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랩 좀 한다며?” 이십여 년 전, 중학교 2학년이었던 유재욱 감독은 다른 반에 힙합을 좋아하는 애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승환 감독을 찾아갔다. 처음엔 ‘이상한 척하는’ 놈 같다는 생각에 거리를 두던 이승환 감독도 쉬는 시간마다 찾아오는 그의 모습에서 진심을 느꼈다. “얜 진짜 이상한 애다.” 이상한 애 둘은 3학년 때부터 ‘라임크라임’이라는 팀을 결성해 자작곡으로 무대에 섰고, 나란히 영화과에 진학한 뒤에도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 두 감독의 첫 장편 영화 <라임크라임>은 죽고 못 사는 두 사람의 자전적 이야기가 바탕으로, 성적도 가정환경도 매우 다른 송주(이민우)와 주연(장유상)이 힙합을 매개로 가까워지고 팀을 만드는 본격 힙합 영화다. 미국 힙합 영화에 빈번히 등장하는 마약과 총은 <라임크라임>에선 한국 중학생들의 ‘삥 뜯기’와 ‘짭 판매’로 바뀌었다. 성내동, 둔촌동 등지에서 촬영한 장면에선 어릴 적 살던 동네를 향한 두 감독의 애정이 듬뿍 묻어난다. 우 탱 클랜(Wu-Tang Clan)과 이센스(E SENS)를 좋아하는 라임크라임은 어떤 음악을 관객에게 들려줄까? 외고에 진학하려는 부잣집 모범생 주연과 이혼해 따로 사는 아버지 밑에서 카센터 일을 배우려는 송주는 계속해서 함께 음악을 할 수 있을까? <라임크라임> 첫 상영을 앞두고, 유재욱, 이승환 감독을 만났다.
언제부터 공동 작업을 해온 건가?
유재욱_ 내가 2005년에 먼저 동국대 영화영상학과에 입학했고 승환이는 2006년에 경희대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했다. 2006년으로 넘어가던 겨울에 승환이가 재수생 때 쓴 시나리오로 함께 영화를 찍었다. 그게 우리 둘 다 처음 찍은 영화다. 그 뒤로도 <밤이 너무 길어>(2007)는 승환이가 연출하고 내가 촬영했고, 반대로 <자기만의 방>(2013)은 내가 연출하고 승환이가 조연출과 편집을 맡았다. <캠퍼스>(2012) 때만 나 혼자 찍었는데 그때도 승환이가 배우들을 소개해줬다.
이승환_ 분업화가 완전히 이루어지기보다 서로 잘 넘나들면서 관여를 많이 한다. 그래도 시나리오는 누구 한 명이 맡아서 쓰는 편이었는데, 이번 <라임크라임>은 재욱이 시작했지만 우리 이야기다 보니 계속 같이 매달려서 썼다.
서로 의견대립은 없나?
이승환_ 정리가 된다. 누가 이 의견이 정말 좋다 그러면 동의가 된다. 반대로 강하게 아니라고 하면 의견을 먼저 낸 쪽도 문제가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스타일이 다르지만 본질적인 뿌리가 같다고 해야 하나. 아주 엉뚱하게 다른 쪽으로 가진 않는 것 같더라.
유재욱_ 스태프들은 힘들 것 같다. 두 명한테 얘기를 들어야 하는데 심지어 서로 미루기도 하니까. “승환이가 괜찮대?” 그러면 그 스텝은 “승환 감독님이 재욱이한테 가서 물어보라던데요. 그래서 온 거예요.” 이러고. (웃음)
이승환_ 학교 다닐 때는 그래서 본의 아니게 대학 간 합작처럼 된 경우가 많았다. 두 학교의 스태프가 섞이면서 친해지기도 하고, 서로 문화가 달라서 안 맞기도 하고.
유재욱_ 승환이는 우리 학교 영화 주인공도 많이 했다. (웃음)
이승환_ 같이 작업했던 스태프한테 섭외당하는 바람에. (웃음) 처음엔 연기지도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 수락했다. 두 편 정도 찍고 그 뒤론 거절한 것 같다. 나랑 성격이 맞는 건 해볼 수 있겠지만 다른 인격을 표현하는 건 무리더라.
유재욱_ 지금까진 다 이승환으로 나온 거였다. (웃음)


오랜 기간 함께 영화를 만들어왔지만, 본격적으로 둘의 자전적 이야기로 영화를 찍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라임크라임>은 어떻게 시작한 건가?
유재욱_ 래퍼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그 꿈을 못 이뤄서 이렇게라도 이뤄보자. (웃음)
이승환_ 그 전에 다른 시나리오가 있었다. 부잣집 애와 못사는 애 둘이 친구가 되는 중학생 이야기였는데 잘 풀리지 않았다.
유재욱_ 이걸 힙합을 가미해서 풀면 재밌겠다 싶어 <라임크라임>으로 발전시켰다.
이승환_ 힙합적인 요소와 우리가 살던 동네 이미지를 버무리면 좋을 것 같더라.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사 오긴 했지만 어릴 적 동네 풍경과 정서를 좋아한다.
유재욱_ 둔촌 주공아파트도 담고 싶었는데 우리가 촬영하려 했을 땐 이미 철거된 뒤였다. 처음엔 단편으로 시작했다. 2016년에 촬영까지 몇 번 했는데 중간에 엎어졌다. 이걸 다시 장편으로 만들어보자 해서 주인공 두 명 빼고는 전부 바꾸고 2018년에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지원받아서 2019년에 촬영했다.
극 중 송주와 주연이 결성한 라임크라임(LIMECRIME)이 부르는 노래들은 어떻게 만들었나? 처음 주연이 송주에게 다가갈 때 소개한 우 탱 클랜(Wu-Tang Clan)의 스타일이 레퍼런스였던 것 같은데?
이승환_ 우 탱 클랜을 선정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우선 주연이 국내 힙합뿐 아니라 힙합 전반적인 지식이 많다는 설정을 부각하는데 적합했다. 송주는 경험해보지 못한 걸 소개해주는 셈이었다.
유재욱_ 우린 아무래도 옛날 세대라 요새 힙합보다는 올드 스쿨적인 힙합이 좋다. 우 탱 클랜은 우리가 좋아하는 먹통 힙합(둔탁한 드럼 소리 때문에 붙여진 붐뱁 Boom Bap의 별칭)이다.
이승환_ 그래서 음악감독하고도 그런 분위기를 살리려고 얘기를 많이 나눴다. 우 탱의 먹통 힙합 느낌을 주면서도 촌스럽지 않게 보이려 노력했다.
이센스(E SENS)도 송주가 좋아하는 래퍼로 비중 있게 언급된다.
이승환_ 가사를 통해 드러나는 이센스의 과거와 송주의 과거가 맞닿는 부분이 있다. 송주가 편지를 쓸 만한 뮤지션으로 이센스가 떠올랐다. 그렇게 우 탱의 노래를 좋아하고 이센스를 동경하는 아이들이 노래를 만들어 공연하거나 녹음한다면 이런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를 생각하며 음악을 만들었다.
유재욱_ 음악 감독을 한 김종연은 우리와 정말 친한 중학교 친구다. 우리 영화의 음악을 다 맡아서 해줬다. 우리가 랩 할 때 걔는 기타를 쳤다. (웃음)
이승환_ 마침 이 영화 음악 만들기 전에 힙합에 관심을 보였고 음악을 많이 들었는데, 워낙 세련된 친구여서 그 친구가 촌스럽지 않게 음악을 잘 만들어 준 것 같다.
배우들은 원래 랩을 할 수 있는 분들이었나?
이승환_ 두 트랙으로 배우 오디션을 봤다. 배우 중에서 랩이 가능한 쪽과 래퍼 중에서 연기가 가능한 쪽. 정확히 그 두 쪽에서 한 명씩 정해졌다. 장유상 배우는 고등학교 때 랩을 했고, 이민우 배우는 코즈에 인 서울(kozue in seoul)로 활동하는 래퍼로 연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민우 배우가 더 빨리 캐스팅됐는데 우리로서는 모험이었다. 연기 경험 있는 다른 배우들과 고민했지만, 좀 더 날것의 본능적인 매력을 기대했다. 주연 역 찾는 게 정말 어려웠다. 그러다 장유상 배우 오디션하고 나서 우리 둘 다 “아, 됐다.” 했던 기억이 난다. 주연 역에 딱 들어맞았다. 게다가 우리와 같은 동네에 살아서 다른 배우들보다 그 동네의 정서를 잘 알고 있었다.
유재욱_ 승환이는 영화에 등장하는 보성고를 나왔고 나는 그 옆에 동북고를 나왔는데, 장유상 배우가 동북고 출신이었다. 장유상 배우 보면 승환이 어릴 때가 생각난다. (웃음) 정말 비슷하다.
이승환_ 난 잘 모르겠는데, 장유상 배우가 워낙 멋있으니까 기분은 좋다. (웃음)


가사는 누가 썼나?
이승환_ 두 배우가 직접 썼다. 배우들 본인으로 가사를 쓰는 것도 아니고 영화 캐릭터의 느낌과 맞아야 하다 보니 어려워했다.
유재욱_ 승환이가 랩 가사와 음악은 전담으로 봤는데, 랩 가사를 송주 배우가 한 번 써오면 열 번은 퇴짜를 놓더라.
이승환_ 송주로서는 조금 현학적인 거 같다거나, 송주라면 이렇게 논리적으로 쓰진 않을 거 같다면서. (웃음) 그래도 가사를 직접 써보면서 두 배우가 캐릭터를 잡아가는 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유재욱_ 한 번은 반대로 우리가 쓰고 싶던 훅을 배우들이 싫어했던 적이 있다. (웃음)
이승환_ 우리가 예전에 썼던 ‘라임크라임’이라는 노래의 훅을 영화에 쓰고 싶었는데 올드하게 느껴져서인지 배우들이 마음에 안 들어 했다. 그래서 우리도 고민했지만 결국 우리 훅이 들어갔다. (웃음)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음악을 하다가 어쩌다 영화과에 진학하게 된 건가?
이승환_ 원래 영화를 좋아했다. 비디오 가게에서 서너 개씩 빌려서 밤에 계속 보고. 랩은 하는 동안 이게 취미로서의 랩일 거라는 생각이 있었다. 물론 몰입해서 했지만, 진로로 삼기에는 내가 랩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뭘 좋아하나 따져보니 영화였고, 그렇게 어느 날 영화감독이 되자고 결심했다. 처음엔 다짜고짜 서점에 가서 영화 제작 관련 책들을 사서 봤다.
유재욱_ 승환이가 영화과로 진학한다길래 그럼 나도 영화감독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웃음) 나도 같이 영화 많이 봤고 좋아하니까 영화과 가는 게 괜찮을 거 같더라.
뒤늦게 결심한 사람이 먼저 붙었다. (웃음)
유재욱_ 승환이가 재수할 때 같이 DVD 방 가서 영화 많이 봤다.
이승환_ 공부를 더 해야 했는데. (웃음) 재수할 때가 내 인생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본 한 해였다.
주로 어떤 영화를 봤나?
이승환_ 가이 리치 감독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1998)를 비디오 가게에서 아무 사전정보 없이 포스터 이미지에 이끌려 봤는데, 몰랐던 세계를 접하면서 영화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붙이게 됐다. 이후에 일부러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들을 골라보며 폭을 넓혀갔다. 좋아하는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다.
유재욱_ 주로 같은 영화를 많이 봤는데, 난 특히 <파이트 클럽>(데이비드 핀처, 1999)을 제일 좋아했다. 그 영화 보고 영화감독을 꿈꾸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