기울이고요.
평소와 조금 다른 역할을 맡게 됐을 때 신경 쓰는 편이에요. 당시 드라마 <출사표>(KBS2)를 준비하던 때였어요. 이전까지 제가 맡은 캐릭터는 완전히 표현적이라기보다는 안으로 감정을 삭이는 경우가 많았잖아요. 근데 <출사표>에서는 딱 봤을 때 야심을 숨기지 않는 당당한 태도가 드러나야 했어요. 목소리도 커야 했고요. 연기 선생님을 찾아가서 조언도 구하고 발성도 연습했죠.
<출사표>는 작년 여름에 종영했어요. 드라마를 마친 후에는 어떻게 지냈나요.
실은 드라마를 좀 힘들어 해요. 아무래도 영화와 비교하면 일정이 빠듯하고 대본도 늦게 나오는 편이잖아요. 이번에도 힘들게 촬영해서 한동안 푹 쉬었어요. 쉬면서 생각도 많이 했죠.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영화를 찍을 때는 굉장히 행복하고 스트레스도 별로 안 받았던 거 같거든요. 그러면서 다시금 영화에 대한 애정을 곱씹어보게 됐어요. 얼마 전 제주도에서 <낮과 달>(이영아, 2021)을 촬영했는데 너무 좋았어요. 속으로 그랬죠. 맞아, 내가 영화를 이렇게나 사랑했지. 아주 귀여운 영화가 나올 것 같아요. 조은지 배우와 호흡을 맞췄는데 촬영장 분위기도 정말 유쾌했어요.


영화 작업할 때는 스트레스를 안 받는다고 했어요. 근데 되짚어보면 영화에서는 유난히 힘든 캐릭터를 자주 맡았죠. 극이 진행되는 동안 감정을 꾹꾹 누르며 바닥을 쳤다가, 막바지에는 어떻게든 쌓아왔던 감정을 토해내고야 마는 인물들이요.
제가 연기할 때 표현이 많거나 감정을 계속해서 발산하는 유형의 배우는 아니잖아요. 텔레비전 화면보다 스크린에 더 적합한 거 같아요. 큰 화면에서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가만히 지켜봐야 하는 배우라고 할까요. 연기할수록 영화에 더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성격도 그렇고요. 사람들 앞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는 확실히 안으로 들어가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래선지 그런 연기가 저한테 더 편안하고 또 어울리는 거 같더라고요.
이태겸 감독은 유다인 배우를 말론 브란도에 비유했어요. “감정을 폭발하는 장면에서도 내면의 결이 흐트러지지 않”는다고요. 말론 브란도를 흔히 메소드 연기의 진수로 평가하잖아요. 이번 작품에서는 정은이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요.
실제로 같은 경험을 할 수는 없지만, 노동 이슈를 다룬 다큐멘터리나 뉴스를 많이 참고했어요. 그분들의 인터뷰 장면을 보며 연구하고, 촬영하면서도 그때 들었던 말을 계속 기억하려고 했고요. 특히 시나리오를 받았던 해에 KTX 해고 승무원이 10년 넘는 투쟁 끝에 전원 복직한다는 뉴스를 봤거든요. 긴 싸움을 지속하는 동안 정말 힘든 일이 많았더라고요. 중간에 동료가 목숨을 끊기도 하고. 그런 인터뷰를 보면서 힌트를 얻었던 거 같아요.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부터 품었던 진심이 관객 분들에게 잘 전달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했어요. 무엇이 그토록 확신을 주었나요.
그냥 시나리오만 봤으면 좋은 이야기구나, 했을 거예요. 근데 KTX 해고 승무원 기사를 읽고 다큐멘터리도 같이 본 상태여선지 마음이 바로 가더라고요. 이 작품은 해야겠다. 영화 만듦새가 어떻든, 영화가 어떻게 나오든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겠다. 그런 확신을 갖고 시작했어요. 제가 그랬듯 관객들 역시 각자 자신의 상황을 떠올리며 공감할 이야기라고 생각했고요.
정은을 배우 자신이라고 느낄 만큼 가깝게 만난 순간은 언제였나요.
하나를 꼽자면 정은이 “일을 줘야 일을 하죠”라고 말하는 장면이요. 어떤 느낌으로 이 대사를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 없이 촬영에 들어갔는데, 연기하는 중간에 뭔가 느낌이 왔어요. 사실 같은 일을 겪지는 않았지만, 살면서 저한테도 그런 순간은 있었거든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 나를 둘러싼 사방이 전부 벽인 것만 같은 느낌이요. 저도 배우로서든 인간 유다인으로서든 그런 감정을 경험해봤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첫 촬영한 장면은 뭐였는지 기억하나요.
오프닝을 제일 먼저 찍었어요. 정은이 차를 타고 새로운 일터로 들어오는 장면이요.

그때 정은의 얼굴에 눈길이 가요. 외적으로는 어수선해 보이는데 눈빛은 고요하고 차분해서요. 감독에게 “정은의 내면을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고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시나리오에서 어떤 부분을 조율해나갔나요.
방금 말한 오프닝이 감독님과 제일 생각이 달랐던 지점이었어요. 그때 정은은 술을 마신 상태잖아요. 머리도 부스스하고 화장도 안 하고요. 저라면, 제가 아는 정은이라면 안 그랬을 거 같은 거예요. 처음 가는 곳인 데다 남자만 있는 현장이고요. 그렇다면 빈틈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오히려 더 단정하고 완벽한 모습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죠. 감독님께 말씀드렸더니 이 장면에서는 정은의 힘든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결국 감독님의 뜻을 꺾지는 못했어요. (웃음)
감독은 배우와 상의한 끝에 대사를 수정한 장면도 있다고 했어요.
영화 후반부에 장례식장에서 정은이 본사 직원과 싸우면서 “우리가 죽지만 않게 해달라고” 말하는 장면이요. 그게 마지막 촬영이었는데 끝에 다다를수록 뭔가 더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원래 대사는 두세 줄뿐이었거든요. 감독님한테 대사를 좀 더 추가해주시면 좋겠다고 했는데,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고 하시더라고요. 고민하다가 제가 연기하면서 느낀 걸 말씀드렸죠. 정은이 그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다가 “우리가 죽지만 않게 해달라”는 문구가 떠올랐어요.
지켜보는 내내 정은이 느낄 고립감이 그대로 전해져요. 모두에게 미움을 받는 캐릭터이다 보니, 촬영장에서도 얼마간 외롭지 않았을까 싶어요.
현장은 화기애애했어요. 충식 역을 맡은 (오)정세 오빠랑 워낙 친해서요. 정세 오빠와 함께한 세 번째 작품이고, 상대 역으로 만난 건 두 번째였어요. 영화 분위기로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저희끼리는 웃으면서 찍었어요. 정세 오빠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놓치는 부분이 있으면 채워주고, 시나리오에 나오지 않는 영화적인 재미도 찾아주고요. 감독님까지 셋이 모여서 아이디어도 많이 냈어요.
각종 기술 용어를 익혀야 했고, 실제로 장비를 착용한 채 연기했어요. 차갑고 무거운 세계에 머물면서 힘든 순간은 없었나요.
영화에서 착용한 장비 전부 실제 현장에서 사용하는 거예요. 엄청나게 무거웠죠. 굳이 힘든 점을 꼽자면 그거였어요. 배우들 중에 저만큼 주렁주렁 매단 사람이 또 없었거든요. 남자 배우들이 제 앞에서는 힘들다는 말을 못 하더라고요. (웃음)
“원청 박정은 대리입니다”라는 첫 대사처럼 정은은 ‘다나까’로 끝나는 경직된 말투를 사용해요. 곁을 주지 않으려는 태도가 드러나는데, 이건 스스로 만들어낸 디테일인가요.
시나리오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는데, 처음에는 마음에 좀 걸렸어요. 정은 혼자만 그런 말투를 쓰잖아요. 과연 자연스럽게 들릴지 의문이어서 정세 오빠와도 이야기하고 감독님과도 상의했어요. 근데 리딩하고 나니까 정세 오빠가 그러더라고요. “이상하게 네가 하니까 괜찮은데?” 그래서 결국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하게 됐어요. (웃음)
충식은 철탑을 두려워하는 정은을 돕기 위해 자동차 열쇠를 높은 곳에 올려 둬요. 그게 바로 당신이 지켜야 할 사람이라고 상상해보라면서요. 그때 정은은 누구를 떠올렸을까요.
죽은 동료요. 정은이라면 그랬을 거 같아요. 촬영할 때 원래 약속했던 것보다 더 높이 올라갔어요. 슛 들어가고 나니까 감독님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고 하셔서요. 속으로 ‘아니, 얼마나 더 올라가라는 거야’ 싶었죠. (웃음) 진짜 높은 곳이었거든요.


함께 작업한 감독들은 배우의 장점으로 눈빛을 꼽아요. <속물들>을 연출한 신아가 감독은 클로즈업할 때 매력이 어마어마하다고 했어요. 심지어 클로즈업 샷을 찍으려던 장면이 아닌데, 막상 찍고 보니 안 쓸 수가 없었다고요.
맞아요, 제가 <속물들>에 출연했던 이유가 바로 그 마지막 표정이 궁금해서였거든요.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까지 보인, 말 그대로 바닥까지 내려간 이 여자의 표정이 너무 궁금해서요. 감독님께 클로즈업이 들어가면 좋겠다고 말씀드리고 찍었어요. 저뿐만 아니라 관객 역시 우정의 마지막 표정을 보고 싶을 거 같아요. 당당하게 서 있지만 안으로는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요.
이번 작품에서도 눈빛을 강조하는 클로즈업이 등장하죠. 섬세한 표현, 내면 연기의 탁월함과 같은 평가는 결국 배우가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봐요.
음, 촬영하면 할수록 느끼는데요. 실은 제가 집중한 것보다 매번 잘 나오긴 해요. 더 집중해서 인물에 아주 깊숙이 들어간 것처럼 나와요.
연출 덕분이라는 뜻인가요.
아니요, 제가 좀 타고난 거 같아요. 그런 면에서. (웃음) 스스로 영화에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이유와도 연결되고요.
데뷔작인 <혜화, 동>을 다시 봤어요. 이상하게 정은이 팩소주를 마실 때, 참치 캔을 열어서 먹던 혜화가 겹쳐 보였거든요. 근데 10년 전 작품을 언급하는 게 불편하지는 않을까 싶더라고요.
저는 기쁘죠. 지금도 저를 응원해주는 영화니까요. <혜화, 동>을 통해 저라는 배우를 기억해주는 분도 많고요. 물론 한편으로는 이제 좀 다른 걸 해야 하는데, 라는 생각도 들어요.
지난 10년은 어땠나요. 상상하고 계획한 대로 왔나요?
배우로서요? 아니요. 저는 제가 다 잘할 줄 알았어요. 다양한 역할을 모두 소화해낼 수 있을 거라고요. 근데 아니었어요. 어떤 건 잘하지만 못하는 것도 있는 거예요. 주변에 이런 고민을 얘기하면 “다 잘할 필요 없어. 왜 그래야 해? 독보적인 영역이 없는 배우도 얼마나 많은데.”라고 하시더라고요. 이제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을 좀 더 발전시켜 나가는 방향으로 노력하려고 해요.
어떤 걸 못한다고 생각해요?
아주 표현적인 연기에는 서툴러요. 아직은. 그리고 재벌 같은 부유한 캐릭터도 저랑은 안 어울리는 거 같고요. (웃음)


그러고 보면 비밀이 없는 캐릭터를 맡아본 적이 거의 없어요. 늘 자신만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고, 그걸 남에게 말하기 어려워하죠.
그런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는 작품에 호감이 생겨요. 근데 최근에는 거절했던 배역이 아쉽기도 해요. 악역을 제안 받았을 때 못하겠다고 했거든요. 일단 악역은 주인공이 아니니까 왜 이렇게까지 악해졌는지 극에서 표현하지 않잖아요. 그냥 이 여자는 원래 못된 여자인 거죠. 근데 저는 자꾸 그 이면을 표현하고 싶고, 시나리오에 나와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표현하게 될 거 같은 거예요. 아주 잠깐 스치는 표정으로라도. 그래서 거절했는데, 지금 기회가 온다면 하고 싶어요.
반대로 연기를 잘한다는 건 뭘까요. 스스로 세운 기준이 있나요.
기본적으로 제 마음이 편안한,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닌 0인 상태에 있을 때 좋은 연기가 나오는 거 같아요. 제 마음이 안 좋으면 어떻게든 화면에 그게 나오더라고요. 되게 밝고 그늘이 없는 캐릭터인데, 제 눈에는 모난 게 다 보여요. 다른 사람은 모르고 넘어간다고 해도 저는 알잖아요. 그럼 만족할 수가 없죠.
이번 작품은 만족스러운가요.
아니요! (웃음) 엔딩 장면에 아쉬움이 가장 많이 남아요. 줄을 타고 가는 정은의 목소리에 좀 더 긴박함을 실어야 했는데, 호흡이 아쉽더라고요. 기자님이 보시기엔 어땠어요?
배우는 정말 세밀하게 보는구나 싶어요.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조마조마했어요. 이전에 사고 장면도 있어서 더 초조하더라고요.
그럼 다행이에요. 실제로 높은 곳에 올라가지는 못하니까 (허리를 짚으며) 이 정도쯤 끈을 설치하고 강풍기 돌려가면서 촬영했어요.
“세상 모든 정은을 위한 가장 솔직한 응원”이라는 카피를 봤어요. 그 문구대로 정은은 동시대 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해요.
음, 영화를 찍을 때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진 못하는 거 같아요. 인물이 맞닥뜨린 상황을 파악하고 감정에 집중하기 바쁘니까요.
이번 작품에서는 성차별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잖아요. 연기하며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관해 곱씹어보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저는 배우잖아요. 그래서 연기로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는 거 같아요. 사실 이런 인터뷰에서 근사하게 말하면 좋을 텐데, 제가 워낙 말주변이 없어요.

정은과 헤어지는 시간은 어땠어요?
사실 <혜화, 동>을 찍을 때만 해도 굉장히 힘들어했어요. 좋은 현장과 헤어지기가 아쉽고, 더는 혜화를 연기할 수 없다는 사실도 슬프고요. 작품 마치고 나서 오래 힘들었는데, 신기하게 한 해 넘어갈수록 금세 털어버려요. 힘든 캐릭터를 만나도 이제 힘들지 않게 돌아서는 거 같아요.
<속물들> 개봉 당시에는 슬럼프를 고백했어요. 요즘에는 배우로 살아가는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일단 슬럼프 같은 시기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는 못한 거 같고요. 여전히 노력하는 중인데, 예전보다 훨씬 가벼워지기는 했어요. 배우로서나 일상 생활에서나. 생각해보면 옛날엔 숨을 잘 안 쉬었던 거 같아요. 늘 바트게 숨을 몰아 쉬고 헐떡거리면서 살았죠. 가만히 있어도 내가 뭘 잘못 했을까 봐 불안해하고요. 주변에 같이 시작했던 친구들보다 뒤쳐지면 어떡하지?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보면 어떡하지? 그게 참 괴로웠는데 이제 타인의 평가나 시선에 관해서는 좀 벗어난 거 같아요.
시간이 약일까요.
(잠시 생각하다가) 아니요. 시간이 지나서 나아진 건 아니에요. 지금 제가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제 옆에 있는 사람들 덕분인 거 같아요. 만약 그들이 없고 상황은 옛날과 비슷하다면, 지금도 그때처럼 불안해하고 낯선 사람들 앞에서 겁먹고 그랬을 거예요. 곁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예전보다 한결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거 같아요.
가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잖아요. 저렇게 좋은 사람이 날 좋아해주다니.
맞아요, 딱 그거예요. 좋은 사람이 날 좋아해주고, 그럼 실은 나도 꽤 괜찮은 사람 아닐까. 예전에는 이런 얘기하면 저도 모르게 울컥했거든요. 그럼 저는 그런 제 모습이 또 너무 싫고. (웃음) 이제 진짜 괜찮은가 봐요. 눈물이 날 거 같진 않네요. 혼자서 단단해지기란 어려운 일이고, 사람이 주는 힘이 정말 커요. 친구가 많지는 않은데, 깊이 사귀는 편이에요.
좋아하는 사람들 만나면 주로 뭐해요?
요즘에는 별수 없이 자주 못 만나는데 보통 집에 초대해요. 같이 맛있는 거 해먹고.
일상을 채우는 유다인만의 기쁨이 있다면요.
강아지요. 14년을 같이 살았어요. 이름은 사랑. 나이가 들다 보니 점점 아픈 곳이 많아져요. 병원 데리고 다니면서 약 먹이고 그래요. 지켜보면 사람이 나이 드는 거랑 똑같아요. 치매 증상이 왔어요. 자다가 소변도 싸고, 예전에 안 하던 행동을 하기도 해요. 녹내장도 있고, 다리도 절뚝거리고 되게 안 좋아요. 그러니까 더 애정이 가고 마음이 쓰여요.
어쩜 이름도 사랑이네요.
저를 포함해서 우리 식구들 전부 말이 적고 좀 무뚝뚝한 편이에요. 어느 날 누가 그러더라고요. 우리 집에는 사랑이 없어. (웃음) 그래서 제가 사랑이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책도 많이 읽던데요. 유튜브에서 책을 소개하기도 하고, 뒤에 보이는 책장이 빼곡하더라고요.
가능하면 틈날 때마다 읽으려고 노력해요. 최근에 김하나, 황선우 작가님이 쓴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읽었는데 재밌더라고요. 지금은 김하나 작가님의 『힘 빼기의 기술』을 읽고 있어요.
책을 선택하는 기준은 뭐예요?
주변에서 추천해주는 책을 먼저 읽어요. 이슬아 작가님 글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책과 팟캐스트를 찾아 봤어요. 어떤 책이 영화 혹은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소식을 들으면 일부러 읽어 보기도 하고요.
글과 영상을 모두 가까이 두네요. 언젠가 직접 연출해볼 계획도 있나요.
사실 시나리오를 한 편 썼어요. 트리트먼트에 가깝기는 한데, 어쨌든 쓰다가 말았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아무렇지 않게 살던 주인공이 어느 날 엉뚱한 순간에 울음을 터뜨린다는 내용이에요. 그 이야기도 표정에서 출발했어요. 저는 이상하게 연기하고 싶어 하는 지점도 그렇고, 영화를 직접 만든다고 상상할 때도 표정이 궁금하더라고요.
왜 하필 표정일까요.
제 관심사인가 봐요. 연기하게 된 계기도 표정이니까요.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 얼굴 보며 어떤 표정을 짓는지 관찰하는 걸 좋아했어요.
표정은 거짓말을 못한다고 생각하나요.
네, 순간순간 미묘하게 달라지는 표정을 보는 것도 좋아하고요. 그래서 영화 작업에 훨씬 애정이 가죠. 스크린에서 봐야 그 미세한 진동이 온전히 느껴지니까요.
연기를 시작한 계기가 표정이라고 했어요.
처음 연기할 때는 잘 몰랐다가 <혜화, 동>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 “오!” 했어요. 제가 하고 싶은 걸 시나리오에서 보게 된 거죠. 모든 걸 참고 있는 이 여자의 표정이 궁금하다. 그걸 해봐야겠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에서는 어떤 표정이 궁금했나요.
엔딩이요. 시나리오도 “정은의 표정이 클로즈업 된다”는 문장으로 끝나거든요.

당시 감독이 요청한 표정이 있었나요?
디렉팅은 따로 없었어요.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감정인데, 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연기했어요. 더는 지지 않겠다. 전부 나를 포기해도 나는 나를 포기 안해, 그럼 된 거야. 그런 마음이었어요.
말주변이 없다고 하더니 오늘 이야기를 잘해주네요.
옛날에는 말하기 전에 한참 생각했어요. <혜화, 동> 촬영할 때 민용근 감독님이 뭘 물어보면 대답하기까지 오래 걸렸죠. 이건 나이를 먹으면서 달라진 부분 같아요. 저는 나이 먹는 게 참 좋아요. 사람들과 만날 때도 전보다 편안하고, 배우로서 표현할 수 있는 영역도 더 늘어났어요.
경험이 쌓여서 방패 역할을 해주나 봐요.
최근에 새로 들어간 작품이 있어요. 테스트 촬영하러 갔을 때 제가 진짜 편해지긴 했구나 싶었어요. 그곳엔 낯선 사람들뿐인데 무섭지 않더라고요. 예전에는 ‘저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생각에 지레 겁먹곤 했는데, 이제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아요. 저한테 그게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멋진 상태네요. 이번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은 뭐예요?
뿌듯한 장면은 있어요. 장례식장에서 원 테이크로 찍은 장면이요. 원래 컷이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현장 여건상 원 테이크로 결정이 났어요. 감정이 고조되는 장면이기도 하고, 동선도 은근히 복잡해서 고생했죠.
테이크를 여러 차례 가기 힘든 장면인데. 극한으로 내몰리면서도 무너지지 않던 정은이 그때 딱 한번 울죠.
일곱 번 가고 일곱 번째 테이크를 썼어요. 동선부터 액션, 감정까지 신경 쓸 부분이 많은 장면이어서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어요. 가장 집중한 상태였던 거 같아요. 제가 놓치면 전부 힘들어지는 상황이니까요. 저는 주로 마지막 테이크를 써요. <혜화, 동> 엔딩도 마지막에 연기한 버전이 들어갔어요. 초반에는 감정이 격해져서 끅끅대는 바람에 대사가 잘 안 들리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연기를 보여주고 끝내는군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까요. (웃음)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2018년 가을에 촬영한 작품이에요. 오래 기다린 만큼 개봉을 앞두고 설렘도 크겠죠.
마냥 설레지만은 않아요. 극장에 자유롭게 드나들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니까요. 제 마음으로는 꼭 개봉 기간이 아니더라도 많이 봐주시면 좋겠어요. 누군가와 같이 보고 나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경험을 나누기에 참 좋은 영화인 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