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이 된 의심
<파이터> 임성미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Feature / 2020-11-10

임성미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대본집을 꺼냈다. 표지에는 임성미와 리진아라는 이름이 위아래로 큼직하게 적혀 있고, 야광 스티커로 영화 제목인 ‘파이터’를 오려 붙였다. 얼마나 넘겨봤는지 종이가 찢어질 정도로 닳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 장씩 들춰보니 대사마다 밑줄을 치고 연습한 흔적이 가득했다. 시나리오 뒷장마다 빼곡하게 적어 놓은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계속 저 자신에게 알려주려고 썼던 거예요. 챙겨야 할 부분이 많은데 막상 현장에 가면 분명히 망각하는 순간이 올 테니까요.” 임성미는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리진아를 꾸며내려고 안달하기보다 이미 리진아임을 믿고자 했다. <파이터>(윤재호, 2020)에서 진아는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물이다. 탈북민, 젊은 여성, 복서, 그리고 빈곤 계층이라는 조건은 그녀를 거듭 시험에 빠뜨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임성미는 “감각을 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카메라 앞에 섰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대한 진아의 입장을 고수하며 견뎌보기로, 어떤 순간이 눈앞에 지나갈지 바라보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방문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임성미는 ‘올해의 배우상’ 수상자로 호명됐다. <파이터>는 임성미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장편영화이기도 하다. 작업하며 무엇이 어려웠고 또 좋았는지 묻자, 그는 대본집을 펼쳐 이런 메모를 보여주었다. “이미 충분히 흡수되었으니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면 된다.”

 

 

2020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기쁜 소식을 들었다. 수상 축하한다.

배우상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나한테도 상을 주면 좋지만 그보다는 작품상을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스태프들 얼굴이 떠오르더라. 마냥 기쁘다기보다는 ‘이제 한시름 놓았네' 싶었다. 감독이나 배우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이 작품이 잘 돼야 다음에 또 좋은 기회를 만날 수 있지 않나. 다 같이 고생해서 만든 작품에 좋은 일이 생겨서 다행이다.

 

영화, 드라마, 공연 등 여러 방면에서 꾸준히 활동했는데 <파이터>가 첫 장편 주연작이다. 시상식에서 이름이 불리는 순간, 수많은 장면이 스쳐 지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극을 이끌어가는 경험이 정말 소중했고 영화를 찍는 동안 많이 배웠다. 그동안 견디길 잘했구나 싶다. 고진감래라는 말처럼 입안에 달콤한 사탕을 집어넣는 기분도 들고. (웃음) 준비 기간이 촉박했던 탓에 영화를 다시 보면 아쉬움도 남는데, 내 입장에서는 시간이 얼마나 주어졌든 아쉽기는 마찬가지일 거다.

 

배웠다는 말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파이터>는 메인 롤을 맡은 배우로서 어떤 부분을 아울러야 하는지 발견하게 해준 작품이다. 현장에서 단순히 캐릭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구성원 중 한 명으로서 어떤 입장과 능력을 갖춰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해야 할 일이 정해지더라. 이전에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해’라고 이론적으로 인식했던 영역이 이번 현장에서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됐지.

<파이터>
<파이터>

직접 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으니까.

맞다. 책이나 주변 사람을 통해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스스로 고민하며 시도해보는 경험이 중요했다. 현장에서는 당연히 아프면 안 되고, 대본을 충분히 숙지하는 동시에 연기 동선도 미리 구상해둬야 했다. 처음부터 콘티 없이 진행하기로 약속한 데다 핸드헬드 촬영이 워낙 많았거든. 촬영 감독님과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는 현장에 갔을 때 머릿속에 대충이라도 동선을 그려놓은 상태여야 했다. 단역으로 등장하는 배우들이 서운하지 않도록 받쳐줄 방법을 고민하기도 했다. 나 역시 단역을 여러 번 경험하지 않았나. 어떻게 보면 그렇게 잠시 왔다 가는 역할이 제일 어렵거든. 감독님께 정말 고맙다. 나라는 배우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믿어주고, 이런 생각과 고민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줬으니.

 

<히치하이크>(정희재, 2019) 개봉 당시 진행했던 인터뷰에서는 “무기력한 상태”를 고백하기도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배우로서 동력을 찾기가 힘들었는데 나 자신과 캐릭터, 일상과 현장을 분리하며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연기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파이터>는 어떤 시기에 만난 작품인지 듣고 싶다.

오디션을 꽤 많이 보던 때였다. 최대한 마음을 비워내면서 나 자신을 추스르던 중이었지. 뭔가를 기대하거나 짐작할 수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더라. 오디션에 갈 때면 ‘촬영장에 연기하러 가는 거야. 무대에 공연하러 가는 거야.’라고 다독이면서 결과보다는 과정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윤재호 감독님과의 미팅을 제안받았을 때도 무덤덤했다. 실은 낮잠 자다가 전화를 받았다. (웃음) 당시 소속사에서 나에게 잘 어울리는 역할 같다면서 <파이터>의 간략한 줄거리를 들려주더라.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상황이었지.

 

감독은 배우를 보자마자 “뭔가 해낼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더라. “임성미 배우가 아니었다면 누가 진아를 이만큼 소화할 수 있을까” 싶었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던데.

인터뷰 보고 깜짝 놀랐다. 실제로는 그런 말씀 전혀 안 하시거든. (웃음) 첫 미팅한 날, 30분 만에 캐스팅을 확정했다. 대화를 마칠 때쯤 감독님이 이 작품 하려면 뭐가 필요하겠냐고 물으셨다. 복싱과 언어 코칭이라고 답했더니 “네, 준비할게요. 그럼 하시죠.”라고 하더라. 아, 심지어 그날 감독님과 만나기로 약속했던 시간에 헤어졌다. 나는 50분 일찍, 감독님은 30분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애초 2시에 시작할 미팅을 2시에 끝낸 거지. (웃음) 바로 다음 날부터 대본 연구하며 연습에 돌입했다. 처음에는 집에서 2시간 정도 걸리는 복싱장에 다녔는데, 왔다 갔다 하는 시간도 아까워서 나중에는 집 근처 체육관을 따로 구했다. 3주 정도 준비했나 보다. 중간에 전체 리딩하고 회식 한 번 하고 나서 바로 슛.

ⓒ이영진

안 그래도 프리 프로덕션 기간이 매우 짧았다고 들었다. 본래 촬영하기 전에 철저하게 연습하고 준비하는 스타일로 아는데, 이번에는 그럴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연출을 믿고 시나리오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부담이나 염려가 없던 건 아니지만 감독님을 따라서 가보자고 마음먹었다. 마치 살아 숨 쉬는 그림을 그려가는 기분이더라. 이미 시나리오에 감독님이 그려놓은 그림이 있었고, 그걸 생동감 넘치게 표현하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다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앙상블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했다. 배우로서 늘 바라고 기다려온 일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보여줘야 했는데 ‘지금이구나!’라는 느낌이 딱 오더라. 억지스럽게 주어진 기회가 아니어서 좋았다. 밀물처럼 내게 와준 작품이었고, 그래선지 부담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오래전부터 액션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며 작품에 대한 갈증을 드러내기도 했고. <파이터>로 그간의 욕구나 아쉬움이 얼마간 충족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귀한 캐릭터를 만난 거 같다.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인물이었고,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중요했다. 다만 복싱은 영화에서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해주는 요소라고 판단했다. 자그마한 링 박스에서 계속 싸워나가는 인물로서 진아가 상징하는 바가 있는 거지. 만약 복서가 되는 과정 자체가 주된 서사였다면, 기술적인 부분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했을 거다. 관객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우선 드라마에 집중해야 했고, 복싱은 최대한 기본기를 탄탄하게 다지려고 했다. 단순한 동작일수록 몸에 붙지 않으면 어설프게 흉내 내는 느낌만 확연히 드러나니까.

 

그런데도 연기와 복싱, 둘 다 완벽하게 소화했다. 복싱을 오래 해온 사람처럼 보여서 확실히 몸을 잘 쓰는 배우로구나 싶더라. 촬영을 준비할 당시 하루 일과는 어땠나.

오전에 미리 몸을 풀고 동네 한 바퀴를 뛴 다음, 체육관이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서 갔다. 10시 30분부터 2시간 동안 운동했고, 이후에는 기본 동작을 계속 연습했다. 줄넘기, 달리기, 잽, 원투를 반복하는 과정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대본 읽으며 대사를 연습하다 보면 금방 저녁이 됐다. 갑자기 운동량이 늘면 몸에 무리가 오기 마련이라 일부러 일찍 자고 푹 쉬었다. 운동에 관해서는 나도 나지만, 김윤서 배우가 정말 대단했다. 윤서는 출중한 실력을 갖춘 복서 역할이었기에 처음 등장할 때부터 완성된 몸을 보여주어야 했다. 엄청난 연습 벌레라고 해야 할까. 정말 단기간에 근육이 붙으면서 몸이 쭉쭉 변했다. 나한테도 이런저런 운동 팁을 알려줬는데 못 따라가겠더라. (웃음)

<파이터>
<파이터>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진아와 윤서의 시합 장면은 실제 경기를 방불케 했다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둘 다 몰입했던 순간이다. 감독님과 스태프는 속으로 ‘뭐지? 쟤네 지금 ‘찐’인데?’ 했다더라. 유심히 보면 그때 관중들도 갑자기 ‘어라?’ 하는 표정이 된다. (웃음) 윤서와 나 사이에는 전우애가 생겼다. 계속 시선을 교환하고 호흡을 나누다 보니 우리끼리는 다 보이고 다 느껴졌지. 그러고 보면 현장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사전에 합을 맞춘 것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인데, 감독님도 제지하지 않고 말없이 지켜봐 주더라. 단지 그 장면뿐만 아니라, 작업 내내 그런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날 봐주고 있구나’라는 감각이 무척 중요했나 보다.

감독은 영화를 전체적으로 보는 위치이자 누구보다 영화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이다. 다만 어떤 순간을 실현하는 건 배우에게 달린 몫이고, 그건 정말 감독이 믿어줄 때 발휘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감독은 배우의 첫 번째 관객인 셈이다. 서로 봐주는 시간이 쌓이면서 바탕이 단단해지는 거 같다. <파이터>는 그런 믿음을 기반으로 한 협업이었다. 내가 그려간 그림과 감독님이 그려둔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보며 함께 다듬어 나갔지. 감독님이 영화는 변태와 변화를 거듭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달리는 신을 찍기 위해 동이 트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아무도 없는 시장 바닥에 앉아서 시계를 보는데 불쑥 “성미 씨, 영화는 진화해요. 우리는 그렇게 존재하는 거예요.”라고 하시더라.

 

영화에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이것만은 해내겠다고 다짐한 부분이 있나.

복합적인 감정을 응축해 놓은 장면이 많았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내가 그 감정에 지나치게 동요하거나 휩쓸려 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배우로서 인물을 구현하는 동시에 관객이 몰입할 수 있도록 적절한 거리감도 만들어야 했지. 여러 감정이 툭툭 튀어나올 때 억지스럽지 않도록, 관객이 충분히 납득할 정도로 켜켜이 쌓아가는 게 중요했다. 다른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정말 큰 도움을 받았다. 진아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우는 장면을 찍을 때가 떠오른다. 오광록 선배님이 본인 신도 아닌데 카메라 뒤에 딱 버티고 서서 지켜봐 주시더라. 공간이 비좁아서 불편하셨을 텐데 내색하지도 않으시고. 진짜 아빠 같았다. 감독님도 급하지 않다며 충분히 시간을 가지라고 하셨다. 어지간하면 현장에서 촬영을 지연시키지 않는데, 그날은 테이크를 여섯 번쯤 갔을 때 체력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조금만 바람을 쐬고 와도 될지 물었더니 곧바로 괜찮다고, 마음 놓고 다녀오라고 하시더라. 그렇게 옥상에서 잠시 쉬었다. 어쨌든 오케이 컷을 못 받은 상황이라 마음이 무거운 상태였는데, 뒤를 돌았더니 백서빈 배우가 보이는 거다. 언제부터 저기 있었나 싶었지. 그때 태수라는 인물을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태수는 이렇게 진아 뒤에서 묵묵히 서 있는 사람이구나’라고 깨달았고, 그 장면을 찍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애정이 묻어난다. 정말 영화 찍는 동안에는 한 팀이었구나 싶다.

우리한테 ‘슬램덩크’ 같은 느낌이 좀 있다. (웃음) 다들 각자 위치에서 힘을 쏟았고, 배려와 지지가 느껴져서 매순간 고마웠다. 배우들은 그 집중력과 에너지를 실시간으로 체감하니까. 육체적으로 지친 순간에도 사람들이 모아주는 힘 덕분에 끝까지 갈 수 있었다. 굳이 나 자신에게 잘해야 한다고 다그칠 필요도 없이, 그저 그 힘을 받아서 존재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충만한 현장이었다. 사적인 친분을 쌓거나 따로 만나서 술을 마시거나 한 일도 전혀 없는데, 내적 친밀감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웃음)

ⓒ이영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중이던 2008년에 단편 <복자>(정희재)로 데뷔했고, 그해 <마더>(봉준호, 2009)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세어보니 데뷔한지 올해로 13년 차다.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면 오래되긴 했구나 싶은데, 생각보다 그리 길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파이터>를 통해서 연기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다들 나를 봐주는데 부끄러워할 수가 없지. 사실 연기할 때마다 카메라 뒤로 숨고 싶다. 도망치고 싶고 쥐구멍이라도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결국에는 온전히 배우 스스로 해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때 연기를 혼자만의 짐처럼 여기면 무게감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다. 내가 찾은 해결책은 사람이다. 자꾸 주변을 둘러보고 동료들과 함께하는 찰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파트너십이 생기더라. 같이 만들어가는 느낌을 공유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공동작업이라면 반드시 포함해야 하는 과정이고, 그 느낌이 진하면 진할수록 작업 결과도 좋은 거 같다.

 

연기를 왜 부끄러워했을까. 자격을 묻는 편인가.

자격보다는 작품을 마칠 때마다 ‘내가 연기했나? 어느 한 구간이라도 연기를 제대로 했나?’라는 질문을 꼭 던진다.

 

뭐가 연기인가.

글쎄, 죽을 때까지 모를 거 같다. 계속 찾아가는 중이고, 아마도 연기가 무엇인지 알게 되면 “아, 이거였구나!” 하면서 깔끔하게 관두지 않을까. (웃음) 인터뷰하러 오는 길에 김혜수 배우의 인터뷰 기사를 봤다. 아주 힘들 때, 심리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을 때 <내가 죽던 날>(박지완, 2020)이라는 작품을 만났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연기와 진실의 경계에 있는 기분이었다”라고 표현했는데, 그 문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이 배우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동시에 인물과 일치하는 순간도 경험했구나 싶더라. 돌이켜보면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던 거 같은데, 대개는 뭣 모르고 지나쳐 왔다.

 

연기에 질린 적은 없나.

왜 없겠나. 은근히 딴짓도 많이 하고 잠깐씩 도망치기도 했다. 연기에 질렸다기보다는 연기하는 나에게 질렸던 거 같다. 배우로서 나 자신을 의심하는 순간이 결국 괴로움으로 돌아오더라. 참 어렵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진짜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데. (웃음)

<복자>
<연애다큐>

시간이 흘러도 생각나는 작품이 있다면.

모두 소중하지만 아무래도 첫 작품인 <복자>와 <연애다큐>(이옥섭, 구교환, 2015)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특히 <연애다큐>는 도전이라고 할 만큼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작업이었다. 그전에는 <12번째 보조사제>(장재현, 2014)처럼 반드시 캐릭터화하지 않으면 소화하기 어려운 인물을 연기했고, 현장에서 뭔가를 즉흥적으로 표현해본 적도 거의 없었다. <연애다큐>를 촬영하면서 문득 ‘그동안 어떤 틀에 나를 가두어 놓고 재단해온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르게 해도 된다는 걸 깨달았고, 과정이 낯설었던 만큼 새로운 재미를 느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촬영했는데, 지나고 보니 내게 분기점이 되어준 작품이더라.

 

최근에는 어떤 영화를 봤나.

영화를 볼 때 취향이라는 것이 점점 무의미해진다. 예전에는 가족 드라마나 서사가 굵직한 영화를 좋아했는데, 요새는 작품마다 지닌 고유한 개성에 집중하면서 보려고 한다. 얼마 전 극장에서 혼자 <남과 여: 여전히 찬란한>(끌로드 를르슈, 2019)을 봤다. 나도 죽기 전에 필모그래피에 저런 작품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 만큼 좋았다. ‘그래, 사랑을 하려면 저렇게 해야지’라고 생각했지. 어떻게 늙어갈지, 어떻게 살아야 잘 늙을 수 있을지 고민해보는 시간이었다.

 

어릴 적엔 코미디언을 꿈꾸었고 고교 연극부에서 활동하며 연기를 시작했다고 들었다. 지금은 어떤 꿈을 꾸나.

그러게, 코미디를 하고 싶었는데 연기하면서 알았다. 나는 참 클래식한 사람이구나. (웃음) 질문을 듣고 보니 꽤 오랫동안 꿈이라는 걸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 거 같다. 우선은 현재의 힘을 잘 유지하고 싶다. 안정적이고 건강한 일상을 지키면서 나를 잘 챙겨야지. 그리고 다음 작품을 만나면 지금껏 쌓아온 힘을 새롭게 전환해서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다. 아직도 할 일이 많다. 경험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경험을 통해 얻고 깨닫는 것이 가장 강렬하게 남는다고 생각한다. 차근차근 새로운 경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싶다.

 

일상을 꾸려가는 게 중요한 시기 같다. 요즘 임성미의 기쁨은 뭔가.

음, 함께 사는 고양이가 자다가 가끔 코를 곤다. 종일 뭐가 그리 피곤했는지. (웃음) 그 소리에 잠을 깰 때 왠지 모르게 행복하다. 내가 지금 누군가의 숨소리 때문에 깼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순간. 이름은 이황식이다. ‘씩’씩한 ‘황’토색 고양‘이’라는 뜻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엄청 약골이었다. 애가 비실비실하다 보니 입양하겠다는 사람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한참 고민하다가 눈에 밟혀서 데려왔는데, 지금은 이름대로 아주 건강하다. 몸이 무거운지 이따금 점프를 망설인다. 그럼 내가 “너 진짜 고양이 맞니?”라고 묻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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