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반 아이들이 강원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날, 중학생 춘희(박혜진)는 아무도 없는 놀이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다 노래방을 찾는다. 춘희가 부르는 ‘엘도라도’ 가사, “끝없이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 외로운 삶처럼”, 그녀는 얼마 전 부모를 잃고 외삼촌 집 다락방에 얹혀사는 신세다. 손과 발에서 땀이 줄줄 흐르는 다한증은 춘희의 몸과 마음을 더욱 움츠러들게 한다. 2019년. 이제 모두 떠나고 없는 집에서 여전히 다락방에 몸을 의탁하는 어른 춘희(강진아)에게 어느 날 날벼락과 함께 어린 춘희가 찾아온다. <태어나길 잘했어>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는 어린 춘희처럼 과거와 현재를 수시로 오가며 춘희의 어릴 적 상처를 어루만진다. 봄에 태어난 계집(姬)이 아닌 봄에 찾아온 기쁨(喜)으로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춘희의 씩씩한 여정에 우리를 초대한 최진영 감독은 전주에서 활동하는 영화인. 사회학도답게 지그문트 바우만을 인용하는 그녀는 시지프스의 외로운 삶에 프로메테우스와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단다. 첫 장편과 함께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최진영 감독을 만났다.
날벼락과 함께 찾아온 환영. 올봄 개봉한 <찬실이는 복도 많지>(김초희, 2019)가 떠오른다.
김초희 감독과 실제로 친하다. 오늘 인터뷰 전에도 전화해서 부산에서 트로피 못 가져오면 올라올 생각하지 말라더라. (웃음) 2017년에 제주 4.3을 다룬 단편 <뼈>를 찍었다. 제작비 3천만 원을 지원받아 6개월을 준비한 나름 블록버스터 단편이었다. 비극적인 현대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우울증도 왔다. 계속 잠을 못 잤다. 6월이었나, 장마철에 후반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날따라 낮잠이 그렇게 오더라. 꿈에서 벼락을 맞고 집에 왔더니 나와 같은 이름의 남자가 있었고, 사랑하게 됐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장국영 귀신 아닌가. (웃음)
꿈은 좀 야했다. (웃음) 천둥소리에 잠에서 깼는데 그 생생한 꿈이 도저히 잊히질 않았다. 바로 메모하고 며칠을 생각해보니 나를 사랑하라는 신의 계시인가 싶더라. 우울증 걸리거나 정신적으로 힘든 분들이 자기혐오가 있는데 나 역시 그게 심했다. 이를 모티브로 시나리오를 썼고 2018년에 한국영상위원회와 전주영상위원회에서 기획개발 지원을 받아 1년 정도 수정한 뒤 작년 12월에 촬영했다. 지난해를 마지막으로 전주영상위원회의 장편제작지원 프로그램이 없어졌는데, 이 영화가 마지막 제작지원작이었다.
인물의 설정이나 공간의 구성 등을 볼 때 자전적 소재가 많이 반영된 것 같다.
처음엔 1996년을 배경으로 했다. 그 때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벌새>(김보라, 2018)의 은희도 그랬고, 중2가 예민하고 호기심 많은 나이지 않나. 그때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동시에 IMF 이후의 삶, 남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예전부터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성수대교나 상품백화점 붕괴는 직접적으로 다가오기보다 계량적인 죽음으로만 느껴졌는데, 옆 학교 아이의 일가족이 IMF 여파로 자살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처음 느낀 사회적 죽음이었다. 앞서 말한 꿈을 꾸고 며칠 후 “그것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었다. 사회적인 죽음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일기를 썼다. 그래서 1998년으로 배경을 옮겨 중학교 2학년생인 춘희 이야기를 쓰게 됐다.
영화에서는 1998년이라는 숫자만 소개될 뿐 IMF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데.
원래 시나리오에는 그 이야기가 있었다. 춘희가 부모님 장례식 마치고 외삼촌 집에 들어오지 않나. 그게 사실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외갓집에 돈을 빌리러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갔고, 며칠 후 세 가족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다 춘희만 살아남은 상황이다. 촬영 직전에 최종적으로 나온 시나리오에서 그 이야기를 뺐다. 굳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아도 2019년의 팍팍한 삶을 사는 현재의 춘희에 집중함으로써 뉘앙스를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GV 때 질문 나오면 할 말도 있고. (웃음) 나와 동년배이거나 조금 더 나이가 있는 분들은 1998년 2월이라는 숫자만 봐도 눈치를 채지만 20대들은 아마 모를 거다. 20대에게는 2014년이나 세월호라는 말이 그렇게 다가갈 것 같다.
춘희와 주황(홍상표)이 처음 만나는 치유모임이나, 어릴 적 자신에게 말을 걸고 다독이는 ‘내면 아이’ 명상 같은 마음수련에 관한 아이디어가 엿보인다.
그런 명상법이 있다는 건 처음 들었다. (웃음) 심리치료나 명상에 관심이 있다기보다,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포를 바로 봐야 한다고 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이 내 모토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끄집어내서 그 고통과 직면하며 스스로 극복해 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생각했다. 치유모임에서 엑스트라로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내 친구들이다. 영화에서는 편집됐지만, 촬영 당시 다들 실제 자기 이야기를 꺼내놓더라. 한 번 그런 시간을 마련해보고 싶었다.
그 좋은 자리의 대표를 사기꾼으로 만들어야 했나. (웃음)
춘희와 주황의 사랑에 장애물 하나를 넣어야 했다. 실제 정말 팬이었던 기체조 명상 가르치는 분이 결국 나중에 돈벌이하는 걸 본 적 있다. 그때 느꼈던 실망감이 반영되지 않았을까. (웃음)
주황이 부는 태평소나 노숙자로 등장하는 황미영 배우처럼 영화 곳곳에 슬픈 소재임에도 따뜻한 유머가 섞인 복합적인 터치가 녹아 있다.
사람이 마냥 진지할 수만은 없지 않나. 장례식장에서도 월드컵을 보는데. 감정들이 다 극단적으로만 나타나기보다 혼재돼서 나온다. 슬픈 상황에서도 뭐 하나가 삑사리가 나고 그렇게 미끄러지고 어긋나는 부분에서 웃음이 터지는 게 좋더라. 단편에서도 그러는 편이다. <반차>(2016)도 이혼하는 부부 이야기인데 계속 나도 모르게 유머가 들어갔다. 노숙자 황 씨는 처음엔 나사에서 일하는 과학자 출신이었다. (웃음) 춘희의 원래 직업이 과학 선생님이었는데 이 노숙자가 과학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거지. 언젠가 노숙자 황 씨 얘기를 더 해보고 싶다.
강진아 배우는 고유의 무표정한 슬픔이 얼굴에 여전하지만, 저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줄지는 몰랐다.
우리 진아 씨가 이런 밝음도 정말 많다. (웃음) 진아 배우가 아니었으면 이 영화는 하지 못했을 거다. 초고 나오고 캐스팅이 결정된 뒤부터는 시나리오를 함께 이야기하며 좋은 생각을 많이 들려줬다. 원래는 더 우울하고 어두운 이야기였는데 덕분에 지금처럼 바뀌었다. 사촌오빠에게 그동안의 설움을 토해내는 장면은 지금도 미안한 촬영이다. 원래 테이크를 많이 안 가는 편인데 그땐 14번 정도 갔다. 진아 배우가 목이 다 쉬고 감기까지 걸린 상황이었다. 울분을 쏟아내면서도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균형을 맞추는 게 정말 힘들더라. 고생한 만큼 정말 좋은 장면이 나와 고맙고 미안하다.
<한강에게>(2018)의 박근영 감독과 잘 아는 사이라고 들었다. 강진아 배우는 그 영화를 보고 캐스팅한 건가.
2018년 전주영화제 뒤풀이 때 만나서 연락처는 알고 있었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 <한강에게>를 보는데 강진아 배우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사람이 가진 아픔과 슬픔의 리듬이 정말 잘 묻어난다고 생각했다. 당장 보자고 해서 초고를 드렸다.
<반차>(2016)의 군산, <뼈>(2017)의 제주, <연희동>(2018)의 연희동 등 전작 단편들과 이번 영화의 전주까지 장소가 갖는 의미에 큰 비중을 두는 것 같다.
건축 덕후다. 전주에서는 공간 아카이빙 작업을 오래 했다. 지자체 등의 단체에서 지원받아 사라지는 건물들을 기록하는데, 단순히 기록만 하지 않고 사회 역사적 맥락을 담아 60분 정도 되는 영상으로 남기는 작업이다. 3년째 하는 작업으로 성매매 집결지였던 ‘선미촌’이 있다. 선미촌이 예술촌으로 바뀌는데, 여성 인권 관련해서 역사를 훑으며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공간이 가치를 얻어 장소로 바뀐다는 말처럼, 공간이 베이스가 되었을 때 시간성이 획득된다는 믿음이 있어서 공간에 집중하는 것 같다. 춘희가 사는 양옥집도 아카이빙 작업하며 알게 된 집이다. 철봉이 있어서 ‘철봉집’으로 부른다.
전주에서 태어나고 자라 지금까지 전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는데, 영화는 언제 시작한 건가?
영화는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내가 영화 좋아하는 걸 주변에서 다 알다 보니 졸업 앞두고 전주영화제에 워크숍이 있는데 한번 들어보라더라. 그때부터 만들었다. 정규 교육을 받은 게 아니다 보니 1년에 한 편씩 찍는 게 나에겐 공부다. 제작지원 받아 가며 꾸준히 찍었다. 올해 전주영상위원회의 ‘전주영화학교’ 프로그램에서 윤가은 감독님에게 배운 수업이 가장 긴 수업이었다.
또 다른 장편인 <가장 환하고 따뜻한>이 이번 달 전북독립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을 앞두고 있다.
작년 1월에 친한 친구들하고 모여 사비로 3회차를 찍었다. 그런데 60분이 넘더라. (웃음) 호흡이 길고 도시의 공기를 담는 영화를 찍고 싶었는데 막상 편집하니 빈틈이 많았다. 4월에 추가촬영을 하기로 했는데 마침 그 직전에 제작지원을 받게 돼서 막내까지 돈을 똑같이 나눠 갖고 추가촬영을 진행했다. <가장 환하고 따뜻한>을 더 먼저 찍었는데 선보이는 건 <태어나길 잘했어>가 며칠 먼저가 됐다. (웃음) <입문반>(김현정, 2019)의 한혜지 배우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여자를 연기한다. 그녀가 옛날 남자친구를 만나러 전주에 온다. 남자친구와 연락이 닿지 않아 혼자서 그와 함께 다녔던 장소들을 거닐며 새로운 여자들을 만나는 이야기다. <태어나길 잘했어>도 전주 올로케지만 실내가 많았다면, 이 작품이야말로 전주 곳곳을 담았다. 전주시는 내게 표창장을 줘야 한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