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주(서영화)와 흥주(양흥주)는 30년 만에 춘천을 찾는다. 청평사 인근에서 의도치 않게 하룻밤을 보내는 이 중년 부부는 과거와는 달라진 감정과 처지로 인해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한다. 장우진 감독의 세 번째 장편 <겨울밤에>는 은주와 흥주를 곁에서 살피는데 그치지 않고, 이들의 환상이 교차하는 무의식의 세계로까지 보는 이를 이끈다. 말 그대로 속수무책, 홀린 듯 빠져드는 기이한 여정이다. 폐쇄된 공간, 폐색한 관계에 처한 부부는 느닷없이 활짝 열리는 밤의 여로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인가. 전작 <춘천, 춘천>(2016)에서 장우진은 비슷한 듯 보이는 두 그림을 나란히 세워두고 차이와 반복의 파동에 몰두했는데, 이번엔 한층 더 복잡하고 과감한 실험으로 다층적 시공간의 흐름을 그려낸다. <겨울밤에> 개봉에 맞춰 장우진 감독에게 만남을 청했다. <춘천, 춘천> <겨울밤에>에 잇달아 출연한 이상희 배우도 초대했다. <겨울밤에>에서 이상희는 ‘그녀’라는 알 수 없는 인물로 등장한다. 은주와 흥주가 청평사에 머물 때, 그녀 역시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온 ‘남자’(우지현)와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하지만 젊은 남녀의 여행은 은주와 흥주의 그것과는 다르다. 서로에게 한 발 더 깊숙이 다가가 사랑의 감정을 확인하는 남녀, 특히 ‘그녀’는 은주와의 짧은 만남에서 따스한 온기를 전해준다. 소중한 것을 잊은 채 살아온 사람들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으려는 여정이야말로 장우진이 줄곧 관심을 가져온 주제. 이들의 매력적인 여정이 감독과 배우의 조화에서 비롯됨을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다. 실제 배우와 극중 인물이 만났을 때 벌어지는 ‘사건’을 적극적으로 프레임 안에 끌어들이는 장우진은 자신의 영화를 ‘페이크 다큐멘터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계획하고 예상한 것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대신 현장에서 길어 올린 우연의 신통한 힘으로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영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서로 깊이 신뢰하는 든든한 동료 장우진, 이상희 두 사람에게 물었다.
<겨울밤에>는 2018년에 제작돼 그해 여러 영화제에서 공개됐다. 개봉까지 꽤 오래 걸렸는데.
장우진_ 영화진흥위원회의 ‘다양성영화 개봉지원’ 사업에 기대지 않고서는 개봉하기 어려운 게 독립영화의 현실이다. 지난해 하반기에 지원했는데 떨어졌다. 누군가는 내 영화를 보면서 일반 관객과 소통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겠지. 다행히 올해 상반기에 개봉 지원작에 선정됐다. <춘천, 춘천>(2016) 개봉 때는 아예 지원조차 하지 않았다. 그 영화는 여러모로 내 나름의 실험을 해본 경우라, 인디스페이스 단독 개봉 형식으로 오랫동안 관객을 만나고 싶었다. 오래 기다린 만큼 <겨울밤에>를 개봉하게 돼 감회가 새롭다. 다음 작업에 한창 몰두하고 있어서 한동안 이 영화를 잊고 살았다. 무엇보다 좋은 건 개봉을 계기로 <겨울밤에> 팀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코로나가 <겨울밤에>를 따라와서 무척 애석하지만, 개봉 자체만으로도 내게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개봉으로 그 짐을 조금은 덜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이상희_ <겨울밤에> 팀원들과 그동안 이 영화가 개봉하면 어떨까, 얘기를 많이 나눴다. 개봉하게 돼 정말 좋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는 어쩔 수 없이 아쉬움이 크다. <겨울밤에>는 극장의 커다란 스크린에서 봐야 비로소 보이는 게 많은 영화다. 극장을 찾은 관객과 직접 만나 소통도 하고 싶은데 지금 상황이 그렇지 못하니까. 하루빨리 이 상황이 나아졌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이 긴 겨울밤이 끝날 때까지 <겨울밤에>가 극장에 오래 걸려 있기를 바란다.
장우진_ 새싹이 돋을 때까지! (웃음)
<춘천, 춘천> <겨울밤에>에서 엿보이는 장우진 영화의 구조적 실험은 상당 부분 배우와의 긴밀한 협업에 기대고 있다. 오늘 그 이야기를 많이 해보려 한다. 이상희 배우도 우지현, 양흥주 배우와 마찬가지로 장우진 감독 영화에 연달아 출연했다.
장우진_ 김대환 감독의 <철원기행>(2014) 촬영 현장에 갔다가 이상희 배우를 처음 만났다. 스태프, 배우를 살뜰히 챙기는 모습에 감동받았다. 눈여겨본 단편 <충심소소>(김정인, 2012)의 탈북자 충심을 연기한 배우가 상희 씨라는 사실에도 깜짝 놀랐다. 전혀 다른 인물 같았으니까. <철원기행>의 편집본을 보면서도 이영란 선배와 함께 연기하는 장면이 되게 인상적이었다. 참 유연한 배우구나 싶더라. 나와도 잘 맞을 거 같고. 그래서 <춘천, 춘천> 때 함께하게 됐다. 근데 영화에는 짧게 등장하잖나. 실은 촬영한 건 더 많은데 영화의 흐름상 뺄 수밖에 없었다. 내 실수다. 그러다 <겨울밤에>를 기획했다. 당시에는 양흥주, 우지현 배우만 같이 하자고 결정한 상태였다. 그런데 상희 씨가 찾아오겠다고 연락한 거다. 내가 마침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상희 씨가 부산까지 왔다. (웃음)
이상희_ (우)지현이가 장우진 감독과 어떤 프로젝트를 할 거라면서 극 중 본인과 함께 나오는 동갑내기 혹은 자기보다 조금 어린 여자 캐릭터가 있다고 하더라. 듣자마자 그랬다. “아니야, 그 여자 캐릭터를 연상으로 가야 해. 내가 들어가야겠어!” (웃음) 지현에게는 장우진 감독에게 귀띔만 해두라고 하고, 부산에 가서 직접 말했다. “연상으로 가는 게 훨씬 더 세련된 이야기가 될 거다!” (웃음)
장우진_ 어린 여자와 오빠라니. 내가 너무 뻔하고 흔한 설정을 했더라. 상희 씨가 제안하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30년 전 이야기가 아니라 60년 전 이야기가 됐을 테니. (웃음) 상희 씨 얘기를 듣자마자 감이 딱 왔다. 심지어 상희 씨가 그때 다른 작품 촬영 중이었는데 틈을 내 부산에 와줬다. 밤에 도착해 내내 작품 이야기를 하고 새벽에 다시 촬영장으로 떠났다. 엄청 감동했다.
이상희_ “나를 써!”라고 막 어필했다. 이게 다 우지현 덕분이다. (웃음)


장우진 감독의 현장이 무엇이 그렇게 좋아서 꼭 같이 해야 한다는 의지와 열정을 내보인 건가.
이상희_ 장우진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장우진이라는 창작자도 좋아하고. 한데, <춘천, 춘천> 현장에서 내 마음이 완전히 열리지 않았다. 전략인지 본심인지 잘 모르겠지만, 장우진 감독은 감독이 배우를 완전히 믿고 있다고 배우가 확신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내 마음이 완전히 열리지 않는 이유는 뭘까. 이 사람과 제대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간 경험해보지 못한 방식의 현장이라는 점도 컸고. 다시 했을 때 훨씬 더 마음이 열렸고 작업에 녹아들었다. 득을 크게 봤다.
출연하고 싶다고 연출자에게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말한 적이 있었나.
이상희_ 처음이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이 방법을 종종 쓴다. (웃음) 장우진 감독이 뭔가 글을 쓴다 싶으면, “아, 거기 혹시?...”라며 (나 쓰라고) 편하게 얘기한다. 그럼 ‘장’(배우들이 장우진 감독을 그렇게 부른다)도 편하게 얘기한다. “누나는 이번엔 없어!” (웃음)
장우진 감독이 사람을 끄는 매력이 보통이 아닌가 보다. 함께한 배우들이 그토록 마음을 내주는 이유가 궁금하다.
이상희_ 정확히 모르겠다. 그런데 스태프도 장우진 감독에게 빠진다. 내가 출연한 <정말 먼 곳>(2020)의 박근영 감독도 그러더라. 장우진 감독은 같이 작업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보면 그는 편견 없이 상대의 말을 되게 잘 들어준다. 함께 일하는 이들이 작업의 과정과 결과에 만족할 수 있게끔 배려하는 것이지. ‘내가 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있구나’, ‘이 사람이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주는구나’를 자주 느낀다. 때로는 ‘아니, 뭐 이렇게까지 열려 있어?’ 싶을 정도다. (웃음)
장우진_ 연출 의도가 없는 거 아니야? 생각이 없는 거 아니야? 그 정도로? (웃음)
이상희_ 물론 소통하면서 중심을 잃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웃음) 연출자가 포용력이 있고 생각하는 범위가 넓으니까 나나 지현은 그걸 믿고 사고를 확장한다. ‘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열려 있을 거야, 라면서. 그러니 그와 작업하는 과정이 재밌을 수밖에 없다.
캐스팅을 위해 배우와 처음 만났을 때 작품보다는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눈다고 들었다.
장우진_ 요즘 어떻게 살고 있나, 뭐 그게 전부다. 영화 얘기라면 요즘 봤던 영화 중 좋았던 게 뭐냐 정도. 그렇게 일상을 얘기하다 보면 면면은 달라도 배우와 가치관이 비슷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다시 말해 ‘이 사람이 되게 좋구나’, ‘이 사람과 친구로 지낼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나와 배우 사이에 텔레파시가 통한다’라는 게 중요하다고도 했는데.
이상희_ 텔레파시까지 간다고? 보라. ‘장’은 이만큼이나 확장 가능한 사람이다. 그럼 나도 더 확장해봐야지. 음, 나라면 ‘죽이 잘 맞는다’고 말하겠다.
장우진_ 그게 텔레파시다. (웃음) 내가 밤새 고민한 것을 이 사람도 고민했구나 느끼는 거다. 서로의 고민을 꺼내놓고 이리저리 조합하면 해결책이 나오고. 그럴 때 엄청난 희열을 느낀다.
“그간 경험해보지 못한 방식의 현장”에 대해 좀 더 일러 달라.
이상희_ <새출발>(2014)과 다르게 <춘천, 춘천>에는 즉흥적 요소가 많다. 우지현 배우에게도 그와 관련해 자주 들었다. 내 딴에는 즉흥 연기를 하니 재밌겠다 싶었다. 한데, 막상 현장에 갔더니 온전한 즉흥이 아니었다. 배우로서, 또 맡은 인물로서 원하는 바가 있다면 그걸 꺼내놔야 했고, 인물이 어떤 방향으로 가면 좋겠는가를 찾아야 했다. 낯선 방법이었다. 기존에는 대본이 있고 그걸 충분히 연습해서 판단하면 됐는데 말이다. 장우진 감독 현장에서는 텍스트로 된 대본이랄 게 없다. 또 현장에서 빠르게 판단해 곧바로 연기에 들어가야 한다. <춘천, 춘천> 때는 주춤거리는 게 느껴졌다. 다른 배우들은 몇 차례 장우진 감독과 호흡을 맞춰서인지 쉬이 되는 것 같은데 나만 겁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에 같이 하면 나도 저들처럼 현장과 인물로 바로바로 들어가고 싶었다. 첫 테이크에서 ‘오케이’가 나면 그것이야말로 감독이 원하는 방향과 배우가 빚어낸 즉흥이 동시에 잘 발생했다는 말인데 그럴 가능성은 정말 희박하잖나. 하지만 그게 일어났을 때 얼마나 재밌는지 모른다.
배우들과 이런 방식으로 작업하게 된 이유나 계기가 있었나.
장우진_ 나만의 연출 방식을 찾는 과정이다. <춘천, 춘천> 때 처음 시도했다. 날 믿고 잘 따라와 준 배우들이 있었다. 그들이 그 시간을 함께 견뎌줬다. 촬영 후반에는 한두 테이크 만에 ‘오케이’가 났지만, 촬영 초반에는 테이크를 정말 수없이 반복했다. ‘우리 것’이라고 딱 느끼는 순간부터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그야말로 죽이 맞기 시작한 거다. <겨울밤에>도 1, 2회 차 때는 작업이 더뎠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춘천, 춘천> 때보다 더 빠르게 한두 테이크에서 오케이가 났다. 계산과 즉흥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그 안에서 생각지 못한 순간들이 툭툭 뛰어나오고. 그건 단순히 반복해 찍는다고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런 연출 방법을 시도한 건 좋아하고 존경하는 로베르 브레송의 자동주의 기법을 내 방식으로 적용해보고 싶어서다.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을 많이 생각했다. 아, 상희 씨도 그 책을 읽었다고 하길래 ‘이것도 통했군!’ 했다.
이상희_ 내가 되게 좋아하는 책이지.
장우진_ 자동주의를 끌어내는 방식은 이성보다는 직관을 쓰게 만든다. 계산된 연기가 아니라 배우의 고유함이 배역에 묻어나는. 배우가 연기할 때의 기분도 묻어나고. 이를테면 어떤 감독은 촬영 당일에 배우에게 대본을 줘 지금 눈앞의 내용에 집중하게 할 것이다.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처럼 연기하면서 배우 그 자신도 모르게 배역에 섞이는 거다. 영화 속 캐릭터인데 되게 리얼해 보이겠지. 나는 여기서 좀 더 다큐멘터리적인 방식을 가미한다.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일 수도 있다.
이상희_ 인물의 전사나 생애에 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적힌 시나리오는 있다. 영화 들어가기 전에 잠깐 보여주는데, 장우진 감독은 흐름만 대충 생각하고 다 잊어버려라, 다 바꿀 거다, 그런다. 그 후 많은 이야기는 구두로 전해준다. 물론 지금 이 인물이 어떤 상황에 있고 인물들이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가는 분명 있다. 하지만 그 내용과 방향은 얼마든지 유동적으로 바뀔 수 있다. 감독과 배우가 합의한다면 말이다.
애초에 염두한 <겨울밤에>의 큰 틀은 무엇이었나.
장우진_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네. (웃음) 30년 전에 하룻밤을 보냈던 춘천의 청평사에서 우연히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 중년 부부의 무의식 여행이랄까. 그게 시작이었다. 상상을 덧붙여 설명하면 이러하다. 부부가 밤에 민박집 방안에서 온풍기를 쬐며 누워 있는 장면을 떠올렸다. 두 사람 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거다. 그다음 장면에서 흥주가 몰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바로 그 장면부터 판타지가 시작된다. 그리고 후반에 온풍기 앞에서 부부가 오랜만에 옛이야기를 하며 조금은 격앙된 감정을 확인하는 장면이 있다. 방안 장면이 리얼 타임이다. 그 외에는 판타지의 확장이랄까. 그걸 어떻게 영화적으로 표현할 것인가가 고민이었다.
이상희 배우가 연기한 ‘여자’는 누구인가. 오랜 친구인 '남자'와 함께 청평사를 찾은 여자는 오래 전의 은주처럼 보이기도 하고, 젊은 시절 흥주가 좋아했던 해란(김선영) 같기도 하다.
이상희_ ‘여자’는 나의 과거 혹은 현재이기도 하고 또는 누군가의 과거일 수도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참 신기하지. 연기할 때는 분명 내가 맡은 인물인 ‘여자’가 있었다. ‘여자’의 역사와 서사가 분명했다. 그런데 완성된 영화를 보면서는 나조차 알쏭달쏭한 거다. 도대체 저 여자 누구지? (웃음) 한번은 내가 흥주 선배에게 선영, 영화 선배와 연기할 때 굉장히 다르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선영 선배는 에너지가 꽉 찬 분이고 그게 신 안에서 다 느껴지는 편이라면, 영화 선배는 응축된 에너지를 명치 아래 꽉 잡아두고 있는 듯했으니까. 그런데 흥주 선배가 “같은 거 같다. 한 사람의 앞면과 뒷면 같다”고 하더라. 그 말이 되게 신기했다.
장우진_ 영화에는 두 젊은 남녀가 막국수를 먹는 장면이 CCTV 화면으로만 나오지만, 막국수 먹는 장면을 꽤 오래 찍었다. 그때 젊은 남자의 군 생활 얘기, 여자가 애인과 근래 헤어졌음을 감지할 만한 이야기가 나온다. 또 원래는 민박집에 부부의 방, 젊은 여자의 방, 젊은 남자의 방 이렇게 세 개가 마련돼 있었고 그걸 다 찍기도 했다. 특히 상희 씨가 방안에서 감정 연기를 하는 장면도 길게 찍었는데 최종적으로 쓰지 않았다. 근데 배우에게는 그 장면을 찍어 본 게 훨씬 좋았을 거다.
이상희_ 처음으로 장우진 감독이 얄밉게 느껴진 게 바로 그 장면을 촬영할 때였다. 프리 프로덕션 때 인물들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그 온풍기 장면은 응축된 감정이 나와야 했다. 나에게 ‘장’이 “농밀하게 표현해줘야 해”라고 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촬영에 들어갔다. 테이크 하나를 40~50분 가까이 찍을 정도로 집중했다. 쪼그리고 앉아 촬영해야 했던 양정훈 촬영감독님이 다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웃음) 촬영 마치고 장 감독이 “아, 누나, 정말 좋았어. 난 만족해!” 하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다음날 나를 보자마자 “누나, 그 장면은 못 쓰는 거야”라고 하더라. (웃음)
장우진_ 내가 솔직하게 밝혔지.
이상희_ 솔직한 건 참 좋아.
장우진_ 사실 그 장면을 쓰려고 찍은 건 아니었다. ‘그 인물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 말로 하는 것보다 배우가 직접 그 인물의 감정을 느껴보면 더 좋을 것 같았고 그걸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한다면 엄청 값진 경험인 거다.
이상희_ 왠지 거짓말 같은데? 그런데 그렇게 조명을 열심히 쳤다고? (웃음) 공들여 찍은 장면을 버린다는 게 사실 되게 어려운 일이잖나. 장 감독은 그런 걸 되게 빠르게 판단한다. 그 판단력과 솔직함을 내가 또 좋아한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뻔뻔한 거지. (웃음)
장우진_ 그렇지, 내가 전혀 미안해하지 않았으니. DVD를 만든다면 다 넣고 싶다.
영화에서 청평사는 시간이 멈춰선 공간이다. 관광지가 아닌, 완전 다른 공간으로 탈바꿈했는데.
이상희_ 청평사는 흥미로운 곳이지만 솔직히 영화 속 청평사가 훨씬 더 좋다. 판타지가 묻어나는 청평사라니.
장우진_ 청평사에 많이 가봤다는 관객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청평사에 가면 길이 잘 나 있는데 이 영화는 하나 같이 그 길을 벗어나 찍었다며 그 이유를 묻더라. 그때야 나도 자각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을 일부러 피해서 찍었구나. (웃음) 계곡도 길이 있는 곳이 아니다. 지금 보는 장면에서 10cm만 카메라를 돌리면 곧바로 엄청나게 붐비는 관광지로서의 청평사가 보일 거다. 프레임을 잡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조명으로 비현실적 공간을 만들기도 했고.
이상희_ ‘여기가 그런 곳이었어?’라며 실제의 청평사와 영화 속 청평사를 비교해 보는 것도 나름 재밌는 관람 포인트가 되겠다.
<춘천, 춘천> 때는 카메라를 강박적으로 고정했다. 반면, 이번엔 아주 적극적이고 다양한 움직임이 눈에 띈다. 그런 카메라의 움직임이 다층적인 시간과 귀기 어린 무드를 만들어 내는데.
장우진_ <춘천, 춘천> 때는 어떻게 하면 비슷하게 보이면서도 그 안에서 차이와 반복을 만들어낼 것인가를 생각하다 보니 풍경 안에서 인물들만 움직이는 게 더 어울리겠더라. 또 그때는 내가 직접 촬영까지 해야 해서 현실적인 제약도 있었다. 반면 <겨울밤에>는 프레임 안에서도 시공간이 바뀌는 듯해야 했다. 그러려면 당연히 카메라가 움직여야 했고. 양정훈 촬영감독님이 인점과 아웃점을 두고 엄청 고민하셨다. 인점에서도 나름의 룩이 나와야 하고 아웃을 했을 때도 환상적이고 기이한 정서가 유지돼야 했다. 트랙을 깔고 촬영하니 아웃점에서 갑자기 너무나 현실적인 분위기가 나오는 경우가 있었다. 패닝, 트래킹을 시도할 때 여러 번 카메라를 옮겨가며 촬영했다. 지금 다시 그곳에 가서 찍으라고 해도 이렇게밖에 못 찍을 것 같다.
오묘한 빛깔의 조명이 이상한 기운을 만드는데 크게 한몫했다.
장우진_ 송학가든에서 밥 먹는 장면을 제외하면 빛은 100% 다 인공적으로 만들었다. 빙벽 장면도 그렇고. 밤 장면이 많기도 했다. 실제로 오후 4시 반이면 배가 끊기고, 저녁 7시면 완전한 암흑이다. 가로등조차 없더라. 우리 앞에 펼쳐진 그 어둠을 블랙 캔버스라고 생각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상희 배우와 우지현 배우는 텔레파시가 굉장히 잘 통할 것 같다.
이상희_ 여러 작품을 같이 한 지현은 참 좋아하는 배우다. 작품에 임하는 스타일은 완전 반대다. 나는 인물로 쑥 들어간다. 반면에 지현은 전체 흐름에서 조화를 생각하며 연기하고, 그 조화를 만들어내는 아이디어가 굉장히 많다. 숲을 잘 보는 친구랄까. 서로에게 자극이 된다. 이번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장우진_ 감자로 요리를 한다고 하면 상희 씨는 감자 그 자체를 두고 엄청나게 생각한다. 어떤 감자이고 감자로 가능한 요리가 뭔지 하는. 반면 지현 씨는 연출자와 같은 태도가 있다. ‘감자로 포테이토를 만든다면 콜라가 어울리겠지? 아, 우리가 만들려는 건 그게 아니니까 이 식탁에는 감자와 우유가 더 나을 거야’ 하는. 상희 씨가 본능적이고 직관적이라면, 지현 씨는 굉장히 이성적이다.
청평사에서 젊은 남녀가 감정을 확인하고 살포시 입을 맞춘 뒤 여자가 쑥스럽고 어색해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이상희 배우의 그 본능적인 움직임이 나온 장면 아닌가. (웃음)
장우진_ 맞다. (웃음)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 장면을 보자마자 ‘너무 20대처럼 보이려고 애쓴 게 아니냐’며 걱정하더라.
이상희_ 내가 너무 귀여운 척한 것 아닌가 싶더라.
장우진_ 아니다. 정말, 좋았다. 그 남자와 처음 키스를 하고 감정을 나눈 거니까. 그 순간, 이상희라는 ‘감자’가 툭 튀어나왔다. (웃음)
무의식의 여행에 관해 좀 더 물어보자. 은주는 자신에게 귀한 것을 되찾기 위해 떠난다면 흥주는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르고 헤맨다. 또한 오직 은주만이 젊은 남녀와 접촉하고 대화한다.
장우진_ 은주와 흥주는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게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흥주는 부부가 함께 있는 그 방에서도 바로 자기 옆에 있는 은주와 뭔가를 함께 찾으려 하지 않고 계속 다른 걸 생각하고, 다른 걸 찾으려 한다. 잃어버린 게 사실은 이 방 안에 있는데 말이다. 그런 흥주를 보는 은주의 마음은 어땠을까. 카페에서 은주가 “남편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게 정말 딱 맞는 표현이다. 흥주는 이미지만을 쫓는다. 그러다 보니 절대 접촉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이상희_ 흥주는 바로 자신 옆에 귀한 게 있어도 못 보는구나.
장우진_ 은주는 비록 잃어버린 휴대폰은 찾지 못했을지언정 그 자신은 찾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은주가 인생 일대의 용기를 내는 순간이다. 택시에서 내린 은주가 점점 더 눈을 빨리 깜빡인다. 뭔가 깊이 생각한다는 듯이. 만약 부부가 같은 걸 잃어버렸다면 같이 그걸 찾아가면 되는데 은주도 이제 더는 흥주와 같이 뭔가를 찾을 마음이 없다.
이상희_ 영화 중간에 은주가 흥주에게 아마도 여러 번 이야기했을 텐데 흥주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된 게 아닐까.
서영화 배우와는 이번 작품으로 처음 만난 건가.
이상희_ 그렇다. 워낙 좋아하는 선배다. 영화 선배가 합류한다고 들었을 때 정말 좋았다. 영화에서 단둘이 대화하는 장면이 딱 한 번이라 그 촬영을 엄청 기다렸다.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한참 고민하고 현장에 갔는데 웬걸 나보다 더 위태로운 은주가 있는 거다. 내가 그렸던 그림과 달라 다소 당황했지만, 오히려 내가 은주에게 힘이 돼주고 싶었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싶어졌다. 나보다 더 위험해 보이는 누군가가 눈앞에 있으니까 되레 내가 중심을 잡게 되더라. 그게 이 영화에 더 맞는 것 같고.
장우진_ 그 장면 찍을 땐 관찰자가 된 것 같았다. ‘이 신이 어떻게 흘러갈까’, 감독인 나조차 궁금했다. 시나리오에는 은주가 젊은 남녀에게 업혀서 산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돼 있었는데 현장에서 보니 지금처럼 서로를 안아주는 감정이 맞겠더라. 서로 동질감을 느끼며 위로하고 위로받는. 그건 찍으면서 발견했다. 처음엔 영화 선배도 은주가 젊은 여자를 만나는 장면을 두고 그 자신의 과거 혹은 잃어버린 자신과 만나는 관념적인 차원의 설정이냐고 물으셨다. 그런데 첫 테이크를 찍고 나서 그러시더라. “지금의 감정으로 보면 나는 그냥 그녀를 만난 것이고 이 여자가 하는 것에 대한 리액션만 충실히 하면 될 거 같다.”
이상희_ 그게 참 좋았다. 많은 경우, 나보다 더 오래 산 사람이 나보다 뭔가를 더 잘 알 것이고 내게 위로를 줄 거라 생각하기 쉽잖나. 그것 역시 편견이었다. 나보다 더 긴 세월을 산 사람도 나보다 더 위태로울 수 있는데 말이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일상에서 동생들로부터 더 큰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그런데 왜 연기를 준비할 땐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장우진_ 시나리오를 들춰본 적이 있는데 그 장면을 내가 꼰대처럼 썼더라. 은주가 이 젊은 여자에게 뭔가 가르치려 들고 ‘괜찮을 거다, 다 지나갈 거다’라고 말하고. 그런데 현장에서 정작 두 사람이 만나자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감정이 발생했다. 그래서 내가 ‘페이크 다큐멘터리’라고 말하는 거다. 관찰자처럼 그들이 느끼고 만드는 감정을 지켜볼 수 있었던 대표 장면이다.
연기 고수들이 다 모였다.
장우진_ 양흥주 배우는 진짜 타짜다. 최근에 단편 <캠프 페이지>(2020, 춘천역 부근의 옛 미군기지 캠프 페이지 부지에서 1972년 실제로 벌어진 핵무기 사고가 배경이다.)도 함께했는데 장르 영화에도 잘 어울리더라. 1인 7역을 소화했다. 표정과 눈빛, 목소리를 미세하게 변화하면서 여러 캐릭터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가 계속 출연해준다면 내가 더 멀리까지, 다른 지점으로까지 가볼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김선영 배우는 <춘천, 춘천>으로 제5회 들꽃영화상에 갔을 때 만났다. 선영 선배가 <소통과 거짓말>(이승원, 2015), <해피뻐스데이>(이승원, 2017)로 조연상을 받은 날이었다. 뒤풀이에서 앞으로 독립영화 작업 많이 할 거라고 하셔서 바로 전화번호를 여쭤봤다. 하루 이틀 뒤에 <춘천, 춘천> 스크리너를 보내드렸는데 그날 바로 전화를 주셨다. 영화를 좋게 보셨다며 같이 해보자고 하시더라. (웃음) 선배님께는 촬영일 하루 전날 현장에 와서 다른 것 말고 나와 흥주 선배와 이야기를 나눠달라고 부탁했다. 밤새 이야기하고 노래 부르며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그날 밤에 다음 날 찍을 분량을 미리 다 찍은 느낌마저 들었다.
이상희_ 대찬 신여성처럼 보이는 선영 선배의 연기가 너무 좋았다. ‘흥주 너는 내가 컨트롤 한다!’ 같은 느낌이랄까. 해란의 밀당이 되게 멋있었다. (웃음)
장우진_ 흥주를 받아주는 것 같은데 계속 밀어내지 않나. 더 놀라운 건 선영 선배는 연기할 때마다 매번 다른 액션을 보여준다. 그러니 상대 배우도 긴장할 수밖에 없다.
이상희_ 아, 나는 다른 촬영 때문에 선영 선배의 포장마차 장면 촬영을 현장에서 못 본 게 너무 아쉬웠다. 지현은 그걸 다 봤다. 며칠 동안 그 얘기만 하는데 어찌나 약 오르던지.
조경숙 배우가 연기한 식당 주인도 예사롭지 않다. 박명훈 배우도 스님 역을 찰떡처럼 소화했고.
장우진_ 조경숙 선배에게도 역할에 대해 대강만 말씀드렸다. 부탁드린 건 딱 하나였다. 촬영 전날 미리 오셔서 <춘천, 춘천>에도 등장했던 실제 내 친구의 어머니이자 송학가든의 주인장과 계속 얘기를 나눠달라. 그분을 잘 복사해 영화에 반영해 달라. 그런데 이건 뭐 복사를 넘어서 귀기가 어린 버전까지 만들어주셨으니. 연기를 어찌나 잘하시던지.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에서 맨해튼 술집 사장이자 미나(천우희) 엄마로 등장했던 바로 그분이다.
이상희_ 박명훈 선배도 진짜 놀라웠다. 진짜 스님인 줄! 감독님이 모자 쓸 거니까 옆머리만 살짝 밀면 된다고 했는데도 본인이 스스로 그 한 장면을 위해 머리를 밀고 오셨다.
장우진_ 본인 촬영일도 아닌데 미리 오셔서, “스님이라면 머리를 밀어야지요”라고 하는데! (웃음)
이상희_ 무소유의 표본처럼 등장하셨지. 내가 명훈 선배와도 친한데 그분 역시 장우진 감독을 진짜 좋아한다. 그만큼 애정이 있기에 머리까지 미셨을 거다.
장우진_ 사실 명훈 선배도 그때가 번뇌의 시기였다. <기생충>(2019) 오디션을 보고 온 직후라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 많으셨다. 스스로도 ‘내려놓자, 내려놓자’ 하는 마음이 컸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기생충>의 근세가 <겨울밤에>에 우정 출연한 것처럼 됐다. (웃음)
코로나 상황으로 준비하던 <마지막 사진>(가제, 베를린에서 만난 남한 여성과 북한 커플의 이야기로 미스터리 멜로물이다.) 프로젝트는 잠시 멈췄겠다. 대신 다른 프로젝트에 한창 몰두하고 있다고.
장우진_ <마지막 사진>은 4고까지 쓰고 잠시 멈췄다. 상황을 보며 적어도 앞으로 2년은 더 기다려야 할 듯하다. 잘 묵혀놔야지. 요즘은 <캠프 페이지>를 장편으로 만드는데 완전히 빠져 있다. 이번에도 또 처음 시도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심지어 콘티도 그렸다. 대본과 촬영본이 95% 이상의 싱크로율을 보이고, 후시녹음으로 만든 장면도 많다. 영화 자체가 기괴하다. 해보니까 이 방식도 재밌다.
이상희_ 장우진 감독은 작품마다 이걸 보여줄 거다, 이런 도전을 할 거야, 가 아주 명확하다. <춘천, 춘천>도 페이크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겨울밤에>는 거기에 더해 촬영과 조명으로 만들어낸 세계가 있었다. <캠프 페이지>에서는 레이어를 여러 개 만들어 근사한 환영의 세계를 만들었다.
장우진_ 연대순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다가 1972년의 충격적인 사건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형식이다. 다양한 군상이 담기길 바란다. 그만큼 등장인물도 많다. 지금껏 같이 작업한 배우들을 다 모셔야 할 것 같다. 이번 영화에는 사회적 이슈도 담아보고 싶다. 사실 캠프 페이지를 조사하면서 충격 받았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바로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도, 미군이 묻어뒀던 석유통이 잔뜩 나온 것도 놀라웠다. 그런데도 시는 이곳에 공원을 만들겠다고 한다. 그곳에서 뛰어놀 아이들을 생각하면 어휴...
이상희_ 장우진 감독은 늘 내게 영화적 놀라움을 준다. 무엇보다 같이 있으면 참 재밌는 사람이다. 덕분에 오늘도 즐거웠다.
장우진_ 오늘은 또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한 것 같아서 나 역시 좋았다.
이상희_ 올해는 이렇게 <겨울밤에> 개봉과 함께 마무리하겠지. 내년에는 더 열심히 해야겠다. 영화 한 편과 넷플릭스 드라마 촬영이 있을 것 같다.
장우진_ 지금보다 더 바쁘길 원하는 분이라!
이상희_ 맞다. 내가 욕심이 많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