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가만 들여다보면
BIFF 2020 <그대 너머에> 박홍민
글 정지혜 사진 이영진 / Festival / 2020-10-22

<그대 너머에>는 기억, 시간, 창작을 둘러싼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영화다. 좀처럼 한 다발로 묶이지 않는 이 영화는 마치 누군가의 기억 회로에 불쑥 빨려 들어가 버린 것도 같고, 자신조차 잊고 살던 기억이 불현듯 현재의 시간을 침범하고 압도하는 듯도 하다. 동일 장면을 다른 각도에서 다시 보는 구조를 통해 영화는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에 주목하며 작고 연약한 존재들이 벌이는 사투에 깊이 교감하고 싶어 한다. 겹겹의 미로를 유영하는 영화의 흐름에 올라타기만 한다면, 낯선 세계로의 진입은 불가능하지 않다. <그대 너머에>는 나 아닌 또 다른 존재를 제 안에 받아들여야 하는 이의 내면을 그린 <물고기>(2011)와 꿈과 현실의 악몽 같은 미궁을 오가던 <혼자>(2016)로 주목받은 감독 박홍민의 또 한 번의 실험이고, 도전이다. 물리적으로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절실하게 찾고 있다면, 우리는 교차하고 교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절박하고 희미한 낙관에 관한 탐구이기도 하다. 영화에는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영화감독 경호(김권후), 20년 전 경호의 첫사랑이자 지금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인숙(오민애), 인숙의 딸이자 경호를 아버지라고 말하는 지연(윤혜리), 그리고 개미가 있다. 잃어버린 기억과 시간 속에서 그들은 다시, 하지만 전과는 다르게 만날 것이다. 박홍민 감독의 세 번째 장편 <그대 너머에>는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비전 부문을 통해 첫 공개된다.

 

 

본인의 감정 상태나 개인적으로 직면한 문제, 주변의 일에 착안해 영화로 만들어왔다. 이번 영화를 만들 땐 어떤 상황에 주목했고 당시 마음의 상태는 어떠했나.

직접 겪고 느낀 게 아니면 그 실체를 잘 파악할 수 없다. 그게 아니라면 취재를 열심히 해야 하는데 내 주변도 제대로 못 챙기면서 그것까지 할 수는 없더라. 평소에도 나 자신에 관해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고 가족, 친구, 친구의 부모님 등 가까운 이들의 상황을 유심히 지켜본다. 내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를 하면 영화가 끝난 뒤에는 주시할 수 없으니까. 경호도 당연히 나로부터 시작했고 내 정서가 어떻게 변화했는가가 그에게 반영돼 있다. 친구의 가족을 보며 느낀 감동이 인숙에게 반영됐다. <물고기> 땐 호기심 많은 내가, <혼자> 땐 심한 강박과 폐쇄적인 감정 상태의 내가 있었다면 지금은 내 주변에 좀 더 시선을 두려고 한다.

<그대 너머에>
<그대 너머에>

영화의 도입과 중간 중간 등장하는 개미가 또 하나의 캐릭터처럼 보인다. 제 딴에 뭔가를 열심히 찾아가는 작고 연약한 존재인 개미를 바로 옆에서 찍어 개미의 시선으로 뭔가를 전달하고자 하는데.

마음의 문제이든 상황 때문이든 나나 내 주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 걸 지켜보다 보면 거창한 이야기로는 눈길이 가지 않는다. 자아에 관해 고민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작은 존재들에 관한 영화를 찍고 싶었다. 개미도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두 달 넘게 여러 마리의 개미를 키웠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개미에게 내 마음을 이입하고 개미를 의인화하게 된다. 아, 개미들은 따뜻한 봄날에 장충단에 잘 풀어줬다. (웃음) 루이스 부뉴엘의 <황금시대>(1930)의 도입에도 전갈이 사투를 벌이다가 나중에는 전갈의 감정으로까지 이야기가 진전되지 않나. <그대 너머에>의 개미가 관객에게 정서적으로 다가가길 바랐다. 개미를 부감이 아닌 아이라인 시점에서 지그시 바라보다 보면 개미에게 자기감정을 불어넣게 된다. 그게 이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과 맞아떨어지면 인물들의 감정과 이어질 거다. 개미처럼 열심히 움직이고 활동하는 존재에게 관객이 감정을 싣게 되면 자신의 존재를 고민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 영화에서 경호는 그저 개미가 신기해서 카메라로 찍지만 인숙은 자기감정을 개미에게 이입하고 자신의 내적 정서의 차원으로 넘어간다. 그 모습을 본 경호가 인숙에게 글을 써보라고 제안하고. 이번 영화에는 존재와 창작을 둘러싼 내 고민이 들어가 있다. 내가 관심 두는 건 이처럼 내밀한 내적 영역이다 보니 그걸 사건화하고 동선으로 구체화할 방법이 뭘까, 항상 생각한다.

 

<그대 너머에>는 기억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상대적이고 편차가 있으며 왜곡하기도 하는 기억 말이다. 특히 지연은 제 존재를 의심하며 자신이 과연 실재하는지, 엄마의 기억 속이나 경호의 글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지연이 창작자의 손에서 벗어나 인숙과 함께 어딘가에서 각자 자유롭게 잘 살아가기를 바란다. 작업하는 동안, 인물들의 내면이 계속 뒤섞이길 원했다. 나를 움직이는 것도 버팀목도 감정적인 면이 크다. 비록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어도, 또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기억할 수 있다면 서로의 내면은 교감할 수 있지 않을까. 살아가는데 그런 게 제일 중요한 게 아닐까. 우리는 그런 감정으로 움직이는 게 아닐까. 서로의 마음과 내면이 꼭 일치하지 않더라도 어느 순간 교감하고 교차하고 중첩될 때가 있는데 그걸 영화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대 너머에>
<그대 너머에>

<그대 너머에> 속 인물들의 내면과 감정의 핵심은 무엇이라 말하겠나.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를 정말로 열심히 찾아다닌다. 인숙이 지연을 한없이 부르는 장면도 그렇고. 자신에게 기대고 자신을 응원하는 누군가가 있다고 스스로 믿는 것, 그게 중요하다. 결국 지연도 마지막에 가서는 누군가가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고 자신을 인정할 거라고 스스로 믿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경호도 내적 성장을 하길 바랐다. 서로의 관계 안에서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 그게 있다면 외부적 상황은 비록 어려워도 살아가는 데 힘이 될 것이다.

 

중반 이후 앞서 전개된 상황이 약간 다른 시선과 입장으로 다시 전개되는데.

확실히 <혼자> 땐 반복에 관심이 많았다.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그림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지금은 반복보다는 같은 상황을 조금 떨어져서 다른 구도에서 다시 보고 싶다. 경호는 인숙과 지연이 자기 앞에 나타났을 때 그들과 대화하기보다 도망가기 바쁘다. 그때 경호를 그렇게 행동하게 한 게 뭐였을까. 뭔가가 자신에게 다가왔을 때 그걸 더 바라봐줄 수는 없었을까. 어떻게 경호를 바꿔볼 수 있을까. 그랬을 때 다른 각도에서 자신의 상황을 마주해보길 바랐다. 나 스스로도 영화라는 틀에서 조금 벗어나 영화를 다시 생각하고 싶었고. 제목도 그런 의미의 반영이다. 인물들과 내가 하나의 단계를 넘어가길 바랐다. 이번 영화는 그런 면에서 매체에 관한 고민과 메타적 표현이 반영돼 있고 시선을 외부로 향해보려는 내 나름의 선언 같기도 하다.

 

장충단 공원에서 진행된 12분이 넘는 롱테이크를 비롯해 긴 호흡의 카메라 무빙과 패닝으로 기억과 시간의 경계를 허물거나 인물의 등·퇴장 통로를 만들어냈다.

<혼자> 땐 강박적이라고 할 만큼 극단적으로 롱 테이크를 썼는데 이번에는 그 정도는 아니다. 다만 공간이 잘 보이면서도 그곳에서의 인물 감정이 끊어지지 않길 바랐고 공간에서 인물들이 느끼는 호흡을 최대한 관객도 느끼길 원했다. 인물 동선과 함께 인물 중 누구에게 감정의 포커스를 맞출지도 굉장히 고심했다. 카메라가 자기 주도적으로 먼저 움직이는 건 작위적으로 보여 지양했다.

<그대 너머에>
<혼자>

<혼자> 때도 골목이 중요한 공간이었는데 이번에도 골목이 등장한다.

기획된 아파트와 달리 골목이 있는 동네는 하나에 또 다른 하나가 점점 덧대지는 방식으로 마을이 형성되는 것 같다. 삶의 흔적이 많은 후미진 골목이 인물과 카메라의 움직임을 만들 때 흥미롭게 느껴진다. <혼자> 땐 밤의 골목을 찍었다면 이번에는 낮의 골목을 찍고 싶었다. 인물만큼 공간이 잘 보여야 했기에 몇몇 타이트 쇼트를 제외하면 24mm 렌즈로 촬영했다. 미시적인 컷, 거시적인 컷, 인물을 바라보는 컷을 다 넣고 싶었다.

 

NG가 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롱 테이크를 여러 차례 반복한 걸로 안다. 심지어 많으면 28번까지도 갔다고. 이런 작업의 방식에 기꺼이 함께한 배우들의 역할도 컸겠다.

놀이터 신을 찍을 때였다. 그때도 롱 테이크로 정말 여러 번 찍었다. 오민애 배우님이 본인 분량을 다 찍은 뒤에 한쪽 구석으로 조용히 가서 “제발, 이거 오케이 나게 해주세요. 감정 더 어떻게 못 해요. 무조건 이번 걸로 돼야 해요”라며 기도하시더라. 촬영할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오디오 체크를 하며 배우님의 기도를 들었다. (웃음) 경험 많은 배우지만 감정을 쏟는 작업을 여러 차례 하는 게 쉽지 않으셨을 거다. 그런데도 마음을 내주셨다. 오민애 배우는 단편 <나의 새라씨>(김덕근, 2019)를 보고 곧바로 연락을 드렸다. 인숙이 격정적으로 감정에 휩싸이는 장면이 있는데 배우의 놀라운 힘과 세심한 연기에 놀랐다. <혼자>로 부산국제영화제에 갔을 때 본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인 게 <소통과 거짓말>(이승원, 2015)이었다. 주인공 남자 역을 맡았던 김권후 배우에게 ‘언젠가 한 번 같이 작업하면 좋겠다’고 말했고 시간이 한참 지나 이제 드디어 만났다. 윤혜리 배우는 연기 잘하고 성실한 배우라며 이돈구 감독이 적극적으로 추천해줬는데 정말 딱 그 말 대로였다.

 

차혜진 작가가 <혼자>에 이어 프로듀서이자 공동 각본가로 함께했다. 이번에는 심지어 영화에 등장한다. (웃음)

내가 전체 구성, 핵심적인 상황, 꼭 표현했으면 하는 방식과 기호 등의 상을 잡으면 차혜진 작가가 문장으로 구체화한다. 그렇게 신이 만들어지면 그걸 두고 또 함께 이야기해 발전시킨다. 차혜진 작가는 방송 드라마 각본을 쓰는 재능 있는 작가다. 제작비가 없어서 정말 힘들었던 <혼자> 때 선뜻 해보겠다고 마음을 내줬다. 내가 차린 ‘농부 영화사’의 실세다. (웃음) 차혜진 작가가 없었다면 <혼자>도 <그대 너머에>도 없었을 거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향해 열정적으로 해나가는 모습이 아름답고 계속 응원하고 싶다. <혼자>에는 내 나름의 비장함과 화가 들어가 있는데 <그대 너머에>는 조금은 긍정적인 면이 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느낀 감동이 영향을 준 게 분명하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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