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을 찍어오기. 여름방학을 맞은 중학교 1학년 사진반 소녀들에게 도무지 알 길 없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일회용 필름 카메라로 말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비전 부문에서 상영하는 권민표, 서한솔 감독의 장편 데뷔작 <종착역>(2020)은 그렇게 ‘세상의 끝’을 찾아 나선 소녀들의 로드무비다. 1호선 끝 신창역까지 가면 나올까 싶었던 ‘세상의 끝’은 좀처럼 보이지 않지만, 아이들은 멈추지 않고 좀 더 깊숙한 미지의 세계로 들어선다. 미리 말하면 이 여정에 왁자지껄한 소동이나 특별한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대신, 호기심 많은 소녀들은 소풍 가듯, 탐험하듯, 놀이하듯 걷고 또 걸으며 긴장과 안도의 세계와 만날 것이다. 그 사이 아이들의 카메라에는 무엇이 담겼을까. 과연 네 명의 소녀들은 ‘세상의 끝’을 찍을 수 있을까.
두 사람은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동기다. 서로의 어떤 면에 흥미를 느껴 공동 연출을 하게 됐나.
서한솔_ 6명씩 분반해 워크숍을 진행해왔는데 민표와는 한 번도 같은 반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부끄러움’이라는 주제로 단편을 만들어 상영하는 과제가 있어 민표의 영화를 봤는데 깜짝 놀랐다. 민표에게 한 번도 말한 적 없는데 정말 훌륭했다. 그런데 코멘트를 받고 2차 편집본을 만들어온 걸 보니 너무 이상한 거다. ‘이 친구, 팔랑 귀인가? 같이 작업하면 내가 어렵지 않게 조정할 수 있겠는데?’ (웃음) 옆에서 우직하게 조언해줄 사람이 필요해 보였다. 같이 하자고 내가 제안했다. 그다음 날 민표가 내가 쓴 초고 한 줄 한 줄 정말 꼼꼼하게 의견을 달았더라. 제안하길 잘했구나 싶었다.
권민표_ 아, 눈물이 다 난다. (웃음) 한솔은 내가 갖지 못한 걸 많이 가졌다. 인문학적 지식이나 사고랄까. 나는 차분한 듯 보이지만 즉흥적인 면이 없지 않다. 또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시나리오에 최대한 반영하려 하고. 그럴 때 한솔은 오히려 차분하게 고민하고 결정하더라.
‘세계의 끝’을 향해 떠나는 소녀들의 로드무비 <종착역>은 어떤 관심과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나.
서한솔_ 사회가 특히 학생들에게 정해진 목표를 강요하는 것 같다. ‘좋은 대학에만 입학하면, 좋은 직장에만 들어가면’ 등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굴고 거기까지만 가면 모든 게 끝나는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 일단 달리면 어딘가에 도착해야 하는 기차를 생각했다. 그렇게 하나씩 덧붙여나갔다. 단, 학업 이야기로 너무 치우치지 않길 바라면서.
소녀들을 중학교 1학년생으로 설정했다. ‘세상의 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단박에 부정하지 않고 어딘가로 잠시 떠나볼 수 있는 시기가 그때라고 생각했나.
서한솔_ 중1은 초등학생들과는 확연히 다른 사회적 기대와 요구를 받는 것 같다. 고등학생이 ‘세상의 끝’을 향해 간다고 하면 메타포가 너무 명징하고. 성인도, 아이도 아닌 중간 시기를 중1이라고 생각했다.


시나리오를 구체화하면서 걷어내고 덧붙인 것, 특히 주안점을 둔 부분은.
권민표_ 초고에는 요즘 아이들이 할 법한 행동, 말이 많았다. 또 ‘세상의 끝’을 찾아 나서는 도중에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게 캐릭터들 간의 충돌을 만들기 위한 다소 작위적인 설정으로 보이더라. 대표적으로 유튜버를 꿈꾸는 소녀 캐릭터가 그랬고 그것부터 걷어냈다. 대신 소녀들이 맞닥뜨리게 될 공간에서 그들이 나눌 대화에 가장 많이 신경 썼다.
물리적 이동 못지않게 소녀들의 생생한 대화가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다. 대사는 어느 정도 구체화했나. 배우들과는 어떤 방식으로 작업했나.
서한솔_ 민표와 함께 초고에 있던 구체적인 대사를 하나씩 없애나갔다. 시나리오 대사 그대로 할 신과 배우들에게 맡길 신을 정리하기도 했고. 캐스팅이 완료된 후에는 시나리오에 대사는 없고 지문만 남았다. 배우들에게는 촬영이 끝날 때까지 시나리오라고 할 만한 걸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가 재단한 말이 아니라 아이들의 말을 듣고 싶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미리 알면 전형적인 연기를 할 것 같았다. 거의 시나리오 순서대로 찍은 것도 그래서다.
권민표_ 시나리오는 연출자와 스태프가 공유한 설계도라고 할까. 대사는 없앴지만, 그 신 안에서 일어나야 할 일, 그 공간에서 어떤 행동과 대화를 할지 등은 정하고 갔다. 촬영 당일, 배우들과 이 공간에서 어떤 대화를 할 것 같은지를 이야기 나누고 이를 취합해 반영했다. 최대한 그 공간에 있는 사물을 활용해 대화해 보자고도 했다. 물론 전적으로 배우들에게만 맡기진 않았다. 한 친구에게 이따가 대화할 때 이런 얘기로 시작해주면 좋겠다고 한두 문장의 대사를 귀띔해주는 식이었고, 그렇게 대화의 물꼬를 텄다.
서한솔_ 현장에서 ‘레디’, ‘액션’을 외치거나 슬레이트를 치지 않았다.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놀다가 대화를 시작하는가 싶으면 스태프들끼리 눈짓 하고 촬영을 시작했다.
권민표_ 슬레이트를 치면, ‘우리 시작합니다’ 하는 선언처럼 들려서 아이들이 긴장하더라.
아이들의 대화와 행동, 아이들 사이의 조화가 중요했던 만큼 캐스팅과 촬영 전 배우들과의 준비 과정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권민표_ 캐스팅이 제일 힘들었다. 원래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진짜 친구들로 섭외하고 싶었는데 그것까진 무리였다. 오디션까지는 아니고 여러 친구를 만나 대화를 많이 했다. 각자 생각이 조금씩 다른 친구들이 만나면 좋겠더라. 네 친구 모두 실제로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다.
서한솔_ 시연과 송희는 이전에 영화를 찍어본 적 있지만, 연우와 소정은 연기가 처음이다. 특히 연우는 연기학원조차 가본 적 없다. 시연과 송희는 서로 아는 사이였지만 다른 친구들은 처음 보는 사이였다. 먼저, 친한 친구들이 돼야 했다. 촬영 전, 한 달 반 동안 10번 정도 만났다. VR 카페에 가서 게임도 하고, 치킨도 먹고. 친구들이 사는 동네로 우리가 가기도 하고. 만날 때마다 2시간 정도 즉흥 연기를 했다. 그때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대화가 잘 진행되는가를 파악해뒀다. 서로 간의 유대를 만드는 게 가장 중요했다.
권민표_ 리허설을 지양했다. 지방으로 가기 전 서울에서 촬영할 때 리허설도 하고 스무 번 넘게 테이크도 가봤지만 그럴수록 배우들이 상황에 익숙해져 생동감이 떨어졌다.
서한솔_ 무조건 첫 번째, 두 번째 테이크에서 결론이 나야 했다. 생각대로 진행이 되지 않으면 그 신은 버리고 장소를 이동해서 다시 찍었다.
권민표_ <종착역>은 공간이 중요하다. 낯선 공간에 갔을 때 아이들이 느끼는 감각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 관건이었다.
서한솔_ 현장 상황에 따라 즉흥성을 발휘했다. 예를 들면 비 내리는 장면도 우연히 만들어졌다. 햇빛이 너무 강해 오두막 쪽에서 쉬고 갈까 하다가 갑자기 비가 와 촬영한 거다.
권민표_ 나름 영화에서 아이들의 감정이 고조되는 장면인데 촬영이 잘 진행되지 않아 환기 차 장소 이동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오더라. 비 덕분에 자연스레 감정적으로도 해소되는 게 있었다.
소녀들은 여정 중간에 약간의 이견과 긴장을 보이며 때때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거나, 몇 씩 짝을 이뤄 따로 또 같이 있다.
권민표_ 학생들에 관해 사전 조사를 하면서 구성원이 홀수일 때 벌어지는 갈등에 관해 많이 들었다. <종착역>은 중1 학기 초를 지나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든 세 친구 앞에 어느 날 시연이 전학을 온다는 설정이잖나. 기존 관계에 약간의 균열이 일 수 있다. 하지만 또다시 균형을 맞춰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소녀들의 세계를 다루고 싶다는 확신만큼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있지 않았을까.
서한솔_ 30대 남성 둘이서 10대 소녀들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하니까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이야기냐’, ‘왜 소녀들로 설정했느냐’ 하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다. 우리도 염려가 없지 않았지만, 오히려 배우들과 대화를 하면서 큰 힘을 얻었다. 여성들이 등장하는 로드무비 자체가 흔치 않고. 소녀들과 같이 남들이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권민표_ 공동 연출이라서 가능했지만, 그보다 먼저 내가 이끌려서 작업한 것이다. ‘세상의 끝’을 찾겠다며 아무렇지 않게 나서는 소녀들이라니! 흥미롭지 않은가.
영화에 등장하는 사진들은 배우들이 찍은 건가.
권민표_ 대부분 그렇다. 실제로 다들 필름 카메라를 처음 써본다고 하더라. 아이들이 카메라를 쥐자마자 제일 먼저 ‘셀카’를 찍으려고 하더라. (웃음)
대학원 입학 전에는 각자 어떤 작업을 했나.
권민표_ 청주대 영화과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부터 비디오방과 극장가길 좋아했다. 오죽하면 비디오방 사장님이 ‘이번 주에는 이 영화들을 보라’며 매주 내가 봐야 할 영화를 뽑아두셨을까. (웃음) 그때만 해도 영화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이들이 하는 작업이라고만 생각했다. 지금도 ‘영화감독이 되자!’라는 거창한 생각보다는 꾸준히 영화를 찍고 싶다.
서한솔_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시나리오를 쓰고 싶어서 관련 학원에 갔다가 연출을 해보면 시나리오가 더 잘 이해될 것이라는 선생님의 조언으로 한겨레 영화연출학교 워크숍 과정을 들었다. 영화 찍고 사람들과 영화 이야기하는 게 정말 재밌더라. 거기서 만난 친구들과 영화를 찍다가 본격적으로 배워야겠다 싶어 대학원에 갔다.
다음 작품을 구상하고 있을 텐데.
서한솔_ 요즘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또 로드무비다. (웃음) 로드무비의 매력? 내 삶과 연결된다. 저기까지만 가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뭔가가 있고. 목표 지점에 도착했지만 정작 얻고자 한 바는 얻지 못한 채 방황하고 되레 다른 걸 얻게 되는 그 구조가 흥미롭다.
권민표_ 나도 로드무비를 쓰고 있다. (웃음) 고향을 떠나 혼자 서울에 와 살면서 내가 여기서 버티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서울에서 버티는 사람과 버티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의 이야기를 내 고향인 원주를 배경으로 찍어보고 싶다.
결국 <종착역>이 찾던 ‘세상의 끝’은 무엇이었나. 또 어디였을까.
권민표_ 누구에게나 나름의 끝은 있겠지만 끝을 생각하기보다는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무엇을 나눌지를 더 생각했으면 한다. 마을회관 장면은 내게도 감동으로 남아 있다. 아이들도 누군가의 끝을 경험했지만 지금 자신 곁에서 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니까.
서한솔_ 세상의 끝은 ‘지금, 여기’가 아닐까. 시간의 측면에서 보자면, ‘세상의 끝’은 매 순간 계속된다. <종착역>을 찍으며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 벗어나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현재의 관계와 지금, 여기가 ‘세상의 끝’인 거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