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행로
BIFF 2020 <아워 미드나잇> 임정은
글 정지혜 사진 이영진 / Festival / 2020-10-20

무명배우 지훈(이승훈)은 오랜 연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았다. 사내 연애를 하다 데이트 폭력을 당한 은영(박서은)은 회사에서 불편한 사람이 됐다. 어느 밤, 한강 다리 위. 자살 방지 순찰 아르바이트를 하던 지훈의 눈앞에서 은영이 쓰러진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남녀, 둘은 함께 어둠이 삼킨 서울의 구석구석을 헤매기 시작한다.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비전 부문에서 상영되는 임정은 감독의 <아워 미드나잇>(2020)은 감당 못할 시련과 고통에 직면한 지훈과 은영을 뒤쫓으면서, 메마른 마음의 해갈과 새로운 기운의 아침을 꿈꾼다. 낯선 남녀의 뜻밖의 만남을 소재로 장편 데뷔작을 만든 임정은 감독에게 빛나는 밤에 관해 물었다.

 

 

꿈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두 남녀가 우연히 한강에서 만나 서울 시내를 걷는다는 설정은 어떻게 시작됐나.

건국대 영화과에서 연출을 공부하고 곧바로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 전문대학원 디렉팅 과정에 들어가 2018년에 졸업했다. 서른을 앞둔 어느 날 뒤돌아보니 내가 20대 내내 학교에서 영화만 찍었더라. ‘영화를 만들면 행복할 거야’라는 순수한 마음으로 경주마처럼 달려왔는데 덜컥 겁이 났다. ‘만약 이 길이 잘못됐다면? 틀렸다면? 배운 게 이것밖에 없는데? 다른 분야로 가려면 지금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땐 거리의 지나가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오고, 다들 어떻게 자신의 일상을 여기까지 꾸려왔을까 싶었다. 그러면서 다시 영화를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고 관심 뒀던 것들을 하나씩 조합해보기로 했다. 그중 하나가 한강이다. 안양에서 태어나 지금껏 그곳에서 살고 있는데 서울 올 때마다 한강을 건너는 게 낯설면서도 좋았다. 그리고 영화 일을 하는 친구들과 나눴던 영화를 향한 각자의 꿈에 관해 생각했다. 무엇보다 청춘 남녀가 한강 다리에서 만나서 목적지 없이 걷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웃음)

 

지훈이 배우라는 설정 덕분에 은영과 지훈이 서로의 마음을 터놓을 때 연극적 요소나 연기를 방편처럼 자연스레 쓸 수 있는 것 같다.

배우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내가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우이기에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특히 소년 같은 구석이 있는 지훈이라면 배우로서의 자신의 고민을 가감 없이 다 드러내 보일 수 있겠더라. 반면, 옥탑에 사는 가난한 배우라는 설정이 너무 상투적으로 보이지 않길 바랐다. 쇼트 하나하나를 더 신중히 찍는 수밖에 없었다.

 

데이트 폭력을 겪은 뒤 직장 내에서 내쳐졌다는 것 외에 은영에 관해 알 수 있는 건 얼마 없다.

은영의 전사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식은 원치 않았다. 최대한 은유와 비유를 사용하려 했다. 불필요한 것은 걷어내고 영화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며 인물의 감정에 집중했다.

<아워 미드나잇>
<아워 미드나잇>

인물들의 정서적 교감이 인상적이다. 밤의 무드를 만들 때 섬세하게 설계된 카메라 움직임도 효과적이고.

단편 작업을 같이한 건국대 동문 김진형 촬영감독이 든든한 조력자가 돼줬다. 내가 시나리오를 소설처럼 쓰나 보다. ‘떠나는 남자가 가기 싫다는 듯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이런 식이었다. 촬영감독은 당연히 이걸 어떻게 시각적으로 표현할 거냐며 되묻는다. (웃음)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필요하면 치열하게 싸우고, 확신이 들면 끝까지 설득하고. 그러면서 촬영의 기준이 정해졌다. <아워 미드나잇>은 정서가 중요하고 인물에게 집중해야 하며 한강 다리가 잘 보여야 하는 영화다. 그걸 최대한 잘 표현하기 위해서 화면비를 3:2로 결정했다.

 

흑백으로 촬영한 이유는.

제작비를 고려한 면이 크다. 촬영감독님이 먼저 제안했다. 흑인을 어두운 곳, 그늘 속에 두고 더 어둡게 찍기로 유명한 사진작가 로이 디캐러바의 작품을 보여주더라. 정말 놀라웠고 인상적이었다. 촬영감독님이 ‘배우들의 눈, 코, 입은 살릴 테니 현장에서 다소 어둡게 촬영되더라도 겁먹지 말고 과감하게 가보자’고 했다. <콜드 워>(파벨 포리코브스키, 2019)의 흑백 감도도 참조했다.

 

카메라가 어디서 어떻게 움직이고 누구를 비출 것이냐를 판단할 때도 인물의 감정이 중요한 기준이었겠다.

맞다. 그게 제일 컸다. 언론고시를 준비하는 스터디원들의 이야기였던 단대 졸업 작품 <새벽> 때도 내 관심사는 인물들의 복잡 미묘한 감정에 가 있었다. 그 작업 이후 곧바로 <아워 미드나잇>의 시나리오를 쓴 터라 인물들의 감정을 더 잘 표현해보고 싶었다.

 

이승훈, 박서은 두 배우와의 작업은 어땠나.

<검은 여름>(2017)을 만든 이원영 감독의 차기작에서 부부로 등장한 두 배우를 보고 같이 작업하자고 연락했다. 이승훈 배우는 지훈과 접점이 많다. 긍정의 에너지가 있고 낭만을 알고 장난기도 있고. 박서은 배우는 내가 미처 예측 못한 방식으로 반응할 때가 있는데 그게 이 영화에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줬다. 보자마자 바로 감정이 읽히지 않는 그녀의 표정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아워 미드나잇>
<아워 미드나잇>

은영의 인상적인 표정을 볼 수 있는 장면 하나를 꼽아보자면.

직장 동료가 은영에게 위로의 말을 하자 대뜸 “뭘 이해한다는 건데요?”라고 말할 때. ‘와, 이 여자 잘못 건드리면 정말 큰 일 나겠다’ 싶더라. (웃음)

 

두 남녀가 사람 하나 없는 밤의 한강, 덕수궁 돌담길, 명동과 종로 일대를 걷고 극장 앞까지 간다.

오직 두 사람만이 있는 듯한 환상의 세계, 밤의 세계를 표현하고 싶었다. 서울은 늘 복잡한데 어떻게 찍나 싶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로 밤에 사람들이 없어서 촬영할 수 있었다. 4월에 13회 차를 찍고 6월에 2회 차로 마무리했다.

 

영화를 향한 감독의 애정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고전 영화가 직접 등장하기도 하고. 지훈과 은영이 그림자놀이로 좀 더 가까워지는 것도 그렇고.

<시티 라이트>를 보는 지훈과 찰리 채플린을 한 화면에 담은 것도 그 영화 속에 지훈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어서다. <시네마 천국> 얘기도 그렇다. 그 영화에서 병사는 100일이 지나도 공주가 자신을 만나주지 않을 걸 알았기에 떠난 게 아닐까. 지훈과 은영도 알고 있을 것이다. 100일이 지나도 자신들의 일상에 환상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저 묵묵히 또 내일의 아침을 맞을 뿐이다. 그렇게 하루를 버티고 있는 청춘들이 여기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은영이 겪은 데이트 폭력도 말로 하나씩 설명하기보다는 그림자놀이를 통해 보여주면 완화된 형태로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세히는 말할 수 없지만, 극장에서 두 사람이 코끼리를 만난다. (웃음)

코끼리는 내 오랜 판타지다! 다른 무엇도 아닌 꼭 코끼리여야만 했다. (웃음) 두 사람이 코끼리를 함께 봐야 비로소 각자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겠더라. 대학원 시나리오 수업 때부터 이 코끼리가 내 글에 있었다. 심지어 그땐 코끼리가 하늘을 난다는 설정이었다. 대학원 교수님인 김태용 감독님이 만날 때마다 물으셨다. “정은 씨, 코끼리는 잘 날고 있나요?” (웃음)

<아워 미드나잇>
<아워 미드나잇>

밤의 소요와 그림자놀이 끝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내밀한 아픔을 전하고 용기를 낸다. 지훈, 은영 각자에게 아주 중요한 순간이다.

다리 밑에서 두 사람이 그림자놀이를 한 뒤 은영이 지훈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기 속내를 정확히 말하고 “우리 같이 공연해보자”고 제안까지 한다. 은영 나름의 성장인 셈이다. 이 장면 이후 지훈도 자신의 공연을 할 수 있게 된다. 지훈이 일련의 일을 겪은 후에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바로 서는 순간인 만큼 담담하고 담백하게 웃으며 공연했으면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더는 혼자가 아닌 연대의 순간을 함께 맞길 바랐다.

 

앞서 ‘영화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지향한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요즘 건대 미래지식교육원에서 영화예술 수업을 한다. 영화의 역사에서부터 쇼트, 앵글, 렌즈, 카메라 움직임 등 가장 기초적인 내용을 가르친다. 학생들에게 ‘왜 이런 쇼트가 필요했나, 카메라가 움직인다면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을 말하다 보니 ‘과연 나는 어떻게 찍고 있는가’를 묻게 되더라. 영화의 기본을 잘 이해하고 그 기본을 변용할 땐 명확한 이유가 있는 영화, 그게 아름다운 영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지훈과 은영의 평범한 하루의 시작을 알리고 동시에 지훈과 은영 주변인들의 일상이 계속됨을 보여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훈과 은영이 연인이 아니라 서로의 깊은 곳을 알게 된 친구처럼 보였으면 했다. 일상의 삶이 가장 위대한 예술이라고 말하는 듯한 <패터슨>(짐 자무쉬, 2016)을 좋아하는 것도 같이 이유다. 내 일상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더 집중해서 좋은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지 않겠나. 그래서 요즘 열심히 운동하며 체력을 키운다. 나를 잘 돌보고 싶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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