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링은 없다
BIFF 2020 <파이터> 윤재호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Festival / 2020-10-23

윤재호 감독은 부산과 인연이 깊다. 너른 바다를 품은 이 도시는 그에게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자, 꾸준히 영화를 소개해 온 창구이기도 하다.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노르웨이 감독 마르테 볼과 공동연출한 <레터스>를 상영했고, 다음 해인 2018년에는 첫 극영화인 <뷰티풀 데이즈>가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다큐멘터리와 극을 오가며 활발하게 작업하는 윤 감독은 올해 부산에서 두 편의 영화를 동시에 선보인다.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서 상영하는 <파이터>는 탈북민 진아(임성미)를,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서 상영하는 <송해 1927>는 최고령 방송인 송해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진아는 복싱에 도전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고, 송해는 어디에서도 내보인 적 없던 기억을 되짚는다. 그리고 둘은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각각 온 힘을 다해 사랑하는 법을 배워간다. 애초 감독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두 작품은 “신비하게도” 여러 면에서 짝을 이룬다. 진아의 탈북과 송해의 월남이 연결되고, 아버지를 기다리는 딸과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겹쳐 보인다.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앞두고 윤재호 감독을 만났다.

 

 

2018년에는 <뷰티풀 데이즈>와 <마담B>를 나란히 개봉했고 올해는 작품 두 편을 동시에 공개한다. 2019년부터 올해까지 정말 바쁘게 보냈을 것 같다.

근 2년을 분주하게 보냈다. 다행히 두 작품의 촬영 일정이 겹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다큐멘터리는 극영화보다 호흡을 훨씬 길게 가져가야 하니 틈틈이 시간을 내면 일정을 맞추는 게 가능하더라. 작년 10월에 <파이터>를 13회차로 촬영했고, 이후 후반작업을 천천히 해나가면서 동시에 <송해 1927>을 시작했다. 다만 코로나19가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11월쯤 송해 선생님과 첫 인터뷰를 했는데, 이후 코로나19가 심각해지면서 촬영이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됐다.

 

<송해 1927>은 제작사로부터 연출을 제안 받았다고 들었다.

<파이터>를 촬영하던 무렵에 <송해 1927> 제작사 측과 처음 미팅을 가졌다. <마담 B> 이후로 다큐멘터리 소재를 찾던 중이었는데, 이번 작품을 제안받는 순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송해 선생님은 인물 다큐멘터리에 잘 맞는 분이셨고, 그동안 내가 해온 작업과 연관성을 갖는 부분도 많아서 여러모로 호기심이 생겼다. <레터스>에도 잠깐 ‘전국노래자랑’ 장면이 나오지 않나. 우리 아버지도 송해 선생님을 워낙 좋아하신다. (웃음) 뭔가 좋은 인연이 닿았다는 생각에 큰 망설임 없이 작품을 시작했다.

<파이터>
<송해 1927>

<송해1927>은 관객이 예상할 법한 서사, 즉 송해를 통해 한국 대중문화 역사를 톺아보는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송해에게 어떤 자국을 남긴 사람들을 찾아가는데 이들 대부분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와 연결된다.

<송해 1927>은 또 다른 도전이었다. 주인공이 워낙 유명한 인물이다 보니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했다. 봐야 할 자료도 방대했는데 우선 기본에 충실했다. 송해 선생님의 인생사를 망라하는 긴 인터뷰를 진행하며, 1927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기별로 어떤 일들을 겪으셨는지 구체적으로 들었다. 그 대화를 책으로 만들어서 분석했고, 이를 바탕으로 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일지 찾아 나갔다. 선생님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기까지 마냥 수월하지는 않았는데, 다행히 영화에 등장하는 둘째 따님을 만나면서부터 관계가 차츰 풀렸다. 자연스레 가족사에 관해 터놓고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송해 선생님이 미처 알지 못하셨던 이야기들도 나왔다. 특히 고인이 된 아드님이 대화에 들어오면서부터 작업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나는 영화도 생명체라고 생각하는데, 그 생명체의 심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요소가 분명히 요구된다. 아드님인 송창진 씨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여기가 이 작품의 심장이구나’ 하며 두근거렸다. 우리 제작진도 마찬가지겠지만 정말이지 신비한 경험이었다. 송창진 씨의 영혼이 나타나서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듯했고, 그렇게 하나씩 차분하게 또 빠르게 연결되어 간다고 느꼈다.

 

<송해 1927>과 <파이터>는 인물을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작품이다. 어떻게 다가가고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지 고민했을 텐데.

인물에 접근할 때는 성별이나 나이, 사회적 위치 같은 건 따지지 않고 항상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려고 한다. 그래야 상대의 진실한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거든. 어떤 껍데기에 갇히기보다 새로운 친구를 마주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바라보면, 눈앞에 있는 사람을 그 사람답게 화면에 담을 수 있는 거 같다.

 

두 작품에서 발견한 공통점 중 하나는 뒷모습을 비추며 시작한다는 거다. 서로 전혀 다른 시공간에 위치하지만, 묘하게 가라앉은 정서는 이어진다. 긴장감을 조성하며 미스터리를 던지는 방식을 택한 이유는 뭔가.

오프닝은 편집할 때 가장 고민하는 부분 중 하나다. 두 편 모두 인물을 다루는 영화이기 때문에 시작점에서는 일종의 가이드가 필요하다고 봤다. 관객이 맨 처음으로 접하는 모습이니까. 개인적으로 사람의 뒷모습에서 어떤 여운을 느낀다. 평소 모습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면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정면에서 바라볼 때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저 인물은 누구일까? 이 영화는 어떻게 흘러갈까?’라는 궁금증 어린 시선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뒷모습을 보여주고, 이후에는 차근차근 측면과 정면으로 나아가는 방식을 선호하는 편이다.

<송해 1927>
<파이터>

<파이터>의 임성미는 어느 때보다 매력적이다. 마치 배우를 정하고 시나리오를 쓴 것처럼 아주 잘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더라.

캐스팅이 가장 어려웠다. 프리 프로덕션이 워낙 짧은 상황이다 보니, 복서 역할을 완벽하게 해낼 배우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단기간에 몸도 만들어야 하고, 복싱도 빠르게 습득해야 하니까. 우연히 임성미 배우와 미팅을 했는데 첫 만남부터 느낌이 무척 좋았다. 말투도 단단했고 뭔가 해낼 것 같은 인상이더라. 고집이 느껴지는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곧바로 함께하자고 제안했고, 그때부터 체육관과 코치를 섭외해서 복싱을 시작했다. 확실히 공력이 있는 배우여서 지켜보면서도 자주 감탄했다. 임성미 배우가 아니었다면 누가 진아를 이만큼 소화할 수 있을까 싶더라. 윤서를 연기한 김윤서 배우도 많이 고생했다. 중요한 역할인 동시에 누구나 할 수 있는 역할도 아니어서 고민했는데, 단편 <사냥꾼>(2019)을 함께 만든 인연으로 이번 작품에도 흔쾌히 출연해줬다. 두 배우 모두 연기와 운동을 병행하느라 힘들었을 거다. 대역도 전혀 없었고, 시합 장면에서는 실감 나게 연기했다.

 

인물이 세상과 맞서는 수단으로 왜 하필 스포츠를, 그중에서도 복싱을 선택했나.

링이라는 한정된 공간, 일 대 일의 관계, 주먹만 사용하여 자기 자신을 방어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고, 킥복싱이나 프리 파이팅에 비교했을 때 훨씬 많은 사람이 이해할 만한 소재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싸운다는 의미에 주목했다. 복싱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힘을 뿜어내거나 거칠게 싸우는 행위가 아니라, 정신적인 수련과 훈련을 거쳐야 하는 스포츠다. 실제로 프랑스 교도소에는 재소자에게 복싱을 가르친다. 일종의 교정 운동으로서 폭력성을 절제하고 스트레스를 관리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진아가 시도하는 싸움의 의미를 전하기에 복싱이 가장 적절한 소재라고 봤다.

<파이터>
<파이터>

진아에게 싸움은 사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복싱장에서 만난 태수(백서빈)와의 사랑이 진아를 움직여 가는 동력이다.

좋아하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순간이 참 귀한 거 같다. 그건 사랑일 수도 꿈일 수도 있다. 음, 살면서 여러 선택을 거치고 때로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하지 않나. 누군가는 사회가 요구하는 바에 적응해서 살아가는가 하면, 다른 누군가는 힘겹더라도 끝까지 원하는 바를 좇아간다. 물론 사랑을 찾고 꿈을 위해 도전하는 과정이 늘 평탄할 수만은 없다. 주변에서 반대하거나 환경이 받쳐주지 않는 순간도 있겠지. 중요한 건 본인이 원하는 일을 찾아내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도전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넘어질 일은 계속 생기겠지만, 작은 도전이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거대한 변화를 바라기보다는 개개인의 작은 시도를 믿는 편이다.

 

가족이라는 관계가 지속적으로 작업에 들어오는 이유는 뭘까.

가족, 그리고 소통에 관심이 많다. 관계란 결국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화합하고, 소통에 실패했을 때 분열하지 않나. 언제나 출발은 소통부터라고 생각한다. 가족이라고 해도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걸 멈추거나 저버리는 순간 오해가 쌓이고, 결국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이 일어나는 거 같다. 송해 선생님이 “자식이 부모 마음을 모르듯 부모도 자식 마음을 참 모른다”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안에 보편적 진실이 담겨 있다고 봤다. <파이터> 또한 비슷한 맥락을 공유한다. 좀 더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마음, 소통으로 나아갈 길을 찾는다면 또 다른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사이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워낙 부지런하게 작업하는 연출자이다 보니 지금도 뭔가 준비하고 있을 거라 예상한다. 차기작은 어떤 작품인가.

2012년 칸 영화제 레지던시에 참여했을 때 3부작을 기획했다. 당시 ‘엄마’라는 제목으로 쓴 시나리오가 <뷰티풀 데이즈>가 됐고, <파이터>도 초안은 그때 나왔다. 이제 남은 작품은 <아버지의 비밀>(가제)이다. 세 영화는 연결고리를 갖는다. 이 작품에 없는 부분은 저 작품에서 채워지도록 구상했다. 당시 시나리오를 불어로 썼고 현재는 번역하며 정리하는 단계다. 2, 3년 내로 촬영하는 것이 목표이긴 한데, 정확한 시기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이외에도 재작년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프로젝트마켓에 선정된 <바닷사람>을 진행하는 중이다. 어떤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본인을 희생하는, 작은 영웅에 관한 이야기가 될 거 같다. 큰 영웅만큼이나 작은 영웅의 존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 곳곳에 자리한 작지만 소중한 힘 덕분에 세상을 버텨나갈 수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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