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과 서먹한 두 남자, 오직 이 설정만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친절한 설명과 익숙한 방법에 기대지 않고,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옅은 감정과 짧은 대화와 무심한 시선만으로 영화가 완성될 수 있을까. <방문객들>은 그럴 수 있다고 믿는 모험적이고, 사려 깊은 작품이다. 민석(허중회)의 아버지와 수호(이상욱)의 어머니는 재혼해서 태국으로 떠났다. 호주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민석은 당장 머물 곳이 없어 할머니가 살던 빈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이제 막 군대를 전역한 수호가 이 집에 찾아온다. 달리 갈 곳 없는 두 사람이 빈집에서 며칠간 함께 지낸다는 것이 설정의 거의 전부인 이 영화는 별다른 정보도 알려주지 않은 채 그저 두 사람의 시간을 차곡차곡 담는 데 집중한다. 수호가 가끔 질문을 던지지만, 민석은 대답을 잘 하지 않는다. 둘은 말없이 밥을 먹고, 멀찍이 떨어져 앉아 텔레비전을 본다. 둘 사이가 진전될 여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몇 번의 낮과 밤이 반복되면서 둘 사이에선 잔잔한 친밀함이 생겨나고, 집의 공기 또한 변화한다. 그 과정을 천천히 따라가는 <방문객들>은 선한 마음과 고독한 시간, 둘 다를 아낄 줄 아는 영화다.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을 졸업한 최혁진 감독의 첫 번째 장편으로, 서울독립영화제 본선 장편경쟁 부문에서 처음 상영된다.
두 남자가 등장인물의 전부인 영화를 만들었다. 졸업 작품인가.
맞다. 작년 여름에 이 영화를 찍고 올 2월에 졸업했다. 워낙 규모가 작아 영화제에서 상영될 것으로 생각지 못했는데 감회가 새롭다. <방문객들>은 두 가지 경험이 합쳐지면서 시작된 영화다. 내가 성인이 되고 부모님이 이혼하셨는데, 어느 날 어머니 남자친구분의 아들과 밥을 먹게 됐다. 그 친구는 휴가 나온 군인이었고, 서로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어색하게 커피 마시다가 헤어졌다. (웃음) 다른 하나는 중학교 동창과 관련된 일이다. 소위 좋은 대학을 나왔는데 EDM에 빠져 한참 열심히 음악을 하던 친구가 갑자기 호주에 간다고 하더라. 거기서 의류회사 매니저까지 하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모습을 보며 당시 내 고민을 겹쳐보게 됐다. 나도 곧 학교를 졸업할 텐데, 아무도 날 안 찾아주고 일도 없으면 어떡하지 싶었을 때니까. 그런 사람이 잘 모르는 누군가와 원치 않게 함께 있는 상황을 떠올린 게 출발이 됐다.
크레디트엔 각본도 따로 쓰지 않았다. 반면, 서울독립영화제 홈페이지엔 최혁진, 류한규, 허중회 세 사람의 이름을 각본에 올렸더라.
처음에 내가 써 놓은 시나리오가 있었다. 그런데 졸업 심사에서 선정되지 못했고, 담당이신 박기용 교수님께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새로운 방법으로 영화를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존 카사베츠나 짐 자무시처럼 자유롭고 느슨하게, 배우들과 함께 만들어 나가보라는 말씀이었다. 원래 관심을 갖고 있던 방식이라 도전해보게 됐다. 그래서 빈 집에 두 남자가 찾아온다는 설정만 만들어두고 하나씩 찾으며 영화를 찍었고, 조감독으로 참여해준 한규 형과 민석 역할을 맡은 허중회 배우와 이야기하며 내용을 채워나갔다.

허중회 배우와는 영화의 출발을 함께했나 보다.
서울 외곽에 있는 가옥에서 영화를 찍고 싶어 집을 수소문했는데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원래 알고 지낸 사이인 허중회 배우가 내 이야길 듣고 자기 할머니 집이 생각났다며 가보지 않겠냐고 하더라. 충북 음성에 있는, 할머니가 요양원에 계시느라 2년째 비어있는 집이었다. 처음엔 분주한 사람들 사이에서 주인공이 혼자 고립되어있는 느낌을 생각했다가, 아예 시골에 뚝 떨어져 있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그곳에서 촬영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허중회 배우의 이야기가 들어오면서 함께 영화를 만들게 됐다.
수호 역의 이상욱 배우는 어떻게 찾았나.
처음부터 비전문 배우를 찾으려 했다. 막 전역해서 기쁘긴 하지만, 막상 사회에 나와서는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과 감정을 연기로 만들 수는 없을 것 같더라. 그래서 고등학교 선생님께도 연락해보고 커뮤니티 사이트에도 올려봤다. 지원은 계속 받았지만 아무래도 계속 연기를 해온 분들이 많아 망설였다. 그러다 상욱 씨가 보낸 장문의 메일을 받게 됐다. 예전부터 영화를 하고 싶었다고, 이제 전역했는데 참여해보고 싶다며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삼천포에 산다기에 서울에 올 수 있겠냐고 했더니 바로 올라왔고, 만난 자리에서 수호가 담배를 피우는 설정이 있어서 담배도 연습해왔다고 하더라. (웃음) 뭔가 순수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야기 나누다 바로 같이하자고 했다. 이상욱 배우는 연기를 아예 처음 해보는 거였고, 그러다 보니 더욱더 열린 영화로 밀어붙여 보게 됐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욱 씨가 더 편하게 잘 해줬다. 나 같으면 그렇게 못했을 거다. (웃음)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공간, 다른 풍경에서 작업하게 됐다. 그곳에서 느낀 것들이 영화에 반영되었을 텐데.
음성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산다. 특화 지역으로 지원도 많다. 시내에 나가면 태국 마트가 있을 정도다. 생경한 풍경 앞에서 왠지 운명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 큰 기대를 안 했는데, 막상 가보니 “와, 이런 데도 있어?” 싶었던 거다. 또 충주와 청주 사이에 있다 보니 발전도 잘 안 되어있고, 집도 텅 비어있어서 그런 상태를 활용해보고 싶었다. 잡초 베는 걸 찍는다든지. (웃음) 집 주변에는 젊은 사람이 아무도 없고, 시내에 나가려면 버스 타고 1시간을 가야 하는데, 그게 동시에 평화롭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온 인물이 마음의 평안도 찾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길 바랐다.

집과 동네에 대한 민석과 수호의 다른 반응이 흥미롭더라.
맨 처음 그곳에 갔을 때 기차 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정말 멀리서 기차가 지나가는데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린다. 도시처럼 빌딩이 없으니까 진동이 막힘없이 전달되는 거다. 민석은 어렸을 때부터 익숙하게 지냈던 곳이니까 그런 것에 별 감흥이 없을 텐데, 바닷가에서 살았던 수호에겐 모든 게 신기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이상욱 배우가 어촌마을 출신이기도 하다. 또 이제 막 사회에 나왔으니까 생각도 많을 거고.
여름이라는 계절도 처음부터 중요하게 고려한 요소였나.
현실적인 여건상 여름에 찍어야 했다. (웃음) 처음엔 겨울을 생각했다. 겨울을 좋아하고, 눈 오는 장면을 한 번은 찍고 싶었으니까. 대신 비 오는 풍경을 담게 됐다. 정해놓은 게 없었으니 비가 오면 “잘됐다” 하면서 찍었다. 의도한 건 아닌데 그렇게 되니 뭔가 의미심장해졌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러고는 또 금방 그쳤다. 그래서 그다음엔 우산 들고 젖은 땅을 걸어 다니는 걸 찍는 방식으로 갔다.
시간 순서대로 촬영한 건가.
맞다. 꼭 순서대로 찍어보고 싶었다. 서로를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을 담고 싶어서, 처음엔 촬영 전에 두 배우를 만나게 할 생각도 없었다. 결국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지만, 미리 친해지는 시간을 갖지는 않았다. 예전에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홍상수, 2015)에 관한 정재영 배우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보통 영화의 시작과 끝에 같은 카페 장면이 나오면 예산이나 시간의 문제 때문에 한 번에 그 분량을 다 찍지 않나. 그런데 홍상수 감독님은 일단 하루 찍고,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가서 찍는다는 거다. 그러면 배우 입장에서도 실제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장소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인상을 받게 되고 연기하기에도 더 좋다고. 나도 그런 걸 노려보려고 했다. (웃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가 편해지고 공간에도 익숙해지는 과정을 담고 싶었다.
두 인물에 대한 정보가 간간이 나오긴 하지만 영화가 별다른 설명을 해주진 않는다. 심지어 민석은 끝날 때까지 이름도 알 수 없다.
처음엔 어머니도 등장하고 친구도 나오는 걸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정보를 주려고 했던 거다. 프리 프로덕션을 하면서 학교에서 진행 상황을 보고하는데, 교수님이 이렇게 가면 지금까지 했던 방식과 똑같지 않냐며 쉽게 찍으려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 설명적인 부분을 없애고 모험을 하기로 했다. 둘만 나오는 것으로도 과연 영화가 될까 고민하면서, 확신 반 불안 반인 마음으로 어떻게든 가보자고 했다.
관습적인 방식에서 멀어져 보려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음식점으로 치면 프랜차이즈처럼 예상 가능한 데가 아니라, 간판도 없이 구석에 있는 식당을 생각했다. 김치도 바가지에 나오고 음식도 그냥 툭 던져주는데 나름대로 먹을 만하고 괜찮은 그런 식당. (웃음) 그렇다고 아예 아무 설명도 안 할 수는 없으니, 균형을 찾는 게 중요했다.
민석과 수호는 대개 어색하게 같이 서 있거나 앉아있고 카메라는 조금 멀리서 그 모습을 담는다. 촬영을 직접 했는데, 두 인물을 찍을 때의 기준이나 원칙이 있었나.
일단 얼굴을 통해서 감정을 드러내는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핸드헬드도 고려했는데, 그러면 찍을 때는 편하지만 끝을 내기 어렵겠더라. 테스트 끝에 고정촬영을 원칙으로 했다. 가끔 길을 지나다니며 술집에서 이야기하는 사람, 창 너머로 부부싸움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그런 정도로만 보려고 했다.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게, 카메라가 누구의 편도 아니게 하고 싶었다. 민석이 10년쯤 뒤에 보면서 “이때 내가 이랬었지” 하며 기억할 수 있는 기록처럼 생각하기도 했고.

둘이 밤길을 걷는 장면은 다르게 찍었는데. 빛이 거의 없는 아주 어두운 밤을 오래도록 담았다.
그때 유일하게 카메라가 움직인다. 둘이 친해지게 만들기 위해 서로를 오해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논밭에서 수호가 길을 잃는 설정을 하게 됐다. 이때는 둘 사이에 이미 형식적인 이야기도 다 오가서 더 할 말도 없을 때다. 그래도 어떻게든 둘이서 지내야 하는 상황인 거고. 민석은 수호가 걱정돼서 찾으러 나왔고, 처음엔 화가 났지만 얘를 찾았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낄 거다. 수호는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이겠지. 이걸 별다른 대사 없이 발소리와 적막과 시골의 분위기만으로 드러내고 싶었다.
후반부에 둘이 함께 장에 가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음악이 흘러나온다.
음악이 한 번도 안 나올 거라는 편견을 깨고 싶었다. (웃음) 한편으로는 형과 함께하고 싶은 수호의 환상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 순간만큼은 수호의 입장에서 상황을 보길 바랐다. 수호가 태국으로 오라는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장에 갔으니, 그 풍경이 이국적으로 보였으면 싶기도 했고. 동남아시아 민속 악기를 알아보다가 찾게 된 음악인데, 마치 수호가 그 음악을 튼 것처럼 느껴지면 좋겠더라. 조금 친해진 둘의 모습, 장터의 사람들, 귀여운 고양이, 그런 것들을 자연스럽게 담아봤다.
연출 의도에 ‘그 당시에는 알 수 없지만 끝에서 불현듯 깨닫게 되는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썼다.
그 감정을 말로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다. 살다 보면 엄청 친했던 사람들과 멀어지기도 하고, 한두 번 본 사람에게 자기 얘기를 다 하게 되기도 하지 않나. 민석은 관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아무와도 연락하지 않고 지내는 인물이다. 처음에는 수호도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혼자 있게 되었을 때 무언가를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더라. 그 경험을 통해서 조금은 변할 수도 있고, 앞으로 더 나아갈 수도 있을 거다.


‘방문객들’이라는 제목은 어떻게 지은 건가.
제목 짓는 데 정말 오래 걸렸다. ‘형제’ 같은 걸 쓸 수도 없고. (웃음) 처음엔 둘 사이의 이야기니까 ‘사이’를 생각했다. 언젠가 민석이 못났건 잘났건 이때는 이렇게 살았다며 스스로에게 자랑할 수 있는 시간이길 바라서 ‘자랑’이라고 짓기도 했고. 그러다 학교 동기인 <종착역>의 권민표 감독이 ‘방문객들’이라는 제목을 지어줬다.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지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선 <오오카가와 강>이라는 단편 다큐멘터리를 상영했다.
원래 전공은 기계과다. 군대에 갔다가 복학하면서 진로 고민을 하며 방황을 좀 했다. 집에 일찍 들어가는 게 싫어서 극장을 전전하다 보니 영화가 좋아졌고, 한번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용인대학교에 편입해서 영화를 공부했다. 더 배우고 싶다는 갈망이 있어서 단국대학교에 갔고. 교과 과정 중에 공간 에세이를 만들었는데, 카메라 하나 들고 어딘가에 가서 기록하는 방식이 매력적이더라. <오오카가와 강>은 워크숍 프로그램으로 구로사와 기요시가 있는 일본의 동경예술대학에 가서 찍은 영화다. 거기서도 공간 에세이를 만들게 됐고, 요코하마를 무작정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공간이 마음에 들어 카메라를 들었다. 혼자 신문 보는 사람, 비둘기 모이 주는 사람, 혼자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사람, 시끄러운데도 낮잠 자는 사람처럼 고독한 사람들이 모인 쉼터 같은 공간이었다. 공간이나 장소에 대한 관심이 늘어서 나중에 세미나도 찾아 들었고, 그 영화에 남자들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많은 걸 배웠다. 난 그냥 공간을 찍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곳이 남성적 공간이었던 거다. 공간에 대한 관심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방문객들>을 처음으로 선보이게 됐다.
영화가 될지도 모르고 시작했는데 이렇게 사람들에게 소개되고 함께 한 배우들에게도 좋은 소식을 알릴 수 있어서 감사하다. 코로나 때문에 많은 분을 초대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보신 분들은 각자의 여름을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곧 충주에서 잠시 지내고 있는 친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어보려고 생각 중이다. 충청도를 대표하는 도시였지만 지금은 시골도 도시도 아닌 채로 애매하게 멈춰있는 충주의 공간성에 매료되기도 했고, 사연 많은 친구 이야기도 담고 싶다. 지금까지와 또 다르게 새롭게 해보려고 한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