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관, 장건재 두 감독이 만났다. 올해 무주산골영화제가 기획‧제작한 장편 옴니버스 <달이 지는 밤>(2020)이 가교였다.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충실히 다지고 섬세하게 확장해온 두 감독은 특유의 관심과 고유한 미감으로 그들만의 ‘무주’를 그려낸다. 파트1에 해당하는 김종관의 영화에서 무속인 엄마(김금순)와 죽은 딸(안소희)은 기억과 환영의 힘으로 접촉하고 대면하는데 상실과 비애의 정서는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파트2에 해당하는 장건재의 영화는 군청 공무원인 민재(강진아)를 중심으로 무주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 무주를 훌쩍 떠난 사람, 무주로 결국 돌아온 이들을 한데 불러낸다. 김종관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여지저기 어른대는 죽음의 그림자를 예민하게 포착하지만, 그 방식이 사뭇 달라 보는 이의 흥미를 더한다. 서울독립영화제를 찾은 장건재 감독에게 먼저 만남을 청했다. <달이 지는 밤>의 작업 과정뿐만 아니라 앞으로 내놓을 기획에 관해서도 두루 들을 수 있었던 자리였다.
<달이 지는 밤>은 <한여름의 판타지아>(2014) 이후 꽤 오랜만에 선보인 연출작이다.
<한여름의 판타지아> 이후 첫 작업이라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작품이다. 무주산골영화제가 기획한 큰 틀 안에서 일정을 잘 맞춰 완성하고 싶었다. 과욕은 부리지 않되 할 수 있는 걸 해내는 게 목표였다. 김종관 감독에게도 누가 되지 않도록 나름 부지런히 움직였다. 근 몇 년간 눈여겨봐 온 배우들, 스태프들과 함께 작업할 수 있었다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강진아와 곽민규, 한해인. 스타 캐스팅이다. (웃음)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민휘 음악감독도 합류했다. <회오리바람>(2009) 때 호흡을 맞췄던 장철호 사운드 슈퍼바이저와도 10년 만에 재회했다. 그만큼 작업의 만족도가 높았다. 또 40대 들어 만든 첫 작품이기도 하다. 김우리, 윤희영 피디와 했던 말이 있다. “고되다.” (웃음) 20, 30대 때 하던 것처럼 스케줄을 짠다면 영화를 온전히 만들 수 없겠더라. 그걸 잘 인지하고 작업하는 게 중요했다. 내 몸과 마음의 상태가 변화한 상황에서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준비해온 차기작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다.
독립영화 작업을 한 뒤 상업영화를 만들려고 시도했으나 꽤 오랫동안 작업을 못한 재능 많은 동료들을 굉장히 많이 봤다. 나는 그렇게 하지 말자고 생각해 의욕적으로 독립영화 작업을 해온 면이 있다. 그러다 내 나름의 대중적 확장을 시도했는데 4~5년의 세월이 확 흘러가 버렸다. 감독으로서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영화를 계속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때에 무주산골영화제 조지훈 프로그래머로부터 작업을 제안 받았다. 평소에 표현을 잘 못했는데 정말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영화제 기획 하에 진행된 프로젝트다 보니 약간의 가이드라인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무주에서 촬영하고 무주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이야기를 고려해주면 좋겠다 정도. 많은 게 열려 있었다. 우리 팀은 그런 고려 사항을 적극적으로 수용해보자는 쪽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무주 구천동에 가본 적이 있고, <한여름의 판타지아>로 무주산골영화제를 찾은 적이 있다. 나에게도 무주는 여전히 낯설지만, 그럼에도 외부자의 시선이 아니라 내부인의 시선으로 이야기 해보고 싶었다.


무주의 인상은.
느긋함이랄까.
“여기 있는 놈들 느려 터져서 세상 물정 하나 모른다”는 민재 엄마의 말도 그렇게 나온 건가. (웃음)
실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내 감각으론 무주가 분지 같았다. 산으로 빙 둘러싸여 있고, 지나는 길목에 있는 곳이 아니어서 일부러 찾아 들어와야 하고. 부침과 변화와는 거리가 먼, 그래서 보수적인 면모가 짙을 것 같고. 그런 곳에서 아주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딸 민재를 키워온 엄마가 할 법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유달리 부지런했던 남편이 남긴 과제를 수행하며 살아가는 여인 아닌가.
무주라는 공간을 두고 인물과 이야기를 발전시켜나간 작업의 과정이 궁금하다.
일단 무주로 헌팅을 하러 가서 현지 분들을 만났다. 이야기를 듣다 관심이 생기면 그에 관해 더 말해 줄 수 있는 분을 소개받아 만났다. 무주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다니고 경청하는 과정이었다. 또 현지 사정을 듣기에는 그곳 공무원분들이 제격이었다. 그 과정에서 무주군 복지과에서 일하는 여성 공무원 한 분을 알게 됐는데 그분이 민재의 모델이 돼 줬다. 감사한 마음도 있었고 영화에 어떻게든 그분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서 성함을 가져다 썼다. 공무원을 그만둔다는 박가영 씨가 바로 그분이다. 아, 실제로 그만두신 건 아니다. (웃음)
촬영은 언제 시작했나.
지난해 8월에 8회 촬영으로 마쳤다. 김종관 감독은 작년 겨울에 촬영을 진행했다. 내가 찍은 영화에 답신과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씀한 적이 있는데. 영화제와 논의 끝에 최종적으로는 겨울을 배경으로 한 김종관 감독의 영화가 앞에, 여름을 배경으로 한 내 영화가 뒤에 오게 됐다. ‘흔적’이라는 의미의 영문 제목 ‘Vestige’는 김종관 감독님 아이디어고, 한글 제목 ‘달이 지는 밤’은 내 아이디어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도 나라국제영화제의 제안으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특정 공간으로 들어가 현지 사람들과 교감하며 영화의 얼개를 만들고, 또 비전문 배우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번 작업과 유사하다.
외형적 조건 때문에 비슷해 보일 수 있겠으나 돌이켜보면 <회오리바람>(2009) 이후, <잠 못 드는 밤>(2012)부터 시도한 내 작업 방식의 연장이다. 전문 배우든 비전문 배우든 또 현지 리서치 과정에서 만난 분이든 결국 나는 사람 이야기에서 영화적 서사를 시작한다. 배우들과도 그렇게 작업하고 있다. 내게 시나리오는 그저 간단한 스케치에 불과하다. 누구와 작업하느냐에 따라 많은 게 변하고 또 바뀐다. 이번에도 내가 시도해온 방법으로 접근했다. 공교롭게도 <한여름의 판타지아>와 <달이 지는 밤>이 여름 배경에 시골 마을에서 찍었고 공무원도 등장해 비슷해 보일지 모른다. <한여름의 판타지아>가 이룬 결실이 있다 보니 혹시라도 내가 그것에 기대고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하고 경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두 영화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
말한 대로 현지 주민, 공무원들이 영화에 출연한다. 비전문 배우와의 작업이 주는 기쁨이 큰 것 같다.
점점 더 그렇다. 그 방식이 제대로만 작동한다면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가 열린다. 어떻게 그걸 계속할지 여러 방법을 탐구하고 있다.
현지답사 때 영화의 많은 부분이 결정됐겠지만, 무주로 떠나기 전 이번 작업을 통해 시도해보고 싶은 게 있었을 텐데.
이 프로젝트와 무관하게 그즈음 내가 관심 두고 있던 게 있었다. 영화에서 죽음의 요소를 가시적으로 사용하는 방법, 유령과 같은 존재를 드러내고 퇴장시키는 방식이었다. 현지에서 찾은 기초 재료에 그 당시 내 관심을 더했다. 한쪽에는 목가적 풍경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시골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들이 만나게 되는 헤어진 친구, 사별한 가족의 이야기가 있다. 장르적 긴장은 아니라도 영화적 긴장 정도는 만들고 싶었다.
죽음과 유령을 그리는 방식에 있어서 시도한 게 있다면.
일상의 시공간에 짙은 비애감으로 죽음을 들여오기보다는 만남의 방식으로 죽음을 등장시키고 싶었다. 아주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고 사별한 남편과 만나는 식이다. 환상적인 설정이나 표현이라기보다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엔딩의 몹신이 대표적이다. 리서치 과정에서 과거 그 고장에 있었던 죽음에 관해 알게 됐다. 어느 해에는 홍수로 사람들이 죽었고, 또 다리가 건설되기 전인 어느 해에는 배로 등하교를 하다가 배가 뒤집혀 많은 학생이 죽었다는 이야기 등이었다. 그곳의 여러 죽음, 그 유령들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모두 불러들여 이 영화의 관객과 만나게 하고 싶었다. 관객을 마중 나온 듯 보였으면 했다. 애초에는 이 사람들 대신 반딧불을 촬영해 넣을 계획이었는데. 아, 정말 반딧불은 찾아보기도 촬영하기도 쉽지 않더라. (웃음)


중심인물인 민재는 가족, 친구, 애인 사이에 어른대는 죽음의 그림자와 마주한다.
민재는 무주가 아닌 도시로 가서 살 수 있었을 텐데 다시 무주로 돌아와 지역 공무원으로 일하며 엄마와 사는 인물이다. 매 장면에서 민재가 사람들을 만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하나의 플롯으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하루 정도에 해당하는 민재의 시간을 그리며 민재가 사는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삽화처럼 보여주고 싶었다. 강한 플롯으로 서사가 전개되지 않더라도 그들 사연에 깊이가 있어 관객이 계속해서 보고 들을 수 있길 바랐다.
강진아 배우의 건강하고 밝은 에너지가 활기차고 귀엽고 낙천적인 민재를 만들어 낸 것 같다.
<태어나길 잘했어>(최진영, 2020), <한강에게>(박근영, 2018)를 비롯해 단편 작업을 꾸준히 봐와서 강진아 배우의 존재감은 익히 알고 있었다. 실제로 만나보니 배우로서 영화에 좋은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굉장히 강한 분이더라. 의욕도 넘치고 자기 작업에 관한 문제의식도 확실하고. 아, 내가 진아 씨의 걸음걸이를 특히 좋아한다. 거의 모든 영화에서 시그니처처럼 그 걸음걸이가 나온다. 디딤발을 꾹꾹 내디디며 호쾌하게 걷는 모습이란. (웃음)
촬영을 전공하기도 했고 동료들의 영화에 촬영감독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카메라를 어디에 두고 어떻게 찍을 것인가에 누구보다 민감할 것 같다.
엄격한 원칙을 세워 두지는 않지만, 인물들이 하는 말을 어디서 들었을 때 그 내용뿐 아니라 그들의 에너지를 가장 잘 듣고 느낄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표준 렌즈를 선호하는 나로서는 카메라와 인물 사이의 거리감이 남아 있는 이슈다. ‘적당한’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바로 그 거리감 말이다. 촬영감독 역시 개별 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나와 촬영감독이 비슷한 감각으로 거리감을 생각한다면 작업이 더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윤희에게>(임대형, 2019), <비밀의 정원>(박선주, 2019)을 작업한 문명환 촬영감독과는 호흡이 잘 맞았다. 특히 그가 작업한 단편 <미열>(2017, 박선주)의 촬영이 인상적이었다. 카메라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가 결정되면, 이후 컷을 나눠서 갈지 여부를 생각한다. 이번에는 컷 수 자체가 많지 않지만 몇몇 대화 신에서 컷을 나눴다. 조금 더 유심히 그 부분을 들어주길 바랐다. 또 전에 없던 클로즈업을 쓰기도 했다.
영화 초반, 민재의 친구 경윤(한해인)의 얼굴 클로즈업이 대표적이겠다.
그때 경윤이 말한다. “항상 될 거로 생각했어. 근데 안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다른 게 보여. 다른 걸 생각하는 거지 내 인생에서.” 지난 4년간의 나를 돌아보며 각혈하듯 쓴 대사랄까, 하소연이랄까. (웃음) 그 역할에 한해인 배우를 꼭 캐스팅하고 싶었다. 내가 해인 씨가 유령으로 등장하는 <밤의 문이 열린다>(유은정, 2018)를 굉장히 좋아한다. 우리 영화에 모셔서 내 속내를 전하는 인물로 그려보고 싶은 나름의 야심이 있었다. (웃음)


정서적으로 좀 더 집중해줬으면 하는 바가 있나.
체념의 정서랄까. 절망은 아니고 ‘C'est La Vie’(그것이 인생이다), ‘Let It Be'(순리에 맡겨라)에 가깝다. 앞서 언급한 경윤의 대사를 생각해보면, 한 우물만 깊게 파본 사람이 더는 그 우물을 팔 수 없겠다고 깨달았을 때 비로소 할 수 있는 말이다. 나 스스로도 그렇게 되길 바라면서 그 대사를 썼던 것 같다. 물론 깨달음은 뒤늦다. 살아서는 깨달을 수 없기도 하고. 순리대로 살아가려는 태도가 인물에게서 느껴졌으면 했다. 죽음을 비극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사라지듯, 돌아가듯 생과 죽음이 서로 수렴하는 이야기이길 바랐다.
올해 또 다른 시도와 결실이 있었다.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한 신동민 감독의 데뷔작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2020)가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김정은 감독의 단편 <야간근무>(2017) 때 총괄 프로듀서를 경험했지만, 장편은 이번이 처음이다. 신동민 감독은 내 제자이기도 하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의 세 번째 이야기 <희망을 찾아서>를 지도했다. 신동민 감독 얘기를 들어보니, 그동안 영화제에 단편을 여럿 출품했지만 단 한 번도 선정된 적이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그간 작업한 걸 다 보자고 했다. 살펴보니 관통하는 주제가 있었다. 바로 어머니였다. 그중 세 편을 묶어 보자고 제안했고 그게 지금의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다. 두 달 정도 편집을 같이했다. 근래 했던 작업 중 가장 집중하고 공들인 경우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신동민 감독이 수상했을 때 사실 현장에서 말 그대로 펑펑 울었다. 내 영화로 상을 받아도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는데 정말 뛸 듯이 기쁘더라. 뭔가 함께 완수했다는 기쁨이 컸던 것 같다. 이 일이 내게는 올해 겪은 가장 큰 사건이다. (웃음)
옆에서 지켜본 신동민 감독의 장점이라면. 특히 무엇이 좋았는지.
이 영화는 신동민 감독의 비극적인 가족 이야기다. 하지만 배우로 출연한 감독의 어머니와 신동민 감독 모두 삶의 희극과 비극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품위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숭고함, 그 태도를 정말 많이 배웠다. 신동민 감독은 깊이 있는 시선을 가진 감독이다.
<달이 지는 밤>의 개봉 계획도 있나.
무주산골영화제 측에서 작게라도 개봉을 시도할 것으로 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작업을 좀 더 다듬어 12월 중에 중편으로 완성할 계획이다.
준비하는 또 다른 재미난 프로젝트가 있다면 귀띔해 달라.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쓴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기』의 판권을 구매해 현재 번역 작업에 들어갔다. 그의 책을 읽고 싶은 마음에, 또 내가 하는 작업과 그의 작업 방식이 맞닿아 있는 면이 큰 것 같아서 내가 소속돼 있는 제작사 모큐슈라에 출판업을 추가해버렸다. (웃음) <친밀함>(2012), <해피아워>(2015) 등 그의 영화를 워낙 좋아한다. 내년 9월 출간이 목표다. 그의 신작을 비롯해 전작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으면 한다. 상황이 허락되고 기회가 닿는다면 감독도 초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