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베를린의 한 야외 카페에 앉아 어딘가를 응시하는 운디네(파울라 베어)의 얼굴로 시작한다.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일그러진 입술에는 초조함이 묻어나고, 눈동자는 예민하게 주위를 살핀다. 이윽고 카메라는 방향을 바꿔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비춘다. 이별을 통보하는 요하네스(야코프 마첸츠)의 목소리에는 애정이나 연민 대신 조바심이 가득하다. 운디네는 무너진 기색이 완연한 얼굴로, 하지만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서 말한다. “날 떠나면 당신을 죽여야 해. 알잖아.” 영화는 두 인물 사이에 정확히 어떤 약속이 오갔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운디네가 주어진 의무를 행하는 사람처럼 결연한 어조로 복수를 예고함으로써, 지극히 평범해 보이던 실연에는 돌연 기묘한 긴장이 끼어든다.
운디네의 절박하면서도 강경한 협박은 자연스럽게 영화 안으로 신화를 불러들인다. 세이렌이나 인어공주와 마찬가지로 물의 정령인 운디네는 저주를 품고 태어났다. 전설에 따르면, 운디네는 사랑하는 남자가 배신하면 그를 죽이고 본래 고향인 물로 돌아가야 한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신화와 설화들, 남성들이 만들어낸 미신은 운디네를 선택의 자유가 결핍된 불쌍한 존재로 붙잡아 두려” 한다며, 운디네는 남성적 세계에서 탈출하려는 상징적 인물임을 밝힌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한 운디네는 투쟁하는 여성이다. 영화는 파국의 운명을 암시하는 요소를 곳곳에 배치하는데, 운디네는 이와 같은 예견된 재앙으로부터 달아나려 애쓴다.
운명에 저항하는 의지는 새로운 사랑을 선택하는 행위로 드러난다. 운디네는 변심한 애인을 찾으러 돌아간 카페에서 크리스토프(프란츠 로고스키)와 마주친다. 그는 산업 잠수사라는 직업을 밝히며 운디네에게 데이트를 제안한다. 이때 운디네는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정체 모를 목소리에 혼란스러워 하며 높은 곳에 놓인 수조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을 목격한다. 위험을 감지한 운디네가 남자를 잡아당기자 수조는 별안간 깨져버린다. 둘에게 쏟아진 물세례는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축복과 저주를 모두 포함한 메시지다. 전신을 적신 채 바닥에 쓰러진 운디네는 수조에 들어 있던 잠수사 조각상을 발견한다. 그녀는 나란히 누운 크리스토프에게 “이게 산업 잠수사인가요?”라고 물으며 희미하게 웃는다.


영화 속 로맨스는 그 출발점인 신화를 넘어 격동을 거듭해온 독일 역사와 연결된다. 운디네는 전쟁과 분단을 기억하고, 통일과 개발을 지켜보는 사람이다. 역사학자이자 베를린 주택 개발위원회가 운영하는 박물관 큐레이터로서, 그녀는 수 세기에 걸쳐 팽창해온 도시의 욕망을 관찰하고 분석한다. 운디네와 크리스토프의 만남은 이질적인 두 공간, 즉 도시와 물을 왕래하는 과정으로 그려진다. 크리스토프는 베를린 역사와 발전 과정을 가르치는 운디네를 황홀하게 바라본다. 그녀는 도시 중심부에 자리한 궁전을 가리키며, 통일 이후 폐허로 남았던 도심 공간이 어떻게 변용되어 왔는지 설명한다. 그런가 하면 운디네는 기차를 타고 연인이 일하는 곳으로 달려가기도 한다. 운디네는 도시를 축소해놓은 여러 개발 모형과 견고한 건축물에서 벗어나 크리스토프와 함께 물속을 탐험한다.
영화에서 물은 양면성을 띤다. 두 인물이 위치한 도시에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고, 도시 개발은 이를 무마하거나 복원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물은 그 모든 변화에도 본래 모습을 잃지 않은 지표이자 계속해서 이동하고 재탄생하는 유동체다. 운디네가 깊은 저수지에 잠수했다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을 때, 크리스토프는 운디네를 육지로 끌어 올린다. 이때 그는 비지스의 ‘Staying alive’에 맞춰 숨을 불어넣는다. 영화 내내 반복되며 쓸쓸함을 강조하던 바흐 협주곡 D단조 2악장 아다지오와 달리, 오래된 디스코 선율은 운디네에게 전에 없던 자유를 선물한다. 영화는 물과 도시를 오가는 운디네를 통해 베를린에 자리한 미추를 되짚고, 현재 속에 여전히 과거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보여준다. 운디네 역시 물처럼 흘러가는 사랑의 기억을 몸과 마음에 새겨 나간다.
<운디네>는 연속과 유한이라는 사랑의 모순적인 속성을 통해 명암이 얽힌 역사를 읽어낸다. 후반부에 들이닥치는 예기치 못한 비극은 운디네를 절망에 빠뜨리지만, 그녀는 사랑을 원동력 삼아 전통적인 결말에 맞선다. 구원을 감행하면서도 희생자로 남지 않겠다는 단호한 눈빛이 짙은 여운을 남긴다. <바바라>(2012) <피닉스>(2014) <트랜짓>(2018) 등을 통해 독일 역사에 잔재한 파시즘의 흔적을 들춰내온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신작으로, 다시 한 번 거대한 폭력에 도전하는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파울라 베어는 신화를 옮겨 오는 동시에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는 극에서 망설임 없는 연기를 펼치며, 시대를 초월한 드라마를 힘차게 이끌어나간다.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수상작(여우주연상).


운디네 Undine 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 출연 파울라 베어, 프란츠 로고스키 수입/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 제작연도 2020년 상영시간 90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20년 12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