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막에는 ‘임재춘 조합원 단식농성 8일’이라고 쓰여 있고, 고요한 천막 안에서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낭독하는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려 퍼진다. “내 오랜 반려자인 나의 의지는 자신의 발로 길을 가려고 한다. 그의 생각은 견고해 꺾이는 법이 없다.” 그 사이 날짜는 8일에서 25일로, 42일로 점점 늘어난다. 콜트콜텍에서 기타를 만들던 임재춘 씨는 2007년 부당해고를 당한 이후, 회사를 상대로 13년간 복직 투쟁을 지속했다. “죽는 거 빼고 다 해본 거 같아요”라는 덤덤한 회고에는 조금의 과장도 거짓도 없다. 그는 천막 농성장에서 밥을 지어 먹으며 사계절을 보냈고 삼보일배와 오체투지, 단식을 감행했다. 민사·형사·행정소송까지 법률 공방도 치를 만큼 치렀다. 투쟁을 알리고 싸움을 승리로 끝낼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하는 동안 세월은 그를 예술가로 만들기도 했다. 콜트콜텍 기타노동자 밴드에서는 카혼을 연주했고 연극 <구일만 햄릿>에서는 오필리어를 연기했으며, 농성일기를 모아 책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를 펴냈다. 이수정 감독은 2012년부터 임재춘 씨와 그의 동료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들이 계속 싸워나갔기에 영화 또한 수차례 변화를 겪었다. <재춘언니>에는 갈등을 거듭하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임재춘 씨의 의지와 그 곁을 지켜내는 감독의 의지가 나란히 담긴다.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을 앞두고 이수정 감독에게 만남을 청했다.
기나긴 시간 끝에 관객과 만난다. 주변에서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고 채근하지 않나.
다들 언제 완성하느냐고 묻더라. 늘 내년에는 나올 거 같다고 답했지. (웃음) 2012년부터 찍기 시작했고 중간에 기획도 여러 번 바뀌었다. 본래 ‘우주최강 콜밴’이라는 제목으로 밴드 활동과 노래가 중심인 영화를 구상했는데, 그해 EBS국제다큐영화제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프로젝트 피칭에서 전부 떨어졌다. 기획이 부족한가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저씨들(김경봉, 이인근, 임재춘, 장석천)이 계속 싸우는 상황이니 너무 조바심을 내지 말자는 생각도 들더라. 좀 더 시간을 갖고 이 작업을 숙성시켜보자고 마음먹으며 촬영을 지속하던 차에 2014년이 됐다. 1월에는 해고 무효 확인소송 파기 환송심에서 노동자들이 패소했고, 4월에는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다. 개인적으로 참 바쁜 해였다. 세월호 공동기록단에 참가하면서 세월호와 콜트콜텍 양쪽을 오가는 상황이었으니까. 당시 작업은 <나쁜 나라>(김진열, 이수정, 정일건)로 완성하여 2015년에 개봉했다.
2016년에는 <시 읽는 시간>을 만들었고 이때 임재춘 씨는 등장인물 중 한 명이었다. 시를 매개로 인물 각자 삶을 되돌아보는 과정을 담았는데, <재춘언니>와 비교하면 보다 실험적이고 연극적인 분위기를 띤다.
콜트콜텍 노동자와 더불어 세월호 유가족까지 가까이 만나다 보니 생각이 많아졌다. 곁에서 기록하는 나 역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고통의 당사자를 다큐멘터리로 담는 일에 관해 깊이 돌아보게 되더라. 실은 <깔깔깔 희망버스>(2012)를 급하게 완성한 다음부터 줄곧 부족함과 아쉬움을 느꼈다. 현장을 실시간으로 기록하고 빠르게 결과물을 내놓는 액티비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좀 더 시적인 호흡을 담은 영화, 사유하고 성찰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시 읽는 시간>을 만들면서도 틈틈이 아저씨들을 찾아갔다. 그 무렵에는 영화에 ‘남은 자들의 노래’라는 가제를 붙였다. <재춘언니>보다 훨씬 무겁고 진지한 톤이었다. 워낙 오래 촬영하다 보니 기획이 조금씩 달라졌고 그때마다 제목도 계속 바뀌었다.


고민이 많았던 거 같다. 작업 당시 감독으로서 목표했던 바는 뭐였나.
첫 번째 고민은 '노동자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까?'였다. 관객이 영화에 들어올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해야 했다. 투쟁 상황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영화를 볼 텐데, 그때 등장인물에 어느 정도 호감을 갖고 따라오게끔 구성하려고 노력했다. 그럼 재밌어야겠더라. 임재춘 씨를 주인공으로 정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다른 아저씨들이 조금은 뻔한 이야기를 할 때도 임재춘 씨는 날 것의 매력을 보여줬거든. (웃음) 평범한 공장 노동자가 노동 운동에 뛰어들고, 그 과정에서 예술을 만나며 변화하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 동시에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만큼이나 ‘내 스타일은 뭘까?’라는 고민이 중요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을 텐데, 그렇다면 나만이 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그걸 찾고 싶어서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재춘언니>는 다른 사람 앞에 나서길 싫어하는 임재춘 씨가 연극 무대에 오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화에서 콜트콜텍 투쟁 상황을 세세히 일러주기보다는 인물 개인에 집중하는 방식을 선택한 이유와도 연결될 거 같다.
찰리 채플린의 무성 영화를 콘셉트로 잡았다. 편집감독과 처음부터 이야기했던 부분이다. 무성 영화에서는 음악을 배경으로 극이 진행되다가 중간중간 자막이 등장하지 않나. 우리도 임재춘 씨의 농성일기와 그간 인터뷰 촬영 녹취본을 다시 읽으며 임재춘이라는 사람을 드러낼 수 있는 문장을 발췌했다. 화면 비율도 일부러 4:3으로 맞췄다. 애초 16:9로 촬영했는데 편집감독이 4:3을 제안하더라. 그럼 옛날 영화 느낌이 나지 않겠냐면서.

그래서 화면도 흑백으로 만든 건가.
흑백이 주는 차분한 느낌이 좋았다. 인물에게 좀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힘이 실리기도 하고. 사실 촬영 분량을 보면 사계절이 전부 담겨 있다. 봄에는 천막 위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에는 쨍한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에는 은행잎이 날리고, 겨울에는 흰 눈으로 뒤덮인다. 그렇게 색을 통해서 계절 변화를 보여줄 수도 있었겠지. 근데 생각해보니 아저씨들은 계절이 바뀌어도 바뀌는 줄 모르고, 눈앞에 예쁜 풍경이 있어도 예쁜 줄 모르고 13년을 살지 않았나. 투쟁 기간이 그들에게는 제대로 된 시간이 아니고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던 거다. 그런 의미에서 색이 제거된 화면이 뭔가를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색깔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어떤 정보가 될 만한 내용을 대개 배제했다. 이름이나 직함 등도 자막으로 넣지 않았고, 그저 해가 바뀔 때마다 연도만 한 번씩 나오도록 했다. 전형적으로 인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관객이 끊임없이 생경함을 느끼면서 호기심을 갖고 인물에게 집중하기를 바랐다.
촬영 분량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편집감독의 역할이 중요했을 듯하다.
편집감독을 몇 명 만나서 제안했는데 다들 난감해하면서 고사하더라. 혼자 꾸역꾸역 편집을 진행하긴 했는데, 직접 촬영하며 현장에 있던 사람으로서 뭘 버려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 거다. 그 무렵 고동선 편집감독이 최근에 일하던 프로덕션에서 나왔다며 연락을 줬다. <깔깔깔 희망버스> 작업 당시 만난 친구인데, 2012년에는 어떤 프로그램에서 멘토와 멘티로 인연이 닿기도 했다. 어쨌든 손발을 맞춰본 경험이 있고, 내가 바라는 호흡을 잘 만들어줄 거 같더라. 이정우 감독의 단편 <화분에 심어진 여자>(2015)와 <돌아가는 관람차>(2012) 등을 편집했던 친구거든. <시 읽는 시간>에서도 같이 작업한 터라 함께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고동선 편집감독에게 제안하고 올해 5월부터 둘이 붙어서 편집했다. 부분 편집을 해놓은 터라 2-3달 안에 빠르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영화 초반에는 감독이 임재춘 씨에게 감정과 기분을 물으면 잘 모르겠다거나 그냥이라고만 답한다. 카메라 앞에서 속내를 터놓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을 듯한데.
관계가 두터워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건 사실인데, 다시 보니 어쩌면 그건 내 스킬 문제였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임재춘 씨는 감정을 표현해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고 따로 훈련한 적도 없다 보니 “몰라”라는 대답이 즉각 튀어나오는 거다. 내가 다르게 질문하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화가 이어지더라.


여러 장면에서 감독 목소리가 여과 없이 삽입된다. 편집 이전에 촬영 단계에서 결정한 부분일 텐데, 영화에서 감독의 위치를 드러내기로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편집감독이 강력하게 주장했다. 말한 대로 나 역시 촬영하면서 생각해온 부분이었지만, 막상 들으니까 너무 민망하고 싫더라. 어떤 부분은 남들 모르게 좀 감추고 싶기도 하고. 편집 초반에는 최대한 내 목소리를 빼고 관찰자적 태도를 유지하려고 했는데, 결국 편집감독의 뜻에 따랐다. 내가 봐도 내 목소리가 들어갈 때 훨씬 재밌긴 하니까. (웃음)
<재춘언니>라는 제목에서 인물을 향한 친밀감이 두드러진다. 정작 영화에서 감독은 임재춘 씨를 형이라고 부르던데. (웃음)
인천인권영화제 여성 활동가들이 임재춘 씨를 재춘 언니라고 불렀다. 옆에서 지켜보는데 재밌더라. 나도 따라 부르고 싶고. (웃음) 나는 대학에 다닐 때부터 남자 선배를 형이라고 부르는 문화에 익숙해졌다. 현장에서는 형 또는 직함을 붙여서 부르곤 했다. 근데 생각해보면 임재춘 씨는 정말 언니 같은 면이 있는 사람이거든. 농성장에서 요리사 역할을 맡았는데, 정말 엄마와 비슷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더라. 맛있는 음식 해먹이고, 누가 오면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서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엄마 같고 언니 같은, 정말 편안한 느낌이 있다. 말하자면 그런 게 여성적 공동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연대하기 위해 농성장을 찾은 활동가 대부분은 여성이었고, 뜨개질이나 만들기처럼 손으로 하는 활동이 많았다.
콜트콜텍과 합의서를 작성하고 투쟁을 마치기 전에 임재춘 씨는 단식농성에 돌입한다. 그때 천막에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낭독하는데, 책의 글귀와 투쟁 상황이 맞물리면서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더라.
2018년 말에는 시간이 어딘가에 고여 있는 듯했다. 다들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로 답답하게 지내던 때라 뭔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같이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 읽는 시간>에 힌트를 얻어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보자고 제안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힘겨움, 친구와 적, 죽음 등 다양한 주제를 본인과 연결해서 이야기하게끔 했다. 무엇보다 책을 소리 내어 읽는 경험이 참 좋더라. 2018년 하반기부터 SNS에 소식을 올리고 농성장에 찾아오는 사람들과 책을 읽었다. 그때는 나도 촬영하지 않고 함께 낭독하며 그 시간을 보냈다. 이후 단식 투쟁할 때 딱 하루만 카메라를 옆에 세워놓고 찍었는데, 그 장면이 영화에 들어갔다.


왜 하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나.
혼자 읽기엔 어려운 책이지 않나. 어느 집에나 한 권씩 꽂혀 있지만 제대로 읽은 사람은 없는 책. 예전에 수유너머에서 책읽기 세미나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그때 경험이 좋아서 천막에서도 그런 걸 하고 싶더라. '천막에서 니체 읽기'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었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위버멘쉬’ 철학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고, 원한 감정이나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기도 했다. 최근에 이인근 지회장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샀다고 하더라. 드라마를 보는데 그 책이 나와서 반가웠다면서. 그래도 천막에서 함께 읽었을 때 마음에 와닿는 게 조금은 있었구나 싶었지. (웃음)
엔딩에서 감독은 고향으로 내려간 임재춘 씨를 찾아간다. 해고 노동자에서 공사장 일용직 노동자가 된 재춘의 뒷모습으로 영화를 마무리한 이유를 듣고 싶다.
투쟁을 종료하고 나서도 다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랜 기간 함께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진 상황이라 한 명씩 찾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임재춘 씨를 만나러 갔을 때가 작년 이맘때다. 단풍이 한창이었지. 이전에도 고향인 대전에 내려가면 가끔 아르바이트로 노가다를 뛰었는데, 그때도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있더라. 대화도 길게 못 나누고 멀찍이 서서 찍었다. 밴드 활동이나 연극을 할 때도 그랬지만, 가만히 보면 일도 참 요령 없이 한다. 몸 고생하는 모습을 보니 슬프고 웃기고 그렇더라. 엔딩에서 임재춘 씨는 거대한 벽 앞에 서 있지 않나. 회사와 합의하고 투쟁을 종결했다고 해서 전부 끝나는 게 아니고, 사는 동안 이렇게 또 다른 벽을 마주할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게 마냥 슬프지는 않았다. 아주 밝은 미래가 펼쳐지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 사람은 열심히 투쟁하면서 13년을 살아냈듯 앞으로도 계속 자신의 자리에서 살아낼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향후 감독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이 확정된 후, 시네마달에 연락해서 배급을 결정했다. <재춘언니>는 극장 개봉 대신 공동체 상영과 기획전 상영에 집중하며 관객을 만나려고 한다. 두루두루 많은 분과 인연이 닿았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