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에>(장우진, 2018) 개봉을 앞둔 우지현 배우를 만났다. 제46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더스트맨>(김나경, 2020)을 상영한 직후이기도 했다. 겨울에 촬영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겨울밤에>와 <더스트맨>은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은 작품이다. <겨울밤에>에서 우지현은 이름 없는 남자로 등장해 영화에 묘한 긴장과 낭만을 불어 넣는다. 장면 하나씩만 떼어놓고 보면 사실적이지만 장면이 전환되고 연결되는 구조는 판타지에 가깝다. 한편 <더스트맨>에서는 트라우마를 간직한 홈리스 태산을 연기한다. 캐릭터만 보면 현실감을 채워내는 일이 가장 중요해 보이는데, 실제로 인물의 마음이 움직이며 영화에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은 무척이나 환상적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눈앞에 나란히 놓고서 우지현 배우가 거쳐 온 작업의 뒷이야기를 하나씩 들어보기로 했다. 여름보다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 그래서 촬영 때도 더위보다는 추위를 참을 만하다는 배우와 초겨울에 나눈 대화를 옮긴다.
지난 겨울에 만든 작품을 각각 영화제와 극장에서 선보인다. 특히 <겨울밤에>는 공개 이후 개봉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기에 배우로서도 감회가 남다를 거 같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참 추울 때 찍었다. 개봉한다고 해도 크게 설레거나 들뜨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소식을 듣고 나니 떨리더라. 촬영하는 동안에는 영화제나 극장 개봉까지 염두에 두는 편은 아니어서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건 어떻게 가능한가. 보통은 고생한 기억 때문에라도 어느 영화제에 가는지, 개봉은 언제 하는지 연연할 거 같은데.
물론 상영 기회가 주어지면 좋지만, 엄청나게 바라지는 않는다. 작업할 때는 일부러라도 미래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만드는 일 자체에 집중하면서 서로 만족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수상이나 개봉은 차후에 덤으로 얻는 거니까.
서로 다른 매력을 지닌 작품을 같은 시기에 만나다 보니 관객 입장에서도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작품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각 연출자와 어떻게 소통했고, 중점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부분은 뭐였는지 듣고 싶다. 장우진 감독과는 데뷔작인 <새출발>(2014)부터 함께한 깊은 인연이다. 김나경 감독과는 <더스트맨>으로 처음 호흡을 맞췄지만, 비슷한 시기에 영화를 시작한 또래 동료라는 점에서 통하는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김나경 감독님은 굉장히 정확한 분이다. 원하는 바도 뚜렷했고 이미 영화의 모든 요소를 촘촘하게 구상한 상태였다. 감독님과의 대화는 그런 정확함을 세밀하게 구현해내기 위해 맞추는 과정이었다. 감독님 머릿속에 명확한 플랜이 있기에 혼란스럽지 않았고, 그걸 잘 따라가며 한 장면씩 쌓아나가는 게 중요했다. 한편, 장우진 감독님과의 작업은 신기할 정도로 전체적인 상을 그리기가 어렵다. 그렇게 대화를 많이 하는데도 말이다. (웃음) 물론 감독님은 분명한 영화적 비전을 갖고 있지만, 배우로서는 어떤 영화로 완성될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현장에서는 너나 구분할 거 없이 이야기를 오래 나누는 편이다. 장면의 목표와 대화 흐름을 고민하고, 각자 자신이 경험했거나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일 중에 그 신에 어울릴 만한 좋은 디테일을 가진 이야기를 꺼내서 전부 펼쳐 놓는다. 그렇게 한참 대화를 나눈 다음에 각자 대사를 정리해 와서 리허설에 들어가는 방식이다.
장기 워크숍 같은 느낌이겠다.
그렇다고 공동창작이라고 말하기는 애매하다. 장우진 감독 역시 굉장히 확고한 기준에 따라 이야기를 선별하거든. <더스트맨>이 순간으로부터 영화 전체로 확장해나가는 과정이었다면, <겨울밤에>는 전체에서 출발해 순간순간을 찾아 나가는 작업이었다.


<더스트맨>의 태산은 혼자만의 시간에 갇혀 있는 인물이다. 자연스레 관계 맺기에 소극적이기에 그간 연기해온 인물 중 가장 가라앉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바로 좋아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멋있으니까. (웃음) 실제 나는 엄살을 좀 부리는 성격인데, 태산은 변명도 핑계도 일절 대지 않는다. 피를 흘리면서도 아픈 줄 모르고, 자신에게 스스로 형벌을 내리는 면도 있지. 인물에 대한 애정이 생겨서 대본을 보자마자 빨리 촬영하고 싶었다.
트라우마를 간직한 인물인 데다 홈리스이기에 현실감을 불어 넣는 것이 가장 중요했을 듯하다. 전사를 유추할 만한 장면이 거의 없고 감정 표현도 제한되어 있다. 자칫하면 유령처럼 붕 떠 보일 법한 캐릭터인데 안정적으로 연기하더라.
아무래도 어두운 인물이다 보니 운신의 폭이 넓진 않았지만, 태산은 곧 어둠이라는 식으로 단조롭게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둠 안에도 희로애락이 있지 않나. 맛있는 걸 먹으면 기쁘고 누군가와 함께할 때는 따뜻함을 느끼기도 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평소보다 더 슬프거나 화가 날 수도 있다. 좁은 폭 안에서도 여러 레이어를 가진 인물로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행복할 여지가 있다면 장면 안에서 더 행복하려고 노력했다.
김나경 감독은 “어떤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배우”라고 칭찬하더라. 연기는 물론이고 현장에 임하는 태도도 완벽했다고.
최대한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힘들고 지치는 건 순간인데, 지나고 나면 돌이킬 수가 없으니까. 그때 현장에서는 추위 덕을 좀 봤던 거 같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와 스태프가 굉장히 집중한 상태였다. 한 명이 흐트러지거나 퍼지면 많은 사람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고, 촬영이 지연되다가 누가 컨디션이라도 떨어지면 당장 내일 촬영에 문제가 생기니까. 현장에 살기가 감돌았다고 해야 하나. (웃음) 야외 촬영, 강추위, 일정 등 여러 가지가 영향을 주면서 예민한 기운이 조성됐고, 덕분에 나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을 수 있었다.
날이 바짝 선 분위기에 도움 받았던 부분을 좀 더 듣고 싶다.
슛을 들어갈 때 느껴지는 공기가 현장마다 다르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곳도 있고, 그런 공기가 전혀 없어서 힘든 곳도 있다. <더스트맨>은 팽팽하게 당겨진 실 같았다. 사실 누구든지 그걸 끊어버릴 수도 있었는데, 당시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일종의 안전망이 되어주었던 거 같다. 현장에서 힘들 때 가까이에 있는 촬영팀이나 조명팀을 돌아봤다. 그 사람들이 괜찮다는 걸 확인하고 나면 기운이 나더라. 그들 역시 지치다가도 배우들이 집중해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직 괜찮구나, 그럼 우리도 좀 더 할 수 있구나.’ 하며 힘을 내지 않았을까.
감독은 고생시켜서 미안하다는 이야기도 하던데.
많이 괴로우셨을 거다. 물론 영화가 감독 혼자만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감독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현장에 모이지 않나. 그들이 추위나 피로처럼 감독 본인도 어떻게 해결해줄 수 없는 고통 속에 있을 때, 포기하지 않고 욕심껏 영화를 찍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냥 테이크를 덜 가면, 오케이 사인을 내버리면 금세 편해지는 건 사실이니까. 감독님은 그런 부담감을 느끼면서도 필요한 고집을 부리며 끝까지 사람들을 이끌고 갔다. 완성된 영화를 보며 새삼 대단하다고 느꼈다.

심달기, 강길우 배우와 함께 연기한 경험은 어땠나.
언젠가 같이 연기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배우들이다. 이번 작품으로 처음 호흡을 맞췄는데, 연기하며 도움을 많이 받았다.
강길우 배우와는 실제로 무척 친하다고 들었다.
내가 많이 좋아하는 친구다. 길우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웃음) <명태>(이홍매, 2017)를 보고 반했다. 뭐랄까, 요즘에는 사방에 미움이 넘쳐나지 않나.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귀 기울여 들어주기보다는 곧장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거 같다. <명태>는 거기에 휩쓸리지 않고 선순환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마냥 밝고 따뜻한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뭔가를 애써서 시도하는 작품이기에 마음에 남는다. 그런 좋은 이야기를 강길우 배우가 좋은 얼굴로 완성하는 걸 보면서 감탄했다. 친하긴 해도 성격은 꽤 다르다. 나는 말도 많고 좀 까불대는 편이거든. (웃음) 길우는 참 어른스럽다.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며 쉽게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사실 길우도 본인이 얼마나 근사한지 아는데, 짐짓 모른 척하는 게 아닌가 싶다. (웃음)
한편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이 그림을 그리며 세상과 소통한다는 이야기는 일면 동화적이고,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리는 더스트 아트 자체에 이미 환상성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 연기하며 현실과 비현실, 일상과 환상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게 태산은 굉장히 리얼한 인물로 다가왔다. 홈리스라는 설정이 인물을 만들어내는 큰 줄기였고, <겨울밤에>처럼 영화의 구조를 고민하거나 인물의 실존 여부를 따질 필요도 없었다. 연기하면서도 비현실이나 환상보다는 사실적인 표현에 집중했다. 그래선지 그림을 그리는 장면의 경우, 시나리오 읽을 때는 오히려 별 감흥이 없었다. 나중에 영화를 보고 나서야 ‘오, 이렇게 보이는구나!’ 하며 감탄했지. 많은 관객이 그 장면을 매력적으로 봐주셨고, 나 역시 영화적으로 훌륭한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자칫 심각하게만 흘러갈 수 있는 분위기에 다른 정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장면이니까.
배우도 그림을 즐겨 그리지 않나. SNS에 만화를 그려 올리던데.
옛날에는 취미 삼아 이것저것 그렸는데 한동안 못했다. 빨리 아이패드랑 펜슬을 사고 싶다. (웃음) 영화에 나온 그림은 전부 준비된 시안을 바탕으로 완성했다. 자잘한 낙서 하나까지 감독님과 미술 감독님이 사전에 준비해오셨다.


장우진 감독과 영화를 만들 때는 인물의 실존을 놓고 많이 고민하나 보다.
<겨울밤에>에서는 물론이고, 따지고 보면 <춘천, 춘천>도 그렇다. 1부와 2부가 분명히 다른 이야기인데, 결국에는 하나의 영화로 엮여야 하지 않나. 그러다 보니 인물을 생각할 때도 연결에 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1부와 2부가 묶여서 딱 알맞은 한 그릇을 이뤄내려면 어떻게 연기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중요했다. <겨울밤에>에서도 나와 이상희 배우가 연기하는 젊은 남녀가 흥주(양흥주)와 은주(서영화)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할지 고민했다. 영화에 이들이 엉뚱하게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두 커플이 서로 닮았다면 어느 부분을 얼마나 비슷하게 보여줄지, 또 너무 닮으면 재미가 없으니까 어디쯤에서 거리를 둬야 할지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장우진 감독님과의 작업은 늘 그런 방식이다. 한 장면에서 보여줄 의미가 어느 정도 정해지고 나면 대화를 통해 인물의 디테일을 채워나간다.
앞서 말한 대로 전체에서 세부를 찾아가는 방식이다.
근데 그건 내게 맞는 방식이고, 사실 배우마다 장우진 감독이 대하는 방식이 전부 다르다. 이상희 배우는 한참 이야기를 듣다가도 어느 시점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난 그냥 지현이한테 집중해서 할 거야”라고 한다. (상희)누나는 순간순간을 정말 특별하게 느끼는 배우 같다. 폭포 장면에서 내 등에 앉았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애드리브였는데 너무 좋았지.
처음부터 끝까지 기묘하게 흘러가는 장면이다. 상당히 길게 이어지는 롱테이크인데 “나는 너한테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대사를 반복하며 감정을 고조시켜 나가더라.
촬영 전날 찾은 문장이다. 제일 중요한 순간에 그 대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촬영하다 보면 의외로 어려운 신이 첫 테이크에 오케이가 나는 경우가 있다. 연기하면서도 속으로 ‘지금이다! 왔구나!’ 싶지. (웃음) 폭포 장면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여기까지 잘 왔다고 생각하며 엎드렸는데 갑자기 누나가 등에 앉는 거다. 사실 1초 정도는 좌절했다. 장난치면 안 되는 타이밍에 왜 그러나 싶어서. 근데 1초가 지나니까 알겠더라. 이건 무조건 오케이구나. 지금 너무 좋은 순간이구나. 그 뒤에 둘이 눕는 것까지는 정해져 있었는데, 대화나 동작을 세세하게 약속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촬영 전에도 대사를 하나씩 맞춘다기보다는 인물이 놓인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는 편이다. 그 장면에서 장우진 감독이 무얼 필요로 하는지는 서로 알고 있으니까.
자유롭기에 도리어 중압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즉흥적으로 채워내고 반응해야 하니까.
배우가 많은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감독 덕분에 가능한 작업 방식이다. 장우진 감독은 원하는 바를 분명하게 제시하는 동시에, 배우가 지나친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현장 관리에도 충분히 신경을 쓴다. 연기가 잘 풀리지 않으면 초조해지기 마련인데, 장우진 감독은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려준다. <춘천, 춘천> 촬영 때는 “너만 괜찮으면 밤새 이 신만 찍어도 돼”라고 하더라. 마음으로 결정할 부분이 아니라, 셋업 자체를 그에 맞게 준비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춘천, 춘천>은 굉장히 소규모로 찍었고 하루 촬영 분량도 롱테이크와 브릿지 각각 하나 정도였다. 에너지를 회복할 시간이 넉넉하니 끝까지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더라.

장우진 감독과 작업을 이어가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서로 익숙해져서 함께한다기보다는 끊임없이 상대에게 새로운 매력을 느끼며 영화마다 다른 시도를 해보는 것 같다.
장우진 감독은 점점 더 내가 잘 모르는 곳으로 간다. <겨울밤에>를 시작할 때는 나름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세 번째니까 대화도 훨씬 수월해지고 작품에 관해서도 더 많이 이해하고 찍을 거라 여겼지. 근데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종국에 완성하고자 하는 영화에 관해서는 더 모르겠더라. 세부는 알겠는데 이것들이 합쳐져서 어떤 의미를 이룰지는 그려지지가 않는 거다. 지나고 보니 그게 좋은 상태인 거 같다. 자꾸 모르는 걸 같이 하자고 하는 장우진 감독이 좋고, 그런 작업을 놓치지 말아야지 싶다. 계속해서 의아함을 느낀다는 게 우리가 작업을 잘하고 있다는 방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멋진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는 믿음도 있지만, 무엇보다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라서 오래 함께하고 싶다. 배울 점도 많고 의지가 되기도 한다. 장우진 감독한테 여우같은 구석이 좀 있다. (웃음) 영리하게 상대를 살피고, 배우들이 작품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각각 다른 방식으로 배려해준다.
장우진 감독은 왜 그처럼 작업을 지속한다고 생각하나.
장우진 감독은 누군가와 함께 작업하기로 마음먹기까지 시간을 오래 쓰는 편이다. 배우도 그렇지만 촬영을 누가 할지, 사운드 믹싱을 누구에게 맡길지 하나하나 신중하게 고민한다. 그리고 결정한 다음에는 그가 한 명의 디자이너로, 존중받는 작업자로서 일할 수 있게끔 환경을 만들어준다. 물론 일방적 관계는 아니다. 감독 또한 그들이 빚어내는 성과를 영화적으로 누릴 테니까. 결국 나뿐만 아니라 이상희, 양흥주, 서영화, 박명훈, 김선영 등 함께 작업하는 배우마다 각각 다른 장점을, 감독이 영화에서 놓치기 싫은 무언가를 지닌 게 아닐까 싶다. 감독은 그렇게 맺은 인연을 잃지 않고 유지하면서 파이를 점점 키워나가고 싶어 하는 거 같다. 왜 나인지 물어본 적은 없지만, 어떤 이유로 내가 필요하다고 말하기보다 자연스럽게 나를 찾아줘서 좋다. “이제 나는 이런 영화를 만들 거고, 너는 이쯤에 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식이거든.
은주(서영화)가 “잘해줘요, 저 친구는?”이라고 물었을 때, 이상희 배우는 “좋은 사람이에요”라고 답하며 “착하고 순하고 좀 바보 같”다고 덧붙인다. 이 대사가 어떻게 나왔을지 궁금했다. 그게 바로 장우진 감독이 바라보는 우지현인가 싶기도 했고.
감독은 그 인물이 흥주의 과거이거나 혹은 흥주와는 다른 남자처럼 보이면 좋겠다고 했다. 싱그럽고 어리고 애 같은 사람. 그게 이름 없는 남자를 이루는 핵심 키워드였다. 영화에서 상희 누나가 그렇게 말해줬을 때 정말 고마웠다. 나는 장면 밖에 있는 상황인데, 그 대사를 통해 영화에 드러나지 않는 부분까지 내 것으로 가져가는 셈이니까. 누나가 내 연기에 방점을 찍어주는구나 싶더라. 그때 나는 촬영을 거의 마친 반면, 누나는 어려운 신을 남겨놓은 상황이었다. 아무 생각 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으면 “너는 다 끝났다 이거지?”라며 되게 얄미워했다. (웃음) 사실 영화에는 편집됐지만, 그 장면 뒤에 재밌는 게 많았다. 감독이 살짝 신호를 줄 테니 그때 다시 들어가라고 하더라. 내가 “가서 뭐해?”라고 물어보니 “그냥 너 하고 싶은 거 해”라는 거다. 이상희 배우와 서영화 배우가 대화를 길게 하는데,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 차례 가볍게 털면 좋겠다는 얘기였다.
순발력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화들짝 놀란 얼굴로 들어가서 밖에 멧돼지가 지나갔다고 말했다. 마치 내가 진짜 멧돼지를 본 것처럼, 아니면 그 남자가 멧돼지를 본 것처럼 말이다. 멧돼지가 ‘와다다다’ 달려갔다고 말하니까 서영화 선배님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셨지. 너무 예쁘고 귀여운 장면이었고 우리끼리 모니터하며 한참 웃었다. 영화 선배는 실제로 멧돼지를 본 줄 알았다더라. “지현 씨가 본 걸 인물이 본 것처럼 말한 거죠?”라면서. 이외에도 맥락상 편집되었지만 혼자 보기엔 아까운 장면이 많다. 개인적으로는 흥주와 해란(김선영)의 포장마차 신이 기억에 남는다. 뒤로 갈수록 ‘대환장 파티’가 벌어졌거든. (웃음) 해란이 노래를 듣고 싶다고 하자 흥주가 산울림의 ‘찻잔’을 부르는데, 둘이서 한 소절씩 주고받으며 능청스럽게 노래하더라. 그러다 의자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배우가 아니라 감독이 웃음을 못 참아서 NG를 낼 뻔했다.


장우진 감독과의 작업은 배우로서 감각을 환기하는 시간인 듯 하다.
맞다. 같이 여행 다녀오는 기분이다. 동시에 어느 작품보다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고 많이 준비해서 가야 하는 현장이다. 안 그러면 감독이 나한테 흥미가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웃음) 나중에 늙어서도 같이 영화 하자고 장난치듯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감독과 내가 서로에게 질리지 않고 계속해서 매력을 느끼면 좋겠다.
그동안 영화와 드라마, 독립과 상업, 장편과 단편, 주연과 조‧단역을 가리지 않고 연기해왔다. 시나리오와 캐릭터, 둘 중 무얼 더 중요하게 생각하나.
굳이 고르자면 시나리오다. 어떤 캐릭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는 편은 아니다. 물론 멋진 캐릭터를 연기하면 기분이 좋기는 한데, 사실 구석구석 들여다보면 모든 인물로부터 ‘좋음’을 발견할 수 있더라. 현재로서는 영화에 필요한 배우가 되기를 바라고, 영화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그 인물을 넘치지 않게 연기해내고 싶다.
최근까지 <뒤로 걷기>(방성준, 2020) <너의 기억>(김동식, 2020) 등 단편 작업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독립영화에도 단편 <이름들>(신이수, 최아름, 2013)을 꼽았더라.
아무래도 다른 매체나 플랫폼에서 만나는 작품보다 확실히 가깝게 느껴진다. 내가 겪거나 내 친구에게 벌어진 일을 보는 것 같아서 재밌다. 단편영화에는 패기나 혈기라고 표현하기엔 아쉬운 무언가가 있다. 막 나가는 영화를 보면 너무 좋지 않나. (웃음) “이렇게 만들면 왜 안 돼?”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영화. 그때 속으로 ‘그래, 영화는 저렇게 만들어야지!’ 하며 기뻐한다.
속 시원한 느낌이 있지.
맞다. 단편에서 예를 들고 싶은데 당장 떠오르는 영화는 <짐과 앤디>(크리스 스미스, 2017)다. 짐 캐리가 실존 인물인 코미디언 앤디 카우프만을 연기했던 기록을 바탕으로 만든 다큐멘터리인데, 재밌기도 하고 생각거리도 많이 던져준다. 도대체 배우란 어떤 존재인가 싶더라. 연기가 무엇이기에 저렇게까지 난리를 치는 걸까. (웃음)


지금 시점에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을까 싶었다. 최근 2-3년 동안 TV로 영역을 넓히며 단시간에 많은 현장을 경험했다. 여러 작업자와 교류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접하면서 자연스레 자신을 돌아보게 될 텐데.
한동안 내가 과연 어떤 군에 속한, 또는 어떤 종류의 배우가 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근데 내가 결정하거나 고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더라. 영화도 아주 우연한 계기로 시작했고, 지금까지 혼자만의 힘으로 온 것도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선택해줘서 가능했던 일이고, 때마다 함께해주는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눈앞에 오는 작업을 열심히 하는 것뿐이지 않을까. 근래 영화를 정말 안 보다가 <짐과 앤디>를 본 후에 다시 불이 붙었다. 좋은 영화를 찾아보면서 계속 새로운 자극을 받고 에너지를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많이 부족하다. 떠들고 보니 반성하게 되네. (웃음)
일에서 성취감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완성된 작품을 볼 때보다 현장에 있을 때 보람을 느낀다. 팀의 구성원이 되는 것에 관심이 많고, 맡은 일을 매끄럽게 해내고 싶다. 현장에서 나 자신을 잘 통제하고 관리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작업 자체를 미화하고 싶지는 않고, 작품을 마치고 나면 별로 미련을 갖지 않는 편이다. 열심히 하고 끝낸 후에는 또 새로운 걸 찾아가는 게 좋다.
<춘천, 춘천> 개봉 때 진행한 인터뷰에서도 “동료들이 같이 작업하고 싶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연기하며 만난 동료 중에 제일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은 누구인가.
이학주 배우와 대학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다. 오래된 친구이기도 하고 커리어 면에서도 비슷한 점을 공유하는 동료여서 대화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사실 학주가 나보다 늘 앞서갔고 지금은 격차가 많이 벌어지긴 했는데. (웃음) 어쨌거나 되게 유쾌한 녀석이라 만나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즐겁다. 무엇보다 안정감이 남다르다. 결국 같은 직군에 있는 사람과 주고받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 학주와는 그런 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의 폭이 넓다. 항상 많은 도움을 주는 친구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귀하게 느껴진다. 친구 중에 누가 잘 되면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 같이 배우고 많은 걸 나눈 사람이 인정받아서 기쁘고, 한편으로는 나도 열심히 하면 좋아하는 일을 맘껏 해볼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도 품게 된다.
대학에서는 연극을 전공했고 2014년 <새출발>로 영화를 시작했다. 연기가 아니라 영화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데뷔는 비교적 늦은 편이다. 이전까지 영화에 관심은 없었나.
관심이 없었다기보다는 잘 몰랐다. 나에게 같이 하자고 하는 사람도 없었고, 나 역시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몰랐던 거다. <새출발>이 큰 기회였고, 이후 명필름 영화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독립영화에 참여할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배우를 꿈꿨나.
영화를 많이 보긴 했는데, 배우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거 같았거든. 막연하게 이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근데 고등학생 입장에서는 연출이 무슨 일을 하는지 촬영이 뭔지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지 않나. 가능하면 여러 전공을 경험해보고 싶어서 찾던 와중에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를 알게 됐다. 당시에는 전공이 세분화되지 않아서 학점을 채우는 대로 정해졌거든. 집에는 드라마 피디가 되겠다고 ‘뻥’ 치고 입학했다. 신입생 환영 공연이 4편이나 됐는데, 그때 살면서 처음으로 무대 공연을 봤다. 별천지에 왔구나 싶더라. 1학년 1학기 때는 연극 수업을 듣고 2학기부터는 영화를 공부할 계획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계속 연극을 했다. 사실 군대 가기 전까지는 무대에 서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날 배우라기보다는 ‘일 열심히 하는 애’ 정도로 생각했고 오디션에서도 계속 떨어졌다. 제대한 다음부터 차츰 무대에 설 기회가 생겼다.
영화에 관심을 가진 특별한 계기가 있나.
어릴 적에 문근영 배우의 팬이었다. 팬클럽 ‘근영 엔젤스’에 가입해서 매일 인터넷 카페를 드나들며 응원했지. (웃음) 그러다가 <장화, 홍련>(김지운, 2003)을 보고 그때부터 영화에 재미를 붙였다.
좋은 사람이 되는 과정에 연기가 영향을 미친다고 얘기했더라.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배우가 생각하는 연기의 좋은 점은 무엇인가.
작품을 통해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다. 연기는 그걸 내 것처럼 느끼면 느낄수록 좋은 일이고, 누군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과정이다. 그 시간을 살다 보면 결국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란 별로 없구나 싶어진다.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는 건 어떤 면에서 되게 피곤할 거 같기도 한데.
타인을 이해하는 게 힘들다기보다는 오히려 나랑 싸우는 시간이 괴로웠다. 나 자신을 인정하고 다독이는 대신 괴롭히는 시간이 길었거든. 그러고 보면 영화가 나한테 많은 걸 줬다. 크고 작은 결실을 봄으로써 자신을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런 여유 덕분에 인물을 바라보는 눈도 좀 더 깊어졌다. 이 순환을 거치면서 조금씩 좋은 사람에 가까워지고 있지 않나 싶다. 관심 없던 것에 눈길이 가고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를 고민하면서 말이다. 일례로 예전에는 플라스틱 사용에 관해서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요즘은 쓸 때마다 의식하며 가급적 줄이려고 노력한다. 작품에도 영향을 받고, 연기하며 만나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받는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런 작은 지점이 모이면서 천천히 바뀌어 나간다. 아, 생활에서 묘한 만족감을 느끼기도 한다. 일반 직장인과는 다른 패턴으로 사니까. 학교 다닐 때 조퇴하고 낮에 집에 들어가면 되게 좋지 않나. 말하자면 나는 자주 조퇴하며 사는 사람인 거다. (웃음)
대신 야근도 많지. 야간 자율학습이라고 해야 하나. (웃음)
맞다. 고생할 때는 몰아서 고생하니까. 그래도 내일 뭘 할지, 일 년 후에는 어떻게 살지 정해진 것이 없는 상태가 주는 흥분과 설렘은 항상 있다.


동시에 초조함도 클 거라 짐작한다. 배우 역시 넓게 보면 프리랜서 아닌가.
고용불안이 심각하지. (웃음) 근데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한결 낫더라. 배우로 사는 동안에는 줄곧 따라다닐 문제라고 받아들이니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나뿐만 아니라 또래 동료와 선배들 역시 불안해하긴 마찬가지더라. 새로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고민이다. 일을 통해 누리는 즐거움과 일하고 받는 임금에는 이런 괴로움까지 포함된다고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목표가 확실해지더라. 가끔은 조급해지기도 하고 벅차기도 한데, 그래서 더 재밌기도 하다. 이 악물고 해보고 싶다.
며칠 전에 <마우스>(tvN) 캐스팅 기사가 나왔더라. 촬영은 언제부터 들어가나.
이제 막 시작했다. 내년 2월에 방영될 예정이라 몇 달 동안 촬영이 이어질 거 같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에도 합류한 거로 안다. 원작 웹툰에는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를 맡았다고.
우신이라는 인물로 주인공인 온조의 아빠와 한 부서에서 근무하는 소방관이다. 좋은 작품에 참여해서 기쁘다. 공개될 때까지 기대하며 지켜봐 주시면 좋겠다. 많은 분의 도움으로 이만큼 왔으니 내년에는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열일’ 행보가 이어질 듯한데, 앞으로의 속도와 방향을 그려 본다면.
여유를 가지면서도 바쁘게 살고 싶다. 사실 일만 계속하면 걱정 없이 사는 성격이거든. 일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차이가 큰 편이다. 일하지 않을 때도 나름대로 시간을 야무지게 활용하며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배우들이 있는데, 나는 그러기가 쉽지 않더라. 연기 외에는 재밌는 일도 딱히 없고 현장에 있는 시간이 제일 좋다.
내게 왔으면 싶은 배역이나 이야기가 있나.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를 꼭 해보고 싶다.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건 어떨지 궁금하다. 아무래도 배우로서 짊어져야 할 무게가 다를 거 같은데, 그 무게에 짓눌려보고 싶다. (웃음) ‘너 이거 진짜 할 수 있겠어?’ 하며 나 자신에게 도전 과제를 주는 작업이 될 거 같다. 다른 하나는 복싱 영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는데, 언젠가는 ‘피 땀 눈물’이 섞인 작품을 만나고 싶다. 실제 경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싫거든. 누군가를 때리거나 누군가에게 맞는 상황 자체가 받아들이기 힘드니까. 근데 링 위에서 복싱하는 순간에 대한 로망은 있다. <블리드 포 디스>(벤 영거, 2016)와 <주먹이 운다>(류승완, 2005)처럼 인물이 의지를 다져서 단순명료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에 끌린다.
실존하는 복서를 연기하면 되겠다.
와! 그럼 진짜 행복하지. (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