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속, 그 너머
<조제> <달이 지는 밤> 김종관
글 정지혜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20-12-10

김종관 감독이 이누도 잇신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을 리메이크해 자신만의 영화 <조제>(2020)를 완성했다. 이별의 과정까지 촘촘히 그렸던 원작과 달리 <조제>는 만남의 순간과 사랑의 진행에 집중한다. 오랫동안 혼자 고독했을 조제(한지민)의 이야기에 좀 더 귀를 기울이길 바라고, 조제의 세계가 외롭지만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선택이었을 것이다. 몸이 불편한 조제, 외부와 단절된 조제, 어두운 방에서 제멋대로 세계를 상상한 조제. 그녀 앞에 건강한 기운과 넘치는 재치, 서글서글한 인상과 누구도 거부 못할 붙임성을 지닌 영석(남주혁)이 벼락같이 등장하면서 견고한 조제의 세계는 조금씩 변화한다. 이유도 조건도 없는 사랑의 시작에 대해 그러했듯이, <조제>는 사랑의 끝에 대해서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조제>의 개봉을 앞둔 어느 날, 김종관 감독을 만났다. 그간 해왔던 작업과는 또 다른 규모의 영화를 통해 그가 터득한 것, 그럼에도 계속해서 견지하고 싶은 것에 관해 두루 청해들었다.

 

 

판권 구매부터 개봉까지 5년간 준비한 작품이다.

원작을 좋아하는 관객이 많다 보니 부담이 컸다. 다행히 언론 시사 후 반응이 나쁘지 않다.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고 기대도 생겼다. <조제>를 좀 더 깊이 읽게 읽어봐 주실 관객들이 있을 거라는 확신과 믿음이다. 물론 코로나 상황으로 관객을 직접 찾아뵙는 무대 인사나 관객과의 대화와 같은 자리를 전혀 갖지 못한다. 하고 싶은 마음은 차고 넘치지만 정작 할 수 있는 게 없다. 일과를 마치고 극장에 오셔서 영화를 봐달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니까. 그런데 또 달리 생각해보면 이런 와중에 <조제>를 보러 오시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만큼 고맙고 귀한 분들이 또 어디 있겠나 싶다. 관객과 더 깊이 만나는 시간이면 좋겠다.

 

2016년 일본에 갔다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프로듀서를 만나 리메이크를 해볼 생각이 있느냐는 이야기를 나눈 게 작업의 시작이었다.

그분이 일본은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작업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시스템 또한 완전히 붕괴했다며 한국 영화를 굉장히 부러워했다. 그러면서 만약 한국에서 일본 영화를 리메이크한다면 한국 관객이 좋아할 만한 작품으로 뭐가 있겠느냐고 묻더라.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러브레터> 얘기가 나왔다. “만약 둘 중 한 편을 꼭 리메이크해야 한다면?”이라고 또 묻길래 늘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이야기, 인간을 깊이 바라보는 시선의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고 답했다. 한국과 일본의 사랑의 방식에 차이가 있고, 원작이 공개됐던 2000년대 초반과 지금의 시대적 상황도 달라졌으니 그런 걸 반영해 내 나름의 영화를 만들어볼 수 있지 않겠나 싶었다. 물론 많은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좋은 작품을 다시 만든다는 건 여러모로 불리한 게임이라고도 말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조제>

리스크를 떠안고서라도 이 영화를 리메이크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한국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날 내가 했던 말속에 이미 내 대답이 있더라. 내가 오랫동안 해보고 싶었던 이야기였고 원작과 다르게 만들 수 있겠다는 판단. 사실, 리스크는 언제나 있다. 그동안 내가 해온 작업 역시 <조제> 못지않은 위험 부담이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밀어붙일 수 있었던 건 창작자로서 더 해보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였다. 창작자로서 얻을 게 있다면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조제>가 제 발로 찾아왔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웃음)

맞다. 어떤 영화는 단순히 ‘재밌다’는 인상에 머물지 않고 그 영화를 봤던 당시의 상황이나 그 영화를 본 공간의 분위기 같은 게 함께 기억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딱 그런 영화였다. 그 영화를 떠올리면 20대의 나, 그때 내가 몰두했던 것, 그때의 인연 등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난 뒤인 지금 다시 그 영화를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나와 내 주변에 대한 생각도 달라질 것이다. 나는 통속극, 특히 멜로영화의 힘을 믿는다. 지극히 사적인 관계를 다루지만, 그 안엔 사람과 세상을 아주 깊이 있는 시선으로 읽어내는 힘이 있다. <조제>를 통해 그걸 시도해 보고 싶었고 나만의 <조제>를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봤던 그 시절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영화를 보고 났을 때 ‘아, 사람 사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웃음) 원작 영화가 좋아서 곧바로 다나베 세이코 작가의 원작 소설들을 찾아 읽기도 했고. <최악의 하루>(2016)의 은희를 생각해보라. 누군가는 은희의 선택을 두고 ‘나쁘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또 은희라면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잖나. 겉으로만 보면 ‘나쁜 행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지라도 그 사람의 내면으로 한걸음 더 들어가 보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상황이 있을 테고 그럼 그 인물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얼마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내게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 영화였다.

ⓒ이영진

각본 작업을 하면서 원작에서 취할 것과 제할 것을 정해야 했을 텐데.

원작의 유려한 영화적 흐름과 서사, 그 이야기의 본질은 잘 간직하되 그 이야기를 다르게 말하는 게 중요했다. 우선 내가 좋아했던 장면들이나 이 영화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에게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장면부터 과감히 버렸다. 원작과 가장 큰 차이라면, <조제>는 조제와 영석의 만남의 과정을 상세히 다루되 두 사람의 이별의 과정은 함축적으로만 표현한다는 데 있다. 원작은 이별의 과정을 길게 보여주잖나. 결국 장애가 있는 조제(이케와키 치즈루)를 버거워하는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제>에선 ‘왜 이별했는가’, 이 부분을 없앴다. 사랑도 부지불식간에 오듯 이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이별의 이유를 따지기보다는 이미 이별한 뒤에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을 느끼는 인물들이 나오는 거다. 고전 멜로영화를 떠올려보면 알 것이다. 그렇게 1년 가까운 시간을 각본 작업에 쏟았다.

 

그 사이 여러 연출작을 쉼 없이 만들었다.

<더 테이블>(2016), <페르소나>의 <밤을 걷다>(2019), <아무도 없는 곳>(2019)을 작업했다. 작은 연극도 한 편 올렸다. 단편 <메모리즈>(2019)도 찍고, 박효신의 뮤직비디오도 만들었다. 창작으로 지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은 늘 갖고 있다. 한데, <조제>는 기존에 내가 해온 작업보다 규모(순제 40억 원)도 컸고 그만큼 스트레스가 많았다. 솔직히 영화를 공개하기 전까지 겁이 났다. 혹시 이 작품으로 내 마음이 다쳐 이후 창작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웃음)

 

시스템 안에서 작업할 때 좀 더 시도해볼 수 있는 지점도 있지 않나.

독립 영화를 만들 땐 창작자로서의 결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적 디테일은 포기해야 할 때가 많았다. 더 잘 찍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어도 예산의 한계에 막혔으니까. 그간 적은 예산으로 영화를 찍으면서 항상 모래주머니를 차고 뛰는 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그걸 좀 벗어던지고 달려봤다. 작은 예산으로 큰 효과를 내는 데 단련돼 있었고, 그 점은 대중을 상대로 하는 상업영화 작업에서도 요긴했다. 

<조제>
<조제>

어떤 배우가 조제와 영석을 연기할 것인가가 관건이었을 것이다.

한지민, 남주혁 두 배우가 함께 출연한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촬영이 시작되기도 전이었다. 영화 시사회에 갔다가 남주혁 배우를 처음 봤는데 인상이 굉장히 좋았다. 사람 자체가 주는 긍정적이고 건강한 에너지가 있었고 그게 커다란 가능성으로 보였다. 얼핏 보면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나 싶지만 잘 들여다보면 영석은 참 선한 사람이다. 남주혁 배우의 선한 기운을 적극적으로 영석에 가져오면 되겠더라. 한지민 배우는 특유의 뜨겁고 강한 힘이 있다. 그 기운이 조제의 내면에 잘 담겨 있다가 조제의 쓸쓸함이 폭발할 때 함께 터져 나오면 감정이 훨씬 더 크게 전달될 거라 생각했다. 배우의 목소리 톤과 조제의 문어체 대사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또 한지민 배우가 함께하면서 조제가 영석보다 연상이라는 설정이 가능해졌다. 그렇다면 조제가 좀 더 오랫동안 고립된 채 살았을 것이고, 그만큼 자기 세계가 단단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설정이 영화에 힘을 불어넣어줄 것 같았다. 특히 지민 씨와는 안개 속에 있는 것만 같은 조제의 감정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인물의 심적 상태를 만들어 나갔다.

 

츠네오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 원작과 달리 <조제>는 조제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원작에서 츠네오를 집안으로 불러들이거나 츠네오를 조제로부터 떨어뜨리려는 할머니의 대사가 <조제>에서는 모두 조제의 몫이다. 조제의 집에도 조제만의 공간이 있고 수집가로서의 조제의 면모도 엿보인다. 조제가 더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다.

도입부는 내게 굉장히 중요하다. ‘이 영화는 원작과 다른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니 비교할 생각 말고 이 영화가 이끄는 길을 따라와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웃음) 먼저 그들이 살았던 공간을 보여주고 이제부터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뉘앙스를 주고 싶었다. 영화 속 인물들이 머물렀던 공간에 그들의 목소리가 떠도는 것처럼 느끼도록 내레이션을 만들었고. 조제는 오랫동안 고립된 채 살아온 쓸쓸한 사람이지만 자기만의 취향이 확실한 사람이기도 하다. 취향이 있다는 건 중요하고, 취향이 있는 사람은 조금 덜 불행하다. 그런 면에서 조제는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 강한 사람이다. 조제는 육체의 장애뿐 아니라 심리적 트라우마가 있다. 어렸을 때 자기가 누군가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데서 오는 일종의 죄책감이다. 자기 세계에 파묻혀 살며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않기도 하고. 그런 조제가 영석을 만나면서 커다란 변화를 겪지 않나. 자신을 아끼지 못했던 조제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하면서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 감정이야말로 가장 아름답다는 게 <조제>의 중요한 테마다. 그렇게 조제는 자신을 조금씩 극복하게 되지 않을까.

 

위스키 병을 수집하는 조제의 취향은 위스키 애호가인 감독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인가. (웃음)

그나마 내가 좀 아는 걸 조제의 취향으로 삼으면 재밌겠더라. 위스키도 그중 하나다. 해외 영화제라는 걸 처음 가봤을 때였다. 낯선 땅에서 혼자 펍에 가서 1~2유로짜리 위스키 한 잔을 마셔봤다. 처음 접한 맛, 약간의 취기가 좋더라. 이후 조금씩 위스키를 알아갔고 지금은 삶의 낙 중 하나다. 소소한 즐길 거리가 생겼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조제의 삶에 나의 기호와 내 옛 기억을 많이 반영했다. 특히 조제의 집은 가난했던 내 유년 시절의 기억이 많이 들어가 있다.

<조제>
<조제>

‘조제의 집이 곧 조제’라고 말한 적 있다. 조제가 아주 오랫동안 산 집, 조제가 많은 시간 혼자 보냈을 집이 어떻게 보였으면 했나.

가난하지만 추레하거나 불안전하고 쓸쓸해 보이기보다는 조제 나름의 삶의 역사가 묻어나길 바랐다. 그래서 아름답게 꾸며주고 싶었다. 너무 협소해 보이지 않으면서 필요에 따라 공간이 분리돼 보이도록 설계했다. 외부는 목포에서 로케이션으로 진행했고 내부는 모두 세트에서 찍었다.

 

인물이 대화나 감정을 주고받을 때 숏을 잘게 나눴다. 리듬을 만들려고 그랬던 건가.

영화의 리듬은 내가 주관해서 가는 편이다. 콘티뉴이티를 유지하는 선 안에서 조영직 촬영감독님이 유연하게 움직여주셨다. 또 미술과 소품, 빛과 그림자의 활용이 중요했다. 특히 <조제>는 그림자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곳>도 그랬지만 밝은 빛보다는 그림자를 활용하고 그 어둠 안에서도 얼마든지 빛이 느껴질 수 있게끔 콘트라스트를 줬다. 워낙 배우들의 얼굴이 아름다워 클로즈업을 많이 쓰기는 했지만, 얼굴의 정면만 클로즈업 한 건 아니다. 옆모습도 있고 때론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가린 보이지 않는 얼굴에 주목하기도 했다. 인물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게 비단 얼굴만은 아니니까. 얼굴을 바라볼 때도 공간을 염두에 두고 촬영했다.

 

허진, 조복래 배우도 함께했는데. 역할의 크기와 상관없이 배우들의 연기가 안정적이더라.

리메이크를 시도할 때 많은 경우 감초 캐릭터를 더 희극적으로 표현하려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살면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 현실의 질감을 입은 캐릭터로 그리고 싶었다. 또 배우들에게 뭔가를 디렉팅하기보다 캐스팅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무엇보다 내가 배우와 작업하는 걸 참 좋아한다. 내 머릿속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캐릭터가 좋은 배우의 힘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인물로 만들어지는 것이 정말 신기하다. 배우가 빚어내는 기적이다.

 

그래서 배우들이 좋아하나 보다. (웃음)

배우들이 좋아하는 감독이라고? 내가 배우들에게 많이 의지해서 그렇다. (웃음) 배우 역시 아티스트인 만큼 창작에 대한 갈증이 있다. 그 지점을 잘 살펴봐 주고 내 작품에서 뭔가 해볼 여지가 있다면 기회를 주는 게 서로에게 더 큰 에너지가 된다.

ⓒ이영진

조제와 영석의 여행이나 호랑이와 물고기가 등장하는 방식 역시 원작과는 전혀 다르다.

직접 외부로 나가기보다 환상처럼 보여주고 싶었다. 조제가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않기도 하고. 나 또한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것에 관해 관심이 있고. 그래서 그걸 좀 더 극적으로 쓰려고 했다. 조제가 두려워하는 호랑이를 조제의 집 담벼락에 있는 구멍을 통해 보여주는 방식도 그러하다. 폐쇄적인 집의 담벼락과 너머에 펼쳐져 있을 세상, 그 경계 어딘가에 두려움의 존재를 배치하고 싶었다. 물고기는 원작 소설의 죽음에 관한 모티프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사람들은 수족관의 물고기를 보면서 갇혀 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물고기들이 보기에는 되레 우리가 갇혀 있다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침잠의 상태를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아름답게 여길 줄 아는 걸 표현하고 싶었다. <조제>는 불투명한 안개 속에서도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는 연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스코틀랜드도 나온다.

지난해 10월 스코틀랜드에 가서 찍었다. 나도 이번에 처음 스코틀랜드에 가봤다. 고요한 시골길 위에 조제와 조제가 탄 휠체어를 미는 영석의 등장이 이 영화의 첫 촬영이었다. 롱 숏으로 그들을 바라보는데 기분이 묘하더라. ‘아, 우리 영화의 주인공들이 이런 사람들이구나’ 싶었다.

 

무주산골영화제가 기획‧제작한 옴니버스 장편 <달이 지는 밤>(2020)의 파트1도 연출했다. 파트2를 만든 장건재 감독의 영화에 대한 일종의 답신처럼 만들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아는데.

지난해 여름, 장건재 감독님이 먼저 촬영을 했다. 그때 내 나름의 시나리오는 이미 있었다. 장건재 감독님이 촬영한 공간을 다른 계절에 담아보면 어떨까 싶더라. 그것은 또 그것대로 유기적이면서도 다른 힘이 생길 것 같았다. 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와 감독님 영화의 엔딩 시퀀스가 같은 장소에서 촬영됐다. 또 각자의 영화에 죽음의 테마가 있는데 장건재 감독님의 영화에선 죽음의 존재가 일상에 나타난다면, 내 것은 장르적 특색이 좀 더 강하다. 두 명의 감독이 옴니버스로 만나 서로 유기적인 구조를 만들 수 있었다. 마치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보일 수도 있고.

 

겨울에 찍은 김종관의 영화가 앞에, 여름을 담은 장건재의 영화가 뒤에 온다. 순서를 두고 논의 과정이 있었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여름, 겨울 순이었는데 장건재 감독님이 순서를 바꿔보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줬다. 내 영화는 겨울이라 한기가 느껴지기도 하고 내용상 긴장하며 보게 된다. 그러다 여름 배경의 이야기가 나오니까 편안해지더라. 내 영화와 비교해 장건재 감독의 영화는 사람들도 많이 나오고 일상의 흐름이 있어서 순서를 바꾸는 게 좋겠더라.

<달이 지는 밤>
<달이 지는 밤>

<달이 지는 밤>의 무당은 김금순 배우가, 죽은 딸의 혼령은 안소희 배우가 연기한다.

<아무도 없는 곳> 때 윤혜리 배우를 캐스팅하려고 그녀가 나온 옴니버스 장편 <한낮의 피크닉>(2018)의 단편 <돌아오는 길엔>을 보다가 엄마 역을 연기한 김금순 배우에게 완전히 꽂혔다. 처음 본 배우였는데 연기를 정말 잘하더라. <아무도 없는 곳>에서 정신이 온전치 않은 여자 역할을 부탁했다. 몇 컷 안 나왔지만,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었는데 역시나 좋은 에너지를 보여줬다. 그 역할과 <달이 지는 밤>의 여자가 닮았다. 단편 <메모리즈>에도 등장한 안소희 배우는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이 있는데 그게 유령이라는 존재와 잘 맞을 것 같았다. 몸의 선이나 움직임도 영적 존재를 표현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고. 죽음을 암시하는 춤사위처럼 보이기도 하는 목을 조르는 장면이나 걷는 장면의 리듬은 배우와 함께 이야기하며 만들었다.

 

앞서 말했듯, ‘경계’라는 테마가 중요한 영화적 관심사로 보인다. 죽음의 모티프와 혼령이 존재했던 <밤을 걷다>나 현실과 창작의 세계 사이의 경계를 이어보려던 <아무도 없는 곳>에 이어 <달이 지는 밤>도 그렇고.

<최악의 하루> 때부터였다. 만들어진 이야기와 이야기 밖의 세계를 이으려는 시도가 재밌더라. 영화에 여러 층의 레이어가 생겼다고 해야 하나. 관객이 내 영화를 보면서 좀 더 많은 걸 읽어낼 거라는 기대가 생겼다. 나로서는 돌파구를 찾은 느낌이다. 표면이 아니라 여러 겹을 둬 영화를 좀 더 깊이 봐주길 바랐다.

 

<조제> 이후 계획을 일러 달라.

우선 내년 2~3월쯤 <아무도 없는 곳>을 개봉하려 한다. 추울 때 봐야 좋은 영화다. 그다음 계획은 아직 구체적이지 않다. 드라마를 비롯한 제안을 검토하면서 다른 방식의 작업을 좀 더 살펴보려 한다. 만약 상업 영화를 한다면 장르 영화, 특히 범죄물을 해보고 싶다. 아니면 작은 예산으로 더 자유롭게 시도해보고 싶고. 무엇이 됐든 계속해서 만들어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겠지.

 

영화를 만드는 일을 나무를 심는 일에 비유한 적이 있다.

나무를 한 그루씩 심다 보면 언젠가 숲이 돼 있지 않을까. 작은 작업에 집중하는 내 나름의 명분이다. 꾸준히 작업하다 보면 나만의 시선도 생길 테고 성장도 할 테고. 그렇게 하다 보면 어떤 커다란 형태가 만들어지겠지. 하나의 큰 성취가 아니라 작은 게 모여 큰 덩어리가 되길. 그게 내가 생각하는 작업의 큰 방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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