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와 폭력의 팔레트
BIFF 2020 <어른들은 몰라요> 이환
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 Festival / 2020-10-23

<어른들은 몰라요>의 강력한 중심은 세진(이유미)이다. 그녀는 일련의 사건을 겪고서 집과 학교를 떠나 임신중절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거리를 떠돈다. 많은 사람이 세진을 스쳐가지만, 그중에서도 18살 동갑내기 친구 주영(안희연)과의 만남이 영화에 특별한 활기를 불어넣는다. 함께 물건을 훔치며 거리를 떠돌던 중 둘은 재필(이환)과 신지(한성수)를 만나고, 재필이 세진을 돕기로 하면서 넷은 잠시 같이 지내게 된다. 하지만 아이들의 생존과 안전에 별 관심이 없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이들은 너무도 쉽게 나쁜 일들에 휘말리고 만다. 세진이 경찰에게 무심하게 내뱉는 한마디는 아마도 이런 상황을 가장 잘 드러낼 것이다. “아저씨, 우리도 살아야 되잖아요.” 그렇지만 영화는 무언가 섣불리 고발하려 하기보다는 10대들의 세계, 세진이 겪는 사건들, 인물들을 둘러싼 폭력과 불행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 위해 노력한다. 장편 데뷔작 <박화영>(2018)에서 10대들의 세계를 강렬하게 그려내며 주목받은 이환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이다.

 

 

<박화영>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인물 세진이 이번 영화의 주인공이 됐다.

처음부터 그럴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다. <박화영>을 공개할 때, 거의 모든 회차마다 관객과의 대화를 갖는 릴레이 GV를 했다. 아마 100회 조금 넘게 하지 않았나 싶다. 그때 청소년 쉼터에서 상담을 하고 있는 두 분의 여성 관객을 만났다. 본인들도 어렸을 때 방황했지만, 지금은 그런 친구들을 계도하는 직업을 갖고 계신 분들이었다. 다음 영화는 어떤 걸 하고 싶은지 물어보시면서 이런 영화를 더 많이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그게 마음속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박화영>에서 사라진 세진이라는 캐릭터, 그 아이의 삶에 대해서 조명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다.

 

세진의 어떤 점이 마음에 남아서 더 들여다보고자 했나.

<박화영>이 화영과 미정, 영재와 세진 네 명의 이야기인데, 거기서 제일 아쉬웠던 게 세진이었다. 다행히 이유미라는 좋은 배우를 만나서 세진이 도드라지게 표현되었는데, 그 과정 안에서 세진이라는 아이가 계속 궁금해졌다. 이 집단에 들어오기 전에 이 아이의 삶은 어땠을까, 혹은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됐을까 알고 싶어지더라. 그래서 들여다보려고 했고, 또 이유미 배우가 확장된 스펙트럼으로 표현하는 세진을 보고 싶었다.

 

임신한 세진이 겪는 일련의 일들이 세밀하게 표현된다. 시나리오를 쓰며 따로 조사한 부분이 있다면.

처음 관심을 둔 대상은 미혼모와 임신중절이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립이 됐지만, 시나리오 쓸 때 사회적으로 임신중절에 대한 찬반이 엄청 치열했다. 나 자신도 명확하게 의견 정립이 안 되더라. 당시에 시사프로나 다큐멘터리, 외국 프로그램을 많이 참고하면서 내가 느끼는바, 내가 가진 생각, 여기에 대한 화두 등을 가감 없이 그대로 드러내고 고민 자체로 남겨두고자 했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서로 어떻게 이야기 나누며 의견을 완성해나갈지가 궁금하다. 처음에는 임신을 한 10대 여자애와 남자애가 임신중절수술을 받으러 떠나는 로드무비로 구상했다. 그런데 어른들에게 계속 사기를 당하는 거다. 그럼 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한 줄에서 시작해서 계속 시나리오가 변모했다.

<박화영>
<어른들은 몰라요>

이번에도 전작처럼 10대 문제를 다루지만, 집과 학교라는 공간으로부터 멀리 벗어난다. 규모도 커지고 폭이 넓어졌는데.

일단 이번에는 조금 덜 불편하길 바랐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필터링 없이 보여주되,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보고 즐기고 또 생각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나는 가볍게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영화가 세다는 말을 하긴 하더라. (웃음) 작은 규모의 예산으로 찍는 영화의 한계를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공간, 의상, 화면 등 여러 가지에 신경을 많이 썼고 스타일리시하게 찍으려고 노력했다. 젊고 튀면서 발랄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요즘 유행하는 롱보드도 집어넣고 음악도 힙합으로 채워 넣었다. 훌륭한 아티스트들이 많이 참여해줬다.

 

세진은 계속 롱보드를 가지고 다니고, 직접 타는 장면도 꽤 자주 나온다. 자유로워 보이고 생동감이 느껴진다.

일종의 상징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드 타는 친구들과 인터뷰를 해봤는데, 기술 하나를 연마하기 위해 몇 개월이 걸리고 그동안 엄청나게 다치는 등 힘든 시간을 보내더라. 그게 어떤 의미에서는 세진이 수술을 하려고 도전하는 과정과 맞물린다고 생각했다. 숨이 트이는 요소를 넣고 싶기도 했고. 이유미 배우와는 시나리오를 쓰기 전부터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기 때문에 롱보드 연습을 일찍 시작했고 나중에는 레슨도 받았다. 지금도 특기처럼 만들기 위해 꾸준히 연습하고 있더라.

 

롱보드를 직접 타본 적은 없나.

난 못 탄다. (웃음) 보드 타는 친구들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타보라고 하던데, 구경하는 게 좋지 타볼 생각은 안 든다.

 

여정이 계속되는 동안, 세진 곁에 있는 사람들은 바뀌어간다.

시나리오를 바꾸는 동안에도 의심하지 않았던 게 있다. 여기서 누군가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세진이라는 거였다. 그 리더십은 곧 세진의 확신과 거기서 나온 이기심과 관련된다고 생각했고. 그런 인물이 사람들을 만나고 상처도 받고 헤어지기도 하는 그런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른들은 몰라요>
<어른들은 몰라요>

이유미 배우와 연이어 작업하게 됐다. 준비과정을 함께 하며 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이유미 배우는 <박화영> 때부터 오랜 시간 워크숍을 했기 때문에, 이미 이해력이 상당히 높은 상황이었다. 일단 초고부터 시작해서 시나리오를 계속 보내줬다. 디벨롭되는 과정을 쭉 봐온 거지. 세진은 본인 것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다른 인물들과 상호작용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신경 써달라고 부탁했다. 이번에도 워크숍을 진행했는데, 인상적인 일이 많았다. 감정을 잘 모르겠을 때는 1층부터 9층까지 계속 뛰어서 오르내리며 호흡을 만들어서 그 집중력으로 연기를 하더라. 또 상대 배우에게서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위험한데도 머리를 벽에 부딪치기도 하고, 치열하고 진중하게 다가간 작업이었다.

 

집 나온 지 4년째라는 주영은 세진과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인물이다. 둘은 드물게도 서로에게 폭력적이지 않은 관계이고 둘 사이의 에너지가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일단은 세진과 동행하는 여자가 꼭 한 명은 있어야 했다. 주영이는 문신도 많고 키도 크고 세 보이지만 실은 세진이보다 강단이 없는 아이다. 영화에서 드러나진 않지만 이 아이에게도 상처가 있는데, 우연히 세진과 동행하게 된 길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예기치 않은 사건도 겪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주영 또한 세진이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자기 인생의 어느 한 부분, 십대의 끝자락을 완성해나가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그룹 EXID의 하니, 안희연 배우가 주영을 연기했다. 웹드라마 <엑스엑스(XX)>, 시네마틱 드라마 <SF8-하얀 까마귀> 등에 출연하며 연기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데, 그중 <어른들은 몰라요>가 첫 작업이었다고.

저예산 영화의 어떤 틀에서 탈피하고자 했을 때 일종의 멀티캐스팅을 생각했고, 안희연 배우를 캐스팅하는 게 그 중 1안이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희연이가 해외에 있었고 매니지먼트와도 계약이 끝난 상황이었다. 연락이 닿지 않아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인스타그램으로 DM을 보냈다. 피디님과 술을 마시고 취해있었거든. (웃음) 그런데 다음날 답이 온 거다. 메일로 시나리오를 보내주고 계속 연락을 주고받다가 한국에 들어온다기에 만났지. 처음엔 고민하다가, 맥주 한잔하면서 자기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기에 당연히 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하시죠.”라고 하더라. 촬영 들어가기 전에 3개월 정도는 거의 매일 만나며 워크숍을 진행했다. 처음 도전하는 연기였는데, 정말 제대로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어른들은 몰라요>
<어른들은 몰라요>

워크숍은 보통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나.

인물들의 전사에 관해 이야기하고 이전에 있을법했던 일을 즉흥극으로 해보기도 한다. 감정을 아주 크게 만드는 연습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런 다음 그 감정을 시나리오에 있는 장면으로 가져와서 써보는 거다. 그걸 일지처럼 카메라에 담아두고, 배우들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주영이 상대방을 돌로 내려치는 장면을 연습할 때였는데, 희연이가 하루는 통으로 된 엄청나게 큰 돼지고기를 사 왔다. 직접 치는 느낌을 알고 싶었던 거다. 그때는 매니저도 없을 때라 혼자서 그 큰 걸 일주일 정도 가지고 다녔던 게 기억난다. 앞으로도 이런 방식을 고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배우들한테도 동기부여가 되고 나로서도 배우들을 잘 관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재필이라는 인물을 직접 연기했다. 자기 책임이 아닌 것을 책임지려고 하지만, 실은 약하고 불안정한 인물이다. ‘어른들은 몰라요’라고 할 때의 어른이 아직 되지 못한, 경계의 인물이랄까.

맞다. 완벽한 성년도 아니고 미성년도 아닌 회색분자인 거다. 아마 과거에 비슷한 경험이 있었을 텐데, 이번에 세진을 도와주면서 극복하려 했지만 결국 하지 못하고 기성세대가 되어 버리는 인물을 생각했다. 이번에 어른들의 이기심이나 폭력 같은 것들을 많이 묘사하려고 했는데, 그쪽으로 넘어가 버리는 거다. 사실 내가 이 영화의 가장 마지막 캐스팅이었다. 재필이가 우뚝 서서 잘 보이는 게 아니라 세진이나 주영과 붙었을 때 상호작용하는 배우여야 했는데, 찾기가 어렵더라. 다른 인물들의 감정을 위해 상대해주고 기다려주고, 취약한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가는 방식을 고수하려고 했다.

 

남성 인물들이 여럿 나오지만 세진과 감정을 나누거나 복합적인 관계를 맺는 건 대개 여성 인물들이다.

여자 이야기가 나오면 남자가 앞장서서 도와준다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여기에도 재필이 나오긴 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끝까지 도움을 주는 건 주영이다. 주영을 떠나보내는 것도 세진이고. 그런 독립적인 판단을 여성 캐릭터들이 해야 한다고 여겼다. 특히 세진의 핵심은 동생인 세정(신햇빛)이라고 생각한다. 세진과 주영, 세진과 세정의 관계를 집중해서 봐주시면 좋을 것 같다.

 

다음엔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나. 이제 20대로 넘어가는 건가.

이제 10대 이야기는 그만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다음에는 워크숍 같은 방식은 유지할 수 있겠지만, 좀 더 안정적이고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재밌는 영화를 찍어보고 싶다. 아직 확실하진 않은데, 아마 올해에는 다른 감독님들과 옴니버스 영화를 만들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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