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저지른 일, 다신 보지 못하리라
SIFF 2020 <빛과 철> 배종대
글 정지혜 사진 이영진 / Festival / 2020-11-30

때때로 우리는 눈으로 봤기에 그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우리는 안다고 생각하기에 그것을 믿는다. 감각과 인식과 신념은 이처럼 균질하고 공고하게 관계하는가. 배종대 감독의 미스터리 심리드라마 <빛과 철>(2000)은 우리가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흔한 상식의 회로를 거부한다. 대신 이들 사이의 굴곡과 간극에 주목하고, 이들 사이에 깊숙이 매복한 실체를 파헤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의 진상이 돌출될 때, 인물들의 분노와 비탄은 걷잡을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서의 비명임이 드러날 것이다. 영화는 이미 벌어진 교통사고로 시작한다. 희주(김시은)의 남편은 죽었고, 영남(염혜란)의 남편은 의식불명이다. 상실의 아픔을 삭이기도 전에 희주와 영남은 우연히 만난다. 뜻밖의 대면으로 인물들의 감정은 들끓어 오르고, 각자는 그간 외면했거나 차마 꺼내지 못한 죄의식과 맞닥뜨린다. 영남의 딸 은영(박지후) 또한 다르지 않다. 모두가 사건에 연루돼 있고, 모두가 비극에 붙들려 있다. <빛과 철>은 장르로서의 미스터리가 아니라 불가해한 삶과 타인이라는 미스터리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장편 데뷔작 <빛과 철>로 올해 서울독립영화제를 찾은 배종대 감독을 만났다. <빛과 철>은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에서 처음 공개돼 배우상(염혜란)을 차지했고, 부산독립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작품인 <모험>(2011)으로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를 찾은 이후 오랜만에 영화제를 찾았다.

10년 만의 귀환이라고 해야 할까. (웃음) 서독제는 워낙 좋아하는 영화제다. 관객들도 세대가 바뀌지 않나. 지금의 관객은 내 단편은 거의 못 봤을 거다. <빛과 철>을 두고 어떤 이야기를 해주실지 그래서 더 궁금하다.

 

<고함>(2007), <계절>(2009>, <모험>을 만들고 장편 데뷔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빛과 철>을 처음 공개했을 때 감회가 남달랐겠다.

코로나 상황으로 일반 관객을 만날 수 없어 크게 실감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완성된 영화를 극장에서 본다는 게 큰 감동이었다. 또 배우, 스태프들이 그때 처음 영화를 보는 거라 걱정도 컸다. 영화 끝나기 20분 전부터 괜스레 울컥하더라. 영화가 끝났을 때 가장 먼저 극장을 빠져나왔다. 사람들과 마주치는 게 무섭고 불안했다. 그렇게 극장 밖에 혼자 서 있는데 염혜란 선배가 다가와 나를 안아주시더라.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 마침내 <빛과 철>이 끝났구나’ 실감했다. 이후 영화제를 통해 장기 상영을 할 수 있게 돼 관객들을 만났다. 대중에게 영화를 공개한다는 건 정말 무섭고도 행복한 양가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나름 예상했던 질문도 받았고 미처 생각지 못한 지점을 물어봐 주시기도 했다. 영화가 또 다른 생명력을 얻는 것 같았다.

 

예상 가능한 질문이라면.

사건의 측면에서 <빛과 철>은 완벽히 해소되지 않는 지점이 꽤 많다. ‘은영은 어디로 갔는가?’ ‘마지막 장면은 어떤 의미인가?’ 관객이 더 적극적으로 영화에 개입할 수 있도록 일부러 사건에 빈틈을 만들어뒀다. 그런 면을 물어봐주실 것 같았다. 반면 인물의 감정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충분히 표현했다. 그 정서와 감정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관객 몫이다.

<빛과 철>
<빛과 철>

<빛과 철>의 시나리오를 쓰기까지 어떻게 지냈나.

<시체가 돌아왔다>(우선호, 2012), <곡성>(나홍진, 2016)의 연출부로 일했다. 시나리오를 완성하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다. (웃음) 단편을 세 편 만들고 났을 때 장편을 만들고 싶은 열망이 컸다. 단편이든 장편이든 작품을 만드는데 드는 에너지는 비슷한데 그 에너지를 좀 더 모아 장편에 집중하고 싶었다. 영화화해보고 싶은 건 정말 많았지만 막상 실현하려니 막막하더라. 단편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은 방식으로 표현하면 됐는데 장편은 대중과 관객과 좀 더 호흡할 수 있는 작품이길 바랐으니까. 몇 편의 글을 썼지만 하나 같이 가짜 같고 성에 차지 않았다. 이러다 정말 영화를 못 찍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 안에 있는 걸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다시 원점에서 출발했다. 그것이 오히려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러 생각의 갈래 속에서 선택하고 집중한 결과가 <빛과 철>인가.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빛과 철>의 희주와 영남을 두고 쓴 시나리오가 하나 더 있었다. 이 두 인물을 다루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이들만 남겨두고 모든 걸 새롭게 썼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정반대에 서 있는 인물, 그들이 계속해 부딪히면서 서로를 알아보고 자신과 상대를 동일시하기도 하고 또 적대하기도 하는 관계. 나는 적대감 역시도 일종의 교감이라고 생각한다. 희주는 내 안의 많은 부분이 반영된 인물이고, 영남은 살면서 내게 영향을 준 사람, 깊이 뇌리에 박힌 사람을 표현했다.

 

피해자의 아내와 가해자의 아내가 서로의 복심에 다가갈수록 사고의 진실은 모호해진다.

드라마를 기반으로 한 미스터리 구조가 필요했다. 그게 핵심이었다. 영화에는 많은 내용이 감춰져 있고 숨겨져 있고 또 꼬여 있다. 단지 미스터리라는 장르적 재미만이 아니라 어째서 이러한 미스터리가 발생했는지를 더 얘기하고 싶었다. 어떤 이유로 희주와 영남이 서로에게서 자꾸만 미끄러질까. 왜 상황은 어긋나고 꼬일 수밖에 없을까. 그걸 하나씩 풀어가고 싶었다. 나 역시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알게 됐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보면 상대를 제대로 몰랐던 경험이 있다. 심지어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관계가 뻗어 나가기도 하더라.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도 어느 순간 보면 단절돼 있고. 도대체 왜 그럴까. 이런 질문을 품고서 미스터리한 사건에서 출발해 감정과 마음의 미스터리로 전환하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구조가 만들어졌다. 또 이 질문 앞에 있는 인물들을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될지를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다. 영화에서 많은 경우 미스터리는 풀어야 할 무엇이고 또 풀리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끝까지 갔다 해도 결코 풀리지 않는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영진

영화의 거의 모든 인물이 사건과 관련해 비슷한 태도를 보여준다. 주요 인물이 도저히 자신을 용납할 수 없을 때 하는 행동들도 유사하다. 도식적 설정으로 보이지 않을까, 우려하진 않았나.

편집할 때까지 거듭 고민했다. 패턴과 행동의 반복이야말로 유치하고 촌스러운 접근이라고 생각해왔으니까. 이전의 나라면 극도로 경계했을 것이다. 실제로 어떻게든 변주하려 했고,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까 자꾸만 이 영화의 핵심에서 벗어나더라. 유치하고 촌스러워도 그걸 통해 감정의 핵심으로 갈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굳이 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세련되고 모던하게 가는 게 목표는 아니니 그런 위험은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대신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지점이 있을 것이다.

희주와 영남 이외의 인물들도 교통사고에 관한 각자의 입장이 있고 그게 전체 스토리로 맞물려 돌아가야 했다. 하나라도 어긋나면, 주출돌이 잘못 놓이면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았다. 나 역시 이런 구조가 자연스러운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건의 진행 과정, 인물의 감정과 등장과 퇴장, 어느 시점에 인물이 감정을 표출하는지 등을 하나씩 다 맞췄다. 내가 썼지만, 이 이야기는 사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모든 우연이 다 겹쳐야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벌어지니까. 관객들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이게 말이 돼?’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영화를 볼 때만큼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게끔 해야 했다. 과장되고 유치할 수 있지만 그래서 더 인물의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덧붙이면, 나는 <빛과 철>이 고전 비극처럼 느껴지길 바랐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많이 생각한 게 바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다. 콤플렉스 혹은 근친상간 이야기로서의 <오이디푸스 왕> 보다는 누가 라이오스를 죽였느냐는 이야기로서의 <오이디푸스 왕>을 참조했다. 희주의 행동과 마음의 변화를 주의 깊게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미스터리 장르나 심리 드라마 등에 관심이 많았나.

미스터리를 좋아하지만 영화는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보는 편이다. 사실 전작들은 전혀 다른 방식의 작품이었다. 내면을 관조하는 일종의 슬로우 시네마에 가까웠다. 그때는 그런 표현이 내 감정을 더 정확히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학부에서도 영화를 전공했는지.

영화는 늦게 시작했다. 부산 동아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시를 공부했다. 학교는 잘 안 다녔다. (웃음) 독자로서 문학을 좋아했지, 창작이 내 길은 아니더라. 어렸을 땐 음악을 좋아해서 한때 음악 칼럼니스트를 해볼까도 생각했고 미술, 특히 만화를 열심히 그리기도 했다. 좋아하는 것 3순위가 영화였고 문학이 4순위였다. 고3 때였나. 당시 부산 수영에 있던 시네마테크 부산에 가서 영화를 정말 많이 봤다. 대학 가서는 그곳에서 진행한 16mm 필름 워크숍에 참여해 처음으로 영화라는 걸 만들어보기도 했고.

<빛과 철>
<빛과 철>

희주와 영남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 은영이다.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인물로, 희주와 영남의 물리적 거리를 좁히기도 하고 둘의 감정적 대립을 조장하기도 한다. 또한 교통사고와 관련해 은영만의 진실이 있고 은영만의 죄책감이 있다.

영화의 시작은 희주와 영남이었지만 워낙 대립하는 인물이다 보니 어떻게 이 둘을 스치게 할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둘 사이의 매개가 은영이다. 나는 은영을 이 영화에서 가장 강인한 내면의 소유자로 그리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지키기 위해 속내를 감추고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 이 영화는 사고가 난 이후 지금 상태를 더는 견딜 수 없는 누군가의 결단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다. 은영이 그런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내용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영화에서 은영의 퇴장은 다른 인물의 그것과는 달랐다. 무엇보다 불안하고 위태롭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더라.

은영을 두고 결론짓고 싶지 않았다. 영화의 모든 인물에게 내 나름대로 퇴장 장면을 다 만들어줬다. 그런데 은영은 공백인 채로 뒀다. 어쩌면 다른 인물들이 은영을 놓쳐버린 게 아닐까. 각자의 진실 찾기는 이제 그만하고 놓치고 있던 정말 소중한 것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김시은, 염혜란, 박지후 배우 모두 감정적 에너지를 발산하기도 하고 삭이기도 하는 난도 높은 연기를 보여줬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가닿을 수 있을지는 인물들의 힘에 달렸다고 판단했다. 그만큼 배우 캐스팅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다들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지만 그 이상의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름 시도한 게 있다. 사전에 배우들과 다 같이 모여 대본 리딩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배우이기 전에 인간인지라 먼저 얼굴을 알게 되면 친밀감이 생길 수도 있지 않겠나. 정제된 연기를 원하지 않기도 했고, 배우들이 촬영하면서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힘에 휘말리기를 바란 면도 있다. 리딩 대신 배우 한 명씩을 따로 만나 해당 인물의 감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보니 배우들이 촬영 현장에서 처음 서로를 보게 됐다. 김시은, 염혜란 배우는 공장의 탈의실 테이블에 마주 앉아 대화하는 신을 찍을 때 처음 만났다. 그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였다. 서로를 향한 증오와 적대를 한껏 키워오다 직접 대면했을 때 곧바로 그 에너지가 터져 나와야 했다. 배우들이 잘해낼 거라는 믿음과 확신이 있었다.

<빛과 철>
<빛과 철>
<빛과 철>

배우들의 어떤 면모가 눈에 띄어 캐스팅한 건가.

염혜란 배우는 특유의 캐릭터로 극에 많이 등장했는데 그때마다 언뜻 스치는 냉소적인 눈빛이 되게 좋았다. 김시은 배우도 많은 작품을 했지만 밝고 생기 넘치는 역할을 상대적으로 많이 한 것 같아서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전에 가장 염려한 건 박지후 배우였다. 은영이 <벌새>(김보라, 2018)의 은희와 비슷한 나이라 혹시라도 캐릭터가 겹쳐 보일까 싶었다. 한데, 전혀 다른 길로 뻗어 나갈 수 있음을 충분히 보여줬다. 대사가 많은 이 영화에서 배우들이 오히려 말없이 표정과 눈빛만으로 감정을 전달할 때가 있다. ‘아, 이런 게 시네마틱한 체험이 아닐까’ 싶더라. 편집할 때 많이 힘들었는데 그때마다 배우들의 그 얼굴을 보며 큰 힘을 얻었다.

 

은영은 섬뜩하고 무섭기까지 하더라.

은영의 내면을 잘 읽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도대체 이 아이의 의도가 뭐지? 무슨 꿍꿍이지? 그래서 조금은 무서워 보일 수도 있다. 가장 미스터리 한, 이 영화의 공백으로 만들고 싶었다.

 

<빛과 철>은 교통사고 현장 주변을 지나는 차량의 운전자 시점 숏으로 시작해 다시 사고 현장으로 돌아가 끝난다.

관객의 시점에서 영화를 시작하려고 했다. 관객을 그 차에 태우고 사고 현장을 지나가는 거다. 그 차의 운전자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 현장을 지나가지만, 만약 그 차가 그곳에 정차해 운전자가 사고 현장을 둘러봤다면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시작한 영화가 결국 처음의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 관객이 사고 현장에서 시작해 다시 그곳에 멈춰 서서 뭔가를 생각해 보길 바랐다.

 

빤한 질문을 빼놓았다. 제목의 의미를 들려 달라. (웃음)

그렇네. (웃음) 빛과 철. 상반되는 느낌이 드는 두 개를 부딪치게 하고 싶었다. 마주 달려오던 두 대의 차량이 헤드라이트로 서로를 확인했을 테지만 결국 철과 철이 맞부딪혀 사고가 난다. 이것이 이 영화의 최초 사건이다. 그렇게 희주와 영남이 만나게 된다. 또 서로를 비추는 밝은 빛이 있기도 하지만 비인간적인 공장 지대의 차가운 느낌이 공존했으면 했다. 영문 제목은 ‘Black Light’인데 직역하면 ‘검은 빛’이다. 되게 빛을 희다고 표현하지만 검다니. 불가시광선처럼 눈에는 안 보이고 숨어 있는 빛이지만 우리가 찾으려고 애쓰는 바로 그 빛을 뜻하기도 한다. 그 모든 게 뒤섞여 있다고 해야겠다.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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