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막에서 천막으로
BIFF 2020 <휴가> 이란희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Festival / 2020-10-23

<휴가>는 배우이자 감독인 이란희의 첫 장편 연출작이다. 결혼 이주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파마>(2009)를 기점으로, 지난 10년 동안 이란희는 다양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며 <결혼전야>(2014) <천막>(2016) 등 단편을 꾸준히 만들어 왔다. <휴가>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이인근, 김경봉, 임재춘 세 사람이 직접 본인을 연기했던 <천막>을 확장한 작품이다. 전작이 천막에서 농성 중인 인물을 통해 일상이 된 투쟁을 담았다면, <휴가>는 잠시 투쟁에서 벗어난 재복(이봉하)을 따라가며 일상과 투쟁의 경계를 질문한다. 재복에게 휴가란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행위이고, 보호자 없이 살아가는 두 딸 현희(김정연)와 현빈(이승주)의 원망을 감내하는 시간이다. 대학에 진학하는 현희에게 예치금을 마련해주고 현빈이 입을 겨울 점퍼를 사기 위해 잠시 일을 재개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영화에는 재복을 중심으로 노동과 관련한 여러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천막을 벗어난 재복의 짤막한 여정을 함께 하다보면 자연스레 누가 무엇을 위해 일하고 또 싸우는지 곱씹게 된다.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서 첫 장편을 선보이는 이란희 감독을 만났다.

 

 

몇 해 전에 <천막>을 장편화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2017년 인천영상위원회에서 기획개발지원을 받았으니 단편 작업 후 곧장 장편 준비에 들어갔나 보다.

준비는 계속해왔다. <천막>도 애초 장편을 찍고 싶어서 취재에 들어갔다가 만든 작품이거든. 처음을 말하려면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실제로 콜트콜텍 아저씨들을 만나야 하는데 그때는 좀처럼 용기를 내기가 어려웠다. 한동안 스토커처럼 인터넷으로 혹은 먼발치에서 그분들 자취를 따라다녔지. (웃음) 중간에 영화를 너무 찍고 싶어서 <결혼전야>를 만들었고, 그러고 나니 용기가 생겨서 2015년에 처음 찾아갔다. <천막>을 촬영하기 전에도 일종의 미디어 교육을 진행하며 단편 세 편을 찍었다. 당시 만들었던 작품 중 <주말퇴근>(2015)의 일부 내용이 <휴가>에 들어오기도 했다.

<천막>
<휴가>

장편은 처음이다. 단편과 비교할 때 작업에서 차이를 느꼈던 부분이 있나.

장편영화라는 게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더라. 단편은 한 장소에서 소수 인원으로 촬영하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특별히 드라마틱한 사건을 제시하지 않아도 장면을 주의 깊게 관찰함으로써 어느 정도 꼴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근데 장편의 경우에는 배경도 설명해야 하고 인물마다 구체적인 행동도 나와야 했다. 이야기를 덧붙이다 보면 어느 순간 억지로 만들어낸 듯 어색한 느낌이 들더라. 진짜처럼 자연스러운 동시에 이야기에 물결이 치도록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제작비가 빤하기 때문에 고려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장편 러닝타임이 단편의 네 배쯤 되니까 제작비도 네 배를 곱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규모가 작으면서도 최대한 지루하지 않게 영화를 구성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각본 작업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거 같다.

예전에 <천막>을 여의도 농성장에서 상영한 적이 있다. 해고 노동자들이 길바닥에 앉아서 그 꿉꿉한 영화를 보는 게 마음에 걸리더라. <빌리 엘리어트>(스티븐 달드리, 2000)처럼 재밌고 신나는, 보고 나면 기운도 좀 얻을 수 있는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처음에는 콜트콜텍 밴드를 중심으로 영화를 구상했다. 기타를 만들던 노동자들이 해고 후 빈 공장에서 밴드를 만들어 투쟁하는 이야기였다. 2017년에 제작지원을 받고 2019년에 시나리오를 완성한 뒤, 당사자와 연대자에게 시나리오를 보여 드렸는데 상당히 난감해하시더라. 과거에 경험한 일이 떠오르다 보니 영화로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던 듯하다. 몇 달 동안 고민하면서 시나리오를 재차 수정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영화를 엎어야 하나 싶을 만큼 막막했지. 그때 <천막> 조감독인 이창수 씨와 <휴가> 프로듀서인 신운섭 씨가 차라리 취재 과정에서 듣지 못한 이야기를 상상하며 영화를 출발해보면 어떻겠냐고 하더라. 생각해보니 <천막>에서 생략된 이야기가 있었다. 재춘이 농성천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부분이다. 영화는 그가 무엇을 하다가 왜 다시 왔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장편에서는 그 부분을 다뤄 보려고 했다. 그러다 보면 그들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투쟁하는지에 대해서 조금은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긴 시간 회사를 상대로 복직 투쟁을 이어온 노동자들이 모든 재판에서 패소한 후 ‘휴가’를 떠난다는 설정이 흥미롭다.

한국에는 콜트콜텍 외에도 장기 농성자가 엄청나게 많다. 그분들이 오랫동안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리고 싶었고, 오히려 농성장 안이 아니라 농성장 밖을 비춤으로써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봤다. 그 과정에서 ‘휴가’라는 콘셉트가 나왔다. 인물을 따라서 바깥으로 나가다 보니 <천막>에서 다루지 않았던 다른 인물과 사건이 튀어나오더라.

<휴가>

<휴가>는 직접적으로 콜트콜텍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가상 회사인 ‘선인가구’를 등장시키고 투쟁 시점도 5년 차에 접어든 것으로 설정한다.

초반에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는데 주변에서 위험성을 지적했다. 도리어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는 평가도 있었다. 콜트콜텍 문제에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다큐멘터리를 촬영해온 한 감독이 국제 행사에서 관련한 내용으로 피칭을 했는데, 특히 외국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더라. 10년 넘게 복직을 요구하며 투쟁하는 상황 자체가 그들에게는 이해 불가능한 영역인 거다.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다는 판단에 기간을 조정했다. 비슷한 상황에서 해고 노동자가 회사를 상대로 해볼 수 있는 재판을 전부 거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5년 정도이기도 하다.

 

오프닝과 엔딩에서 천막 농성 장소로 강남역 8번 출구를 비춘다.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 씨가 1년 동안 고공농성을 지속했던 곳이다.

우여곡절 끝에 농성장을 구했다. 본래 김경봉 씨 소개로 금속노조 일진다이아몬드지회를 찾아갔는데 촬영하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마포 한가운데 자리한 곳이어서 유동 인구도 많고 소음도 심했거든. 이후 한국지엠 부평 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사용하던 농성장을 섭외했다. 예전 콜트콜텍 농성장과 거의 흡사한 공간이었고 생활감도 풍부해서 특별히 미술로 손을 댈 게 없었다. 근데 촬영을 앞두고 노사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농성장을 정리하게 됐지.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프로듀서가 강남역에 가보자고 하더라. 삼성해고노동자 투쟁에 관심이 많았거든. 그곳도 김경봉 씨가 연결해주었다. 흔쾌히 농성장을 빌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보조출연까지 해주셨다.

 

재복을 연기한 이봉하 배우는 주로 연극 무대에 섰던 거로 안다. 어떻게 만났나.

배우를 오디션에서 찾는 일은 처음이었다. 보통 단편 작업할 때도 프리 프로덕션을 두세 달은 진행하는데, 이번에는 한 달밖에 시간이 없었다. 별수 없이 오디션을 열었는데 젊은 배우에 비해 중년 배우는 그리 많이 오지 않았다.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과 똑 닮을 필요는 없지만 너무 늠름한 아저씨처럼 보이지는 않기를 바랐다. 무뚝뚝한 인상이면서도 귀여운 데가 드러났으면 했지. 이봉하 배우가 딱 그랬다. 너무 부유해 보이지는 않는 얼굴이기도 했고. (웃음) 오디션에서도 유쾌한 모습을 보여주셔서 마음이 편해졌다. 촬영하기 전에 콜트콜텍 관련 영상을 많이 보여드렸다.

<휴가>
<휴가>

극단 한강에서 배우이자 기획자로 오래 활동했고, 현재도 연출과 연기를 겸한다. 비전문 배우와 호흡을 맞춘 경우도 많다. 배우들과 소통하는 본인만의 노하우가 있다면.

한강은 배우들이 공동 창작으로 즉흥극을 올리는 집단이었다. 여러 사회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곳이기도 했다. 연극을 위해서는 취재와 공부가 기본이었다. 예를 들어 산업재해를 다룬다고 하면, 현장 노동자들과 연극 워크숍을 진행했다. 어떤 고충이 있는지 직접 듣고 배우는 과정에서 연극의 재료를 확보했던 거다. 연기 연출이나 교육에 딱히 비결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지만, 그때 쌓인 경험 덕분에 현재도 비슷한 방식으로 작업을 해나간다. 촬영을 앞둔 상황에서는 리허설을 최대한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실제 촬영처럼 해당 장소에서 소품을 이용하며 여러 차례 연습해본다. 그러다 보면 시나리오의 허점이 눈에 들어온다. 어디가 비어 있는지, 어떤 대사를 바꿔야 할지 보이지. 혼자서 시나리오를 쓸 때는 생각나지 않던 문장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휴가>에서 현희와 재복의 대화 장면 일부는 김정연 배우와 리허설을 하며 완성했다. 내가 생각나는 문장을 툭툭 던지면 정연 배우가 자기 말로 바꿔서 대사를 만들었다. 특히 이번에는 김재영 스크립터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리허설 때 즉흥적으로 주고받은 대사를 꼼꼼하게 적어 전달해주었고, 자신의 의견도 이야기해주었다.

 

<휴가>를 완성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관객과 만남을 앞둔 지금 마음은 어떤가.

지금은 홀가분하다. 워낙 오래 붙들고 있던 작품이다 보니 때때로 괴롭기도 했다. 시나리오를 쓸 때 자주 찾던 카페가 있다. 하도 오랫동안 드나드니 나중에는 직원이 먼저 알아볼 정도였지. <휴가> 편집을 마치고 지인과 그 카페에 갔는데 기분이 묘하더라. ‘여기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니!’ 하며 놀랐다.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이후 계획은 어떻게 되나.

올해는 영화제에 집중하려고 한다. 우선 영화를 완성한 것만으로도 기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개봉 시기를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가능하면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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