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냐, 넌!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은해성·오하늬·이서윤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1-01-20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엔 악인이 없다. 월세에 허덕이면서도 여러 현장을 오가며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민규(은해성)와 피겨 선수 생활을 접고 캐나다에서 돌아온 한나(오하늬), 해외로 입양됐다가 생모를 찾아 한국에 온 프랑스인 주희(이서윤)까지 모두가 선하고 묵묵히 제 길을 걷는다. 세 인물에게 못된 의도로 접근해서 상처를 주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이도 없다. 다만, 악인이 없다고 해서 이들이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세상은 정의롭지 못하고 제도는 현실적이지 않으며, 꿈에 닿으려는 여정은 언젠가부터 줄곧 제자리걸음이다. 제각각 걱정거리를 품은 채 다른 세계에 머물던 세 사람은 촬영과 인터뷰를 계기로 한자리에 모이고 얽힌다.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민규는 새로운 감정을 깨닫고, 한나는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를 고민한다. 주희는 둘과 함께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나선다. 우연한 만남을 통해 자신의 테두리를 조금씩 넓혀 나간 인물들처럼 세 배우 또한 현장에서 서로 의지하며 마음을 주고받았다. 어렵고 힘든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관계의 가나다’를 이룬 동료 덕분에 무사히 지나왔다는 은해성, 오하늬, 이서윤 배우에게 '영화'와 '청춘'에 관해 물었다.

 

 

오디션 없이 곧바로 캐스팅을 제안받았다고.

은해성_ 시작할 때 감독님께 정말 괜찮냐고 물었다. 오디션 없이 들어간 작품은 처음이었거든. 연극 <형제의 밤>을 공연할 때, 이인의 감독님과 김경선 피디님이 찾아오셨다. 영화에서 상규 역할을 맡은 장준휘 배우까지 함께. <형제의 밤>을 인연으로 준휘 형과는 이미 아는 사이였다. 공연 마치고 술이나 한잔하자고 해서 따라갔더니 영화 이야기를 꺼내시더라. 처음에는 나한테 출연을 제안하신 줄도 몰랐다. 단순히 작업 중인 작품에 관해 말씀하시는구나 싶어서 시나리오를 보여 달라고 했지. 그날 밤에 피디님이 바로 메일을 보내셨다. 읽어보니 작품이 되게 좋더라, 꼭 개봉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 좋겠다고 답장을 드렸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때 감독님과 피디님은 내 답장을 읽으면서 ‘거절 의사를 돌려서 말한 건가?’ 했다더라. (웃음)

 

어떤 면에서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나.

은해성_ 시나리오에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콜트콜텍 투쟁, 해외 입양, 실향민 등 다양한 사회 문제를 다루면서도 지나치게 공격적이거나 딱딱하지 않았다. 이슈만 부각했다면 극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느낌이었을 텐데, 세 인물을 통해 전체 이야기가 자연스레 이어지더라. 관객들도 쉽게 이해하고 공감하며 볼 수 있는 작품이 되리라고 봤다.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이서윤 배우는 실제로 프랑스에서 오래 거주했다. 캐스팅 과정은 어땠나.

이서윤_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메시지가 왔다. 내 사촌 언니의 남편이라면서 통화가 가능한지 묻더라. 솔직히 기억에 없는 사람이라 난감했지만, 어쨌든 가족이라고 하니 전화를 걸었다. 형부가 아직 모델 일을 하느냐며 대뜸 연기할 생각은 없냐더라. 당연히 없다고 했지. 너무 뜬금없잖아. (웃음)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는 선배가 영화를 만드는데 불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다. 그때까지 연기해본 적도 없었고, 자신 없는 일은 애초에 시작하고 싶지도 않았다. 거부감이 들었는데 형부가 미팅이라도 해보라면서 설득하더라. 속으로 어쩔 수 없네, 하면서 시놉시스만 읽은 상태로 감독님 작업실에 갔다. 근데 이상하지. 감독님이 주희라는 캐릭터를 설명하는데 왠지 들을수록 나 같은 거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주희에게서 본인 모습을 발견했나 보다.

이서윤_ 나도 어린 나이에 프랑스로 갔다. 엄마와 함께였지만, 아빠와는 꽤 오랜 시간 떨어져 살았다. 주희가 느낄 공허함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겠더라. 주희처럼 부모님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거나 정체성이 희미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아빠를 향한 그리움이 늘 있었지. 거의 10년 동안 못 만나다가 20대 초반에 한국에 오면서 자주 왕래하게 됐다.

 

그때는 아빠를 만나기 위해 왔던 건가.

이서윤_ 20대를 대학에서만 보내기에는 아쉬웠다. 좀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랐고 새로운 곳을 모험하고 싶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관해 아는 바가 없으니 궁금하기도 했다. 여름방학에 프랑스 친구들과 한국에 놀러 온 게 시작이었다. 너무 재밌더라. 24시간 영업하는 가게가 이렇게나 많다는 것도 신기하고, 술값도 정말 쌌지. 식당에서도 1,500원이면 소주를 마실 수 있었으니까.

오하늬_ 와, 언제 적 얘기야.

이서윤_ 딴에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완벽한 곳처럼 느껴졌다. 엄마한테 이제 아빠도 자주 만나고 경험도 쌓을 겸 1년 정도 한국에서 살아보겠다고 했다. 휴학하고 한국으로 왔던 때가 2013년이다. 근데 나중엔 후회했다. 놀기엔 좋지만, 생각보다 노는 걸 엄청나게 좋아하지는 않거든. 게다가 내가 느끼기엔 이 나라가 너무 차갑다. 프랑스에서는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과도 웃으며 인사하는데, 여기선 내 몸에 밴 문화대로 행동하면 이상하게 보더라. 적응하는 과정에서 상처도 많이 받았고 괜찮아지기까지 오래 걸렸다. 영화에서 주희가 그러지 않나. 처음에는 환영한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는 제삼자 취급한다고. 그게 딱 내 얘기였다. 여행 왔을 때는 어딜 가든 반기는 분위기였는데, 막상 사회에 나가니 버릇없고 특이한 사람 취급하며 수군댔다.

ⓒ이영진

주희에게 느끼는 동질감만으로는 연기에 대한 거부감을 전부 떨쳐내기 어려웠을 텐데.

이서윤_ 작업실에서 갔을 때, 감독님이 대사를 가리키며 불어로 읽어 달라고 하셨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읽었는데 느낌이 좋다면서 칭찬해주셨다. 사실 그때도 출연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은해성_ 근데 네가 불어로 말하는 건 정말 멋져.

이서윤_ 내 입장에서는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았지. 하늬 언니와는 이미 아는 사이였는데, 언니는 연기한 지도 오래됐고 참여한 작품도 여럿이지 않나. 아무것도 모르면서 불어를 구사한다는 이유만으로 이 작품에 들어간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은해성_ 어이구, 그런 생각까지 했어? (웃음)

오하늬_ 진짜 몰랐다. 현장에서도 워낙 즐겁게 지냈으니까.

이서윤_ 내색하진 않았지만 정말 부담스러웠다. 처음엔 거절했는데 감독님이 다시 연락을 주셨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가장 잘 어울릴 거 같다면서. 사람이 칭찬을 들으면 갑자기 자신감이 좀 생기지 않나. 달리 보면 인생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흥미로운 일이었다. 지금까지 끌리는 대로 살아왔으니 연기도 한번 해보자. 대신 열심히 하자고 맘먹었지. 그날부터 영화도 찾아보고 책도 읽으면서 준비했다. 주희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막막했는데, 특히 슬픔을 드러내는 게 쉽지 않았다. 나는 눈물도 별로 없고, 슬프면 감정을 아예 다른 쪽으로 바꾸는 편이거든.

오하늬_ 기억난다. 너 사진 보면서 몰입하려고 되게 애썼지.

이서윤_ 맞다. 내가 열일곱 살 되던 해에 아버지처럼 따랐던 분이 돌아가셨다. ‘아찌’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감정을 되새겼다. 나한테 슬픔은 딱 그것뿐이어서. 

은해성 ⓒ이영진

다들 자신이 맡은 캐릭터와 연결고리를 하나씩 가진 거 같다. 오하늬 배우는 어땠나. 최근에는 독립영화뿐만 아니라, 상업영화와 드라마에도 활발하게 출연했다. 이인의 감독은 캐스팅을 제안하면서도 과연 수락할까 싶었다던데.

오하늬_ <디바>(조슬예, 2020) 촬영으로 지방에 머무르던 중에 연락을 받았다. 숙소에서 혼자 시나리오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대개 시나리오는 이미지를 상상하며 읽다 보니 완독하기까지 오래 걸리는 편인데, 이 작품은 소설처럼 금방 읽혔다. 나 역시 서윤이처럼 한나를 가깝게 느꼈다.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봄에는 내 선수 생활이 끝났고 이제는 다큐도 끝났고. 다 끝났는데 나만 계속 제자리를 맴도는 거 같아.” 내 마음을 그대로 반영한 듯했다. 쉼 없이 연기하던 시기였고 주변에서도 많이 격려해줬지만, 내심 불안하고 힘들었다. 남은 게 없는 것만 같고 스스로 발전했다는 느낌도 안 들고. 그때 영화에서 민규가 한나한테 해주는 말에 무척 위로받았다. 돌이켜보면 시기적으로 잘 맞았다. 이전까지 장편에서 주인공을 맡은 적이 없던 터라, 처음부터 끝까지 호흡을 이끌어가고 싶은 욕심이 생긴 때이기도 했거든.

은해성_ 한나를 누가 연기할지 궁금했다. 감독님한테 하늬 배우가 캐스팅됐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우와, 딱 맞네!’ 그랬다.

 

왜 한나 역에 오하늬 배우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나.

은해성_ 한나가 할머니를 앵두라고 부르지 않나. 자칫 잘못하면 막무가내로 보일 텐데, 하늬 배우라면 밉지 않고 귀엽게 연기할 거 같더라.

오하늬_ 실제로 할머니와 친하게 지낸다. 요즘엔 편찮으셔서 내가 아프지 말라고 혼내지. (웃음)

 

두 배우도 원래 친분이 있었나 보다.

오하늬_ 해성이가 데뷔하기 전부터 알고 지냈다. 사실 연기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깜짝 놀랐다. 이 일에 관심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거든.

은해성_ 태어나서 2016년 말까지는 배우라는 직업에 관해 생각해본 적조차 없었다. 데뷔 자체도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이영진

예전 인터뷰에서 자신을 ‘자연인’이라고 표현했던데. 틈날 때마다 농막을 관리한다고?

오하늬_ 자연인이 딱 맞다. 워낙 수더분하고 가식 없는 친구여서 무대에 선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웹드라마 <아이돌 권한대행>에서 ‘서프라이즈 U’ 멤버로 등장하지 않나.

이서윤_ 맞아, 너 아이돌이었지. (웃음)

오하늬_ 해성이한테 전화해서 재미있냐고, 할 만하냐고 계속 물어봤다. 아이돌이라면 일종의 팬서비스를 해야 하는데 과연 스트레스 없이 즐길 수 있을까 걱정했지. 나는 스스로 연예인 성향이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아니란 걸 깨달았거든. 그래서 지금도 계속 조절하며 노력하는 중이고.

은해성_ 그건 나도 그래. (웃음) 처음에는 어렵고 당황스러웠지만, 하다 보니 연기가 재밌더라.

오하늬_ 의외로 잘 맞나 봐. 그러고 보면 해성이도 민규라는 인물과 꽤 비슷하다.

은해성_ 민규를 연기하기 위해 감독님을 많이 관찰했다. 극 중에서 상규가 감독님의 현재 모습이라면, 민규는 감독님의 20대 버전이니까. 살펴보니 얼굴도 약간 닮은 거 같고 신기하게 걸음걸이도 좀 비슷하더라. (웃음) 질문을 많이 던졌다. 감독님은 왜 다큐를 시작하게 됐는지, 왜 콜트콜텍 투쟁에 관심을 가졌는지 계속 여쭤봤지.

 

감독과 투쟁 현장에 가서 직접 촬영도 했고.

은해성_ 본사 투쟁할 때 함께 갔다. 당시만 해도 곧장 피부로 와 닿지는 않았는데, 책과 신문 기사 등 자료를 접하면서 점차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다. 뉴스를 통해 노동조합이 어떻고 입양 문제가 어떻다는 말은 접하지만, 솔직히 그때뿐이지 않나. 머릿속에 남기 보다는 대부분 그렇구나, 하며 지나쳐 버리지. 콜트콜텍 기타노동자의 경우에는 무려 13년 동안 복직 투쟁을 지속했다. 이 이야기가 영화로 전달된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고, 나부터도 촬영하면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노동조합이 필요한 이유를 알아가는 동시에, 부조리에 당한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영화를 만드는 동안에는 잘 완성해서 개봉하기를 바랐고, 지금은 가능하면 여러 사람이 봐주기를 기대한다.

 

영화에서 다루는 사회 문제에 자연스레 관심이 갔던 거네.

은해성_ 실은 콜트콜텍 기사를 찾다가 살면서 처음으로 인터넷 뉴스 아래 댓글을 달았다. 괜히 노조 만들어서 일도 안 하고 회사에 피해만 끼친다며 비난하는 사람을 보는데, 그게 꼭 옛날 내 모습 같더라. 내가 바뀌니까 마음이 답답해졌지. 제발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라고, 이 문제에 관해 심도 있게 살펴보신 다음 댓글을 달아 달라고 썼다.

오하늬 ⓒ이영진

주희는 해외 입양 당사자고, 한나는 다큐멘터리 촬영 현장에서 통역사로 일하며 주희와 동행한다. 두 배우 역시 연기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접했을 텐데.

오하늬_ 시나리오를 재밌게 읽은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이때까지 전혀 몰랐거든. 한나가 입양법의 이면을 마주하고 얼굴에 물음표를 잔뜩 띄우지 않나. 실제 내가 그랬다. ‘진짜? 이럴 수 있다고?’ 하며 놀랐지. 해성이랑 똑같은 마음이었다. 내가 출연하든 안 하든 이 작품이 많은 이에게 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서윤_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내게는 촬영 자체가 무척이나 신선한 경험이었다. 모두가 순수한 열정으로 현장에 임했고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더라. 다들 한 몸처럼 움직이며 힘을 모으는 걸 보고 깨달았다. 아, 이들은 영화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스태프들은 추운 날씨에 먼저 나와서 준비하고, 배우들은 조금이라도 나은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 집중했다. 감독님은 세상에 이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열정이 누구보다 큰 분이었고. 그동안 관객으로서 독립영화를 낮게 평가해온 건 아닌지 자문했다. 이렇게 순수한 의도와 목적으로 최선을 다해 만드는 게 독립영화구나, 라는 걸 배웠다.

은해성_ 말을 왜 이렇게 잘해. 똑똑해.

이서윤_ 똑똑한 게 아니라 예민한 거야.

오하늬_ 얘가 가끔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할 때가 있다니까.

이서윤_ 난 겉보기보다 생각이 깊어! (웃음) 특히 현장에서 감독님을 지켜보며 자주 놀랐다. 민규라는 인물과 정말 비슷한 분이거든. 현실적인 어려움을 잊을 정도로 어떤 사랑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더라.

은해성_ 그래서 부담도 컸다. 감독님이 많은 걸 쏟아 넣은 작품인데, 내가 연기를 못해서 망치면 어쩌나 싶더라.

 

민규를 맑고 씩씩한 청년이자 타인에게 귀 기울이는 인터뷰어로 그려냈다. 연기하면서 어느 정도는 실제 성격이 반영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은해성_ 닮은 구석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사실 ‘싱크로율’로 따지면 셋 중 내가 제일 안 맞는다. 음, 나라면 한나한테 호감을 표현하기까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을 거다. (웃음) 친화력은 좋은 편이거든.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먼저 다가간다. 또 남의 말을 들어주지만, 내 관심사가 아니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는 잘 흘려듣는다.

이서윤_ 얼굴에 속으면 안 된다. 난 해성이의 또 다른 얼굴을 매일 봤지. 성격도 좋고 착한데, 이 친구가 진짜 유치하다. (웃음)

오하늬_ 너희 둘 다 유치해. 옆에서 보면 정말 초등학생 같다. 쉬지 않고 티격태격. (웃음) 우리 현장 분위기가 딱 이랬다.

ⓒ이영진

영화에서는 오하늬 배우가 통통 튀는 매력으로 재미를 불어 넣더라. 인물도 이야기도 참 착해서 자칫 단조로울 뻔했는데, 한나가 생기를 더한다.

은해성_ 연기하면서 부러웠다. 하늬 배우가 너무 잘하니까 질투가 나더라. 거기에 연기 경험이 없다는 서윤이까지 잘해서 큰일이다 싶었지. (웃음)

이서윤_ 언니는 정말 ‘프로’다. 내가 앞에 없을 때도 나를 보는 것처럼 반응하더라. 같은 대사를 다양하게 표현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했다.

오하늬_ 오늘 두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좀 놀랐다. 둘에 비교하면 나는 부담감을 덜고 편안하게 연기했던 거 같다. 최근 2년 동안 촬영장에 갈 때마다 울고 싶었다. 분명히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어느 순간부터 뭐 하는지 모르겠다는 마음이었거든. 내 연기에 불만족스럽다 보니 모니터링하기가 싫을 정도였다. 이 작품을 선택할 때는 평소보다 부담이 적었고, 무엇보다 친한 친구들과 작업해서 즐거웠다. 가장 좋은 점은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다는 거였다. 크고 작은 작품에 조·단역으로 참여하는 동안, 연출자와 의논하고 소통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주연이라는 자리에서 감독님과 상의하며 하나씩 맞춰 나가는 과정이 소중하고 감사했다.

이서윤_ 감독님이 우리에게 계속 자신감을 줬다. 뭐든 괜찮다면서 원하는 대로 해보라고 하셨지. 특정한 방향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배우들이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그러고 나면 “와, 이걸 그렇게 해석했어? 너 연출해도 되겠다.”라며 칭찬해주시고.

은해성_ 편안하게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시더라. 준휘 형도 많이 도와줬고.

오하늬_ 맞아, 현장에 가면 꼭 찾았다. 지금 어디냐고, 얼른 와서 우리 봐 달라고. 심지어 상규가 나오는 장면도 아닌데. (웃음) 장준휘 배우는 캐스팅 디렉터와 연기 티칭으로도 크레디트에 올려야 한다고 농담하곤 했다. 나를 감독님에게 연결해준 사람도 준휘 배우고.

이서윤 ⓒ이영진

한나는 영화에서 가장 많은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이다. 현실과 꿈 사이에서 고민하는 젊은이이자 새로운 세계에 도착한 이방인이고, 통역사로서 주희와 소통하며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거기에 민규와의 풋풋한 로맨스까지 소화해야 했다.

오하늬_ 솔직히 연기도, 연기를 마친 후에 받아들이는 과정도 너무 어려웠다. 작년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을 당시, 편집실까지 쫓아다니며 감독님과 대화를 나눴다. 여러 역할을 오가며 감정을 전부 담으려 하다 보니, 어느 때는 한나가 이상하게 보이더라. 꿈과 현실 사이에서 괴로워할 때는 기분이 가라앉았다가 민규와 있으면 설렘을 느끼고, 그러다 주희의 입양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는 화를 내기도 한다. 들쭉날쭉하게 감정이 널뛰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걱정했다. 게다가 자꾸 내가 못한 부분만 눈에 들어오고. 실은 어제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야 내려놓았다. 한나만 떼어놓고 보면 이상하지만, 중간중간 다른 서사가 들어가면서 맥락을 만들고 빈 곳을 채워주더라. 영어 연기도 아쉬움이 많았는데, 이것 역시 어제 겨우 내려놨다. 현장에서는 처음 연기하는 사람처럼 말도 제대로 못한 느낌이었거든. 어쩌면 대사를 아는 입장이라 더 어색하게 들릴 수 있겠구나 싶더라.

이서윤_ 나는 민규한테 고맙다고 할 때, 일부러 발음을 뭉개야 해서 어려웠지. 최대한 프랑스인이 말하는 것처럼 해야 하니까.

 

그러고 보니 이서윤 배우는 영화에서 불어, 영어, 국어를 모두 구사했다.

이서윤_ 다른 건 괜찮은데, 눈앞에서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모르는 척하는 게 어렵더라. 주희는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캐릭터이지 않나. 다들 반응하는 와중에 나 혼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기가 쉽지 않았다. (웃음)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광고와 뮤직비디오로 먼저 얼굴을 알렸다. 이제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하는 건가.

이서윤_ 꼭 그렇진 않다. 본래 기자로 일하다가 우연한 계기로 모델 일을 경험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는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솔직히 연예인과 일반인이라는 구분도 마음에 들지 않고, 연예인이라고 해서 남들보다 대우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연예인이니까 사생활 침해쯤이야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시선도 받아들일 수 없다. 연예인도 인간이니 때로는 실수하기 마련인데, 매체에 노출되는 순간부터 모르는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게 일상이 되어버리지 않나. 여러 요소가 내게는 부정적으로 다가와서 현재는 모델 활동을 관두고 회사에서 일하는 중이다. 어쩌다 보니 영화에 출연했지만, 기본적으로 연기든 노래든 어떤 예술 활동을 내 일로 여기기에는 어려울 듯하다.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남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면서 때 묻을 거 같거든. 이번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때는 내 인생에 찾아온 또 하나의 재밌는 에피소드구나, 하며 참여할 생각이다.

 

민규는 “좋아서” 계속 다큐멘터리를 찍는다. 한나 또한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할 때 같은 마음이었다. 배우들은 이 일을 좋아하나. 이번 작업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였나.

은해성_ 극장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봤을 때가 떠오른다. 연극은 관객 반응을 실시간으로 체감하는데, 영화는 관객을 만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지 않나. 극장에 앉아 관객의 웃음소리를 듣고 다양한 감상을 마주할 때 재밌더라. 이번 작품에서는 사람이 참 많이 남았다. ‘관계의 가나다’가 무엇인지 말로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현장에서 스태프와 배우를 볼 때면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지금 우리가 바로 ‘관계의 가나다’에 있구나.

오하늬_ 막 연기를 배우기 시작한 20대 초에 쓴 일기를 다시 봤다. 연기학원이 아니라 놀이공원에 가는 거 같다고 적었더라. 연기 수업은 롤러코스터, 노래 수업은 자이로드롭, 움직임 수업은 회전목마. 이런 식으로 각각 다른 놀이기구를 경험하는 기분이라며, 다음에는 어떤 기구를 타게 될지 기대된다고 쓰여 있었지. 그게 연기 활동 초반에 느낀 원초적 즐거움 같다. 지금 시점에서 통 틀어 생각해보면, 좋은 파트너와 함께 호흡하며 교감하는 순간이 가장 재밌다. 꼭 카메라가 도는 시간만 중요한 게 아니다. 합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대본을 분석할 때도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호흡을 다양하게 주고받으며 새로운 걸 시도하는 과정이 즐겁다. 창조의 기쁨이라고 해야 할까.

이서윤_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을 찍으면서 새삼 열정이 지닌 힘에 놀랐다. 나처럼 무감각한 사람의 마음도 움직였으니까. 처음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지. 해가 들어오든 말든 그냥 찍으면 되는 거 아닌가? 조명 한 번 달라진다고, 소리 한 번 어긋난다고 무슨 큰일이 벌어지나? 근데 알고 보니 그게 다 정성이더라. 그게 여기 모인 사람들의 일이고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나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영화가 완성되었을 때, 화면에서 조화롭게 보일 거 같았거든. 그때부터 주희라는 인물에 몰입하기 위해 애썼고, 현장에 있는 동안 치열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며 감동했다.

 

가나다로 표현한다면 세 사람은 지금 어디쯤 와 있나.

은해성_ 가나는 지난 거 같고 다 정도?

이서윤_ 난 타파하. 이대로 좋거든.

은해성_ 그게 무슨 말이야?

이서윤_ 항상 마지막인 것처럼 하루를 알차게 보내려고 한다. 대단한 걸 하지 않아도, 그냥 강아지랑 자전거 타고 한강에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만족스럽다. 무언가를 선택할 때 굉장히 신중한 편이라 후회도 별로 없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도 않다. 지금이 좋다.

오하늬_ 난 아자! 올해부터 아자아자 하려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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