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 연출됐다. 독립 다큐멘터리를 위한 영화제에 각종 응원 도구를 구비한 관객들이 몰려든 것이다. 박윤진 감독의 첫 장편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유명 배우를 향한 팬덤 못지않은 열기로 영화제 분위기를 달궜고, 열띤 분위기는 이후 열린 다른 영화제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놀랍고 생경한 풍경을 만들어낸 주인공은 1999년 서비스를 시작한 넥슨의 세 번째 출시작 일랜시아의 유저들. 일랜시아는 2008년 마지막 업데이트를 끝으로 개발진과 운영자마저 방치한 게임이지만, 이들 유저에게 일랜시아는 과거의 문이 아니라 미래의 창이었다. 박윤진 감독 또한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세계, 일랜시아의 골수 시민이었다. ‘내언니전지현’이라는 아이디로 16년 동안 일랜시아를 일궈온 감독은 이제 카메라를 들고 유저들을 찾아 이렇게 묻는다. 왜 아직까지 일랜시아를 하는가?
일랜시아는 사냥과 전투 위주였던 MMORPG(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와 달리 낚시, 요리, 조각 등 실생활과 가까운 다양한 퀘스트를 비중 있게 심어놓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용자가 원하는 대로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는 것도 당시엔 참신한 시도였다. 현실에 더욱 밀착해 있으면서 높은 자유도를 지닌 일랜시아에서는 “사냥을 하다 요리를 하고, 요리를 하다 낚시도 하고, 낚시를 하다 사냥도 했다.” 게임의 세계관에 따르면, 일랜시아는 카오스가 삼켜버린 지구를 떠나 고대인들이 이주한 새로운 대지였다. 유저들은 현실에서 감히 실행하지 못한 것을 게임을 통해 맛봤고, 더 나아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꿈꿨다. 쇠락한 게임을 놓지 못하는 소규모 유저들은 그러니까 아름다운 몽상가인가. 그들에게 일랜시아는 절대로 뺏길 수 없는 이상의 모태인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운영자가 떠난 자리에 사냥, 채집 등을 반복적으로 자동 수행하는 매크로가 똬리를 틀었다. 일랜시아에 각종 불법 매크로가 성행하고 있음을 영화는 초반부터 가감 없이 드러낸다. 매크로 사용법을 세세히 보여주면서 사람 대신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컴퓨터를 화면 가득 담는다. 일랜시아가 어느 정도로 망가졌는지 강하게 자조하는 이 장면이 실은 시대에 대한 환멸의 비유임을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다. 매크로가 집어삼킨 일랜시아는 더 이상 허튼짓을 용납하지 않는다. 캐릭터 육성의 루트는 정해졌고, 모두가 그 길을 따라 최고의 자리에 오르려 한다. 이상을 품었던 대안의 장소는 어느새 현실 세계와 똑 닮은 공간으로 변질됐다.
누가 일랜시아를 한순간에 오염시켰는가. 영화는 섣불리 단정하지 않는다. 대신 매크로를 돌려서라도 살아남고자 했던 유저들에 주목한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성취를 어떻게든 맛보고 싶은 그들의 마음은 떠나간 유저들의 바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매크로를 돌린 만큼 수치가 오르고, 캐릭터는 강해진다. 현실의 금수저들을 보며 좌절하던 젊은이들에게 일랜시아는 시간과 노력을 쏟은 만큼 성장하는, 정직하고 공정한 세계다. 계획을 세우고 (루트를 짜고), 곧바로 실행하면 (매크로를 돌리면) 대가가 응당 돌아온다.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 이곳에서 그들은 현실의 허기를 가까스로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고급 매크로를 소유하여 일랜시아의 금수저가 된 유저들, 하지만 일랜시아는 얼마 안 되는 그들만의 일랜시아다.


<기생충>(2019)의 기택과 기우는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워 바디>의 자영과 현주는 왜 계속 달리는 것일까. 빈부의 공고한 격차에 관해 언급한 많은 영화들이 떠오를 무렵, 게임과 현실을 오가며 길드원의 이야기를 듣던 감독이 카메라 앞에서 목소리를 낸다. 이 선택은 악순환이 더는 반복돼선 안 된다는 의지의 충동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랜시아 유저들이 매크로가 지배하는 사이비 현실의 논리에 희생당하지 않고, 위대한 환상의 진리를 다시 품을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마지막까지 현실/가상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된 새로운 커뮤니티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참고로 개봉 버전에서는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상영된 이후 벌어진 현실 속 변화도 추가됐다.
내언니전지현과 나 People in Elancia 제작 백선우 감독 박윤진 출연 박윤진 외 배급 호우주의보 제작연도 2020년 상영시간 86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20년 12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